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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시대의 클래식 캐릭터 ⑧

그들이고 싶었던 나의 몸부림

피노키오와 미운 오리새끼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그들이고 싶었던 나의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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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리에 감각이 생기자 피노키오는 혼자서 걷기 시작했고 방안을 걷기 시작했고 방안을 뛰어다녔어요. 그러다가 문으로 달려가 길거리로 뛰어들어 달아나버렸답니다.
  •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 중에서
그들이고 싶었던 나의 몸부림

콜로디의 동화 ‘피노키오’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아무리 달달 외워도 금세 까먹는 영어단어가 있는가 하면 한번에 가슴에 콕 박혀 불도장처럼 새겨지는 영어단어가 있다. 나의 경우 ‘eccentric’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중심(center)에서 벗어난(ex-)’이라는 어원을 지닌 이 단어는 ‘괴짜, 기인(奇人), 별난 사람’이라는 뜻의 명사와 ‘이상한, 별난, 괴벽스러운’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쓰인다. 고교시절 시험공부를 위해 영어단어를 달달 외울 때 이 단어에 유독 마음이 아팠다. 중심에서 벗어나면 다 이상하다는 건가? 그럼 중심은 항상 옳고 표준적인 것인가? 중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다 별난 것인가? 그럼 나도 좀 이상한 아인가? 난 중심을 벗어난 삶이 멋져 보이는데. 난 중심을 이탈할 용기가 있을까? 이런 망상을 하며 오랫동안 이 단어를 들여다보곤 했다.

그런데 내 안에는 이중적인 욕망이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중심으로부터 이탈해 멋진 괴짜가 되고 싶은 마음과 중심을 벗어났을 때 감당해야 할 위험에 대한 공포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사춘기 시절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비행청소년’이었다. 탈선, 불량아, 문제아가 되는 것이 가장 무서웠고 내 동생이나 내 친구들이 그렇게 될까봐 걱정했다. 그러는 한편 어른들이 ‘문제아’라고 부르는 애들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 시절에는 문제아라고 해야 자율학습 몇 번 빼먹고 남자친구 사귀고 공부 좀 안 하는 정도의 가벼운(?) 탈선에 그쳤다. 당시 학생이던 내 눈에 이 세 가지 탈선을 동시에 해내는 애는 대단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괴짜를 동경하면서도 정작 괴짜가 되는 건 두려워하는 심리, 이 소심한 이중인격의 기원에는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의 독서 체험이 한몫 톡톡히 했을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는 단지 오리들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천대받고 따돌림당했다. 피노키오는 나무 인형 ‘주제에’ 인간을 꿈꾸면서도 ‘인간답게’ 어른들의 교육 방침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독한 경험을 한다.

정말 배워야 할 교훈은

집단이 개인을 고립시키는 ‘왕따’의 대명사인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는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다. 미운 오리새끼는 자신을 학대하는 오리떼와 자신을 조롱하는 다른 동물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참고 또 참는다. 그리고 제발 자신과 같이 놀아달라며 집단의 아성에 끈질기게 구애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과 똑같이 생긴 백조 무리를 만났을 때 자신이 지금껏 고민했던 ‘다른 오리들과의 차이’야말로 자신의 우아한 정체성이었음을 깨닫는다.

피노키오는 사뭇 다르다. 피노키오는 이야기 막바지에 이르도록 좀처럼 안정된 정체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실수하고 유혹에 굴복하고 나약한 자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마침내 자신을 만든 아버지 제페토와 함께 고래 뱃속에서 탈출하자 그제야 일시적으로 방황을 멈추고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인간의 세계’로 진입한다.

철저한 왕따 상황에서 독자의 연민을 자극하는 두 캐릭터는 집단 속에서 한 개인이 정체성을 갖기까지의 과정, 즉 사회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의 자아정체성 찾기 모험을 읽으면서 정작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누구든 쉽게 따돌리고 배제하는 집단의 권력과 횡포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따돌림을 당하고 놀림감이 되는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의 불쌍함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따돌리고 놀리는 집단의 폭력에 대해서는 눈감았던 게 아닐까? 그러면서 성악설에 기초한 인간관을 무의식적으로 배포해온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은 나쁜 인간들로 가득 차 있으니 중뿔나지 않게, 왕따 당하지 않게, 그저 고분고분 ‘우리’의 울타리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말이다.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니까, 세상은 험난하고 위험하니까, 착한 인간이 아니라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가정교육이 팽배하는 세상에서 미운 오리새끼와 피노키오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미운 오리새끼도 피노키오도 독특한 개인을 받아주지 않는 사악한 공동체와 맞서야 하는 처지다. 윤리적인 개인과 비윤리적인 집단의 싸움,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풀리지 않는 문제다. 미운 오리새끼처럼 ‘나와 똑같은’ 백조의 무리가 나타날 때까지 참고 또 참아야 하나? 피노키오처럼 거짓말을 하고 일탈을 하다가 어느 순간 ‘바른 마음’의 정체를 스스로 깨달아야 하나? 내가 기억하는 한 ‘오리떼가 나쁘다’라든지 ‘피노키오를 괴롭히는 존재들이 나쁘다’고 가르쳐준 어른들은 없었다. 우리가 ‘그들 중의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도 받아본 적 없다. 피노키오와 미운 오리새끼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노키오를 괴롭히는 존재들이나 미운 오리새끼를 밀어내는 오리떼처럼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가.

오늘은 학교에 가서 읽는 걸 빨리 배우고 싶어. 내일은 쓰기를 배우고 모레는 숫자 세는 법을 배울 거야. 그런 다음 내 힘으로 돈을 많이 벌 거야.

- ‘피노키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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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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