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나무에 미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나무를 사랑하며 살다가 마침내 나무가 되고 싶다”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9-11-06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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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에게 세상 만물은 ‘나무’로 환원된다. 길을 걷거나 책을 읽을 때, 밥 먹고 강의하는 순간에조차 나무와 함께 있다. 잠자리에 들면 나무 꿈을 꾼다. 그는 말한다. “어떻게 나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게 다 나무인데요.” 나무만 보고, 나무만 생각하며 살아온 지 10년, 그는 여전히 나무에 미쳐 있다.
    ‘나무에 미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나무를 세어본 적 있나요?”이해하기 힘든 질문이다. 나무를 센다는 게 무슨 뜻일까. 단어를 곱씹으며 생각해본다. 한 그루, 두 그루… 이렇게 나무의 개수를 헤아리는 것? 그렇다. 계명대 사학과 강판권(48) 교수가 질문한 건 그렇게 나무를 세어본 적 있느냐는 뜻이다. 그는 세상 사람을 ‘나무를 세어본 이’와 그렇지 않은 이로 구분한다. 물론 그는 전자에 속한다. 지난 2000년, 강 교수는 계명대 캠퍼스 163만9000여㎡(약 50만평) 안에 있는 나무를 모두 세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집 근처 공원에 있는 나무까지 빠짐없이 헤아렸다. 지금도 그의 머릿속에는 한 그루 두 그루 세어나갔던 나무의 이름과 모양, 한아름 품에 안기던 촉감과 바람에 흔들리던 이파리의 떨림이 생생히 남아 있다.

    “사람들은 제가 그 많은 나무를 정말 다 세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아요. 그때 만든 자료를 보여주고, 캠퍼스 어디에 무슨 나무가 있는지 말해주면 그제야 혀를 내두르지요. 그러고는 하나같이 나무가 도대체 몇 그루냐고 묻습니다. 저는 ‘한 그루도 없다’고 대답하지요.(웃음)”

    강 교수는 중국 청(淸)대사를 전공한 사학자다. 동시에 ‘나무병 환자’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나무를 생각하고, 나무를 공부하며, 나무에 대한 글을 쓴다. 그가 “캠퍼스에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고 하는 이유는, 나무를 센 뒤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옮겨 심었기 때문이다.

    강 교수의 나무 사랑은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는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도 “캠퍼스 안의 은행나무를 세어오라”는 숙제를 낸 적이 있다. 사학과 수업에서 웬 나무냐며 당황하는 이들에게 “나무를 세고나면 이유를 알게 될 것이고, 알고나면 천지가 개벽할 것”이라고 했다.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



    “리포트 제출 시기가 다가오자 학생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지더군요. 귀찮고 쓸모없는 일 같아 하기 싫은데, 그렇다고 학점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막판까지 버티다 허겁지겁 만들어 온 보고서를 보니 세어 온 나무 개수가 다 달랐어요.”

    나무 세는 방법이 잘못됐기 때문이었다. 강 교수에 따르면 나무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눈으로만 세는 이에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멀찍이 떨어져 숲을 보세요. 이 나무가 저 나무 같고, 저 나무가 이 나무 같지요. 그렇게 수를 세려 하니 헛갈릴 수밖에요. 그럴 때는 나무 가까이로 한 걸음 더 다가가야 합니다. 껍질을 만지고 향기를 맡는 거예요. 그러면 내 눈 앞의 나무와 그 옆의 나무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세상 모든 나무는 각각 오직 하나뿐인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지요.”

    그는 그렇게 나무를 셌다. 줄지어 선 메타세쿼이아 나무도 한 그루 한 그루 새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진지한 손길로 쓰다듬고, 가지 모양과 잎새를 살폈다. 그 순간 메타세쿼이아 숲이 사라지면서, 각각의 나무가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채 그에게 왔다. 강 교수가 캠퍼스 안에 있는 나무를 다 세는 데 걸린 시간은 1년. 그 덕분에 그는 모든 나무를 온전히 마음속에 옮겨 심을 수 있었다.

    강 교수는 “나무를 세면 생명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눈이 뜨인다”고 했다.

    “인간은 숲에서 태어났지요.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바로 그 숲을 사라지게 하는 과정이었어요. 숲의 소멸은 지금 인류 문명에 큰 위기를 가져오고 있고요. 나무를 보고 그 생명력에 감탄하다보면, 자연히 인간과 역사와 철학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강 교수는 이런 방식이 우리 선조들의 오랜 공부법이라고 했다.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物)을 통해 이치를 깨닫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이치를 깨닫기 위해 어떤 ‘물’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논어’ 자장편에서 찾을 수 있다. ‘배우길 널리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그 안에 인(仁)이 있다(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가까이 생각한다’는 뜻의 ‘근사(近思)’예요. 성리학자들은 이것을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지요. 송나라 주희와 여조겸이 편찬한 ‘근사록’은 당시 선비들의 애독서였고요.”

    그는 이런 성리학의 공부 방식을 현대에 되살리고 싶다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나무를 세라고 한 건, 학교를 오가며 수없이 마주치는 캠퍼스 안의 나무야말로 ‘가까이 생각하기에’ 좋은 대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강 교수 자신도 나무를 가까이 생각하고(近思) 나무에 대해 절실하게 물으며(切問) 학문을 세웠다. 그가 ‘청대 안휘성 휘주부의 숲과 생태환경 변화’ 같은 논문을 쓰고, ‘공자가 사랑한 나무, 장자가 사랑한 나무’ ‘중국을 낳은 뽕나무’ 등의 책을 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무에 미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사학과 식물학의 통섭을 꿈꾸는 강판권 교수.

    소나무 숲에서 울다

    강 교수가 처음부터 이처럼 나무를 통해 역사를 공부했던 건 아니다. 계명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중국 청대 농업사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나무에는 관심조차 없는 평범한 사학자였다. 강 교수는 “솔직히 말하면 평범한 축에도 못 드는, 못난 학자였다”고 했다.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촌에서 종합고등학교를 나온 뒤, 재수 끝에 간신히 계명대에 들어갔지요. 졸업하고 원래는 취직을 하려 했는데 원서를 넣는 곳마다 떨어졌어요. 1년을 허송세월한 뒤에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그런 그에게 지도교수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3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자 “박사 공부는 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다시 한 번 취업을 시도했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여기저기 대학원에 지원한 끝에 4년 만에 경북대에 입학했다.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다시 6년 반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동안 생계는 계명대, 대구대 등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며 받는 강의료로 근근이 꾸렸다.

    “뭐 하나 한 번에 된 적이 없지요. 힘들고 괴로웠어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절대 교수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사실만 점점 분명해지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고요.”

    1999년 간신히 박사논문을 쓰고 나자 이젠 정말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마흔이 다 된 나이에 새로 시작할 일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두 아이도 마음에 걸렸다. 그는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대구 팔공산 성전암에 올랐다. 절집 뒤로 펼쳐진 소나무를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나무에 미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강판권 교수는 “나무를 공부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꽤 오랫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숲에 갔습니다. 비가 오든, 폭염이 쏟아지든 하염없이 나무를 바라봤지요. 때로는 눈물 흘리고, 때로는 소리도 지르면서요.”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나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건. 우연히 접한 산림학자 차윤정씨의 나무생태서 ‘신갈나무 투쟁기’가 계기가 됐다. 신갈나무를 의인화해 나무에게도 치열한 삶이 있음을 기록한 이 책을 읽으며 강 교수는 무릎을 쳤다. 그동안 쌓은 인문학적 지식과 나무 얘기를 묶어 책으로 내면 호구지책(糊口之策)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저는 시골 사람이라 나무와 함께 자랐어요. 소나무의 어린 가지를 꺾어서 달콤한 물을 빨아먹기도 하고, 지게 가득 땔감을 해 나르기도 했지요. 나무 얘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보니 그런 유년 시절 추억이 떠오르면서 정신이 번쩍 든 겁니다. ‘조금만 공부하면 나도 책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되든 안 되든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었지요.”

    호구지책

    책을 쓰려면 나무의 이름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식물도감을 사서 첫 장부터 읽어나갔다.

    ▼ 그럼 오로지 생계를 위해 나무를 공부하신 거군요.

    “그렇죠. 그때는 ‘근사’고 ‘격물치지’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교학사에서 나온 ‘한국의 수목’을 펴놓고 하나하나 이름을 익혔지요. 그 뒤엔 캠퍼스에 나가 그 나무를 찾아봤고요.”

    나무 이야기에 인문학적 지식을 더하기 위해 각종 사료도 뒤졌다.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중국 청대의 식물학 서적들이었다. 강 교수가 서가에서 꺼내 보여준 당시의 식물도감 ‘식물명실도고(植物名實圖考)’는 백과사전만큼이나 두꺼웠다. 식물 1714종에 대해 기록해놓았다는 책을 펼치자, 나무 모양을 그린 세밀화 옆에 각각의 이름, 특성이 적혀 있었다. ‘측백나무’를 찾으면 ‘씨는 맛이 달다. 소나 말이 등창에 걸렸을 때 이 열매를 먹이면 낫지 않는 경우가 없다’고 쓰여 있는 식이다.

    ▼ 오랫동안 사학을 공부하고도 살길을 찾지 못해 나무로 눈을 돌린 건데, 또 고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힘들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오히려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는 것조차 잊을 만큼 재미있었어요. 옛 식물도감에는 나무에 얽힌 역사나 그 시대 사람들이 나무에 대해 쓴 시 같은 것이 기록돼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공자가 이 나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적고는 출처를 ‘논어’라고 밝히는 식이지요. 도감을 읽다가 그런 부분이 나오면 원전을 찾아 읽고, 거기 다른 나무 얘기가 나오면 다시 또 그 책을 찾고…. 그렇게 계속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갔어요. 나무가 우리의 삶과 이렇게 깊은 연관을 맺고 있구나, 어떻게 지금까지 나무에 대해 무관심한 채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도감에 나오는 나무들을 직접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름을 외우고, 특징을 알게 되니 그동안 무심코 지나치던 나무들이 하나하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인문대 앞에 서 있는 벽(碧)오동의 푸른 나무껍질이 한눈에 들어왔고, 여간해서는 볼 수 없다는 목백합의 연초록빛 꽃망울을 찾기 위해 무성한 가지 아래서 한참동안 잎새를 올려다보기도 했다. 나중엔 학교를 거닐다 모르는 나무가 보이면 조경담당자를 찾아가 물어볼 정도가 됐다. 그렇게 조금씩 진심으로 나무에 빠져들었다.

    “언제부턴가 도감에서 제가 직접 보지 못한 나무 사진을 발견하면, 그 나무를 만나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 됐어요. 이 이파리가 바람에 떨리면 어떻게 보일까, 나무껍질은 얼마나 부드러울까…. 마치 연애할 때 애인이 어떤 옷을 입고 나타날까 상상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지요.(웃음)”

    ‘도로변에 우뚝 선 물박달나무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났다. 박달나무를 만났다는 기쁨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눈앞에 나타난 물박달나무가 내가 상상했던 우주목(宇宙木) 혹은 세계수(世界樹)와는 달리 너무 왜소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안아보았다. 굵지 않은 나무인지라 작은 가슴에 들어왔다. 비가 내린 뒤라 나무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갈색 수피(樹皮)와 계란형의 잎, 끈적끈적한 가지는 식물도감에서 본 그대로였다. … 숲과 구름에 가려 알아보기 힘든 나무의 모습을 내 마음속에 담아 오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때의 안타까운 심정은 한 존재를 진정으로 사랑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강 교수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박달나무를 간절히 찾아다닌 끝에 마침내 경북 문경에서 맞닥뜨렸을 때 쓴 글이다.

    ‘나무에 미친 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

    나무는 가까이 다가가 끌어안고 어루만질 때 비로소 제 모습을 온전히 보여준다.

    통섭의 인문학

    ▼ 나무를 세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 무렵부터였나요?

    “그렇죠. 나무 공부를 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 새삼 캠퍼스 안에 나무가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부 합치면 얼마나 될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지요. 처음엔 저도 학생들처럼 멀찌감치 떨어져 개수를 셌어요. 몇 번을 다시 세고서야 한 걸음 다가서는 법을 배웠지요. 껍질을 쓰다듬을 때 느껴지는 나무, 넉넉한 그늘 아래 누워 올려다보는 나무는 그때까지 알아온 나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어요. 정말 새로운 세계가 열린 거지요.”

    강 교수는 나무를 사랑하는 이유로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을 들었다. 천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도, 늘 푸르게만 보이는 소나무도, 가까이서 바라보면 언제나 변화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물을 머금고 잎을 틔우고 나이테를 불리는, 세상 누구보다도 치열한 나무의 ‘삶’을 보며 그는 잠시나마 그들을 생존의 도구로 생각했던 걸 반성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나무는 그저 온전한 사랑의 대상이 됐다.

    강의가 없는 시간을 쪼개 나무를 세면서 그는 종종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멀쩡한 중년 남자가 나무 사이를 오가며 껍질을 쓰다듬거나 나무를 끌어안고, 심지어 그 아래 누워 하염없이 이파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동료 학자들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명색이 인문학자가 공부하다 잘 안 된다고 해서 ‘외도’를 하면 되느냐”는 냉소와 비난이 들려왔다.

    “하지만 저는 제가 외도한다고 생각지 않았어요. 고대 철학자가 과학을 연구하고, 퇴계가 직접 도산서원을 설계한 것처럼 인문학은 원래 경계가 없는 학문이라고 믿으니까요. 현대의 식물도감과 청대의 역사서, 경전, 문학서적을 함께 읽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는 “사학이 나무와 무관한 학문이라는 인식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인간은 나무보다 늦게 세상에 왔고, 그래서 인류의 모든 역사가 나무와 긴밀하게 얽혀 있음을 나무를 공부하며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미쳐야 미친다

    그의 관심 분야는 사학의 영역을 넘어 점점 넓어졌다. 예사로 지나치던 모든 나무가 큰 의미로 다가왔다. 동요에 언급되는 나무의 원형을 추적하고(동요 ‘푸른 하늘’에 나오는 ‘계수나무’는 무슨 나무일까, 어떤 특징이 있기에 달나라에서 토끼와 함께 머무는 나무로 여겨졌을까, 달나라에 계수나무가 있을 거라고 처음 상상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역사의 이면을 파헤쳤으며(공자가 제자를 가르쳤다는 ‘행단’은 어느 나무 아래 있었을까, 왜 공자는 수많은 나무 가운데 그 나무를 선택했을까, 공자의 가르침과 그 나무는 무슨 관련을 맺고 있을까), 유명 화가의 삶을 돌아보기도 했다(고흐는 왜 자살 직전 ‘측백나무’를 그렸을까, 이 나무에 신경쇠약과 불면증에 좋은 ‘백자인’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가 일본 원산 ‘삼나무’를 주제로 그린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은 고흐의 정신세계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지금껏 누구도 연구한 적 없는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반까지’ 나무에 묻혀 살았다. 강의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나무를 세거나 관련 책을 읽고 틈틈이 글을 썼다. 점심, 저녁 두 끼는 모두 도시락으로 때웠다.

    “일요일 하루는 학교를 떠나 새로운 나무를 만나러 다녔지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를 보거나, 교내에 없는 특별한 수종을 찾아다닌 거예요. 그전에는 몰랐는데 제가 뭔가에 빠지면 정말 ‘미치는’ 성격이더군요.(웃음)”

    나무를 만난 뒤에도 직업은 여전히 시간강사였고, 미래는 불안했지만 그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았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열정을 바쳐 공부할 주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밥’을 위해 시작한 나무 공부는 그렇게 그의 ‘꿈’이 됐다.

    강 교수는 2002년 마침내 첫 책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세기’(지성사)를 펴냈다. 나무와 역사, 나무와 문학, 나무와 미술 등에 대한 그간의 연구를 풀어낸 역작이다. 그는 책머리에 ‘일 년 이상 도시락을 준비하면서도 불평은커녕 오히려 더 맛있는 반찬을 싸주지 못해 미안해하던 아내, 아침에 잠깐 아빠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지원과 영민에게 이 글이 조금이라도 보답이 되길 바란다’고 썼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않았지만, 팍팍한 살림에 숨통을 틔워줬다. 그리고 2005년, 그는 강사 생활 16년 만에 마침내 모교의 교수가 됐다. 나무 공부를 통해 ‘괴짜 사학자’로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면 꿈조차 꾸지 못했을 일이다. 강 교수는 “나무에 미친 내게 나무가 준 선물 같다”고 했다.

    ▼ 스스로 ‘나무에 미쳤다’고 생각하세요.

    “미쳤지요. 틀림없이.(웃음) 사람이 사는 동안 자기가 가진 에너지를 얼마나 쓰고 가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나무를 만난 뒤 제가 가진 것의 100%를 쓰고 있어요. 그렇게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이 이 세상 다른 무엇이 아닌 나무여서 행복하고요.”

    나무를 세고, 생각하고, 연구하면서 그는 존경과 감동을 자주 느꼈다. 특히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서 본 천연기념물 제289호 소나무를 잊을 수 없다. 고매한 선승처럼 위엄 있는 모습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경기 양평군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도 보는 사람을 압도했지요. 그런 나무를 만나면 저는 큰절을 올립니다. 한자리에 서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낸 존재의 깊이라는 건, 한낱 인간이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경북 상주시 화서면의 반송(천연기념물 193호), 충북 괴산군 화양면 청천리에 있는 ‘왕소나무’(천연기념물 290호)도 종종 눈앞에 어른거린다. 부산 양정 1동 동래 정씨의 시조 묘 근처에 있는 배롱나무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늦봄 구름 한 점 없던 어느 날 오후, 그 나무 밑에 앉아 새 소리를 들었던 순간은 그가 평생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추억 가운데 하나다.

    강 교수는 현재 대학에서 ‘동양고대사’ ‘동양중세사’ ‘동양근대사’ 등 주로 시대사를 강의하고 있다. 사학과 전공 수업이지만, 강의에는 당연히 나무 얘기가 넘쳐흐른다. 나무는 그가 역사를 읽고 쓰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어떤 강의를 맡든 한 학기에 한 번 이상은 야외수업을 하며 학생들과 함께 나무를 본다. ‘근사’와 ‘격물치지’의 실천이다.

    나무인간 강판권

    그는 ‘나무를 사랑하는 사학자’로서 연구 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조만간 그가 정리한 ‘나무 이름 풀이 사전’이 출간된다. 우리가 부르는 나무 이름이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다양한 문헌에서 생태적 문화적 근거를 찾아내 설명하는 책이다. 그는 동시에 우리나라 식물학사를 개괄하는 책의 집필도 준비 중이다. 대한민국 식물학이 지금까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왔는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어떻게 발전 또는 왜곡됐으며 그것은 현재 우리나라 숲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등을 정리할 계획이다. 강 교수는 “평생 쓰고 싶은 책 제목은 이미 다 정해놓았다. 앞으로 계속 공부하고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며 웃었다.

    그의 꿈은 이렇게 나무를 사랑하며 살다가, 언젠가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강판권 쥐똥나무’라고 쓰여 있었다.

    “‘쥐똥나무’는 아파트나 학교 등의 울타리로 많이 쓰이는 나무지요. 키 작은 모습이 저랑 닮은 것 같아 ‘본명’으로 삼았어요. 중심에 서 있는 것보다 울타리가 되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점도 저와 비슷하고요. 게다가 이름도 정말 앙증맞잖아요.(웃음)”

    그는 다른 이들에게도 나무 이름을 짓도록 권한다. 나무 이름을 갖는 순간 ‘내가 나무가 되고, 나무와 같은 가치를 갖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무가 되면, 우리도 나날이 새로워지고, 서로에게 평등해지며, 타인의 도움 없이도 혼자만의 힘으로 삶을 꾸릴 수 있게 되겠지요. 정말 근사한 일 아닌가요?”

    그래서 강 교수의 ‘인문식물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모임 ‘나무세기’ 회원들은 서로를 각자 원하는 나무 이름으로 부른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와 함께 캠퍼스로 나섰다. 벽오동을 지나 회화나무 산시나무 계수나무로, 산딸나무를 돌아 은목서 자귀나무 뽕나무로, 다시 상수리나무와 목백합 느릅나무로 길은 이어졌다. 강 교수를 만나러 가던 길엔 그저 ‘나무1’ ‘나무2’ ‘나무3’일 뿐이던 것들이 하나 둘 제 이름과 향기를 갖고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 (그것은 비정규직의 늦은 밤 무거운/ 가방으로 걸어 나오던 길 끝의 느티나무였을까)// … 어쩌면 그는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려/ 우리에게 온 나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무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

    -이성복,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1-나무인간 강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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