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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괴짜들 ⑮

홍콩 영화 촬영지 순례자 주성철

“주윤발과 함께 하늘 보고, 유덕화와 같이 달리고, 장국영과 더불어 차 마시는 방법”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홍콩 영화 촬영지 순례자 주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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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 촬영지 순례자 주성철
‘올드 보이’의 박찬욱 감독은 이런 주성철에 대해 “치고 박고 총질하는 영화들에 대한 그의 열광은 때로는 장엄하기조차 하다”고 평했다. 사실 홍콩 누아르는 1980~90년대 대한민국 거의 모든 소년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존재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홍콩 영화를 신물 나게 보다 지친 나머지 꽤 오래 끊고 지낸” 박 감독처럼 그 뜨겁고 매혹적이던 세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처음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주성철은 “내가 홍콩 영화에 빠져들던 시절에는 홍콩 영화 마니아가 주류 중에서도 주류였다. 영화 잡지의 메인 페이지에는 늘 성룡이나 장국영이 실렸고, 기자들이 그들의 홍콩 집에 찾아가 인터뷰하는 일도 흔했다. 내 또래 가운데 상당수는 나처럼 언젠가 홍콩 땅에서 오랜 판타지의 공간을 찾아다니겠다는 꿈을 꿨을 거다. 그걸 했을 뿐인데 괴짜가 되나”라고 했다. 그러나 당신 주위에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들 어디로 갔을까요.”

주성철이 특별한 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여전히 그 시절 가슴을 달구던 불꽃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를 롤 모델로 삼았던 열한 살 소년 때처럼.

유덕화의 계단



“‘영웅본색’에서 총상을 입고 장애인이 된 주윤발에게 옛 부하가 돈을 던져주던 코즈웨이베이 거리를 얼마 전에 찾았어요. 그 거리에 서면, 번쩍번쩍한 건물에서 슬로 모션으로 걸어 나와 주윤발에게 ‘밥이나 사 먹으라’며 지폐를 내던지던 부하의 모습과, 한때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였던 주윤발이 바닥에 나뒹구는 지폐를 하나씩 주워 드는 모습이 떠오르죠.”

처음 이런 여행을 생각한 건 언제였을까. 이 질문에 그는 ‘천장지구’ 얘기를 꺼냈다. 주성철을 홍콩 영화의 세계로 불러들인 것이 ‘영웅본색’이라면, 결코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빠지게 만든 건 ‘천장지구’다. 모든 영화는 배우가 죽어야 비로소 마무리되는 것이라고 여기던 시절, 늘 죽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덕화는 그를 매혹시켰다.

그에 따르면 유덕화는 늘 죽는다. ‘투분노해’에서도 죽고, ‘천장지구’에서도 죽고, ‘복수의 만가’에서도 죽고, ‘지존무상’에서도 죽고, ‘천여지’에서도 죽고, ‘용재강호’에서도 죽고, ‘풀타임 킬러’에서도 죽고, ‘결전’에서도 죽고, ‘파이터 블루’에서도 죽고, ‘삼국지:용의 부활’에서도 죽고, ‘무간도’ 마지막 편에서도 죽는다. 실제 죽지 않는다 해도 ‘강호정’에서는 죽을 ‘뻔’하고, ‘암전’에서는 죽은 ‘척’하며, ‘열혈강호’에서는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죽음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그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천장지구’의 마지막 부분, 복수를 결심한 유덕화가 홀로 비탈길을 걷는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비스듬한 오르막길, 가스등이 밝히는 계단 위를 칼을 숨긴 채 천천히 걸어가지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코피를 쏟으며, 제대로 말도 듣지 않는 발을 한 걸음씩 옮깁니다. 그 부분을 볼 때마다 저기가 어딘지 알기만 하면 당장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쓰러지는 유덕화를 잡아주고, 그의 죽음을 막고 싶었죠.”

2000년 회사 출장으로 처음 홍콩에 가게 됐을 때 물어물어 ‘천장지구’ 속 계단을 찾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1800년대 말 설치된 네 개의 가스등이 서 있는 그 계단에서, 주성철은 웨딩사진을 찍고 있는 신혼부부를 만났다. 가슴이 먹먹했다. ‘천장지구’에서 유덕화는 연인 오천련과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 뒤 신부를 성당에 남겨둔 채 이곳으로 달려온다. 이어진 참혹한 죽음…. 행복의 정점에 서 있는 신혼부부의 웃음 너머로, 뜨겁게 사랑했지만 끝내 함께하지 못했던 ‘천장지구’ 속 두 청춘의 비극이 떠올랐다. 지독한 비극의 무게가 뼛속까지 생생히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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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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