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호

‘에고를 버리고 예술을 껴안으니 피안이 여길세’

무주 적성산의 예술가 이익태와 두 여자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11-06-22 10:3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에고를 버리고 예술을 껴안으니 피안이 여길세’

    예술가 이익태(가운데)와 공동생활을 하는 두 여자가 한가로이 춤을 추고 있다.

    ‘ 새들아/ 여긴 허공이 아냐/ 머리를 박지마라.’

    유리창에 흰 물감으로 그렇게 쓰여 있다. 풍경이 거꾸로 비치는 유리창엔 걸핏하면 새들이 날아와 머리를 처박는다. 돌멩이가 날아왔나 싶어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면 전속력으로 날다 유리에 머리를 부딪힌 새가 피를 흘리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런 꼴을 산꼭대기에 사는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런데 다친 새를 안고 안타까워 쩔쩔맸을지언정 저런 글귀를 써 붙일 생각은 못했다. 새들이 한글을 해독해서 날기를 자제할 리 없다는 건 합리에 길든 과학적 사고다. 그러나 전북 무주군 초리분교 인근의 새들은 한글해독 능력이 있나보다. 그렇게 써 붙인 뒤 추락사고가 한결 줄어들었다 한다.

    방은 크지 않다. 분교 사택의 작은 방에 창만 크게 뚫었을 뿐인데 새에게 말을 거는 글을 써 붙인 뒤 이 방은 슬며시 기운이 달라졌다. 새와 인간이 만나고 교감할 수 있는 영역이 됐달까. 초배지 바른 방 안에는 여기저기 푸르게 물들인 한지조각이 붙었다. 얼룩이 졌거나 뚫어진 자리를 적절히 기운 흔적이다. 그러나 가라앉은 닥종이 빛깔 위에 알맞게 내려앉은 쪽빛 네모꼴은 한 폭의 모노크롬 추상 회화다. 거실로 쓰는 방에도 그림이 있다 .먹으로 간결하게 밥그릇과 수저를 그려놓고 곁에다 ‘개밥그릇 씻어 아침 먹으니/ 아/ 한 식구 되었네’라고 써뒀다. 부엌에도 있다. 커다랗게 ‘밥’이라고 쓰고는 ‘한 그릇 한 그릇 /담을 때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라고 해설했다. 밥의 ‘ㅂ’자가 커다란 밥그릇이거나 웃고 있는 입 같다는 생각을 처음 해본다.

    한반도의 배꼽

    여기는 그림을 그리는 ‘저산’의 집이다. 집은 무주 적상산을 마주 보고 있는 마을의 옛 초등학교 분교인데 두 칸짜리 교실 중 하나를 작업실로 쓰고 뒤쪽 쓰러져가던 관사를 슬쩍 손봐서 살림집으로 만들었다. 이 공간은 말하자면 세간의 온갖 잣대로부터의 해방구다. 일정한 시간에 자고 깨서 움직여야 한다는 규칙도 없고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는 초조도 없고 남보다 앞서도록 부지런히 달려야 한다는 긴장도 없다. 억압과 경쟁구도를 지워버린 공간엔 허랑한 자유가 넘쳐난다. 바람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가득 찼다.



    “무주는 삼태극의 땅이랍니다. 무주, 진안, 장수는 한반도의 배꼽쯤 되는 부분에 놓였어요. 아주 고요해요. 중심이 깊어 모든 진동이 멈추는 땅이에요.”

    저산의 가족은 지금 셋이다. 혈연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족등록부에 기재된 혼인관계도 아니지만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따로 또 같이’ 특별한 화음을 이루며 살고 있다. ‘물결’과 ‘저산’이 가까이 사는 곳에 지난해 새롭게 ‘빔’이 등장했다.

    “내가 좋은 여자가 생기면 집에 데려올 수도 있고 물결이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데리고 올 수도 있지. 자유롭고 성숙한 인간이라면 그 정도는 뛰어넘어야 하지 않겠어? 물결하고 나는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련되어 있어. 관계를 맺는 경우에는 서로를 소유하려고 하지만, 관련됨에는 집착도 소유도 없어. 사람 사이가 관계로 이어지면 일상이 틀 속에 갇혀 무감각해지지만 관련지어져 있으면 인생이 확장되고 보다 생생해지거든.”

    “맞아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불확실한 것을 두려워하지요. 두려워서 관계를 맺어 틀 속에 서로를 묶어놓으려 하잖아요. 그러나 그 틀 때문에 도리어 관계 자체를 죽이고 마는 일이 허다하지요.”

    ‘에고를 버리고 예술을 껴안으니 피안이 여길세’
    평소 ‘저산’과 ‘물결’이 주고받던 얘기였다. 그들은 아이들 말로 소위 ‘쿨’한 관계를 지향하는 어른들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빔이 써놓은 글이 있으니 읽어보자.

    ‘내비道’(내버려 두라는 뜻임)

    나는 소유하고 독점하는 불협화음으로 고통을 겪다가 결국은 관계가 감옥처럼 지겨워져 헤어지는 일을 반복해왔다. 혼자 사는 것은 외롭지만 관계 맺는 것은 괴로웠다. 괴로움보다는 외로움이 낫다고 판단했기에 앞으로 혼자 살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저산은 분교에서 나를 맞았다. 먹물을 들인 면바지와 소매를 찢어버린 낡은 셔츠 차림의 그는 울진에서 봤을 때보다 인상이 더 강렬했다….

    그가 앉아 있는 뒷벽에 ‘내비道’ 라고 쓰인 붓글씨가 붙어 있었다. 저산이라는 낙관도 찍혀 있었다. 폐교 입구에도 페인트로 ‘Bean Powder Family’ (콩가루 가족)라고 쓰여 있었다. 폐교나 집의 분위기나 저산의 옷차림 같은 것들과 잘 어울리는 단어들이었다.

    “아 이거? 우리가 믿는 교가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라는 내비도야. 우리 사회가 혼란한 건 잘못된 종교 때문이거든. 기독교인은 예수를 죽여야 하고, 불자는 부처를 죽여야 해. 요즘 시대의 진정한 종교는 내비도여야 해.”

    저산이 내 이름을 생각하기 위한 것인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빔이 어떨까? 비운다는 뜻의 빔도 되고, 영어로 하면 빛이란 뜻이 되기도 하고, 참 기둥의 뜻도 있군.”

    “괜찮은데요.”

    내가 동의하자 곁에서 듣고 있던 물결이 갑작스럽게 제안을 했다. “우리 같이 사는 것이 어떨까?” .

    “우리가 공동생활에 성공하면 새로운 가정형태의 모델이 될 수가 있어. 부부 중심의 가정하고는 다른 형태의 삶이기도 하고, 예술을 삶으로 끌어들인, 즉 삶 속에서 예술을 영위하는 가족형태라고도 할 수 있지.”

    “겨울에 보일러 기름 값도 만만찮게 들 텐데 같이 살면 경제적이고 좋지 않겠어?”

    우리는 혼자 사는 것보다 세 배 이상 풍요롭고 재미있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일단 그해 겨울을 같이 보내는 데 합의했다. 평소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타인과의 동거가 시작된 셈이다.

    “공동체 이름으로 풀포기 가족이 어때?”

    저산의 말을 물결이 반대했다.

    “쓰던 대로 빈 파우더(콩가루) 패밀리가 좋아.”

    “바보야. 풀뿌리의 풀이 아니라 영어의 ‘풀(full)’을 말하는 거야. 풀포기는 전부 포기한다는 뜻이야. 에고를 죽이지 않고는 공동생활을 할 수가 없어.”

    “좋아! 풀포기 패밀리 접수한다.”

    곧 닥쳐올 겨울을 혼자 산속에서 날 것이 걱정스러웠던 나도 흔쾌히 대답했다.

    ‘자아를 포기하자’

    ‘에고를 버리고 예술을 껴안으니 피안이 여길세’
    그렇게 빔은 이곳으로 이주했고 ‘풀(full)포기’한 대신 재미와 자유를 얻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교실 출입문 기둥에 쓰인 ‘풀포기’가 그 앞에 한들거리는 아기똥풀 같은 잡초를 말하는 줄 알았더니 ‘자아를 완전히 포기하자’란 구호였던 것이다.

    ‘저산’ 이익태는 예전부터 이단아였다. 이름 앞에 마땅한 모자를 씌우기가 어려울 만큼 온갖 일을 섭렵해왔다. 연출가였고 퍼포먼스 기획자였고 큐레이터였고 극작가였고 배우였고 사진가였고 화가였다! 두루뭉술하게 표현하자면 ‘아티스트’라고 붙이는 것이 타당할, 예술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총체적인 모색을 통해 요즘은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라고 회화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이야기 도중에도 저산은 숱하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흔들리는 풀잎에, 찻잔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찻잎에, 벗겨진 페인트에, 하늘이 비치는 고인 물에, 발밑에 뒹구는 돌멩이에 대고! 저산이 포착한 렌즈 안에는 늘 신비한 형상들이 잔뜩 들어 있다. 이목구비를 가진, 외계인 같기도 하고 정령 같기도 한 수수께끼의 생명들이 수시로 그렇게 저산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다.

    그의 작업실에는 ‘빔’이 기록한 ‘불자는 부처를 죽여야 해’를 표현한 그림이 100호 크기로 걸려 있다. 화면 중앙에는 연화대에 올라앉은 석가모니불이 놓였는데 부처의 얼굴 부분엔 끈이 흘러내린 낡은 가죽 구두 한 짝을 큼직하게 그려뒀다. 종교인에게는 신성모독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이런 무엄하고 신랄한 반동은 딴은 꽤나 통쾌하기도 하다. 우리 마음 안에 더께 앉은 때와 각질은 이런 충격적 방식이 아니고선 떨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저산 이익태는 천성적으로 기존 형식을 뒤엎는 ‘전복’을 모색하는 사람이다. 한곳에 붙어 있지 못하고 천방지축 떠돌았다. 남과 똑같은 짓은 죽어도 못하는 기질을 타고 났다. 그러자니 늘 새로운 실험에 빠져든다. 이제 예순이 넘은 그의 표정 안에는 그런 방랑인의 흔적이 여실히 새겨져 있다. 평생 아무것도 겁내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도전하며 살았다. 그림 재능은 중·고교 때 드러났다. 전국미술대회를 휩쓸며 상을 받았으나 미대에 낙방하자 드라마센터 연극학교(현재 서울예술대학의 전신)에 입학한다. 연극연출로 방향을 튼 것이다. 듣고 보니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친구들과 더불어 ‘필름 70’이란 전위 영화그룹을 만든 것이 1969년이다. 기존 영화에 반기를 든 한국 최초의 아방가르드 실험영화 ‘아침과 저녁 사이’를 이때 만들었다.

    “40분짜리 영화인데 지금 봐도 그리 촌스럽지는 않아요. 그 영화에서 내가 1인 5역을 했어요. 각본, 주연, 감독, 편집, 제작을 혼자서 감당했는데 당시 한국 뉴시네마 운동의 기수니 뭐니 하면서 전 매스컴이 관심을 보였지요.”

    연출·연기·퍼포먼스·그림 섭렵

    유현목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도 잠깐 하고, ‘하나의 그림자를 위한 열두 개의 촛불’이란 시극도 만들고 슬라이드와 영화 필름을 사용한 당시로선 파격적인 쇼 무대를 꿈꾸며 송창식, 윤형주와 어니언스 ‘리사이틀’의 연출도 담당한다. 1973, 1974년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분에 가작이지만 연달아 입선했으며 블랙코미디 형식의 ‘병태의 감격시대’(추송웅 주연)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는가 하면 당시 기발한 도전을 감행하던 ‘전위 해프닝 그룹’ ‘제4집단’(김구림, 정찬승, 정강자, 방태수)의 멤버로도 활약했다.

    생활 방편으로 수많은 액션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연극(콜렉터의 캐리번 역)과 영화(김승옥이 각본을 쓴 ‘황홀’)배우로도 출연했다. 그냥 나열하기만도 버거울 만큼 여러 장르를 섭렵하면서 서른이 되었고 만 서른이 되던 1977년 돌연 미국으로 이민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익태란 이름은 잊혔다.

    미국에서도, 한군데 정착할 줄 모르는 그의 방황과 열정이 달라졌을 리 없다. 아니 도리어 그는 점점 더 복잡한 이단아가 되어갔다. 계절의 변화가 없는 LA의 반복적인 일상, 태어나고 성장한 문화권으로부터의 단절감, 정체성의 위기, 바둑판처럼 펼쳐진 거리풍경이 주는 몰개성(沒個性)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게다가 그의 처음 일터는 상업미술 대량생산공장이었다.

    “앤디 워홀의 코카콜라 배열작품처럼 반복 메커니즘으로 똑같은 물체를 그리는 일이었어요. 내가 유난히 남 따라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요. 똑같이 그리는 게 싫어 눈에 안 띄게 살짝 다르게 그려놔요. 그런다고 늘 혼이 났고 마침내 쫓겨났죠.”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에 매달리기 시작한 때는 1989년 무렵이다. ‘스키드 로(skid row)’로 불리는 노숙자 거리를 주제로 사진첩(가제 Lost Angels)을 발간하기 위해 노숙자들을 필름에 담고 일종의 거리연극을 위한 스케치를 하다가 그림으로 비약됐던 것이다. ‘로스트 앤젤스’라는 제목은 그가 살고 있는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담겨 있다. 현실에서 추방당한 길거리 인생들을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진리도, 도덕도, 인간성도 없는 인간상에 겹쳐놓으려는 의도였다.

    ‘에고를 버리고 예술을 껴안으니 피안이 여길세’

    이익태 씨는 ‘거리를 둔다’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저산’이라고 지었다.

    “야수처럼 화면에 자신을 내던졌어요. 비로소 고향을 찾은 기분이었지요. 회화는 내 예술의 본령이라는 각성이 뒤늦게 마흔세 살이나 되어 찾아왔던 겁니다.”

    그림은 오랜 방황 끝에 얻은 전리품이고 다양한 경험이 축적된 노정에서 새롭게 찾은 표현창구였다.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어둡고 비판적이고 기형적인 물체들을 생산해냈다. 바깥의 반응도 생겼다. LA지역 오렌지카운티 현대미술센터 공모전에 입상한것을 비롯해 오리건주 칼매스 화랑국제전, 롱비치아트 전, 뉴욕주 클라리 마이너 화랑국제전 등에 연거푸 입상하면서 본격 작가로 인정받았다. 저산에 관한 자료를 챙겨주던 소설가 ‘빔’이 곁에서 거든다.

    “클라리 마이너 전엔 출품작 2000점 가운데 1위에 입상했대요. 이 전시 심사를 맡은 뉴욕 휘트니 뮤지엄 큐레이터 바라라 해스켈은 저산의 ‘그림자의 저항’ ‘여행의 끝’ 같은 그림을 보고 반문명적이고 묵시적인 화면에 매료되었다고 평가하데요.”

    전위적 작가

    그림으로 돌아오기 전 1980년대 그가 심취했던 작업은 한국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바탕에 깐, 아방가르드 형식의 퍼포먼스였다. 퍼포먼스는 그의 적성에 딱 맞는 작업이었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아이디어가 스파크가 일 듯 절로 떠올랐다. 1980년은 광주의 비극이 일어난 해다. 1982년에 무대에 올린 퍼포먼스의 제목은 ‘곡(哭)’이었다. 흰옷을 입힌 여자들을 무대에 죽 앉히고 객석을 향해 천천히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게 만들었다. 곡이었지만 굿이기도 했다.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 해원하는 의식이었다. 미국인들의 반응도 좋았다.

    “딱히 광주를 염두에 뒀다기보다 ‘아이고’라는 곡을 반복시키면서 주술적이고도 묵시적인 무대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사랑과 평화를 상실한 세기, 땅 물 불의 죽음을 애도하는 울음이기도 했으니까!”

    이어서 무대에 올린 ‘哭(곡)3’(물의 죽음 LA, 1985), ‘哭(곡)4’(불의 죽음 LA, 1988), ‘워킹 인투 어 블루 스페이스(Walking into a blue space)’(LA 1990) 등도 같은 계열이었다. 곡 시리즈는 미술전문주간지 ‘아트위크’ 등 권위 있는 지면에 여러 번 비중 있게 다뤄졌으며 극단 1981에 대한 호평도 실렸다. LA의 평론가들은 음양오행의 우주적, 환원적 접근을 시도하는 공연이라면서 주목했다.

    저산이 미국에서 벌인 퍼포먼스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것은 1993년 LA 흑인폭동 1주년을 맞아 폭동 현장에서 벌였던 대규모 설치미술과 퍼포먼스인 ‘볼케노 아일랜드’였다. “폭동으로 희생된 이들을 상징하는 마네킹들을 죽 걸어놓고 마당굿 형식으로 소리를 하고 춤을 췄어요. 나중에는 무대가 됐던 중심의 수북한 화산섬에 퍼포먼스에 참여한 여러 인종이 함께 나와 잔디씨를 뿌렸어요. 그날 밤에 마침 비가 내려서 며칠 후엔 공연장소였던 화산재 위에 잔디들이 파랗게 돋아나는 걸 봤지요.”

    퍼포먼스 기획과 연출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된다. 한국에 돌아오는 것도 미리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1999년 친구의 부탁으로 인테리어를 도우러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았다. 20년 만의 귀국이었다. 한국에서의 첫 작업은 1997년 무주 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였다. 개막 전날 무주 군청 앞 한풍루 공원 한가운데에 높이 3m의 작품을 세웠다. 제목은 ‘땅의 죽음’. 짚더미에 10여 개의 마네킹 머리와 커다란 벽걸이 시계 가방을 노끈으로 친친 묶었고 그 위에 쇠파이프로 만든 구조물과 투명한 비닐을 덮었다. 바깥쪽에는 목 잘린 마네킹들을 마치 땅속에서 금방 파낸 듯한 해골들처럼 여기저기 흩어놓았고 짚과 광목천을 깔아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오랜만에 귀국했을 때 지방을 여행하면서 들판에 비닐하우스들이 세워진 광경을 보면서 얻었어요. 마네킹이니 쇠파이프 비닐 등은 문명을 상징하지요.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욕망을 고발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행복 그 자체

    그가 만드는 무대는 늘 잔치다. 또 해원이고 화해고 구원이다. 광복 54주년을 기념하는 퍼포먼스 ‘빙벽’은 임진강 통일대교 북단에서 벌였다. 삼팔선을 상징하는 얼음덩이 380개를 38m 길이로 늘어놓고 그 중앙에서 남녀 소리꾼들이 소리를 시작한다. 얼마 후 큰 징소리가 울리자 양쪽에서 주민들이 등장, 빙벽 주위에 놓였던 도끼와 곡괭이를 들고 빙벽을 두들겨 부수는 작업이었다.

    “빙벽을 부수는 작업을 할 땐 실제로 북한 주민을 동원하고 싶었어요. 얼음벽을 부수고 다 같이 손을 잡을 때 북한 주민이 직접 등장했다면 실제로 그게 바로 상징적인 통일이었을 텐데….”

    그는 퍼포먼스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남원 춘향제 예술감독을 맡고 선시화전을 열고 아크릴 그림을 그리고 전주 한옥마을의 아트디렉터로도 일했다. 허공에 사람 같기도 하고 새 같기도 한 형상을 금속으로 만들어 걸었고 드럼통 수십 개를 색칠해 나무를 심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일을 벌이는 건 아마도 그의 본능인 것 같다. 한 우물을 파라는 익숙한 교훈과는 어긋난다. 그래서 그는 예순이 넘은 지금까지 제대로 샘물이 콸콸 솟는 우물을 파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화가이기도 하고, 연출가, 무대 디자이너이기도 하다는 것은 요즘 같은 전문가 시대에 아주 불리한 조건이다. 그를 가까이에서 본 어느 평론가는 “이익태가 다양한 매체를 종합적으로 수용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미적 대상 상호간의 공통요소를 결합시켜 전체성을 얻으려는 작가적 노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체성을 얻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아니라 기질상 그는 애초부터 물이 콸콸 솟는 큰 우물을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하다. 장난스럽게 벽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풀포기’ 혹은 ‘콩가루 집안’ 같은 희화적 구호들이 실은 그가 지향하는 삶일 수도 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늘 가볍고, 가벼워서 언제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 무겁게 한자리에 붙박이는 이들이 지고 있는 멍에가 그에게는 없다. 관계의 멍에도, 지위의 멍에도, 재물의 멍에도 벗어버리면 단순하고 간결한 삶이 남는다. 그의 화실에도 살림집에도, 빨려들 듯 깊은 눈동자를 가진 인도 성자 마하리쉬의 사진을 붙여뒀다.

    ▼ 왜 저 사진을?

    “한때 명상서적에 빠졌던 적이 있어요. 특히 서른여섯 살에 죽은 일본인 선사 무묘양 에오의 10권짜리 책을 열심히 읽었지요. 오쇼의 가르침에 열광한 적도 있고요. 마하리쉬의 가르침은 심플해서 좋더군요. 마하리쉬를 요약하면 인간의 불행은 ‘에고(자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스스로 어려움을 만들어놓고는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친다는 것이죠. 우리 자신의 성품이 원래 행복 자체인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자기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니 어리석다는 지적이지요.”

    저산의 그림 안에도 마하리쉬의 눈동자가 있다. 실은 그 눈동자는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다. 연민에 가득한,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품은 눈이다. 요즘 저산은 수시로 그걸 본다. 구름에서 물에서 찻잔에서 풀잎에서!

    “춤이 영혼을 구원하는 제일 손쉬운 길이에요. 아침에 일어나면 한 30분씩 날마다 춤을 춰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이 절로 움직이죠. 아니 마음과 몸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이 바로 ‘몸’이거든요.”

    ‘아무것도 아니다’

    ‘에고를 버리고 예술을 껴안으니 피안이 여길세’
    입으로 자유를 말하는 이들의 위선을 우린 지겹게 봐왔지만 이익태에겐 그런 가면이 없다. 그의 춤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묘비명을 채웠던, 카잔차키스가 기록한 조르바라는 그리스인을 연상케 한다. 키가 훌쩍 큰 나이 든 남자의 춤은 저산이란 호처럼 너무 싱겁지 않으면 너무 선(禪)적이다.

    ▼ 호가 왜 저 산입니까. 차라리 이 산으로 하지.

    “거리를 두는 뜻에서 ‘저’라고 했지요. 거리를 두지 않으면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를 않으니까…. ‘저 산’이라야 여기서 잘 볼 수 있잖아요. 한자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의 ‘저’자가 있다던데 그런 뜻도 괜찮은 것 같았고.”

    저산은 전주의 세 군데 갤러리에서 동시에 전시회를 마쳤다. 그림은 형상이 지워진 점묘가 대부분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탕에는 빼곡하게 글씨가 쓰여 있다. 분간할 수는 없지만 나는 누구인가? 같은 내용인데 한지 위에 아크릴과 먹으로 그런 글씨를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건 무수한 빛의 덩어리뿐이다. 그 빛은 화면 앞에 선 자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는 최근 어떤 계기로 예술에 관한 메를로 퐁티의 발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됐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감성을 통해 매개한다’는 것인데 이건 예술의 효용을 통쾌하게 웅변한다. 화면 속의 아름다움이 그저 아름다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미가 우리의 차원을 이동하게 만든다는 통찰은 정말 내 마음에 든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우리는 예술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게 그림이든 노래든 자연이든 아름다움에는 삶의 신비와 생명을 감싸는 폭넓은 아량이 있다. 이것이 인류가 그토록 끈질기게 아름다움을 추구해온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통해 세계 전체에 두루 퍼져 있는 영성과 교감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아름다움(예술)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갈 수 있다. 그게 바로 예술의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설명하지 않아도 저산이 자신의 그림에서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지라는 것을 알겠다. 그는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영적이거나 선적인 메시지를 찾아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물결과 빔과 저산은 걸핏하면 들로 산으로 나선다. 셋이 가기도 하지만 대개 무주나 전주에 살고 있는 후배 무리와 함께 간다. 강가에서 돌을 줍고 물속을 들여다보고 나무를 껴안는다.

    “한번은 돌멩이에 새겨진 바바지를 봤어요. 마침 내가 바바지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바바지는 히말라야의 성자로 지팡이 집고 긴 머리 휘날리며 나타나는데 아주 잘생긴 남자입니다.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면 꼭 그런 형상이 주변 사물 속에서 나타나게 돼 있어요. 돌에도 의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는 순간 대상의 분자 구조가 바뀐다고 해요. 우리 마음이 간절하면 돌멩이도 반응한다는 거지요.”(저산)

    부조화의 조화

    저산은 아이쿠라는 블로그(www.aaikoo.com)를 운영한다. 들어가면 최근 그의 작업들을 구경할 수 있다.

    ‘에고를 버리고 예술을 껴안으니 피안이 여길세’
    ▼ 아이쿠가 뭐지요?

    “하이쿠의 한국 버전이지. 아니 한국의 아이쿠가 일본에 건너가서 하이쿠가 됐을 걸요. 내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일종의 하이쿠라고 할 수 있어. 아이쿠! 라는 건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상태를 표현하잖아. 예술은 고정관념을 깨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어. 그래서 블로그의 이름을 그렇게 정했지.”

    저산, 빔, 물결 세 사람은 같은 집의 다른 방에서 자고, 밥은 다 같이 먹으며, 작업은 각자 다른 공간에서 한다. 앞으로도 그렇게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약속했다. 각자 수십 년씩 혼자 살다가 우연히 만나 함께 살게 된 이상한 가족이다. 이들은 아침에 마시는 차를 비롯해 하루 세끼 음식은 최고로 먹는다. 부자가 아니지만 그런 생활이 가능한 것은 물결 때문이다. 물결은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먹이는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한다. 요리는 언제나 그녀의 영역이다. 대신 빔은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저산은 쓰레기를 치우거나 허드레 마당일을 맡는다.

    세 식구니까 이 집은 냉장고도 셋이다. 물결의 음식솜씨 탓에 밥 먹으러 들르는 지인들이 줄을 섰기 때문이다. 빔이 냉장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냉동실은 제철에 따서 삶은 호박잎, 비닐 봉다리에 물과 함께 얼린 고춧잎, 삶은 우거지 같은 채소들과 고기, 생선들로 꽉꽉 찼어요. 냉장실도 물결이 만든 각종 장아찌, 젓갈, 친구들이 갖다 준 효소들, 각종 양념가루와 두부나 콩나물 등으로 꽉꽉 찼어요. 우린 한 달에 한 사람이 50만원쯤 써요. 그런데도 먹는 것은 황제 부럽지 않아요.”

    음식은 광에도 가득 찼다. 우거지, 호박, 무 말린 것, 간수를 뺀 천일염, 거제도산 멸치액젓, 소래산 새우젓에 악양에서 보내온 대봉, 무주산 사과, 해남 고구마에 물결이 만든 각종 잼(포도, 감, 딸기)들도 유리병마다 소담하게 담겨 있다. 밀가루나 설탕 등도 만드는 사람의 신원이 분명한 유기농 제품들이고, 된장, 고추장, 들기름도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 만들어서 보내준다. 물결은 이런 기본재료들을 확보해두고 최고의 음식을 만들어 주변사람들을 거둬 먹인다. 전국 각지에 친구들이 흩어져 있어 그들 집을 수시로 순례하며 밥을 해주고 필요한 도움을 건넬 수 있다.

    ▼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최종적인 꿈이 뭐예요?

    (고리타분한 질문이지만 대답은 여전히 자유롭다.)

    “이름은 잊었는데 예전에 붓 한 자루 들고 전국을 떠도는 화공이 있었대요. 혹은 선사인지도 모르지요. 그림 한 장 그려주면 밥과 술이 생기고 잠자리도 생기지요. 남은 날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뭐겠어요?”(저산)

    ‘에고를 버리고 예술을 껴안으니 피안이 여길세’
    金瑞鈴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대구 중앙중 국어교사, 매일경제신문·샘이 깊은 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 ‘여자전’ ‘김서령의 家’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등


    무주 텃밭에는 제철 채소들이 움쑥움쑥 자란다. 빔과 물결이 키우는 밭이다. 없는 채소가 없어 심지어 꽃핀 고수나물도 보인다. 이들은 조금 일하고 많이 즐긴다. 시골에서 살기를 선택하면, 경쟁의 대열에서 슬쩍 내려서기만 하면 잠깐 일해도 이렇게 먹을 것이 넘치는 냉장고를 가질 수 있다는 건 확실히 복음이 아닌가. 물결과 빔은 새와 벌레에게 말을 걸고 저산은 그걸 그림으로, 사진으로 포착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즉 새와 벌레라고, 우주 그 자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진리의 한 귀퉁이를 툭 던져준다. 그렇지만 그들은 철저히 빈손이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