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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⑩

‘넬슨의 피’ 럼주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넬슨의 피’ 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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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사망하자 당장 그의 시신을 넣은 관을 영국까지 안전하게 운구하는 일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냉장 보관시설이 없어 임시방편으로 럼주를 관 속에 가득 채웠다. 그런데 영국에 도착해 관 뚜껑을 열어 보니 관 속에 채워두었던 많은 양의 럼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항해 도중 부하 선원들이 몰래 관에 작은 구멍을 내고 술을 빼 마셨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넬슨의 용기와 전투 능력, 그리고 인간적인 풍모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부하들이 그의 혼이 담긴 술을 마셨던 것. 그때 부하들은 관 속의 술을 ‘넬슨의 피(Nelson’s blood)’라고 했으며, 이후 영국 해군 장병들에게 배급되는 럼주를 ‘넬슨의 피’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됐다.
‘넬슨의 피’ 럼주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는 일본이 자랑하는 해군제독으로 러일전쟁(1904~1905)에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러시아 발틱 함대를 물리침으로써 일본에 결정적인 승리의 전기를 만들어준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동양의 넬슨’으로 불리며 일본에서는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런데 도고 제독은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언급으로 유명해졌다.

이야기에 의하면(물론 여러 변형된 이야기가 있다), 러일전쟁 승리로 세계 해군의 주목을 받던 당시에 임관을 앞둔 미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일본을 방문해 도고 제독을 접견했다. 이때 도고 제독은 존경심에 가득 찬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나의 업적을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한국의 이순신 장군은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진위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런데 사실 한일 양국을 제외한 세계를 놓고 볼 때, 세계 해군사의 핵심에 있으면서 지명도 측면에서 가장 유명한 해군 영웅으로 손꼽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영국의 넬슨 제독일 것이다. 이 때문에 도고 제독 역시 서양의 시각에서는 흔히 ‘동양의 넬슨’으로 불렸다. 이순신 장군도 임진왜란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친 ‘한국의 넬슨 제독’으로 소개하면 외국인이 쉽게 이해할 것이다. 넬슨의 이런 위상은 오늘날 영국 런던의 트라팔가르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웅장한 모습의 넬슨 동상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 해군 지휘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넬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1758~1805)은 1758년 영국 노포크의 버넘이라는 마을에서 11명의 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당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으나 그가 9세 때 어머니가 사망했다.

학교에서 기본 교육을 이수한 넬슨은 1771년 1월 외삼촌이 선장으로 있는 배에 평범한 선원으로 승선해 키잡이로서 해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외삼촌인 서클링(Maurice Sucking·1726~1778)은 그 후 넬슨의 후원자가 돼 넬슨이 바다에서 경력을 쌓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넬슨은 선원이 된 지 얼마 후 곧 해군사관생도가 돼 본격적인 장교 교육을 받았다. 이후 넬슨은 외삼촌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여러 배를 옮겨 다니면서,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하고 북극해를 통한 인도항로 개척단에 참가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1775년 동인도회사를 보호할 목적으로 출항한 인도양 항해에서 첫 전투 경험을 쌓기도 한다. 그러던 중 1776년 초 말라리아에 걸려 6개월간 휴양을 했고, 병에서 회복해 배로 복귀했을 때는 이미 해군 감사관(comptroller)이라는 고위직에 올라있던 외삼촌 서클링이 영향력을 발휘해 넬슨을 부관(lieutenant) 대리로 승진시키고, 상선 호송 목적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는 우스터호(號)에 그를 배속시켰다.

1777년 4월 우스트호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온 넬슨은 정식 부관 자격시험을 치른다. 무난히 시험에 합격한 그는 ‘대리’ 꼬리표를 떼고 정식 부관이 됐고, 카리브해의 자메이카로 항해하는 로스토프호에 배속된다. 1777년 7월 카리브해에 도착한 로스토프호는 미국 독립전쟁 와중에서 영국 승리를 위해 참전해 큰 전과를 올린다. 당시 함선의 지휘관이었던 파커 선장은 넬슨의 공로를 인정해 전리품으로 포획한 적함의 지휘권을 맡기기로 했다. 넬슨으로서는 생애 처음 지휘를 해보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코르시카 전투에서 한쪽 눈 실명(失明)

이즈음 미국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이 미국 편으로 참전하면서 영국 해군의 공격 대상이 더욱 늘어나게 된다. 넬슨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큰 활약을 보이며 1778년 말에 이르러서는 많은 적국 선박을 취하게 된다. 파커는 마침내 그해 12월 넬슨을 함선 배저호의 선장으로 정식 임명한다.

이후 1780년에 이르기까지 미국 배를 나포하거나 스페인 전초기지를 공격하는 등 크고 작은 작전에서 다양한 전투 경험을 한다. 넬슨은 각종 수송 호위 업무를 포함해 1783년 미국 독립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투에 참가해 프랑스, 스페인 전리품들을 획득한다.

1783년 6월 전쟁 종식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 넬슨은 얼마간 프랑스를 방문하고 정치에 관심을 갖고 국회 진출을 시도하는 등 한때 일탈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다가 1784년 보레아스호 지휘권을 맡아 카리브 해에서 임무를 수행할 당시 그는 네비스 섬의 지역 유지인 허버트(John Richardson Herbert)의 초대로 그의 집을 종종 방문했다. 이때 그가 만난 사람이 남편과 사별하고 돌아와 삼촌 허버트 집에서 생활하고 있던 젊은 부인 패니(Frances Fanny Nesbit·1761~1831)였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했고, 1787년 3월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후 곧 카리브해에서의 임무가 끝나자 넬슨은 영국으로 돌아가고, 패니도 얼마 후 그를 따라 영국으로 간다.

1787년 하반기 이후 넬슨은 몇 년간 함선을 지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평화 시대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함선을 국가에서 많이 운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1792년 프랑스혁명으로 새롭게 탄생한 프랑스공화국 정부가 네덜란드에서 당시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지금의 벨기에)을 점령하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해군 전력 보강이 급해진 영국 정부는 1793년 1월 넬슨에게 64문의 대포가 장착된 함선 아가멤논호의 지휘권을 맡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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