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세계 지도자와 술 ⑫

‘칵테일의 제왕’ 마티니에 빠진 제왕적 대통령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칵테일의 제왕’ 마티니에 빠진 제왕적 대통령

1/4
  • 대통령에 네 번이나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사진).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選) 대통령인 그는 임기 내내 대공황과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제왕적(?)인’그가 특히 좋아한 술은 ‘칵테일의 제왕’이라고 하는 마티니였다. 루스벨트는 거의 매일 마티니를 즐겼고, 자신이 바텐더가 돼 직접 마티니를 만들었다. 저녁 각료회의가 있을 때면, 거의 항상 저녁 식사 전에 직접 마티니를 만들어 각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마티니는 영화 007에서 제임스 본드의 “젓지 말고 흔들어서(shaken not stirred)”라는 전설적인 대사를 남기기도 했다.
‘칵테일의 제왕’ 마티니에 빠진 제왕적 대통령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1882~1945)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전무후무하게 무려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돼 12년간(1933~1945) 재임한 인물이다. 그는 특히 임기 중 미국의 경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같은 역사적 대사건을 거치면서도 특유의 지도력을 발휘해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인물이기도 하다.

루스벨트는 1882년 1월 30일 미국 뉴욕 하이드파크의 허드슨 밸리 타운에서 부유한 명문가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사라(Sara Delano·1854~1941)는 아들에 대한 강한 집착과 엄격함을 보이면서 자식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이런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부터 거의 매년 유럽을 드나들면서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배웠다. 또 승마, 사냥, 조정, 골프 같은 상류사회에 걸맞은 각종 취미 생활을 즐겼다. 그가 항해 기술을 배우자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요트를 사주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이렇게 당시 명문 집안의 관습대로 정해진 학교를 다니지 않고 귀족식 사교육을 받으며 귀공자로 성장해나갔다. 그러다가 14세 때 매사추세츠 소재의 성공회 소속 사립 명문학교인 그로톤 기숙학교(Groton school)에 입학했다. 그는 교장이던 피바디(Endicott Peabody·1857~1944) 목사의 영향으로 기독교 박애사상에 눈을 떴다.

친척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롤 모델

하버드대 재학 시절인 1901년 그의 12촌형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 재임기간 1901~1909)가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미국의 제2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비록 그의 집안(민주당 지지)과는 정치적 성향은 달랐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강력한 지도력과 개혁 마인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의 정치적 롤 모델이 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하버드대에서 4년간 경제학 공부를 마친 뒤 1904년 컬럼비아 법학 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1907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루스벨트는 1905년 3월 당시 여전히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딸이자 그에게도 먼 친척이 되는 두 살 아래의 엘리너(Eleanor Roosevelt·1884~1962)와 결혼했다. 약관의 나이였던 1903년, 백악관에서 열린 새해 만찬회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 사랑에 빠졌지만 엘리너를 탐탁지 않게 여긴 어머니 사라의 반대로 한동안 결혼 공식 발표가 미루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그로톤 기숙학교 시절의 옛 스승 피바디가 주례를 선 이 결혼식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됐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릴 때 양친을 잃은 엘리너를 위해 결혼식에서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개성 강한 시어머니 사라와 며느리 엘리너의 불편한 관계로 다소 힘든 면도 있었으나 6남매를 낳을 정도로 초기에는 비교적 순탄했다. 그러나 얼마 후 루스벨트가 엘리너의 개인 비서이던 루시(Lucy Mercer·1891~1948)와 혼외정사를 가지면서 결혼생활에 결정적으로 금이 갔다. 그들의 불륜 관계를 알게 된 엘리너는 즉시 이혼을 요구했지만, 어머니 사라는 아들의 정치 역정에 큰 흠이 될 것을 걱정해 이혼에 강력 반대했다. 루스벨트 자신도 엘리너에게 다시는 루시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루스벨트 부부의 한번 깨어진 신뢰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한다. 다만 엘리너는 이 사건 이후에도 야망을 가진 정치가의 아내로서 나름의 내조 역할은 수행한다. 루스벨트와 루시의 관계는 훗날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며, 1945년 루스벨트가 뇌출혈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에 그와 같이 있었던 사람도 루시였다.

먼저 루스벨트의 사회생활부터 살펴보자. 1907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루스벨트는 이듬해인 1908년 당시 유명한 월스트리트 회사에 법률 담당으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1910년 루스벨트는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민주당 후보로 뉴욕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그의 명성과 집안 배경으로 무난히 당선된다. 이후 당내 파벌 싸움에서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 그는 점차 강력한 당내 기반을 확보해나가기 시작한다. 1912년 재선에 성공한 그는 그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미국의 28대 대통령이 되는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재임기간 1913~1921)을 적극 지지해 그의 당선에 일조한다. 루스벨트는 윌슨의 당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3년 3월 해군차관에 임명되면서 뉴욕 주 상원의원직은 사퇴한다.

루스벨트의 두 여인, 엘리너와 루시

루스벨트는 이후 7년 남짓 이어진 해군차관 재임 시절, 해군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해군력 증강에 온 힘을 쏟는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인 1917년 독일군의 잠수함 공격이 시작되자 미국 해군을 본격적으로 유럽에 파견할 것을 윌슨에게 건의하기도 했지만 이 제의는 거절당한다. 그러나 이듬해에 영국과 프랑스를 방문해 미국 해군의 전쟁 개입 문제를 구체적으로 상의했다. 이때 훗날 중요한 정치 동반자가 되는 영국의 처칠을 처음 만난다. 루스벨트는 이후 자신이 직접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하기를 희망했으나, 전쟁은 그해 11월 독일의 항복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1920년 7월 해군차관 직을 사임한 루스벨트는 그해 말에 열린 제29대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오하이오 주지사 콕스(James M. Cox)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다. 그의 부통령 출마는 당시 만 38세라는 젊은 나이를 감안할 때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선거는 결국 상대 후보인 공화당 하딩(Warren G. Harding·1865~1923, 재임기간 1921~1923)의 승리로 끝났다. 루스벨트는 선거 패배 후 재기를 기약하며 일시적으로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4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목록 닫기

‘칵테일의 제왕’ 마티니에 빠진 제왕적 대통령

댓글 창 닫기

2018/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