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싸움

  • 김민경| 전략기획팀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12-07-20 10: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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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구찌(왼쪽 페이지)와 루이비통 매장.

    “그 브랜드와 우리 브랜드를 한 기사 안에서 언급하시면 안 됩니다. 본사 원칙이거든요.”

    “그 이야기는 절대 쓰지 마세요.”

    흔히 ‘명품’이라 부르는 럭셔리 브랜드 관련 기사를 쓰는 기자라면 종종 듣는 말이다.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 구찌 같은 패션 브랜드나 롤렉스, 블랑팡 같은 시계 브랜드들 말이다. 홍보 담당자들은 기자들의 자료 요청에 친절하지만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곤 한다.

    명품 브랜드들의 ‘원칙’은 분명하다. 브랜드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차단하는 것이다. 오늘날 명품의 본질이 곧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보통 명품 가방의 소매가가 원가의 12배 정도라고 하니, 11분의 1은 ‘꿈’과 ‘환상’의 가격이라고 하겠다(나는 이를 ‘폭리’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여기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명품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물건이 쏟아지지 않는 가죽 주머니가 아니라, 로고가 상징하는 호화로운 삶에 속한 종족임을 확인해주는 신분증이다).

    따라서 ‘다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아야 하는’ 명품 브랜드들 사이에서 세기의 라이벌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한 세기 넘게 소비자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남은 브랜드라면, 각각의 고유한 세계 위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중에서 구찌와 루이비통, 루이비통과 구찌(이후 언급은 가나다 순) 두 브랜드를 선정한 건, 물론 모두 다 존경할 만한 장인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 밀워드브라운의 발표에 따르면 2012년 루이비통이 7년째 ‘가장 가치 있는 럭셔리 브랜드’ 1위(196억 달러)를 차지하고, 구찌가 5위(64억 달러)를 차지해 격차가 있지만, 그 사이에 있는 에르메스, 롤렉스, 샤넬 등은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구찌, 루이비통과 다른 길에 있다.

    나이, 인종, 경제적 장벽 초월해야 명품

    구찌와 루이비통은 대량생산 시대에 침체와 위기를 겪은 뒤 혈투를 벌인 세기말의 인수합병(M·A)을 통해 각각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다분히 감정적이었던 구찌와 루이비통의 ‘핸드백 전쟁’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몬테규가와 캐플럿가의 머뭇거림 없는 칼싸움이 떠오른다.

    현재 구찌와 루이비통은 비슷한 가격대에서 같은 시장을 공략하고 있고, 무엇보다 한국의 명품 소비자에게 폭넓게 사랑받는다. 샤넬 백을 든 남성은 드물지만, 루이비통 지갑이나 구찌 구두, 벨트를 가진 남성은 흔하게 본다. 최근 지방의 소도시에서 만난 남성 신입사원들의 휴대 단말기 커버도 구찌나 루이비통이었다.

    젊은 여성들에게 루이비통의 스피디백이나 구찌의 재키백은 ‘하나쯤 꼭 가져야 할 것(must-have)’이다. ‘명품중독’의 출발선에서 소비자를 유혹하는 것도 구찌와 루이비통이다. 구찌냐, 루이비통이냐의 문제는 구입의 순서일 뿐이다.

    결국 구찌와 루이비통은 전 세계 여성과 남성에게, 할머니에서 손녀에 이르는 전 세대에 걸쳐, 대중적인 상품에서 초고가 주문제작품까지 팔리는 아주 드문 브랜드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루이비통이 속한 세계 최대의 럭셔리그룹 LVMH(루이비통-모에-에네시)의 임원 다니엘 피에트는 이렇게 말한다.

    “명품은 나이, 인종, 지리적, 경제적 장벽을 초월한다. 우리는 부유층 훨씬 너머까지 고객을 확대했다.”(1997,)

    루이비통은 1854년 프랑스 파리의 가방 전문점으로 시작했고, 구찌는 192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마구용품점으로 문을 열었으니, 설립 연대로 보면 구찌보다 루이비통이 반세기 이상 앞서 있다.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2010년 중국 베이징 세계초콜릿드림파크에서 전시한 초콜릿으로 만든 루이비통 가방.

    프랑스의 알프스 산기슭 마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열세 살 소년 루이 비통(1821~1892)의 소원은 파리에 가는 것이었다. 당시 파리는 유럽의 중심이었고, 이곳에서 혼맥(婚脈)으로 이어진 유럽 귀족과 정부들 사이 사치 경쟁은 극에 달해 있었다.

    앙리 4세의 둘째 부인 마리 드 메디치는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각각 3000개씩 박힌 드레스를 주문하기도 했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의상비는 늘 국고의 예산을 초과했다. 나폴레옹의 부인 조제핀은 프랑스가 미국에 루이지애나 땅을 팔고 받은 돈 절반을 단 10년치 옷값으로 썼다. 남보다 더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 왕족과 귀족들은 공예 장인들을 발굴해 지원했다. 이러한 투자는 헛되지 않았는데, 오늘날 유럽에 큰 수익을 안겨주는 럭셔리 산업의 토대가 이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의 탐욕, 명품 시대를 열다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지난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구찌 쇼의 한 장면.

    사치 경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한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외제니 황후는 특히 페티코트, 모자, 식기 등을 수십 개의 트렁크에 바리바리 실어 여행 다니길 좋아했다. 이때 곰팡이 슬지 않는 트렁크를 만들고, 남다른 ‘수납의 기술’로 발탁된 이가 바로 루이 비통이었다. 루이 비통은 반구형이었던 트렁크를 쌓기 좋도록 직육면체로 만들고 방수포를 씌우는 등 혁신적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나 훌륭한 아이디어의 특징은 누구든지 쉽게 따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후 루이비통 브랜드의 역사는 물귀신 같은 모방 업체들을 따돌리기 위한 발상의 전환, 복제하기 어려운 디자인과 견고한 품질을 발전시켜 온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6년 루이 비통의 아들 조르주는 알파벳 L과 V, 꽃과 잎의 그래픽으로 이뤄진 그 유명한 ‘모노그램’ 캔버스를 내놓았다. 이 역시 모조 방지를 위한 것이었는데 상표권 등록(1905)까지 마쳐 이후 명품이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모노그램’은 루이비통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3초 백’이라고 부를 만큼 흔히 보는 루이비통이 바로 모노그램 캔버스를 소재로 한다. 특히 일본 국민의 40% 이상이 소유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보여주듯 일본인의 루이비통에 대한 열광은 합리적인 설명을 넘어서는 터라 모노그램 문양이 일본의 우키요에 회화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 무렵 피렌체에서 작은 마구상이 문을 열었다. 주인은 구치오 구치(1881~1953)란 젊은 청년이었다. 구치가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가문이었다. 격한 가족 싸움 끝에 집을 나와 영국으로 간 구치오는 런던 사보이 호텔에 취직한다. 그곳에서 그는 귀족들의 가방을 눈여겨보며 제대로 된 가죽 가방을 만들겠다는 꿈과 자신감을 얻는다. 그는 곧 가죽과 공예 산업이 발달한 고향으로 돌아온다.

    구치의 고향 피렌체는 또 어떤 곳인가. 피렌체는 앞서 언급한, 파리로 시집가 진주 다이아몬드 3000개 달린 드레스를 주문한 앙리 4세의 부인 마리 드 메디치의 친정이 아닌가. 파리에 비하면 많이 기울었지만 수백 년 동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황금기를 누렸으며 뛰어난 장인들이 부를 쌓아 상공과 금융업이 발달해 있었다. 자연스럽게 예술적 안목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구치오는 처음엔 마구상(1906)으로 시작했지만, 마차에서 자전거, 자동차로 이어지는 탈 것들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감각이 뛰어났다. 그는 마구에서 영감을 얻어 귀족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자동차로 여행할 때 갖고 다닐 수 있는 작은 가방, 벨트, 신발 등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구찌 공식 홈페이지는 당시 구찌의 가게에 ‘구름처럼 많은’ 손님이 밀려들었다고 기술한다.

    구찌와 루이비통을 포함해 샤넬, 에르메스, 발렌시아가 등과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같은 진정한 의미의 명품들에 최고로 ‘좋은 시절’이었다. 유럽에서 왕과 귀족들은 이름만 남았지만 여전히 사치스럽게 살았다. 혁명으로 귀족을 몰락시킨 신흥 부르주아는 왕과 귀족이 입고, 먹는 폼을 따라 하느라 바빴고, 돈도 아끼지 않았다. 신흥 부르주아의 이러한 욕망을 사실적으로(꽤 시니컬하게) 그린 소설이 바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다.

    부르주아들은 왕비와 황후의 단골이었던 루이비통에 가서 트렁크를 사고, 귀족이 즐겨 신는다는 구찌의 가죽 신발을 주문했다. 이뿐만 아니라 더 섬세하고, 더 사치스러운, 한마디로 더 귀족적인 물건을 얻으려고 솜씨 좋은 장인들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을 주문했다. 향수병은 크리스털로 만들어 황금이나 보석 뚜껑을 달았고, 향수 이름은 시인이 지었다. 적어도 일부 계층에게는 삶과 예술이 완벽하게 일치한 시기였다.

    명성에 가려진 어두운 과거

    한편으로 신대륙에는 록펠러, 카네기, 구겐하임, 밴더빌트 같은 재벌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유럽 귀족에 밀리지 않기 위해 우아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돈은 너무 많았다. 미국의 재벌가는 유럽의 귀족과 혼사를 통해 고귀한 신분을 얻고 싶어 했고, 유럽의 몰락한 귀족은 돈이 필요했으므로 이해가 맞아떨어진 정략결혼이 대서양을 연결했다. 상심한 귀부인들은 명품과 보석을 쇼핑하고 작가들과 ‘교유’하면서 작품을 사주어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 신분상으론 평등한 세상이었지만, 소비가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다. 소비의 방식, 즉 무엇을 사느냐가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시대가 된 것이다(베블런, ).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던 명품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위기를 맞았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샤넬 같은 프랑스의 대표적 디자이너들이 문을 닫거나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에도 루이비통은 성업 중이었다. 루이비통 가족 일부가 괴뢰 정부에 협력하고, 훈장까지 받은 덕이다. 이것은 루이비통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된다(스테파니 본니비치, ).

    구찌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국제사회에서 경제 제재를 받자 원자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구찌는 대나무를 휘어서 가방의 손잡이로 쓰고, 대마를 직조해 독특한 광택이 나는 캔버스 백을 만들었는데, 이런 신상품들이 유럽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미국에까지 구찌의 명성을 알리게 된다. 여세를 몰아 구찌는 1951년 이탈리아 브랜드로는 처음 뉴욕에 부티크도 연다. 구찌의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는 ‘뱀부백’이나 ‘디아만테’ 캔버스백은 지금도 조금씩 디자인을 바꿔 생산되고 있다.

    1953년 창업자 구치오 구치가 사망하면서, 그는 구찌를 네 아들에게 맡긴다. 둘째 아들 알도가 해외시장을 개척했고, 넷째 로돌포는 새로운 제품으로 사세를 키웠다. 한동안 구찌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피는 속일 수 없었는지 형제간의 다툼이 재발했다. 특히 알도의 두 아들은 무분별한 라이선스 사업을 통해 구찌의 이미지를 추락시키고, 아버지를 탈세 혐의로 고발해 감옥으로 보냈다. 경영권을 얻은 로돌포의 아들 마우리치오는 우여곡절 끝에 투자사에 모든 지분을 빼앗기고 전 부인이 보낸 청부업자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된다. 전 부인은 사치와 방탕으로 구찌 몰락에 속도를 붙였는데 “자전거를 타고 웃느니 롤스로이스를 타고 울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구찌는 만신창이가 됐다. 1980년대에 구찌 이름을 붙인 상품이 2만 2000개에 달했다고 하니 명품은커녕 싸구려 라이선스의 실패 사례가 된 것이다.

    구찌를 구한 두 천재, 도미니코 드 솔레와 톰 포드

    구찌가 오늘날의 구찌가 된 건 1994년 도미니코 드 솔레와 톰 포드라는 두 명의 탁월한 천재가 영입된 덕이다. 도미니코 드 솔레는 하버드대를 나와 구찌의 미국 지사장을 맡고 있었고, 배우 겸 모델이던 톰 포드는 인테리어업과 의류업을 거친 스물아홉 살의 디자이너였다. 섹시하고 매력적이어서 매스컴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톰 포드는 구찌의 유산을 모던하게 해석한 제품들을 내놓았다. 그가 구찌에 온 첫날 디자인한 제품이 대나무 손잡이를 붙인 배낭이었다. 톰 포드의 구찌를 보고 전문가들은 ‘이것은 구찌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톰 포드는 ‘나는 구찌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고 말했다. 소비자는 새로운 구찌에 열광했다. 구찌는 매 시즌 트렌드를 창조했다.

    도미니코 드 솔레는 구찌의 가격을 30% 정도 낮춰 루이비통과 경쟁했다. 또한 라이선스를 거둬들여 명품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그 결과 파산 직전이던 구찌는 2년 만에 매출이 3배로 늘었고, 증시에 성공적으로 상장했으며, 다시 2년 뒤인 1998년에는 ‘올해의 유럽기업’에 선정됐다.

    그보다 앞서 명품이 어떻게 ‘산업’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브랜드는 루이비통이었다. 전쟁 후 루이비통은 트위기 같은 모델을 위한 가방을 만드는 등 일종의 스타 마케팅도 도입했지만 1980년대까지는 어디까지나 전통 있는 장인 가족 기업으로 조용히 명성을 이어갔다. 즉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고 있음이 뚜렷했다. 루이비통가의 사위로 경영권을 물려받은 앙리 라카미에는 수익을 확대하기 위해선 제작보다 유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중간상을 없애고, 일본에 매장을 내고, 대중적인 가죽 제품을 내놨다. 고급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귀족스포츠인 요트 대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구찌를 세계적인 명품으로 키운 도미니코 드 솔레(왼쪽)와 톰 포드.

    라카미에가 경영을 맡은 지 7년 만에 수익은 30배나 늘어났다. 1986년 그는 루이비통을 주류 회사인 모에 에네시와 합병하고 지방시도 사들여 당시 프랑스 상장 기업 중 6위에 해당하는 LVMH그룹을 탄생시켰다.

    LVMH 부회장이 된 라카미에는 회장과의 주도권 갈등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베르나르 아르노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베르나르 아르노가 럭셔리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현재 LVMH 회장인 베르나르 아르노는 총자산 411억 달러를 보유한 유럽 1위, 세계 4위의 갑부다(2011,). 당시 그는 크리스찬 디오르와 셀린느를 인수한 참이었다. 아르노 회장은 라카미에의 상황을 알게 되자 그의 라이벌, 즉 LVMH 회장을 만나 주식을 인수하기로 한다.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회장과 부회장의 갈등을 이용해 아르노 회장이 주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LVMH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1년 넘는 살벌한 법정 다툼과 치사한 언론 플레이를 통해 아르노 대 라카미에의 싸움이 계속됐고, 1990년 법원이 아르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프랑스 역사상 가장 적대적인 기업 인수 사건이 마무리됐다.

    “럭셔리한 수익률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은 럭셔리 산업뿐”이라고 생각한 아르노 회장은 끊임없이 명품 브랜드들을 인수했다. 구제불능이라고 포기했던 구찌가 톰 포드와 데 솔레에 의해 반짝반짝 빛이 나자, 그의 야심도 다시 불붙었다. 구찌와 루이비통의 ‘핸드백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아르노 회장은 처음엔 비밀리에, 그리고 나중엔 공공연히 구찌의 주식을 매집했다.

    1999년 구찌는 거의 그의 손에 들어간 듯싶었다. 그러나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반전이 일어났다. 크리스티 경매, 프랭탕 백화점, 의류업체 르두트 등을 소유한 PPR그룹이 구찌 주식 40%를 매입해 구찌그룹을 형성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톰 포드와 데 솔레가 아르노 회장이 내겠다는 가격보다 훨씬 싸게 PPR에 주식을 넘긴 것이 알려졌다. 톰 포드와 데 솔레가 아르노 회장에 대해 가진 불신과 반발은 그만큼 컸다. 이어 PPR은 이브생로랑, 발렌시아가, 보테가 베네타, 부쉐롱 등 전통 있는 하우스와 알렉산더 매퀸 같은 젊은 디자이너들을 보태 LVMH에 맞서는 글로벌 패션그룹으로 세를 불렸다(톰 포드와 데 솔레는 그 뒤에 구찌를 떠났다).

    20세기 명품의 역사는 아르노 회장 전과 후로 나뉜다. 아르노 회장 이전의 명품은 장인들이 전통을 이어가는 가족적 공방이었다. ‘한 땀 한 땀’ 제작이 사업의 본질이었고, 장인과의 의리, 고객들과의 신뢰가 돈보다 더 중요했다.

    명품의 역사를 가른 LVMH 아르노 회장

    아르노 회장 이후, 명품은 생산성을 높여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비즈니스가 됐다. 그는 미국식 주식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유럽인에게 제대로 보여준 셈이었다.

    구찌의 데 솔레는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기업인이었고, LVMH 아르노 회장은 프랑스 명문 에콜폴리테크니크를 나왔지만 경영 실전 경험은 미국에서 쌓았다. 미테랑 사회당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불안감을 느껴 미국으로 이민 갔던 그는 프랑스로 돌아올 때 신자유주의 시대에 기업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부분을 과감히 매각해 ‘마키아벨리’라는 별명을 얻었고, 직원들과 어울려 와인 마시기를 좋아하는 어르신들-예를 들면 지방시 같은 전설적 디자이너-을 해고해 ‘터미네이터’로 불렸으며, 경영권을 은밀하고 집요하게 노려 ‘캐시미어를 입은 여우’ 또는 ‘뱀’이라는 공격도 받았다.

    그는 현대 명품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상징’이자 ‘이미지’임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공장을 통제하면 품질을 통제할 수 있고, 유통을 통제하면 브랜드 이미지를 통제할 수 있다.”(베르나르 아르노)

    새로운 소비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구찌와 루이비통은 각각 화끈한 미국의 두 젊은이를 디자이너 책임자로 영입했다. 구찌의 톰 포드는 이탈리아인처럼 슈트를 잘 차려입고, 섹시한 패션 피플과 밤마다 어울리는 모습으로 구찌를 리뉴얼했다. 루이비통이 찾아낸 또 다른 천재 마크 제이콥스는 뼛속까지 뉴요커로서 전위적인 예술가들과 어울리고, 이국적인 여행을 즐기는 여피 부르주아로 루이비통의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했다. 이를 위해 양사는 어마어마한 광고 및 홍보비를 쏟아 부었다.

    구찌와 루이비통의 역사에서 보듯, 두 브랜드 모두 옷과는 상관없었지만, 아르노 이후 구찌와 루이비통은 컬렉션에 참여해 코트부터 비키니까지, 애완견 목걸이에서 아이폰 커버까지, 모든 것을 로고로 뒤덮어 내놓았다. 로고는 새로운 미다스의 손이었다.

    실제로 두 브랜드의 진짜 수익이 소량 제작되는 옷들이 아니라, 런웨이 때 모델이 들고 나오는 가방과 구두 등에서 나온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가방과 구두는 문화, 인종과 체형-비현실적인 모델의 몸매가 아니어도-에 상관없이 대량 생산해서 전 세계 시장에서 팔 수 있는 아이템이다. 아르노 이전, 가방이 공방에서 제작되던 시절 상류 사회의 여성들은 클래식한 가방을 하나 사서 어디나 들고 다녔지만, 아르노 이후엔 전 세계의 ‘보통’ 여성들이 매 시즌 각 브랜드에서 미친 듯이 쏟아내는 ‘잇백’을 따라잡기 위해 카드를 긁어댄다. 구찌와 루이비통은 소비자의 욕구를 자극하는 한편 공급량을 늘리기 위해 컴퓨터로 디자인하고, 포드 식 제작 시스템을 도입했다. 구찌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1994년부터 1998년 사이, 구찌 가죽제품 생산은 연간 64만 개에서 240만 개로 늘어났다.

    구찌와 루이비통이 혹시 1980년대의 잘못-로고의 남용과 소비자층에 대한 오판-을 반복하는 건 아닐까. 로고에 싫증난 패션 피플들은 새로운 디자이너를 찾아 철새처럼 떠나고, 어쩔 수 없는 재고 처리를 위해 명품 아웃렛이 번창하고 있으며, 패스트패션이라고 불리는 브랜드들이 저가 명품들을 쏟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변화와 도전 거듭하며 새로운 가치 창출

    구찌와 루이비통은 끊임없이 새로운 ‘종’과 교배함으로써 고객층을 확대하는 동시에 세분화하며 진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주 ‘콜래보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 협업한다. 밋밋한 루이비통 가방에 벽화 화가 스티븐 스프라우스, 일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을 넣어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고, 최근엔 일본의 스타 작가 쿠사마 야요이와 협업 중이다. 구찌는 올해 한국 소비자를 위해 ‘무궁화’를 소재로 한 한정판 상품들을 내놓기도 했다(화제는 됐으나, 판매는 부진했다는 후문). 이들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매장을 늘리고, 스타 마케팅으로 신입 고객을 모은다. 동시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유서 깊은 공방에서 전통적 방식으로 제작하는 스페셜 오더 상품을 만들어 소수의 ‘하이엔드’ 고객을 관리한다.

    그러므로 구찌와 루이비통은 여전히 패션계에서 가장 ‘핫’한 뉴스의 중심에 있다. 최근의 소식. 구찌를 루이비통으로부터 구해낸 구찌그룹(PPR)의 프랑수아 피노 회장과 슈퍼모델 출신 스타 린다 에반젤리스타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양육비 소송을 벌여 뉴욕이 떠들썩한 가운데, 루이비통을 이끄는 마크 제이콥스가 하얀색 팬티가 훤히 보이는 검은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나타나 전 세계 패션 피플에게 충격을 줬다는 얘기다.

    한 세기 전 구찌와 루이비통의 점잖은 단골들이 봤다면 발걸음을 끊었을 만한 스캔들이다. 하지만 새로운 소비자들은 이것이야말로 구찌답고, 루이비통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십 다음 페이지에 이어지는 루이비통과 구찌 광고를 홀린 듯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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