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노무현식 천도론에 문제 있다

  • 글: 김형국 서울대 교수·지역개발학 kimhk@snu.ac.kr

    입력2004-02-27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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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식 천도론에 문제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1월29일 정부대전청사에서 열린 ‘지방화와 균형발전시대 선포식’에 참석해 개막 버튼을 누르고 있다.

    지난 1월29일 대전에서 열린 ‘지방화시대 선포식’에서 참여정부 수장(首長)이 행정수도에 대한 속내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혔다. “천도(遷都)는 한 시대 지배세력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민주화, 남북평화 등은 전직 대통령이 다 해버려 그 정도론 역사책에 빛이 안 날 것 같아 지방화만큼은 내가 간판을 붙이겠다”고 했다. 이 발언은 거대 국책사업에 대한 개인 야심, 그리고 역사관을 말하고 있어 특히 주목된다.

    지배세력 바꾸겠다는 발상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얼마 뒤엔 역시 대전에서 “충청도에서 재미 좀 봤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언급이 행정수도안(案)이 대선전략용 임기응변책이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과거 행적의 자평이었다면, 위의 두 시각은 관련 국정의 미래에 대한 시사다. 무엇보다 지배세력의 변화라는 뜻은 행정부만 이전하는 분도(分都)가 아니라 천도(遷都)라는 뜻이다. 대통령이 말을 통해 행정부만 옮길 것인지 중앙권력 3부(府) 모두를 옮길 것인지, 그동안 애매했던 천도의 정체가 점차 베일을 벗고 있다.

    지배세력의 변화를 염두에 둔 천도는 멀게는 조선개국도 그렇지만, 가깝게는 반세기 전 외국사례에서도 나타난다. 파키스탄과 브라질의 경우인데, 두 나라 모두 구(舊)수도를 청산해야 할 식민정치의 인적·물적 잔재라 여겨 참신한 국풍(國風) 조성을 목적으로 삼아 각각 새로 수도를 만들었다.

    이런 시각이라면 국토가 분단될 즈음 북한이 처음 그들 헌법에 명시한 대로 서울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로, 아니 한반도의 정통수도라 우길 만도 했다. 북한과는 달리, 남한은 친일세력을 척결하지 못한 채 한동안 식민세력의 거점이던 서울을 장소적 관성에 따라 계속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반도의 정통성 계승에 명분이 약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라는 문명사적 순리를 선택한 덕분에 오늘의 남한은 국력에서 북한을 압도한다. 이런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건국과정에서 북한보다 많은 인구 그리고 수도 서울의 역사성 선점이 국가 정통성 쌓기에서 상대 우위를 안겨주었다는 점이 새삼 고마울 뿐이다.

    해방직후 첨예한 이념갈등으로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졌는데, 과연 참여정부가 편 가르는 신·구 지배세력은 누구를 말함인가. 뜨고 지는 것이 있음을 변화라 한다면 386민주세력은 역사적 소명의 신진 사류(士類)이고, 나라를 절대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려 피와 땀을 흘린 경제개발 역군들은 모조리 기득권층이요, 그래서 타기 내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말인가.

    성장제일주의가 우리사회에 성취만큼이나 부작용을 낳았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부귀를 쌓는 일이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도덕적 해이가 사회에 만연한 점을 꼽을 수 있다. 도덕성이 가장 중시돼야 할 교육계마저 교육감선거가 돈 잔치판으로 치러진 사실은 기성세대의 타락상을 말해주는 생생한 보기다. 그렇다고 386 민주세력의 행세가 모두 도덕적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참여정부 수장의 측근들이 줄줄이 뇌물수수로 쇠고랑을 차고 있음이 작금의 상황이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세대·계층·지역·이념정향(定向) 별로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이력별 특장(特長)을 북돋우어 상승적 통합을 유도하는 것이 위정자의 본분이 아닌가. 그래야 이 나라가 민주화와 지속 성장의 양 날개로 계속 날 수 있을 것이다.

    위험한 이분법적 발상

    프롤레타리아 혁명식 자본주의 개조론에 서 있다고 믿고 싶진 않지만, 지배세력 변화에 대한 참여정부 수장의 언급은 지역이나 사회계층상 주변부 반(反)엘리트를 ‘압제’해온 지배엘리트가 그들의 반발을 ‘중화’하고 ‘흡수’하는 데 실패하면 마침내 주변부 반엘리트에 의해 ‘대체’되고 만다는 계층갈등론을 염두에 둔 듯이 보인다. 노사화합이니 진보 대 보수의 상생이니 하던 그동안의 언급은 모두 진심이 아니었다는 인상을 줄 만하다.

    계층갈등론은 한때 우리 현대사회의 전개를 설명하는 데 유효한 이론으로 작용했다. 이를테면 3공 등장의 계기였던 5·16 군사쿠데타의 전후사정을 그러한 거시이론을 빌려 설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울과 주변 중부지방을 근거로 삼은 정치권이 국가를 독선적으로 다스릴 뿐 국민의 복리 향상에는 지극히 무력했던 반면, 무반(武班)을 하대하던 전래 사회인식의 연장선에서 6·25 전쟁때 몸을 바쳐 나라를 지켰음에도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군부는 오히려 미군을 통해 현대적인 경영기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중에 육국사관학교가 진해로 피난을 오고 경상도 출신 청년들이 대거 입학해 반엘리트로 자라났다. 이 기반을 토대로 국가성장의 기치를 높이 들고 기성 정치인들을 대체한 것이 바로 5·16쿠데타였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우리사회는 이젠 정치권력만을 단선·유일가치로 여겨 경합과 쟁탈을 일삼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민간경제부문이 급성장하고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경제인과 문화인 이 권력으로 치부될 정도로 중요 사회세력에 합세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권력 위주의 지배세력 대 피지배세력이라는 이분법은 우리사회의 복잡다단한 역학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때문에 계층갈등론의 유효성을 말하는 것 자체가 바로 구시대적 작태라 할 것이다.

    참여정부 수장과 측근들은 자주국방을 강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민족공조적 지향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반(反)역사성이 속속 알려지고 있는 북한 주사파에 동조한다는 기미도 비치고 있다. 북한 정권의 반역사성은 최근 미국 의회에 보고된 북한보고서를 통해 생생히 밝혀졌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정권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굶주린 나머지 굴러다니던 가죽끈을 삶아먹는 ‘비행’을 저질렀다고 자동차에 매달아 끌어 죽인 사람의 시체를 강제 동원된 관중들로 하여금 만져보게 했다. 인륜상 도저히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항의한 사람을 총살로 즉결처분한 것이 북한체제의 실상이다.

    안보보장 대책 마련해야

    남북 화해라면 한민족의 인간존엄성 증대도 겨냥할 터인데 이에 대한 정부·여당 측의 태도는 미온적이다. 이를테면 ‘북한 민주화를 위한 정치범 수용소 해체운동본부’가 제안한 ‘인권개선 촉구 결의안’에 대해 여당인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반대하고 나섰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1월말 김수환 추기경이 오죽했으면 “민족공조를 강조한 나머지 어떤 것도 좋다는 식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직설을 날렸겠는가.

    추기경이 누구인가. 지난 세기말 공산주의 붕괴에 앞장섰던 현 교황처럼, 추기경은 특히 명동성당을 민주화운동의 보루로 삼게 해 1980년대 중반에 마침내 6월 시민혁명의 결실을 거두게 한 산파역이었다는 점에서 386민주세력의 대부라 할 것이다.

    민족공조파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계속 노래해온 통일지상주의자와 상통한다. 그런데 남한의 통일주의자는 천도에 대해 여태껏 말이 없다. 참여정부는 수도이전과 더불어 용산 미군기지 이전을 자주의 실현이라며 좋아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북한은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2004. 1.23)을 통해 “용산 미군기지 이전은 북침전쟁을 위한 것으로, 미국이 조선반도에서 제2전쟁을 도발할 경우 우리의 타격권에서 벗어나 보려는 타산 밑에 이를 진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통일주의자들이 천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수도 남행(南行)이 북침전쟁의 준비와 무관하며 오히려 남북한 대치 국면의 지리적 고착이라 보아 반긴다는 뜻인가.

    참여정부 수장이 국정수행에서 임기 이후의 역사적 평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언급은 원론적으로 국민으로부터 공감을 얻을 만하다. 문제는 사태의 기본인식과 대처방식이 국민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북핵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국제정치판도를 안다면 남북평화가 정착되었다는 주장에 동조할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그리고 수도권의 지나친 비대를 지양하는 지방화정책이 바람직하긴 해도, 이것은 단연코 나라 안보가 보장되는 여건에서 추진해야할 종속변수에 불과하다. 삶의 질이 향상되려면 건강이 있어야 하듯이, 나라의 균형발전도 국가안보가 전제된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다.

    1970년대 중반, 3공이 안보를 명분 삼아 수립했던 ‘임시’ 행정수도안은 남북대치가 계속되는 오늘의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당시 행정수도안은 청와대가 휴전선에서 지근(至斤)거리에 있기에 유사시 국군통수권자의 지휘가 공간적으로 크게 제한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때 야당지도자 김대중씨는 “휴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안전거리를 확보하려함은 군사적 고려일 뿐, 국민의 호국의지를 감안한다면 수도를 대치 현장에 바싹 붙여 유지함이 옳다”고 했다. 실제로 독립 파키스탄이 수도를 카라치에서 인도와 영토 분쟁중인 카슈미르 인근 이슬라마바드로 옮긴 데는 영토수호 의지 를 과시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발상에서 핵구름이 짙게 드리워진 급박한 한반도 정세에 대한 고려가 일절 보이지 않음은 유감이다. 현대도시이론에 따르면 국가운명은 대도시가 변수라 했다. 대도시 가운데 특히 수도는 나라를 결딴내는 인질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도시 인질설’의 소론대로 북한이 아직 버리지 않은 무력·적화통일전략의 주 공격대상은 단연 서울이다. 북한 군부가 서울 등 남한 대도시의 시가지를 모형으로 만들어 군사훈련을 한다는 군사적 관측은 도시이론에서도 진작부터 유념했던 바다.

    노무현식 천도론에 문제 있다

    수도 서울에 정치 사회 교육 산업시설이 집중된 것은 지역 균등발전을 저해한다. 사진은 지난1월 설 때 서울을 빠져나가는 귀성차량 행렬.

    때문에 우리 국체(國體)를 지키자면 서울이 북한의 인질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주한미군 주력이 서울 북방에 자리잡은 것도 대한민국 안보를 위해서는 서울 사수가 절대적이란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이 미군마저 전시대적인 자주국방을 강조하는 참여정부의 퇴행적 대처로 인해 몇 년 뒤면 한강 훨씬 남쪽인 평택 쪽으로 이전하기로 결정되고 말았다.

    아무튼 서울 사수는 남한 안보에 필수 요건이다. 반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불균형 속에서 국가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지방화정책이 노리는 균형발전은 ‘선택’에 불과하다. 균형발전이라는 정책목표가 선택사항임은 참여정부가 행정부를 충청권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한 직후에 정부 방침의 정당화작업을 지원하자고 관련 학회가 주최한 국제세미나에 참가한 세계적 지역학자의 단언이기도 했다. 그는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를 옮긴다는 발상은 한마디로 난센스라고 일소에 붙였다.

    분권 실현되면 천도할 이유 없어

    천도를 논의하자면, 누구보다 먼저 전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도권 사람들이 안보상황을 굳게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서울을 사수한다고 철석같이 약속해놓고는 대통령은 이미 떠났고 이어 한강다리를 폭파했던 6·25 때의 아픈 체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만큼 수도권 주민들에게 믿음을 주려는 대책은 각별해야 한다. “적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에 기대지 않고, 적이 공격할 수 없게끔 해 놓은 것을 믿도록” 해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지혜는 지금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지방화시대 선포식에서 “지방화만큼은 내가 간판을 붙이겠다”는 참여정부 수장의 포부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지방화 내지 균형발전이 바람직하긴 해도 그게 하필 천도에 의해 이루어질 일이라는 발상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해도 분권을 하지 않고는 중앙집권체제가 달라질 리 없고, 분권을 제대로 실현한다면 천도 없이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은가.

    천도는 거대한 물리적 덩어리 만들기인데 이는 결국 치적을 물증으로 남기겠다는 속셈이다. 물리적 덩어리 만들기는 실속보다는 전시 위주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3공 절대권력자의 취향을 감안해 계절적으로 잔디를 심기 어려운 도로 주변을 푸른 페인트를 칠했던 것은 전시행정의 대표적 사례다.

    국민들 사이의 숙의와 합의도 없이 서두르는 천도는 겉치레에 치중할 염려가 있고 그렇게 되면 브라질리아 꼴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나라의 새 기상을 활짝 편다며 도시구조를 제트기 모양과 닮게 설계해서 대통령궁은 조종석에 배치하는 식의 어린이 장난감 같은 도시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도시의 체질은 인공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며 유기체를 닮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계의 지혜인 데도 기계를 본떠 만들었으니 후유증은 당초에 잉태되었던 것. 무미건조한 관청거리가 중심에 자리잡고 건설공사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이 주저앉아 몰려 사는 빈민가가 도시외곽을 감싸는, 그리하여 빈부층이 공간적으로 뚜렷이 양분되는 전형적인 ‘이중 도시’가 브라질의 신수도다.

    안보를 걱정할 일이 없던 브라질인 데도 수도이전 공사비로 엄청난 인플레라는 복병을 만났다. 장장 200년 이상의 긴 세월 속에서 국민적 합의를 일군 끝에 마침내 수도이전을 결행한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차질 없이 공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헌법조항에 건설예산의 자동 상계(相計)를 삽입했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었다. 극심한 인플레 탓에 마침내 쿠데타가 발생했고 연이은 군사독재로 이 나라 국민은 20년이나 고통을 겪었다.

    국민 3분의 2가 찬성해야

    수도이전은 이렇게 어려운 역사(役事)다. 다만 브라질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이 있다면, 수도이전을 제대로 하자면 우리도 헌법 개정에 준하는 국민적 합의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국민 3분의 2가 지지하는 천도라야 순리라는 얘기다.

    정상국가(normal state)에서 민주적 합의를 거쳤다 해도 초대형 사업이 순항한다는 보장이 없다. 이 점에 착안해서 국토개발 관련 이론에서는 대형사업의 성공조건으로 대대적인 초기투자를 권고하곤 한다. 초기의 대대적 투자는 사업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굳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 전개마저 해당 사업에 대한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전제로 한다. 이를테면 갓 독립한 이스라엘이 적대 아랍과의 접경 사막지역에 대대적으로 신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신도시야말로 정주처 마련은 물론이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전략촌으로도 필수적임을 국민이 절대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에 견주면 우리의 경우 ‘균형개발용’에서 ‘지배세력의 변화용’으로 말바꾸기가 계속되는 지경에서 국력 결집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치적을 물리적으로 남기려 함은 독재자의 기본 속성이다. 이 점에서도 천도가 거부감을 안겨준다. 고속전철처럼 국민적 공감대가 큰 경우와는 달리, 천도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초대형 국책사업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 권력자들에 의해 추진되곤 했다. 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3공의 개발독재가 이 땅에서 절대 부족했던 사회간접자본을 성공리에 대대적으로 조성했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20세기 백년을 마감하는 회고에서 외지(外紙)는 박정희 대통령을 두고 경부고속도로, 수많은 댐, 포항제철 같은 물리적 외형이 바로 그의 기념비라 말했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아직 권력을 제대로 장악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수도이전 관련법이 통과되었을까. 얼른 보아도 참여정부의 승리가 아니라 거대야당의 무원칙과 안일 탓이었다. 대선 때 정략적으로 발의된 천도는 거대야당이 당초 반대했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다가올 총선 대비책이라며 24개 국회의석이 걸려 있는 충청도 지역이익에 발목이 잡혀 국기(國基)에 관한 일에 대해 국회 나름의 국론 수렴 공청회 한번 갖지 않고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파행을 자행했다.

    결국 더 깊이 살펴보면 여·야 할 것 없이 ‘예측할 수 없는’ 실체란 점만 부각시켜 정치권 전체에 대한 국민의 불신만 키웠으니 참여정부로서도 딱히 좋아할 일만도 아니다. 오죽했으면 정제된 말 쓰기가 직업인 원로 작가 박경리는 최근 국회의원들을 두고 ‘조폭 집단원’ 같다고 말했을까.

    지역 배타주의 기승 우려

    절대 약세의 여당을 거느리고도 문제의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으니 이제 절대권력자처럼 행세하려는 참여정부 수장의 몸짓이 탄력을 받을지 모른다. 개국을 도왔던 공신 수만 명을, 집권을 보고 나자 멀리 몸을 숨긴 한 사람만 빼고 다 죽인 명(明)나라 태조처럼 그는 대통령으로 발신(發身)할 수 있었던 정치터전 민주당을 내팽개쳤다.

    정치적 신의는 소의(小義)이고 나라개혁의 실현은 대의(大義)라 여겼기 때문인지 몰라도, 자못 전제왕조시대의 제왕처럼 “부끄러워 할 것이 없다(無恥)”는 전 시대적 인상마저 풍긴다.

    이 지경이라면 어떻게 민주시대를 살아갈 “분수를 알고 부끄러움을 안다”는 염치의 덕목을 무겁게 여기도록 국민을 교화할 수 있을 것인가.

    천도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지역수준에서 당장 예상되는 것은 충청권의 향배다. 입지예정지역 주변은 12년 동안 개발을 제한한다는 조치는 이전예정지라고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토지소유자에게 당장 실망성 불편을 안겨줄 것이다. 이어 올해 안에 입지를 정하고 나면 충청권의 나머지 시·군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지역 배타주의가 기승을 부릴 것이다.

    공약성 국책사업은 정권의 향배와 직접 관련돼 있다. 이번 4월 17대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거나, 총선 이후 정당간 연대로 과반수 이상에 이르지 못하면 참여정부는 더욱 레임덕 현상에 빠질 것이다. 무엇보다 재신임을 자청한 것이 발목을 잡을 것이다.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경우에도 북핵문제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현 정부의 행동반경을 제약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민적 합의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음은 두고두고 걸림돌로 남을 것이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사업을 되돌릴 수 없도록 초기에 저돌적으로 대대적 투자를 감행하기에도 참여정부의 임기는 짧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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