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노무현 정부 ‘마지막 1년’에 바란다

‘승부수’로 뒤집으려 말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parkp@snu.ac.kr

    입력2007-01-04 18: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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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까지 ‘이기는 법’만 배웠을 뿐 ‘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대선후보가 될 때도, 탄핵 때도 그랬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승리의 귀재’가 됐다. 그것이 바로 비극의 원천이다. ‘실패학’을 모르니 지고 나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비극을 끝장내려면 여당에도 지고 야당에도 지며 언론이나 국민에게도 굴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길이 열린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1년’에 바란다
    출범 이후 지금까지 국정을 주도해온 ‘노무현호(號)’의 여정을 되돌아보면,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함으로써 자수성가한 사람의 일대기보다는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자신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며 결투를 신청하는 다혈질의 투사를 다룬 드라마가 떠오른다.

    반전과 역전, 온라인 말싸움이 아니면 오프라인 말싸움 등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던 ‘소요의 정치’, 정상과는 거리가 먼 ‘파격의 정치’였기 때문일까. 물론 주연과 관객이 분리된 드라마였다면 관객으로서는 손에 땀을 쥐는 한이 있더라도 즐겁게 구경했겠지만, 문제는 관객인 국민이 주연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조연의 신세였다는 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임기가 1년 남은 시점이라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의 경구를 좌우명으로 삼아 ‘성찰의 정치’를 펴야 할 때다. 그럼에도 지지율 8%의 대통령과 지지율 9%의 열린우리당이 통합신당 문제를 놓고 요란하게 다투는 행태를 보면, 만길 낭떠러지를 아래에 두고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좋은 터’를 잡겠다며 용호상박의 다툼을 벌이는 형국이니, 결코 아름답지 않다.

    새로운 ‘被통치학’ 요구한 ‘서러운 대통령’

    “좀 조용히 해!” 교실 안이 소란스러울 때 선생님이 교탁을 치면서 하는 소리다. 지금 영락없이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로 전락한 국민이 노 정권에 대해 하고 싶은 소리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정당정치든 서신정치든, 당을 깨든 당을 지키든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좀 조용히 할 수 없겠니?” 이 주문이야말로 노 정권이 남은 1년 동안 화두로 삼아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정부’의 집권행태 가운데 뇌리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은 울분과 격정을 쉴 새 없이 토해내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상대가 언론이건 강남사람들이건, 대통령은 언제나 서러웠다. 하도 서러움과 격정의 토로가 잦으니, 혹시 그것이 권력의 특권이며 본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러움과 회한을 권력의 본질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민주권력이란 설득과 소통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것인데, 울분을 쏟아놓으면 카타르시스가 되는지, 아니면 동조자를 결속할 수 있다고 믿는지, 유달리 노 대통령은 자신이 추진하는 일이 반대에 부딪히거나 자신의 정책이 실패해서 역효과를 낳을 때 억울함을 느꼈고 서러움을 주체하지 못했다. 권토중래한 노 대통령과 주변의 386 사람들이 승자의 미소를 짓기보다 서러움을 곱씹었다는 것은 좀처럼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인데, 문득 바위고개 언덕을 넘으면서 ‘10년간의 머슴살이’가 서러워 진달래꽃 한 아름 안고 눈물짓던 옛사람이 생각난다.

    대통령의 직분이나 권력을 고역보다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은 누구나 대통령이 되고 권력을 잡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일생 동안 사무친 응어리와 한이 봄볕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보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 오히려 더 박해를 받고 있다는 의식이 강해진 것 같다.

    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오르지 않는 지지율을 생각하며 눈물 흘린 것은 이해된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언제 한번이라도 대통령이라고 인정해본 적이 있느냐”며 비판적 언론을 향하여 절규했다. 그동안 ‘프로정치’보다 ‘아마추어정치’, ‘현장정치’보다 ‘서신정치’, ‘민생정치’보다 ‘코드정치’에 힘을 쏟아온 노 정권에 비판과 비난이 쇄도했다. 그를 지지하던 진보진영조차 노 대통령의 실패가 진보의 실패로 이어진다며 아우성쳤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국민과 언론, 야당의 충고나 비판을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감수해야 할 직무상의 양약(良藥)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진정성을 가진 개인 노무현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간주해 분노를 느끼고 괴로워하면서 더욱 폐쇄적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권력을 공유한 386 참모들도 한(恨)과 서러움에 복받쳐 있다.

    참여정부 홍보에 유별나게 열의를 바친 국정홍보처는 권력자의 한과 서러움을 방출하는 기관으로 유명해졌다. 그 결과 여론과 언론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른바 오기(傲氣)정치가 출현했다. 독선과 고집으로 일관해온 그의 통치에 대해 용감하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보다 동으로 가라면 서로 가는, 한사코 엄마의 말을 거부했던 청개구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 정권 특유의 ‘오기의 통치학’에는 아무래도 언론이나 국민의 책임도 있는 것 같다. 언론이나 국민은 참여정부 출범시 여느 때와 같이 “비판 없는 절대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라는 고전적 준칙을 떠올리며 ‘선출된 권력’에 대해 칭찬하고 격려하기보다는 감시와 비판으로 견제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절반’과 너무 쉽게 헤어져

    노 대통령은 어떠했는가. 처음에는 ‘반통령’에 불과하다며 자기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을 끌어안겠다고 공언했지만, 그와 국민의 절반은 너무 쉽게 헤어졌다. 그들의 비판과 우려를 단순히 대통령을 흔들기 위한 기득권자의 음모로 치부한 것이다. 만일 노 대통령이 모든 국민의 대통령, 즉 ‘온통령’이 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했더라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평화롭고 번영한 사회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혹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소란스럽고 덜 어지러웠을 것이다. 심지어 지지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반대하는 사람이 줄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편 가르기를 하며 싸움에 뛰어든 결과 우리 사회는 ‘만인투쟁의 장’으로 변모했고 ‘투쟁이 모든 것의 아버지’가 되는 살벌한 상황으로 일변했다. 운명은 노 대통령에게도, 국민에게도 가혹했다. 통합보다 투쟁의 길을 선택한 그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외롭고 슬픈 대통령’이 되었고, 그의 슬픔과 외로움은 국민의 불행과 불안, 탄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린은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 되었다고 하지만, 역전(逆轉)의 귀재인 노 대통령은 왜 ‘슬픈 대통령’이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그의 집권기간은 국민을 어떻게 다스릴지에 초점을 맞춘 ‘통치학’보다 통치자를 어떻게 섬길지에 주안점을 둔 ‘피(被)통치학’ 개발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제왕학’보다 ‘백성학’의 정립이 필요한 시기였다.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호소하고 설득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함께 가게 만드는 방법론보다 국민이 서러워하는 대통령을 달래고 격려하면서 바람직한 국정운영을 하게끔 유도하는 방법론을 고민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물론 언론도 이 사실을 몰랐다. 이것이 ‘노무현 정치의 비극’을 넘어 ‘한국 정치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주역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정상까지 오른 용은 후회할 일만 남았다는 의미다. 한국의 대통령은 누가 뭐래도 용이다. 그것도 물속에 엎드려 있는 ‘잠룡(潛龍)’도 아니고, 산속에 누워 있는 ‘와룡(臥龍)’도 아닌, 오로지 하늘로 오른 ‘비룡(飛龍)’이다. ‘용비어천가’야말로 이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그러므로 대통령을 배출한 지역 사람들이 서슴지 않고 “용 났다”고 하는 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일단 대통령이 돼 최고 권좌에 오르면 찬란함과 인기도 잠시뿐 ‘고난의 행군’ 시기가 찾아오게 마련이다. 여론의 요동이나 인기의 부침은 얼마나 심한가. 더구나 사면초가에 직면한 노 대통령으로서는 지금 ‘항룡유회’의 비애를 곱씹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당은 여당대로 화가 나 있고 야당은 야당대로 냉소적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충실했던 노사모가 결사적으로 대통령을 옹위하는 것도 아니다. 전투적 성향을 띠던 친노(親盧) 매체들도 노 대통령 때문에 진보의 이미지만 구겼다고 불만이 대단하다. 대통령은 글자 그대로 ‘왕따’ 신세고 벼랑 끝에 섰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노 정부는 뭐니뭐니 해도 핵 문제와 부동산 문제에서 뼈아픈 실패를 했다. “남북 문제만 잘되면 다른 문제에서는 깽판 쳐도 된다”고 했는데, 북한이 덜컥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했으니 사람들이 대북 포용정책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포용정책은 차기정권도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며 성역(聖域)으로 만들고 있다.

    하기야 이 정부에서 헌법처럼 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바로 부동산 문제가 그렇다. 부동산과의 전쟁을 선포한 횟수만 해도 부지기수다. 그 결과 중과세 위주의 정책을 남발했는데, 부동산 값은 어느 정권 때보다도 오르는 기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부동산 정책에 관한 한 강남사람들과의 ‘전투’에서는 이겼는지 모르나 ‘전쟁’에는 졌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부동산 정책은 결코 실패가 아니며, 그 효과는 몇 년 후에 나타날 거라고 강변할 뿐이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1년’에 바란다

    북핵사태는 햇볕정책을 펴온 참여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2006년 11월3일 보수단체 회원들이 서울 종묘공원에 모여 ‘북핵 폐기촉구와 간첩단 수사 확대 국민대회’를 연 후 광화문까지 거리행진을 했다.

    굴복이 미덕인 줄 알아야

    실패와 변명의 악순환. 그 근원은 무엇인가. ‘아마추어리즘’이 그 핵심일 것이다. 국정 수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덜컥 국정을 맡은 것이다. 메뚜기는 겨울을 모른다. 서리도 얼음도 모른다. 가을 한철 뛰놀다가 죽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 정권과 386 참모들은 권력을 잡기 전 비판과 저항으로만 일관했기 때문에 권력을 잡은 후 국정 어젠다를 어떻게 건설적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로드맵만 짜면 결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다보니 개혁을 한다며 기존의 것들을 과감하게 파괴했는데, 결과는 ‘창조적 파괴’가 아니라 ‘파괴적 파괴’였다. 오믈렛을 만든다며 달걀을 수없이 깼는데, 오믈렛은커녕 ‘프라이’조차 만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국민은 묻는다. “나무는 많이 벴는데, 산림만 황폐해졌을 뿐, 건설하겠다던 집은 어디 있는가” 하고…. 결국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오의 딸들’처럼, 노 정권은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벌을 받고 있다. 아무리 힘들여 물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 그 비밀은 어디에 있는가.

    노 대통령은 이제까지 ‘이기는 법’만 배웠을 뿐 ‘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대선후보가 될 때도, 탄핵 때도 그랬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며 ‘승리의 귀재’가 됐다. 그래서 그런지 노 대통령은 ‘승리의 신화’를 만들고 ‘성공학’을 썼을망정 ‘패배의 미학’을 배울 기회는 갖지 못했다. ‘실패학’을 모르니 지고 나서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오뚝이처럼 일곱 번 넘어진 다음에 여덟 번째에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철학’에만 능했을 뿐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역설의 철학’은 체득하지 못했다. 그토록 많은 재보궐선거에서 졌는데도 “여당은 태생적으로 불리하게 마련”이라며 진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5·31 지방선거의 참패에 대해서도 “선거에 한두 번 진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을 뿐이다.

    노 대통령은 ‘당정(黨政)분리’라면서도 열린우리당을 이기려 했고 한나라당은 수구정당이라며 이기려 했다. 또 비판언론은 기득권세력이라며 이기려 했고 국민은 독재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산다며 이기려 했다. 또 강남부자들은 부도덕하다며 이기려 했고 시장은 실패하는 법이라며 이기려 했다.

    유도를 배우는 사람은 낙법(落法), 즉 떨어지는 법부터 배운다. 낙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아예 죽거나 중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면 섭섭해하고 비판받으면 열패감을 느꼈고 비난을 받으면 설욕을 다짐했다. ‘지는 것’의 미학, ‘씹히는 것’의 멋, ‘백기를 드는 것’의 묘미를 몰랐던 것이다.

    인사 문제에서 지라고 한 국민에 대해 “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인사권밖에 없다”고 버틴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여론은 읍참마속(泣斬馬謖)처럼 오른팔이든 왼팔이든 잘라내라고 요구하는데, 오른팔은 왼팔로, 왼팔은 오른팔로 바꾸며 ‘돌려막기’를 거듭했을 뿐이다. 외톨이가 되어 슬픔을 가눌 길 없게 된 노 대통령의 비극은 이기려고만 한 ‘승자의 비극’이다.

    백조처럼 마지막에 아름다운 춤을

    이 비극과 서러움을 끝장내려면 만시지탄의 감은 있지만, 여당에도 지고 야당에도 지며 언론이나 국민에게도 굴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 시장이나 강남사람들에게도 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길이 열릴 것이다. 졌다고 깨끗이 승복하는 것은 결코 운동선수에게만 미덕이 아니다. 대통령에게도 굴복은 미덕이 될 수 있다.

    임기말이 다가올수록 노 대통령은 ‘지는 해’의 낙조(落照)를 감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싶다는 야망까지 포기할 수는 없겠지만, 민심도 놓치고 개혁 에너지도 소진한 대통령으로서 금의환향한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처럼 ‘대풍가(大風歌)’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백조처럼 마지막에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추려면 노 대통령은 남에게 도와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 그래야 하늘이 돕는다. 예를 들면 “임기를 마치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처럼 국민을 놀라게 할 만한 말을 불쑥 던져서는 곤란하다. 대통령직의 엄숙함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책무란 ‘국태민안(國泰民安)’, 즉 국가를 태평하게 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다. 정치지도자가 ‘유종의 미’를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면 직무유기 아닌가. 인사문제도 그렇다. 아무리 여론이 들끓어도 ‘내식으로 가는 인사’를 고집함으로써 ‘보은인사’ ‘코드인사’ ‘회전문 인사’ ‘돌려막기 인사’ 등 수많은 냉소적인 조어가 등장했다. 그런데도 막판에 방송사를 장악하겠다며 KBS 사장 인사 등에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면, ‘아름다운 춤’을 출 것 같지는 않다.

    정부 인사든 서신정치든, 노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마다 논란이 벌어진 것은 정치를 ‘좋은 통치(good government)’의 문제로 보지 않고 오로지 ‘가능성의 예술(art of the possible)’로 보았기 때문이다. 정치를 ‘최선이냐, 차선이냐’의 잣대로 가늠하지 않고 ‘불가능이냐, 가능이냐’의 문제로 접근하면 그 결과는 천박해지게 마련이다. 사람을 쓰거나 정책을 입안할 때도 ‘최선의 대안이냐, 차선의 대안이냐’를 고민해야지 ‘가능한 대안이냐, 불가능한 대안이냐’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속물정치’가 된다.

    무엇이든 전략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시도하는 식으로 ‘실험의 정치’를 하면 상식과 순리가 결여된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상식과 순리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우면 상식과 순리가 된다. 전략적 사고(思考)를 포기하고 순리의 정책을 펴고 인사를 하면 ‘국태민안’의 정치가 된다. 그러려면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고 압박하기 전에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사코 국민을 이겨보겠다고 하기보다는 국민에게 져야 한다.

    일관성보다 합리성 따져야

    이제 노 정권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권력의 누수현상, 즉 레임덕을 걱정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누구나 늙으면 노쇠해지는 것처럼 한 정권의 임기도 말년에 가까워지면 그런 조짐이 나타난다. 그것을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위적인 방식으로 막으려 하면 탈이 난다.

    또 정권 초기부터 시작한 정책의 일관성을 어떻게 유지할까 노심초사하고 있다면, 그것도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정책의 ‘일관성’보다는 정책의 ‘합리성’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중과세 위주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했으면 시장친화적 정책으로 바꿔야 한다. 대북 포용정책이 실패했으면 상호주의가 가능한 정책으로 바꿔야 한다. 그동안의 인사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면 ‘탈 없는 인사’로 바꿔야 한다. 지금 노 정부가 걱정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지, 어떻게 싸우고 배수진을 치며 승부수를 던질까 하는 문제는 아니다.

    정치를 무위자연의 흐름으로 받아들일 때 ‘오기’가 없어지고 ‘원한’이 사라지며, 또 ‘무오류’를 주장하지 않게 된다. 권력이 서러워하기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 바로 그것이 자연의 정치다. 가을이 되어 단풍이 들고 잎이 떨어져 나목(裸木)으로 변해가는 나무가 벌거벗지 않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것을 보았는가. 여름을 시끄럽게 하던 매미가 죽기 싫다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았는가. 몸부림을 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1년’에 바란다
    박효종

    1947년 서울 출생

    가톨릭대 신학부 졸업, 서울대 석사(국민윤리 교육학), 미국 인디애나대 박사(정치학)

    現 서울대 사범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대표, 교과서포럼 대표

    저서 : ‘합리적 선택과 공공재’ ‘정당국고보조금제 비판과 대안’ ‘한국민주정치와 삼권 분립’ ‘국가와 권위’


    레임덕을 막기 위해 열린우리당과 힘겨루기를 하고 또 정책 실패의 책임을 야당에 떠넘긴다면, 자연을 거역하는 정치가 된다. 옛사람들이 말하던 ‘무치(無恥)’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의 대통령은 어떤 일을 해도 부끄러울 필요가 없었던 옛날의 임금과 다르다. 국정현안에 전념함으로써 국민에게 봉사하겠다는 의지를 불사를 때 오기도 무치도 없는 무위자연의 정치가 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지는 해’라도 하늘을 황혼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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