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겹눈의 인간’이윤기, 가슴을 열다

“오래 걷다 보니 거기 산이 있었다”

  • 글: 이나리 byeme@donga.com

    입력2002-11-05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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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가 겸 소설가 겸 신화연구가. 그러나 그 이상인 ‘우리 시대의 르네상스인’ 이윤기. 섬뜩하리만큼 총명했던 어린 시절, 오직 ‘앎’을 위해 목숨 걸고 정진한 16세, 베트남의 사선을 넘어 ‘장미의 이름’으로 우뚝 선 30대, 문학의 칼로 크로노스의 배를 가른 50대. 이제 반쯤 비껴앉은 그는 말한다.
    • “그러셔, 누가 말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좋다 이거여.”
    ‘겹눈의 인간’이윤기, 가슴을 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약력(略歷)으로 다 설명되는 사람, 행간으로만 설명이 되는 사람. 작가 이윤기(56)는 후자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다. 검정고시를 거쳐 신학대학에 잠시 적을 둔 것이 전부다. 석사학위도, 박사학위도 없다. 그는 200여 권의 문학·인문서를 번역했으나 그저 번역가가 아니며, 동인문학상·대산문학상을 탔으나 그저 소설가도 아니다. 얼추 100만 권이 팔린 ‘그리스·로마 신화’의 대히트로 신화연구가의 꼬리표를 달았으되, 이 또한 그의 진면목이랄 수는 없다.

    이윤기는 흥 많은 사람이다. 눈물 많은 사나이다. 다시 태어나면 무용수가 되고 싶다 하고, 가수로도 한번 살아보고 싶다 한다. 조용필의 ‘사나이 결심’을 부를 땐 왠지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북채로 얻어맞고 하늘을 보니 나처럼 울고 있는 듯한 낮달…’, 이렇게 넘어가는 한국계 엔카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듣다가는 아내를 안고 그만 펑펑 울어버렸다 한다. 단언컨대 그는 가수도 무용수도 될 수 있었다. 직접 보고 들은 그의 춤, 그의 노래에는 문득 가슴 한켠 무너뜨리는 아픈 정조가 묵은 장(醬)처럼 질큼하니 녹아 있었다.

    허나 가까운 이들에게 이윤기는 다만, 홍시 같은 사람, 군고구마 같은 사람이다. 세상에 다 드러내놓기 못내 아까운 사람. 다락에 숨겨놓고 개 짖는 겨울밤 남몰래 꺼내 먹던 그 홍시처럼, 아궁이 깊이 스리슬쩍 묻어뒀다 누이 자고 아우 젖 빠는 시간 호호 불어 먹던 그 고구마처럼. 많은 말과 글로 그는 이미 세상과 친하지만, 세상은 그를 아직 잘 모른다. 그래서 그와 술 한잔 하러 간다. 여우비 내리는 가을 초입이다.

    5000권의 책에 둘러싸인 老戰士

    지난 봄 새로 이사한 그의 집은 과천 현대미술관 근처 뒷골마을에 있다. 고만고만한 전원주택들이 단정히 늘어선 고즈넉한 동네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한 집 대문 앞에 웬 아저씨가 담배 물고 앉아 이 쪽을 본다. 이윤기다.



    1970년대에 지어졌다지만 뼈대만 남기고 다 발라내 정성으로 매만진 덕에 집은 꼭 새 것처럼 윤기가 난다. 나무 계단 밟고 올라서면 담황색 벽돌로 마감한 본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 앞 빈자리에는 작은 바비큐 그릴과 목공 작업대 하나가 놓여 있다. 아담한 정원에서는 백구 두 마리가 컹컹 짖는다. 썩 잘 생긴 녀석들이다.

    그는 지금 몹시 지친 상태다.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지 채 이틀도 되지 않았다. 몇몇 매체에 줄 원고 때문에 새벽 2시30분부터 내처 아홉 시간을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다. 그런데 움직임엔 활력이 있다. 당당한 풍채도 그대로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순이 멀지 않은 그는 아직도 청년의 골격을 갖고 있다. 177㎝의 키도 줄지 않았고 어깨, 척추, 두 다리의 선 또한 곧고 유연하다.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근사한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처럼 코르덴 셔츠에 멜빵, 작업복 바지 차림이다.

    새 집을 둘러본다. 동양화가인 안주인의 감각이 돋보인다. 과한 것이 없다. 똑같은 것도 없다. 사방으로 트여 있다. 자유롭고 자연스럽다. 또한 이윤기의 늑골만큼이나 고집 세고 튼실해 뵌다.

    그의 옛 집이 떠오른다. 1년 전 가을, 그는 과천의 한 서민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문 열고 들어서며 내심 놀랐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은 꽤나 어지러웠다. 낡은 소파 위아래에는 벗어놓은 옷가지며 읽다 만 책, 수제(手製) 엽서, 술안주였음이 분명한 땅콩 접시까지가 두서없이 널려 있었다.

    물건마다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은 건 멋진 일이었다. 금세 내 집처럼 편안해졌다. 다리 풀고 앉아 땅콩부터 주워 먹었다. 3000원어치 사과 한 봉지를 달랑 쥔 손이 어느새 부끄럽지 않았다. 집은 사는 이를 닮는다던가. 글쓰는 남편과 그림 그리는 아내가 친구처럼 어울려 사는 집은 참으로 ‘그 집’다웠다.

    서재를 구경한다. 책 둘 곳이 필요해 이사했달 만큼 중요한 그 공간은 넓고 밝고 기능적이다. 무엇보다 삼면 벽을 둘러 천장까지 맞닿은 수제 책장이 감탄을 자아낸다. 두께 30㎜의 집송목으로 크기가 다른 박스 100여 개를 만들어 켜켜이 쌓아올렸다. 5000여 권의 책, 그 가운데 늙은 전사(戰士)처럼 건조한 몸체로 우뚝 선 이윤기가 왕후장상 부럽지 않아 뵌다.

    “책장 참 근사하네요.”

    “이게 다 경험에서 나온 거요. 좋은 책장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째, 무거운 양장본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해야 하고, 둘째, 혼자 손으로도 조립 가능해야 하고, 셋째, 구조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야 하고. 그걸 충족시키려다 보니 지금 같은 모양새가 됐어요.”

    경북 사투리가 언뜻언뜻 끼여드는 느릿한 말투. 누군가 “이윤기는 글보다 말이 더 맛깔스럽다” 했던가. 그렇기야 하랴마는, 울림 큰 목소리에 실려 송창(誦唱) 가락 마냥 흘러가는 그 솜씨는 구수하면서도 아귀가 딱딱 맞는다. 입말글, 그러니까 구어체 글쓰기를 누구보다 높이 사는 그가 아닌가.

    술술 잘 넘어간다 해서 편한 단어 아무 거나 불러다 대강 눙치고 들어가는 식은 또 전혀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나이 어린 사람도 깍듯이 존대한다. 스스로 “10년은 알고 지내야 비로소 말끝이 내려간다” 할 정도다. 사람 사귐의 무거움을 알고, 피붙이간에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음을 알고, 이름 없는 나무 앞에서도 종종 숙연해지는 그는 영락없는 반가(班家) 자손이요 갈 데 없는 촌사람이다.

    ‘겹눈의 인간’이윤기, 가슴을 열다

    그의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서재. 이 곳에서 그는 하루 평균 열 시간씩 공부와 글 쓰기에 매달리다

    어느 글에선가 이윤기는 인간 존재를 ‘자기 과거의 상속자, 자기 과거의 퇴적물’로 규정했다. 그 또한 그럴 것이다. 이윤기의 삶은 경상도 북부, 군위와 대구 어름 그 어딘가에 명주실로 꼭꼭 홀쳐 매여 있다.

    이윤기의 고향은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두북동 2구다. ‘수성암의 최적층이 생으로 드러나 있는 땅, 네바다의 사막과 유타의 고원에 견주어 나을 것이 없는 땅’에서 그는 9남매를 낳아 7남매를 키운 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첫돌을 지낸 직후 세상을 떴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만무하다. 사진 한 장 없다. 다만 ‘체격이 엄장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도량이 크고 도량에 못지않게 발 또한 컸다’는 ‘전설’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가진 첫 기억은 만 세 살 때 6·25전쟁의 포화를 피해 피란갔던 일이다. 누나가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내려 애쓰던 일이며, 벽돌담 아래서 사람이 죽어가던 모습들이 선명히 기억난다.

    “동창들이 그래요. 휴지통이라고. 왜 PC 보면 필요 없는 파일은 ‘휴지통’에 버리잖아요. 근데 전 정말 별걸 다 기억해요. 네 살 무렵 뗀 ‘천자문’ ‘명심보감’을 지금도 줄줄 외우니까요. 친구들 부추김에 술자리에서 가끔 재미 삼아 외워 보이는데, 그럴 때면 꼭 “너 어젯밤에 외웠지?” 하고 나서는 녀석이 있어요. 벌컥 화부터 내곤 돌아서서 후회하지요. 내 아직 공부가 멀었구나….”

    근 400년을 안동에 터잡고 살다 의성을 거쳐 군위로 이주한 그의 집안은 반성(班性)이 강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능참봉을 했어요. 종8품이니 말단이지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빳빳했어요. 정승이 와도 고개 숙이지 않는 게 능참봉 아닙니까.”

    게다가 그를 맡아 키우다시피 한 할머니는 더 꼿꼿한 집안 출신이었다. 강한 반골 기질에 의기가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 어린 막내손주를 앉혀 놓고 이렇게 가르치곤 했다. “대장부는 남의 편지 받으면 간직하는 게 아니고, 글을 쓰면 구차하게 남기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는 또한 근동에서 따라올 자 없는 문장가였다. 손자 중 하나 학자로 키우는 것이 소원이던 할머니는 그에게 직접 ‘천자문’을 가르쳤다. ‘명심보감’ ‘동몽선습’ ‘채근담’은 같은 마을 살던 고종형의 어깨너머로 배웠다. 글에 목말라 장형(長兄)의 중학교 교과서까지 달달 외웠다. ‘물상(物象)’이라는 과학교과서에서 본 ‘돌젤라(토리첼리)의 실험’이라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모두 초등학교 입학 전의 일들이다.

    요즘 말로 독서광이던 할머니는 거처에 ‘옥루몽’ ‘숙영낭자전’ ‘조웅전’ ‘류충렬전’ ‘장화홍련전’ ‘권익중전’ 같은 이야기책을 갖춰 놓고 운율 붙여 읽기를 좋아했다. 할머니 방은 그 소리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세상을 뜨자 어머니가 책들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논일밭일 하는 틈틈이 송창 가락에 맞춰 ‘옥루몽’ 한 구절을 눈물나게 자아 올렸다. 그 또한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그중 몇 권을 통째로 외웠다.

    “나무요 나무요 톱 들어가니더”

    글 읽고 노래하며 살았다 해서 살림이 넉넉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태어날 무렵만 해도 군위군에서 손꼽히는 부농이던 가세는 6·25전쟁 끝날 무렵 기울기 시작했다. 장형이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때 운수업이라는 건 요즘으로 치면 헬리콥터 사업 같은 거예요. 그걸 전답 팔아 뒷바라지하려니 남아나는 게 없을 밖에요.”

    장형의 사업체는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남은 것은 빚, 그리고 논 일곱 마지기뿐이었다. 위로 형 누나들이 하나씩 대구로 떠나거나 출가하면서, 어머니와 2년 터울인 형과 이윤기, 이렇게 셋이 농사일을 꾸려갔다. 그 때를 이윤기는 “내 고통스럽던 고향살이의 절정”이라 말한다.

    “제가 농사에는 지진아 수준이었어요. 일상사도 마찬가지여서, 뭘 깨뜨린다거나 심부름거리를 잊는다거나 하는 일이 잦았어요. 아마 자꾸 딴 생각에 빠져들었기 때문인가 봐요. 한편으로 할머님은 절 ‘맹기(孟氣)’니 ‘아성(亞聖)’이니 하는 별명으로 부르셨는데, 어쭙잖지만 맹자 될 기가 있다, 맹자 버금가는 성인이 될 거라는 뜻이었겠지요.”

    바로 위 형은 열 살 무렵부터 아름드리 소나무를 쓰러뜨려 장작을 패 내다 팔만큼 상일꾼이었다. 그 형에게는 ‘참 따뜻한 버릇’이 있었다. 소나무를 자르기 전 톱 등으로 나무를 툭툭 치며 “나무요 나무요 톱 들어가니더”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구처(求處) 없어서 베기는 한다만 백 살 넘은 나무 욕보일 수는 없다”는 것이 형의 말이었다. 이제는 교과서 속 용어가 되어버린 애니미즘, 이윤기는 그 신화와 만물교감의 세계를 몸으로 살았다.

    1958년 군위에 남아있던 세 식구마저 대구로 이사했다. 가난보다 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 사는 숙부가 그 무렵 시작된 재일 동포 북송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게다. 마을에는 북송된 사람의 집안이 더러 있어 그의 식구를 원수로 대했다.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빨갱이 가족’이란 꼬리표는 이후로도 그의 삶에 이런저런 굴곡을 가져왔다. 장형마저 자동차노조 경북 지부장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한 집안에 요시찰 인물이 둘로 늘었다. 이로 인해 한때 ‘허무주의적 육군 대위’를 꿈꾸던 이윤기는 욕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죽는 날까지 통장이나 지갑을 가져본 적 없는 큰형님”은 예나 지금이나 그의 가장 큰 자랑이다.

    대도시 대구는 이윤기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총명한 만큼 예민해 만사를 그 깊은 결까지 손으로 직접 쓸어보아야 직성이 풀리던 소년에게, 대구에서의 ‘문화적 삶’은 거기 대응할 특단의 ‘자기 강화 프로그램’을 요구했다. 이윤기는 신기(神氣)에 가까운 열정으로 그 싸움에 몰입했다.

    “이사 후 1년을 쉰 다음 대구 칠성국민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어요.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많았죠. 그때 우리 반에 제일모직 상무 아들이 있었어요. 전교 1등은 도맡아 하던 친구였는데, 어느 날 보니 군위 촌놈이 하나 와 있더래요. ‘춘향전’에 나오는 어사또가 지은 시에 대해 배우는데 제가 빙긋 웃더랍니다. 선생님께서 ‘너 이 시 아냐, 한번 써보라’ 하시니 망설임 없이 나가, 金樽美酒(금준미주)는 千人血(천인혈)이요, 하며 주욱 휘갈기더래요. 그래 그랬답니다. 에이 씨, 내 시대는 끝났구나.”

    허허 웃으며 이런 에피소드를 입에 올리다가도 문득문득 난감한 듯 입을 다문다. “침소봉대, 영웅전이 돼가는 것 같다”며 걱정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과거사가 절대 과장이 아님을 듣는 이가 분명히 알아주길 바란다. 더하여 그런 기대를 갖는 자신은 “확실히 공부가 덜 됐다”는 말까지 잊지 않으니 듣는 사람으로서야 도망갈 구멍이 없다. 집요한 자기추궁이다.

    그의 아내가 내내 신기해하는 것이 있다. 그렇게 가난했다는 사람이 어찌 중학 시절 바이올린을 배우고, 전축이며 미제 클래식 원판을 가질 수 있었냐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돈을 벌었어요. 동급생 집에서 입주과외 선생을 했지요. 부잣집이라 월급도 나쁘지 않았어요. 가끔은 어머니께 생활비를 보태드리기도 했으니까요.”

    설움받은 일은 없었을까.

    “뭐 그다지…. 이런 거는 있었어요. 1960년대에 겨울 과일이란 금값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 집들에선 벌써 바나나를 먹었어요. 어쩌다 그런 게 나오면 전 알레르기가 있는 척 먹지 않았죠. 저까지 달려들면 그쪽 몫이 줄어들잖아요. 솔직히 먹고 싶은 맘도 별로 없었어요. 일종의 방어기제랄까, 이 집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다 싫어하자, 그런. 허우대 큰 놈 중에는 독종이 없다는데, 제가 좀 그렇게 독한 데가 있어요. 어쨌든 생각하면 쓸쓸한 일이죠.”

    일찍 돌아간 아버지 생각을 전에 없이 자주 한 때이기도 하다.

    “전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이 어떤 건지 몰라요. 주위에는 아비 없이 자라는 저를 가엾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죠. 하지만 전 별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어요. 근데 입주과외를 하면서 보니 아버지란 사람들이 화수분이에요. 은행을 끼고 사나, 아들이 달라면 그냥 돈이 막 나와요. 거 참 무지하게 편리해 뵈데요.”

    그런 기억 때문일까.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돈 부칠 때가 가장 기분 좋고, 참으로 아비 노릇 한 듯 하여 가슴 뿌듯하단다.

    “아내한테 ‘얼마 부쳤어?’ 해서 ‘1만 달러’란 대답이 나오면 짐짓 ‘왜, 한 2만달러 부치지’ 그래요. 사실 은행 잔고는 바닥이 훤히 드러난 상태인 줄 뻔히 알면서요. 아내와 그런 실없는 문답 나눌 때가 저는 참 행복해요.”

    교회를 넘어, 예수를 넘어

    1962년 경북중학교에 입학했다. 경상남·북도의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여 들었다. 학생들은 지역 전체의 ‘예우’를 받았다. 저 멀리, 소매 끝에 줄 세 개 들어간 경북중 교복이 보이면 버스 기사들은 그를 태우려고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도 차를 세웠다.

    “1학년 때는 반 애들하고 막 박치기하면서 살았어요. 기억에 선명한 일이 하나 있는데, 당시 경북중의 멘탈리티가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일화지요. 우리 어머니께서 절 37세에 낳으셨으니 그때는 벌써 돋보기를 쓰실 나이였어요. 어느날 도시락을 열었는데 머리카락이 들어 있어요. 그걸 본 친구녀석 하나가 그러데요. ‘야, 니네 집 식모 혼내야겠구나’. 전 상당한 충격을 받았어요. 경북중에는 그렇게 부잣집 아들이 많았어요. 과외 없이 경북중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사춘기가 됐다. 2학년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학교 도서실 사서 노릇을 시작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서정주의 시와 이어령의 산문들에 깊이 중독됐다. 같은 시기, 또 하나의 충격적인 세계와 만났다. 예수였다.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요만한 전도지가 있어요. 성경 구절을 촘촘히 새겨 넣은 소책자지요. 거기서 처음 기독교를 알았어요. 예수라는 캐릭터에 뻑 가버렸죠. 예를 들어 ‘나는 너희에게 화해가 아니라 불화를 주러 왔다’는 식의 자신감 충만한 말을 매우 뱉어내는 인간상. 또 성경은 어찌나 넓고 깊은지, 비로소 이성과 문화라는 것에 눈을 뜬 기분이었죠.”

    하지만 기독교에 완전히 빠져들기란 불가능했다.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은 거예요. 그래서 마찰도 적지 않았어요. 중학교 때 교회 회지 편집을 맡았는데 어느 일요일 인쇄작업을 하고 있으니 부목사가 달려와 나무라요. ‘주일에 왜 일을 하느냐’는 거였지요. 저도 지지 않고 덤볐어요. ‘당신도 오늘 설교한 몫으로 일주일 먹고사는 거 아니오’. 또 한번은 대구에서 유명한 소아과 의사가 요즘 돈으로 한 10억쯤을 헌금했다 해서 난리가 났어요. 그때도 그랬지요. ‘그 돈 벌게 해주느라고 하나님이 애들을 얼마나 울렸겠나’. 3년쯤 교회에 다녔는데 세례 받기와 사도신경 암송은 끝까지 거부했어요.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되는 듯이.”

    예수와 부처를 사랑하나 절과 교회, ‘남 말고 나 좀 잘 봐 주소’ 하는 기복 신앙에 대한 그의 불신은 강고하다. 1998년 그가 동인문학상을 받았을 때 옛 교회친구가 전화하더니 “너 잘되라고 우리가 기도 많이 한 덕분”이라 했다. 그는 그만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고교 1학년 때 교회를 떠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옳다 하는 것이 교회에는 옳지 않다면, 좋다, 지옥에 가자. 선악의 단죄에서 벗어나 독립선언을 하자. 또 하나, 교회는 떠나지만 성경은 더 깊이, 더 열심히 읽으리라.”

    예수와 성경을 향한 찬탄, 탐구욕은 곧 종교학 전반에 대한 열정으로 옮아갔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삭아 문드러진 철학 서적과 문학 책들’에도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미술을 만나면 미술을 때려잡고, 클래식을 만나면 클래식을 때려잡고, 외국어를 만나면 외국어를 때려잡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점수에 도움 안 되는 공부에 골몰하느라 하루 걸러 날밤을 새고 코피를 쏟아냈다.

    “맘 잘 통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한데 몰켜 다니며 참 유치한 짓 많이 했지요. ‘말러는 좀 무겁지 않나?’ 뭐 이런 발랑 까진 소리들이나 지껄이고. 다 이해도 못하면서 뒷주머니엔 ‘사상계’를 꽂고 다녔어요.”

    ‘교양’의 힘을 깨달은 것도 이때다.

    “예를 들어 오늘밤에 ‘신곡’을 읽으면 다음날 누군가 신기하게도 단테에 대해 물어와요. 그런 일이 자주 있었어요. 아, 교양이 이런 거구나, 바로바로 티가 나는구나. 그때 알았죠.”

    그가 서가 한 귀퉁이에서 너무 낡아 잘 펼쳐지지도 않는 영어 사전 한 권을 꺼내 온다.

    “이게 제가 중·고등학교 때 보던 영어사전이에요. 요기 위쪽에 갈색 얼룩 보이지요? 이게 코피자국이에요. 코피가 나면 사전 모서리로 쓱 닦고 그렇게 남은 자국을 보며 흐뭇해하던,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기는 시절이었어요.”

    책 속표지에는 한 친구가 낙서 삼아 썼다는 ‘미래 약력’이 적혀 있다. ‘예일대 교수, 신학 박사, 철학 박사, 의학 박사’. 대단한 박력이다. 요즘 중·고등학생들 중 이런 욕심을 품을 줄 아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왜 그러셨어요? 왜 그다지도 머릿속에 많은 지식을 몰아넣고 싶어했죠?”

    “글쎄…, 일단 알고 싶었어요. 여기에 뭐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책이든 무엇이든 놓을 수가 없었어요. 감자 줄기 캐듯 한없이 파고들었죠. 그게 참 재미가 있었어요.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외기만 했나 몰라요. 사전 통째로 외우기, 교향곡 통째로 외우기. 돌이켜보면 참 천박한 짓인데 말이죠.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체하고 싶었나? 경제적 열등감을 지적 허세로 만회하고 싶었나? 꼭 그 때문만은 아닌 것같고. 다만 이런 건 있었어요. 나의 현재는 비참하다. 그러나 붙자! 하여튼 매일 밤낮을 치유 불가능한 과대망상과 치유 불가능한 열등감 사이에서 방황하던 날들이었죠.”

    “부디 나를 용서하지 마시라”

    중학 시절 그는 유도를 시작했다. 동인문학상 시상식 때 그는 이런 요지의 소감을 발표했다.

    “유단자가 되어 검은 띠를 매던 날의 감격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그날 저는 몇 가지 결심을 했지요. 그중에는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겠다던가, 비가 와도 우산 같은 것은 들지 않겠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어느 늦가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었어요. 저는 보도 중앙을 독일 병사처럼 걸었습니다. 근데 같이 걷던 한 친구는 보도 옆으로 늘어선 남의 집 처마를 이용해 절묘하게 비를 피하더군요. 저는 그 친구가 조금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오늘 받은 상은 그때 그 검은 띠와 같습니다. 문학의 유단자가 됐으니만큼 먼저 검은 띠 맨 유단자들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겠습니다.”

    그때 그 비 피해 가던 친구와는 요즘도 왕래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대답이 재미있다.

    “중학교 동기들이 수상 축하 잔치를 열어준다 해서 나가보니 회장이 바로 그 친구예요. 그 자리에서 친구 역시 그 시절 이미 유단자였다는 걸 처음 알았죠. 친구는 ‘유단자’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은 유단자였어요. 문학에 대한 이해 또한 깊고도 넓었지요. 그 친구야말로 고수였습니다. 참 부끄러웠죠.”

    바로 이런 게 이윤기 식 ‘자복(自服)’이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이렇게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그와 마주치게 된다. 자기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걸 그는 왜 자꾸 ‘얼굴에 모닥불 묻은 심정’으로 고백하고, 내처 ‘부디 이런 나를 용서하지 말아달라’며 손을 탁 놓아버리는 걸까.

    “그런 태도는 자칫 위선이나 위악으로 비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 이런 사람이니 믿어달라’, 이건 위선이고, ‘내 원래 이런 놈이니 건드리지 말라’, 이건 위악이고요.”

    “둘 다 아니에요. 자복은 외려 살면서 위선 떨고 위악 떨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에요. 사람이 자복할 줄 모르면 종내는 힘이 딸리게 돼 있어요. 무리수를 두게 되지요. 예를 들어 제가 미술사 공부를 좀 했지만 그게 사실은 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은 감동 때문이었거든요. 이후 제법 전문적인 영역까지 들어갔다 해서 모두 내 것인 양 떠들면 어떤 순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돼요.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못박고 나서는 게 낫죠.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배우는 사람일뿐이다 하고요.

    두고 보세요. 제가 무슨 문학상 심사위원 노릇을 한다거나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제겐 다른 누군가의 작품을 평가할 능력이 없어요. 뭐냐 하면, 전쟁에 나간 병사라면 전투를 잘 치르면 그뿐, 총 좀 쏠 줄 안다고 교관 노릇할 생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전투는 하되 열병식은 싫다는 거죠. 그게 그런 거예요.”

    딴 공부에 몰두하면서 이윤기의 학업 성적은 가파른 하향세를 보였다. 1학년 때는 ‘번쩍번쩍하던’ 성적표가 3학년이 돼서는 바닥 수준이었다.

    “학교 공부래봐야 결국 서울대 들어가자는 건데 그건 아니다 싶었어요. 처음에는 ‘서울대? 그거 며칠만 쪼르르 하면 되겠지’ 하는 자만심도 있었는데 나중에는 아예 관심이 없어졌지요. 문학병이 단단히 들었거든요.”

    마침 가정 형편이 더 어려워져 집에서 완전히 독립해야 할 상황이 되자, 이윤기는 야간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수석 합격 후 그 사실을 담임교사에게 고하니 “너 같은 쓰레기가 수석을 하다니, 역시 경북중은 좋은 학교”라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친구를 사이에 “일등과 꼴등을 맘대로 하는 녀석”이란 평가를 듣던 그에게 교사의 폭언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는 지금도 그 교사를 용서하지 못한다.

    “고등학교는 3개월 다니다가 그만뒀어요. 학교를 제가 퇴학시켜버린 거죠. 대신 세상이라는 학교로 곧바로 쳐들어갔습니다. 좋았어요. 읽고 싶은 책, 듣고 싶은 음악을 24시간 끼고 살아도 문제될 것이 없었어요. 지금도 전 그놈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뛰어내린 걸 내 생애 가장 잘한 선택이라 자부합니다.”

    학교를 뛰쳐나온 그를 맞이한 건 모래바람 이는 광야였다. ‘세례 요한’에게 세상은 어떠한 관용도, 이해도 베풀지 않았다. 열여덟 살, 채 영글지 않은 소년은 맨 몸으로 그 칼바람과 직면했다. 진검승부요, 다만 정면돌파가 있을 뿐이었다.

    “헤밍웨이, 오 헨리, 윌리엄 포크너를 영어로 읽고,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끼,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일어로 읽었어요. 특히 일본작가들의 글에 감명 받아 유미주의, 탐미주의에 깊이 빠져들었죠. 그 병 고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어요.”

    영어 공부는 초등학교 6학년 졸업 무렵부터 시작했다. 독학생들을 위한 ‘중앙강의록’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일본어를 습득한 건 중학교 2학년 시절. 한자 지식이 풍부해 남들보다 빨리 익힐 수 있었다. 독일어도 공부해 원서 몇 권을 독파했다.

    “지금도 처음 영어를 공부하던 때의 희열을 기억해요. 책을 드는 순간 거기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있었지요. 우리가 ‘사과’라 부르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애플’로 통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어요. 영어와 일어를 안 다음부터는 눈에 띄는 사물의 영어이름, 일본이름을 꼭 알고 넘어가야 속이 시원했지요. 그러면서 각각의 언어에는 나름의 뿌리와 원칙이 있음을 알게 됐어요. 단어를 분해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그때 처음 했어요. 어원과 어근을 알고 나니 수많은 새 단어를 사전 없이 이해할 수 있었죠. 한자도 같은 방식으로 익혔어요.

    제가 싫어하는 단어들이 어떤 건 줄 아세요? 우리집 뒤뜰에 보면 후박나무 가 있어요. 전 그런 이름이 싫어요. 그 이름과 나무 사이에는 어떠한 내적·외적 연관성도 없어요. 이름과 나무를 동시에 기억하려면 무조건 외우는 수밖에 없잖아요.”

    눈물 많은 ‘주먹’

    열여덟 스물 시절, 그는 시인 겸 농부가 되거나,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가 되거나, 아니면 아예 군인이 되자는 생각을 했다. 그가 군인을 생각한 건 푸슈킨의 소설 ‘대위의 딸’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그도 남의 판단에 따라 죽음 앞에 몸을 던지는 불꽃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몇 년 후 실제로 그는 ‘남의 판단에 따라 죽음 앞에 허무주의적으로 몸을 던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베트남에서였다.

    “그 무렵 저는 제법 튼실한 몸을 갖게 됐어요. 중학교 때는 자그마했는데 열여덟 살을 넘기면서 한 해 10㎝씩 크더라고요. 아버지를 닮아선지 발도 무척 커, 미제 워커 외에는 맞지 않았죠. 책읽기만큼 스포츠도 좋아했는데, 동네 양아치들 사이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놈’으로 소문이 나기도 했어요. 주먹이 세서가 아니라, 한번 붙으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근성 때문이었죠. ‘종잡을 수 없는 놈’이란 말도 많이 들었는데, 주먹질에 이골이 난 듯한 녀석이 음악 듣고 영화 보다가는 질질 짜기도 잘 했거든요.”

    먹고살기 위해 제분소며 공장이며 이런저런 일거리를 전전했다. 제도를 떠났지만 귀속감에 대한 갈망은 떠나지 않아, 교복 비슷한 옷을 챙겨 입고는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

    “시험 준비가 의외로 힘들었어요. 흥미가 당기지 않는 과목이 많아서요. 1966년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스물한 살 때 서울로 올라갔죠. 신학대학에 입학했거든요. 하지만 학교 생활은 고등학교 때처럼 3개월 만에 막을 내렸어요. 신학대학만 가면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를 죽도록 배우며 정말 미친 듯이 공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군요. 학교 그만두니 금세 영장 나오고, 그래서 어머니와 대구 근교 가창에서 뽕밭 3000평을 일구다 군대에 갔죠. 스물세 살 때였어요.”

    초년 고생은 사서도 한다던가.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타고난 고생에 사서 한 고생까지, 꽤나 사연 많은 청소년기를 보냈다. 가난했던 것에, 원하는 만큼 꿈을 펼칠 수 없던 상황에 그는 원망하고 분노하지 않았을까.

    “대구 칠성국민학교에 다닐 때였어요. 한 의사가 선생님을 통해, 자질이 있는 아이니 내가 맡아 잘 키워 보겠다는 뜻을 전해 왔어요. 전 ‘안 갑니다’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펑펑 울었어요. 만일 그때 제가 그 집 품에 들었다면 지금쯤 뭐가 돼 있을까요. 아마도 판사나 의사 같은 직업을 가진, 그래서 지금의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에요.

    그래요. 고생 많이 했지요. 삶의 간난에 휘둘리며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또한 그 때문에 세상 구경 참 많이도 했다고 생각해요. 고2 시절(전 ‘세상 학교’ 2년차 시절을 그냥 이렇게 불러요) 신문을 보다, 이화여대 강당에서 한 외국 경음악단이 연주회를 연다는 기사를 발견했어요. 불쑥 그 연주가 듣고 싶어지데요. 그래서 길을 떠났죠. 대구에서 서울까지 걸어갔어요. 꼬박 일주일이 걸리더군요.”

    아현동 길을 돌아 이대 정문을 통과하니 커다란 강당이 짜잔 하고 나타났다. 거기 들어가 지친 다리 두드릴 새도 없이 낯선 이국 악단의 유려한 연주에 몸을 맡겼다. ‘경음악도 꽤 괜찮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악단의 연주를 저만큼 깊이 들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남들 차 한번 타면 오고 갈 곳을 저는 걸어서 올라가고 걸어서 내려왔으니까요. 돌아올 땐 쉬엄쉬엄 구경도 좀 하느라 13일이 걸렸어요. 도합 20일. 그 20일 또한 저만큼 길게 산 사람은 드물 거라 생각해요.

    저는 인생의 대부분을 ‘3등칸’에서 보냈어요. 이제는 슬슬 ‘2등칸’을 타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시쳇말로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뭐 그런 거죠. 하지만 그걸 타면 절대 길게 살 수 없어요. 이젠 나이도 있고 상황도 변했고, 안 타겠다 발버둥쳐도 절로 2등칸 인생이 되겠지만, 지금도 제 정신은 3등칸을 원해요.”

    과연 3등칸은 그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무엇보다 그 3등칸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2등칸은 언감생심 꿈일 뿐이었을 것이므로.

    “세상사가 다 그래요. 선과 악을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을까요? 어느날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에 대해 묵상하다, 종교에서 말하는 선악이란 실상 중생을 묶어두는 속임수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당대의 도덕률이 선을 규정한다면, 악이란 선이 되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는 거죠. 유다라는 장치가 없었다면 예수의 글로리(부활의 기적) 또한 존재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살아생전 인색하기 그지없어 주변 사람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던 구두쇠가, 죽고 난 뒤 보니 그렇게 모은 재산으로 쉬 하기 힘든 선행을 하였다면, 그의 인생은 악일까요, 아니면 선일까요.”

    그래서 요즘 그는 얼른 봐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공작’을 꾸미고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철학과 바이올린을 전공중인 딸(22)에게 슬슬 대학 중퇴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미국에서 영화학을 공부하다 ‘카투사’에 입대한 아들은 이미 그의 꼬임에 거지반 넘어온 상태다.

    “우리 아이들은 참 순탄하게 살아왔어요. 1991년 저 공부하러 갈 때 같이 따라가 좋은 환경, 좋은 선생님 밑에서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냈지요. 지금도 각자 자기가 택한 분야에서 착실히 내공을 쌓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도리어 위태로워 보여요. 고등학교는커녕 대학 중퇴도 안 해 본 녀석들이 뭘 하나 하는 거예요. 저렇게 만사가 편안해서야 과연 향내 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자기강화 프로그램은 오직 자기 안에서만 나오는 건데, 그건 부모가 대신 해 줄 수도 없는 일인데.”

    그렇다면 지금의 아들, 딸 나이이던 시절, 그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1969년 입대해 경기도 일산 고봉산 정상에서 관측 근무를 했어요. 틈틈이 군수용품 휴지에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지겨웠죠. ‘물은 흐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베트남을 택했어요.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지 제 자신을 시험해보고도 싶었고요.”

    1971년 4월부터 14개월간 그는 이국의 정글에서 총을 쏘았다. 과연 죽음은 널려 있었다. 다섯 명이 밥을 먹다 ‘퍽’ 소리가 났는데, 정신 차려 보면 그중 세 사람이 죽어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좋은 군인이었다. 날래고 정확하고 대담무쌍했다. 당시 그의 수첩에는 ‘죽음은 아름답다’ ‘죽음은 모든 것의 완성이다’ ‘아름다움을 위해 범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류의 탐미주의적 경구들이 빼곡했다. 죽음 앞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한 부적 같은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책을 읽었다. 영내 방송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지금 당장 ‘설국(雪國)’을 구해달라”며 대구 사는 친구를 닦달했다.

    “이게 그 책이에요.”

    30년도 더 묵은 일어 문고판은 손때, 세월 때가 묻어 지저분하다. 속표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이 책은 1971년 6월10일 珠가 보내주었다. 월남의 전화 중인 푸민 성 남지나 해변에서, 소포의 끈을 풀기가 바빠 칼로 잘랐다….’

    “배낭에 턱 기대앉아 이 책을 보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놀라요. 그냥 책도 아니고 일어판이니까. 속으로 생각했죠. 일본어 공부한 보람이 있군. 이런 정도 보람이라면 앞으로 몇 십 년이라도 더 공부해 주마. 아…, 그 천박함이라니!”

    전투병을 은퇴한 뒤 3~4개월 간 영내 도서관에서 사서 노릇을 했다. 책 좋아하는 그에겐 절로 웃음 나올 일이었다. 책을 찾는 전우들이 별로 없어 근무 기간 내내 질리도록 책을 보았다. 그 즈음 그의 장서량은 700권에 육박해 있었다. 도서관에서 훔쳐낸 것이 아니었다. 동료들이 TV 사고 밥통 사는 데 들이는 돈을 그는 베트남 수도 사이공, 필리핀의 클라크 기지, 일본 오키나와의 나하 기지 등에서 일어·영어판 책을 사는 데 쏟아부었다. 그 책들은 지금도 그의 서가에 꽂혀 있다.

    이윤기는 1972년 귀국, 임진강변 오두산 관측소에서 잔여복무기간 3개월을 채운 뒤 제대했다. 그 무렵부터 그는 조금씩 마음이 불편해졌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 자랑스러운 마음 같은 것도 있었어요. 운동권 친구들이 ‘너 거기서 뭐하고 왔냐’ 따져도 ‘군인이 싸움했지 뭘 했겠냐’며 제법 당당하게 굴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갈수록 부끄럽고 죄스러워졌어요.”

    이에 대해서는 이윤기에 대한 평론가 권명아의 글 한 토막을 인용하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하겠다.

    ‘베트남전 체험은 이윤기에게 제국주의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전쟁의 대리 수행자라는 전쟁의 성격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한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들’, 타자에 대한 배타적 태도에서 비롯되는 자기중심적 세계 이해, 자기중심적 타자 이해에 대한 반성적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975년 현충일, 그는 참전 중 받았던 여러 개의 훈장을 ‘처리’해 버리기에 이른다. 핏자국 남은 군복에 줄줄이 달아 국립묘지 전우의 묘지 앞에 놓아두고 온 것이다.

    한편, 1972년 제대 후 1년간 그는 공사판을 전전했다.

    “방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몸에 쌓인 모든 걸 소진해버릴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도목수인 재종형을 따라나섰지요. 서기와 일종의 ‘해결사’ 노릇을 겸했어요. 틈틈이 직접 손쓰는 일도 했어요. 제법 유능한 일꾼이었어요.”

    1974년 겨울, 공사판 생활을 청산하고 일종의 해적판인 ‘니체 전집’ 윤문 작업에 들어갔다. ‘권력에의 의지’ ‘선악의 피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원고지 장당 10원을 받았다. 한 달이 지나니 17원으로 올려주어 살만하다 했는데, 2년 뒤 자기 이름으로 번역을 하고 보니 장당 공장가는 200원이었다.

    1975년, 청소년 잡지 ‘학원’의 기자가 됐다. 화보 담당으로 유명 가수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미국 잡지, 일본 잡지 기사 번역도 전담하다시피 했다.

    “아주 재미있었어요. 공사판 이씨가 이기자가 됐으니까요. 특히나 제가 뭐라 우스운 말을 하면 대학 나온 여자들도 까르르 넘어가는 것이 기특했어요.”

    ‘학원’에서 이윤기는 평생의 반려를 만났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편집기자로 일하던 그이는 청초한 미모에 재기발랄함까지 갖춘 이른바 ‘일등 신부감’이었다.

    “제가 요즘도 아내한테 종종 하는 말이 있어요. ‘당신처럼 태어날 때부터 양변기 타고 온 사람은 몰라’. 그만큼 집이 부유했다는 뜻이죠. 우리는 3년 동안 결혼생활 이상의 행복한 연애를 했어요. 서로의 조건이 너무 차이 나니 오히려 더 낭만적이고 절절했어요.”

    1976년 12월, 단편 ‘하얀 헬리콥터’가 1977년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빠른 등단에 좋아라 희희낙락할만도 하건만 그는 오히려 어, 뜨거라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는 당시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어떻게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운이 좋아서 단 한 차례 케이오 펀치를 날렸던 권투선수가, 챔피언 결정 토너먼트에 참가하라는 제의를 받은 판인데? 튀자… 나는, 연습을 핑계 삼아, 문단에 들어가기도 전에 입산했다.’

    여기서 입산이란 본격적인 번역작가의 길로 들어섰음을 뜻한다. 사실 이즈음 그는 비밀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일종의 ‘인생 50개년 계획’ 같은 거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게 서른 살 때였어요. 그때 내 결심이, 소설은 쉰 살부터 쓰겠다, 우리 문학은 퍼내야 할 연못이 연못답지 않다, 나는 그걸 더 넓혀서 오래 퍼 쓰겠다는 거였어요. 한편으로는 오기도 있었어요. 사람 나이 서른이면 이미 어느 정도 사회적 서열이 매겨지는 때예요. 법대, 상대 간 친구들과 일직선상에서 비교되는 일이 저는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이제 시작이다. 나는 죽기 전 100권의 책을 쓰리라. 본격적으로 글을 쓸 때까지는 번역을 생업으로 삼으리라. 보들레르는 불어로, 니체는 독일어로, 오비디우스는 라틴어로, 그리스 신화는 희랍어로 읽으리라. 그때 그 거창했던 계획표를 생각하면 아직 저는 할 일이 하고 또 많이 남은 사람이지요.”

    1978년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 서른 둘, 아내는 스물다섯이었다. ‘완벽한 아내’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었을까, 그는 무리를 해 홍은동 22평 아파트를 구입했다.

    “집 값이 700만원이었어요. 그중 400만원을 이자율 3할짜리 사채로 충당했죠. 결혼식 앞두고 종합병원에 찾아갔어요. 건강검진을 한 다음 의사에게 물었지요. ‘하루 15시간씩 10년 동안 일하려는 데 몸이 견뎌나겠습니까?’ 그렇게 의사의 ‘재가’까지 받은 다음 미친 듯 일에 매달렸어요.”

    번역으로 무슨 금자탑을 세우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생업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그 일이 못 견디게 즐거웠다.

    “처음 2~3년은 완전히 신들린 듯했죠. 한 달에 한 권 꼴로 책이 나왔어요. 카사노바가 여자 낚아 자는 재미가 그런 거였을까 몰라. 잘한다 잘한다 하니 더 신나고, 공부할 것이 자꾸 생기니 기분도 좋고.”

    번역 작가로서 그의 성가를 한껏 높인 작품은 1985년 출간된 움베르토 에코 소설 ‘장미의 이름’이었다. 그는 이 책 번역을 생애 가장 치열했던 전쟁으로 기억한다.

    “탁 보니 저 혼자서는 도저히 못 하겠어요. 언어학자 5명은 필요하겠습디다. 그런데 또 그건 안될 말이에요. 예술은 분업이 아니니까요. 자칫하면 향기가 다 죽어버리거든요.

    고민 끝에 결심했죠. 좋다, 향기에서는 내가 살고 언어학적 정치(精緻)함에서는 박살이 나자! 그래서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까지 다 제 손으로 붙들고 매달렸어요. 몇날 며칠 한 문장을 못 만들어내는 때도 있었어요. 그건 언어도, 움베르토 에코도 아닌 저 자신과의 싸움이었어요.”

    1992년, 이윤기는 ‘장미의 이름’을 다시 번역했다. 5~6년이 지나 다시 보니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오류가 여럿 눈에 띄었다. 마침 미국 연수중이던 때라 각국에서 온 학자들과 그 주제로 토론하며 좀더 정교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장미의 이름’을 고비로 그의 경제사정은 안정궤도에 올라섰다. 1990년쯤에는 마음만 먹으면 한 달에 2000만원도 벌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자꾸 회의가 들었다. 노가다판과 뭐 다를 게 있나 싶었다. 아내를 설득해 미국으로 갔다. 미시간주립대 국제대학원 초빙연구원 자격이었다.

    첫 목적은 종교학 박사학위였다. 그런데 잘 살펴보니 박사학위란 것은 ‘현미경 수술’이었다. 유장한 학문의 강물, 그중 물방울 하나를 콕 찍어 7년, 8년을 물고 늘어져야 하는 고심참담한 일. 깨끗이 포기했다. 대신 많은 책을 읽기로 했다. 괜찮은 소설도 쓰고 싶었다. ‘이제 내 목소리를 내겠다, 나보다 못 쓰는 인간의 책은 더 이상 번역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리고 1994년, 첫 장편소설 ‘하늘의 문’(전 3권)을 상재했다.

    1995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나비넥타이’는 번역가가 아닌 소설가 이윤기의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켰다. 1998년 ‘숨은 그림찾기1-직선과 곡선’으로 동인문학상을, 2000년 소설집 ‘두물머리’로 대산문학상을 받으면서 이윤기는 비로소 20여 년 전, 시행세칙까지 만들어 자신에게 선포한 ‘인생 50개년 계획’의 중간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어 실로 우연치 않은 기회에, 나머지 절반을 달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될 ‘대사건’이 터졌다.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의 출간이었다.

    “1996년 일단 귀국했다 1997년 9월, 다시 미시간대 사회과학대학 초청으로 도미했어요. 아내와 딸은 한국에, 저와 아들은 미국에 있는 상황이라 집안 일로 주부습진에 걸릴 지경이었지요. 그 때 웅진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고등학생용 참고서 전집을 만드는데 거기 부록으로 끼워 넣을 신화입문서를 좀 써달라고요. 계획한 부록이 두 가지인데 또 한 권은 이어령 선생 저작이라 했습니다. 아이고, 내가 이어령 선생이랑 게임이나 되겠나, 그냥 편한 마음으로 쓰자 싶어 응낙했지요.

    참고할 책 대부분이 한국에 있던 상황이라 정말 무지 심한 상태에서 썼어요. 신화는 ‘학원’지 시절부터 20년이 넘게 천착해 온 주제인만큼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고요. 또 하나 ‘아는 척 좀 그만 하자, 이젠 안 그래도 꽤 훌륭한 사람인 줄 알 것이다, 그 독을 빼자’는 결심을 단단히 했지요.”

    사실 그 책은 서점에 한 번 깔아보지도 못하고 사라질 운명이었다. 시작 자체가 참고서 전집 무료 부록이었으니 말이다. 설상가상 대학입시제도가 바뀌면서 전집 판매마저 중단되었다. 그때 한 눈 밝은 직원이 이윤기의 책에 주목했다. 1999년, 그 직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용을 보완해 시중판매용으로 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마침 4개월간의 유럽 취재여행을 계획해 놓은 때였다. 사력을 다해 모은 자료, 사진, 도판을 곁들어 새롭게 편집했다. 바야흐로 신화 열풍의 시작이었다.

    “칼이 짧으면 한발 더 가 찔러라”

    번역가로, 소설가로, 신화연구가로 그 누구도 쉬 넘보지 못할 이름을 얻었지만, 아직도 이윤기에겐 어렵던 시절 세운 세상살이 법칙 몇 가지가 있다. ‘사회가 나한테 항복하지 않는 한, 자발적으로 나를 인정하지 않는 한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그를 대접하지 않고는 제 스스로가 불편해질 때까지 참고 또 참겠다는 다짐이다.

    “요즘은 그래요. 평소 관심 갖고 왔다갔다한 동네도 아닌데 갑자기 전화 걸어 와 ‘당신에게 이러저러한 상을 주고 싶은데 받아줄 수 있겠느냐’고 해요. 그제서야 ‘아이구, 영광입니다’ 하고 상대 무안하지 않도록 달려나가죠.

    원한이 깊거든요. 끝내 저를 배제하고 어떻게 해 보려는 수작들에 여러 번 상처 입었어요. 제가 번역한 학술서가 꽤 많아요. 근데 학자들이 논문에 책 인용을 할 때면 꼭 그 책들만 번역본이 아닌 원문을 끌어다 써요. 이윤기가 한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거죠. 박사학위도 없고 교수도 아니니까요.”

    그래서일까, 요즘 이윤기는 각종 ‘청문회성 모임’에 불려 다니느라 바쁘다. 혹자는 그의 인문학이 너무 쉬운 말로 표현되어 있음에 불만을 표한다. 그래서 더 미덥지 않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그는 말한다. “당신들은 학회를 향한 인문학을 하시오. 나는 독자를 향한 내 식의 인문학을 하겠소.” 또 어떤 이는 그를 감상적 신화 숭배자로 몬다. 그때마다 “나는 텍스트주의자다. 내 미학과 감수성을 풀어놓는 것은 소설 하나로 충분하다”고 되받아친다.

    “저처럼 타이틀 없는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인문학을 하려면 조심해야 해요. 실수하면 단번에 가는 수가 있으니까요. 그나마 제가 약간이나마 안심하는 지점이 있다면 두 가지에요. 첫째, 시간 싸움이라는 전투법이예요. 비슷한 지능이라면 저보다 한 텍스트에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할 수 있는 이는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요. 둘째, 그리스·로마 신화, 몽골 신화, 이집트 신화를 각기 따로 다루는 것은 가능하나, 저처럼 지역과 나라 구분 없이 종횡으로 달려드는 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스파르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날 아들이 말했어요. ‘아버지, 칼이 너무 짧아 찌를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답했죠, ‘얘야, 한 발 더 가까이 가서 찌르려무나.’ 그런 자신감도 없으면 어찌 살겠어요.”

    그는 자신의 에너지가 일정부분 콤플렉스에 기인한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미꾸라지를 산 채로 횟집까지 운반하려면 그 안에 메기 한 마리를 집어넣으면 된다지요. 메기로부터 달아나려는 필사의 생존본능이 미꾸라지의 수명을 한참 늘려놓는다는 겁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삶의 에너지는 콤플렉스와의 화해를 위한 부단한 노력으로부터 옵니다. 전, 사람은 어디로 올라가는지 모르고 그저 꾸물꾸물 올라갈 때 가장 높은 데까지 오를 수 있다고 한 올리버 크롬웰의 말을 믿어요. 누구도 하루 여덟 시간, 꼬박꼬박 한눈 팔지 않고 정진하는 사람을 당해낼 수 없지요.”

    그래서 이윤기는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싫어한다.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에게 무슨 실례인가 싶어서다.

    “제가 인생을 험하게 살아요. 할 일이 있으면 밥도 못 먹고 시름시름 앓아요. 대신 술을 마셔요. 저에게 술은 점쟁이들이 점칠 때 쓰는 동전이나 수정구, 아메리카 인디언 샤먼이 피우는 담배 같은 거예요. 친구들과 혹은 아내와 술 한잔 하며 세상사 서머라이즈(요점정리) 하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지요.”

    이윤기는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 쓴 글에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읽고 쓰는 인간’, 그리고 ‘살아버리는 인간’이다. 그는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일까.

    “‘살아버리는 인간’ 쪽이 훨씬 높은 경지인데, 전 그 수준이 되려면 멀었어요. 그건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임을 증명한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지요. 제 주변에도 절필하고 바람처럼 사는 친구들이 더러 있어요. 하지만 진정 허허롭게 ‘살아버리는 인간’은 아직 조르바 한 명밖에 못 봤어요. 세상과 미디어의 도전을 이길 수 없어 허허로움을 위장하는 것은 진짜 자유가 아니에요. 전 앞으로도 10년 동안은 당신 같은 기자들이 들이대는 현미경에 맞서 힘껏 싸워 볼 작정이에요. 그제야 비로소 바람처럼 사라질 자격도 생기겠죠.

    뭔가 이루고픈 욕망이 있다 해서 자신을 욕심 많은 사람이라 탓하지 마세요. 자기 증명이 끝나지 않은 자가 물러서는 건 비겁한 일이에요. ‘귀거래’는 아무나 하나요. 도연명 같은 천재나 하는 거지.”

    그렇다고 이윤기를 자기 생각만 내세우는 고집쟁이라 오해할 필요는 없다. 그는 분명 쉬 항복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날아오는 화살이 있으면 피하는 게 아니라 “다 받아주어라” 하고 가슴을 내미는 타입이다. 하지만 또한 그는 ‘르네상스인’이다. 인문학자 박홍규 교수(영남대)는 “진정한 휴머니스트는 겹눈을 가진 인간”이라 했다. 보편성과 다양성이라는 양각(兩脚)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 그리 알고 나면 요즘 이윤기가, 이문구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의 도입부를 인용해 자주 뇌까리는 이 말의 속뜻이 비로소 이해된다.

    “그러셔, 누가 말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좋다, 이거여.”

    나도 나비넥타이를 매련다

    이윤기의 중편소설 ‘나비넥타이’는 ‘남 안 매는 나비넥타이만 줄창 고집스럽게 매고 다니는 박교수 이야기, 남 안 기르는 콧수염을 기르고 다니는 그 아들 이야기’다. 박교수는 훌륭한 인격과 웬만한 실력을 갖췄음에도 언제나 매고 다니는 나비넥타이 때문에 동아리에서 따돌림당한다.

    박교수에게 나비넥타이는 남들이 뭐라 해도 끝까지 밀고 가고픈 그만의 무엇이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그런 자기만의 나비넥타이가 하나쯤 씩은 있을 것이다.

    “저한테는 진짜 나비넥타이가 두 개 있어요. 하나는 미국에서 가까이 모시던 분이 선물한 거고, 또 하나는 소설 탈고 기념으로 딸이 선물해 준 거예요. 저 올 가을부터는 그 나비넥타이를 매고 다닐 작정입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나비넥타이가 있나요. 문학상 시상식장이나 결혼식 주례 서는 자리에 그 넥타이를 매고 가서, 볼일 끝나면 고무줄 소리 탁 나도록 풀어버리는 재미를 이제는 저도 느끼며 살랍니다. 그렇게 제 나비넥타이를 세상에서 맘껏 시험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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