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인도 암살단은 왜 북한 외교관 부인을 저격했나

북한·파키스탄 핵 커넥션 내막

  • 글: 이정훈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oon@donga.com

    입력2003-01-30 15: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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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키스탄이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한 직후 저격당해 절명한 북한 여인 김신애
    • 인도가 보낸 공작원, “강태윤 암살하려다 실수로 김신애 저격했다”
    • 제2경제위 대표로 활약하다 부인 잃고 보위부에 체포된 비운의 남자 강태윤
    • 파키스탄이 핵실험에 성공하기 직전 북한에서 날아온 미사일 기술자 17명의 수상한 행적
    • 미사일 半제품 싣고 파키스탄으로 가려다 인도에 검거된 북한의 구월산호
    인도 암살단은 왜 북한 외교관 부인을 저격했나
    2002년 12월29일자 일본의 ‘마이니치(每日)신문’은 1면 톱기사로, 가스가 히로유키(春日孝地) 파키스탄 주재 특파원이 보낸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98년 6월7일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의 경제담당 참사관이자 무기 수출을 주임무로 하는 북한 ‘창왕신용무역공사’ 파키스탄 대표의 집에 복면을 쓴 일단의 그룹이 난입해 그의 부인(당시 54세)을 사살했다. 영국의 ‘선데이 텔레그래프’는 파키스탄 경찰의 첩보를 인용해, 이 부인이 북한의 무기 수출에 관한 정보를 서방 외교관에게 제공한 혐의가 있다고 보도했다(기자 주:인도와 파키스탄은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영국 언론의 취재력은 상대적으로 강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죽은 여인의 남편인 북한대사관의 참사관은 파키스탄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런데 북한은 이 시신을 넣을 관(棺)에, 부인의 시신과 함께 파키스탄에서 제공받은 고농축 우라늄을 추출해내는 가스 원심분리기 샘플과 그 설계도를 함께 넣어, 이슬라마바드-평양을 비행하는 특별기편으로 평양으로 가져간 사실이 ‘마이니치신문’의 취재 결과 밝혀졌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98년 5월말 파키스탄은 처음으로 지하 핵실험에 성공했다. 북한은 파키스탄이 핵실험에 성공한 직후 파키스탄으로부터 가스 원심분리기 설계도 도입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죽은 여인의 관에 核설계도를 담아…



    참사관 부인을 죽인 후 그 시신을 넣은 관에 가스 원심분리기 설계도와 샘플을 함께 담아 북한에 가져갔다는 것은 탐정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런데 북한 외교관 부인의 죽음과 북한의 핵개발 연관성을 보도한 것은 ‘마이니치’만이 아니었다.

    사건 발생 5개월 후인 1998년 11월6일자 ‘동아일보’는 죽은 부인의 신원을 밝히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죽은 북한 여인은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에 경제참사관으로 근무하던 강태윤의 처인 김신애다. 미국의 노틸러스연구소에 따르면 김신애는 북한과 파키스탄 사이의 미사일 거래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서방국가 정보기관에 제공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김신애는 핵무기를 개발해온 파키스탄의 칸연구소(기자 주:파키스탄 핵 개발의 아버지인 압둘 칸의 이름을 딴 연구소)에 근무하는 북한의 비밀요원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신애의 사망에 대해 ‘마이니치’와 ‘동아일보’의 보도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언론은 공통적으로 김신애의 사망이 북한의 핵 개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1998년 6월 파키스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사건은 북한의 핵개발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현재 탈북자 동지회 회장으로 있는 홍순경씨는 1999년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다 탈출해 2000년 한국으로 망명했다. 홍회장은 태국에 근무하기 전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

    북한의 외교 사정에 정통한 홍회장은 “북한은 김신애 피격 사건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지만, 우리 같은 외교관들에게는 그 진상이 알려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1983년부터 1988년 2월까지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했는데, 그때 강태윤씨도 부인 김신애씨와 함께 무역 참사로 일했다. 당시 우리 집사람이 김신애씨와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김신애씨에 관한 이야기는 똑똑히 기억한다. 강태윤씨는 1989년까지 파키스탄에서 근무했는데 잠시 북한에 들어갔다가 제2경제위원회 대표가 돼 다시 파키스탄으로 나왔다가 부인이 죽는 참변을 당했다.”

    홍회장은 강태윤이 경제참사관이 아니라 제2경제위원회 대표로 나왔다가 부인이 피살되는 변을 당했다고 거듭 강조했다. 북한의 제2경제위원회는 군수산업 경제만 다루는 부처로 조선로동당 99호실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북한산 무기를 수출하기 위해 ‘창광무역’이라는 회사를 운영한다. 홍회장은 강태윤이 파키스탄 주재 창광무역 대표도 겸직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니까 ‘마이니치’가 보도한 창왕신용무역공사는 창광무역을 영어와 파키스탄어·일어 등으로 중역(重譯)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기(誤記)이거나 창광무역의 위장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

    김신애씨가 저격당할 당시 홍회장은 태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홍회장은 “때문에 김신애씨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사건이 일어난 다음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홍회장이 알고 있는 김신애씨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마이니치’나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과는 크게 다르다. 그는 “김신애를 죽인 것은 파키스탄과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는 인도측의 저격수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김신애씨 사망 사건이 있기 전 북한미사일 전문가 17명이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이들은 북한제 미사일을 갖고 와서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이들은 시험 발사 성공 후 황급히 북한으로 돌아갔다. 인도에서 저격수를 보내 이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첩보가 있어 급히 돌아갔다고 들었다.

    북한 미사일 전문가들이 떠난 후 인도 저격수들은 강태윤을 노렸다. 강태윤-김신애씨 부부는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떠난 후 저격수들은 강태윤을 죽이기 위해 이 집 부근에서 잠복했다고 한다. 강태윤씨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자 김신애씨가 나와 문을 열어주었고 강씨가 먼저 들어간 뒤 김씨도 뒤따라 들어가다 저격수의 총탄을 맞았다고 들었다. 사건 직후 저격수들은 재빨리 도주해 검거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홍회장은 김신애씨가 북한-파키스탄 간의 미사일 거래 정보를 서방 정보기관에 전해주었을 가능성에 대해 부정했다. “김신애씨는 남편이 하는 일에 관한 정보를 빼내 단독으로 다른 나라 정보기관에 넘겨줄 정도로 담이 큰 여자가 아니다. 정보를 넘겨주려면 우선 외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김씨는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었다. 반면 강태윤씨는 1985년부터 로켓(미사일) 업무에 깊이 관여해 왔다. 따라서 인도의 저격수가 노린 것은 강씨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1998년 6월 부인을 잃고 파키스탄에서 사라진 강태윤씨는 또 다른 불행을 겪게 됐다고 한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1998년 사건 이후 강태윤은 북한으로 소환되었다가 1999년 1월 비리 혐의로 보위부에 검거되었다. 보위부는 외화벌이에 종사한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해, 작은 혐의점이라도 발견되면 무조건 사람을 잡아들였다. 이 와중에 강태윤도 체포된 것이다. 부인을 잃어가면서까지 북한을 위해 최일선에서 뛰었던 강태윤이 외화벌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소한 부정으로 체포된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인도-파키스탄의 核경쟁

    김신애씨 절명 사건을 중심으로 북한-파키스탄 커넥션을 추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김신애씨 저격 사건이 있기 직전 인도와 파키스탄이 연쇄적으로 지하 핵실험을 했다는 사실이다.

    김신애씨 저격 사건이 일어나기 27일 전인 1998년 5월11일 오후 3시45분, 인도는 라자스탄주 사막지대에 있는 포크란 핵실험장에서 지하 핵실험을 실시했다. 그 직후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인도 총리는 언론에 핵실험 사실을 공표하고 “인도는 핵무기 제조능력을 갖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날 인도는 자체 개발한 사거리 50km의 단거리 미사일인 ‘트리슐’의 시험발사도 성공시켰다.

    인도는 1974년 비밀리에 핵실험을 벌인 바 있다. 그러나 그때 인도 정부는 핵실험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핵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얼버무렸다. 그런데 1998년 5월에는 직접 총리가 나서서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했다. 왜 인도는 이렇게 행동한 것일까. 그 해답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에서 찾을 수 있다.

    인도 암살단은 왜 북한 외교관 부인을 저격했나

    파키스탄에서 사살당한 북한 외교관 부인의 시신을 넣은 관에, 원심분리기 설계도를 넣어 북한으로 가져갔다고 보도한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기사

    과거 인도와 파키스탄은 한 나라로서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그러다가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의 갈등으로 인해 인도 연방과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나뉘었다. 이때 파키스탄은 인도 좌우로 분리된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인도 왼쪽에 있는 파키스탄은 서(西)파키스탄으로, 인도 오른쪽의 파키스탄은 동(東)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으로 불렸다.

    그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는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대거 이동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상대 종교에 대한 대대적 학살이 일어나 20만∼5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인·파 분쟁의 시초다. 그후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지방의 영유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는데, UN의 개입으로 카슈미르 지역의 3분의 2는 인도가, 3분의 1은 파키스탄이 차지한 가운데 정전이 이루어졌다.

    1971년 3월 동파키스탄이 분리 독립을 선언하자 서파키스탄이 이를 탄압하였다. 그러자 인도는 동파키스탄으로 군대를 투입해 분리 독립주의자를 도왔고, 그 결과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라는 국명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의 독립으로 인도-파키스탄 관계는 극도로 악화돼, 그해 10월 양국은 제3차 인·파전쟁에 돌입했다. 이 전쟁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74년 인도는 비밀리에 핵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인도의 핵실험이 있은 직후 국력의 열세를 절감한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는 “온 국민이 풀뿌리를 캐먹는 한이 있어도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부토 총리는 1977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후 처형되었는데, 1988년에는 그의 딸인 베나지르 부토가 총리가 돼 1991년까지 파키스탄을 이끌었다. 부토 부녀(父女)는 물론이고, 부토를 처형한 하크 정권도 핵개발만은 일관되게 추진했다.

    인도는 오래전부터 원자력 발전소를 갖고 있었다(현재는 14기 보유). 또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사용후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재처리공장과 고농축우라늄을 만드는 공장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단 한 기의 원전도 보유하지 못했다. 때문에 압둘 칸 박사를 중심으로 한 파키스탄 기술자들은 원심분리기를 이용해 우라늄을 농축하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야 했기에 오랜 세월이 흐른 1998년에서야 완성을 앞두게 된 것이다.

    먹히지 않는 미국의 압력

    파키스탄의 핵개발이 분명해지자 인도는 자국민에게는 자부심을 심어주고 파키스탄에게는 경고를 하기 위해 먼저 공개적으로 핵실험을 행한 것이었다. 이때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강행할 것을 알고 두 나라에 대해 핵실험 중지를 요청했다. 미국의 압력은 인도가 기습적으로 핵실험을 한 후 좀더 강해졌다. 후발국인 파키스탄은 더욱 강해진 미국의 압력을 고스란히 받게 되었지만, 미국의 압력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고 18일 후인 1998년 5월29일 아프가니스탄 국경 부근인 발루치스탄주 라스코 산악지대에서 핵실험을 강행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핵실험 7시간 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30분 동안이나 핵실험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이 통화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의회의 반대 때문에 파키스탄에 인도하지 못한 F-16 전투기 28대를 즉각 넘겨주겠다는 등 여러가지 당근을 제시했다.

    그러나 샤리프 총리는 “파키스탄이 인도가 한 것(핵실험)을 따르지 않게 하려면, 국제사회는 인도를 강력히 처벌했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인도에 대해서는 꼬리를 내리지 않았느냐. 나는 정말 (핵실험)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국민은 (핵실험을 하라고) 거리에서 시위를 하고 있고 언론과 야당도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이번 일은 이미 내 손에서 떠났다”며 거절했다(당시 ‘뉴욕타임스’ 보도 요약). 파키스탄 언론은 산악지대에서 행한 핵실험으로 산악지대 전체가 우르릉거리는 장면을 찍어 방영했다.

    김신애씨 저격 사건은 파키스탄이 핵실험에 성공한 때부터 9일째 되는 날 발생했다. 이 아흐레 사이에 북한에서 17명의 미사일 기술자들이 파키스탄으로 날아와 미사일 시험발사를 성공시키고 재빨리 북한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정황으로 본다면 홍순경 회장의 분석처럼, 인도의 저격수들이 북한의 미사일 기술자를 노렸다가 여의치 않자 강태윤으로 대상을 바꿨는데, 실수로 그의 부인을 절명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감행하자 미국과 중국, 그리고 UN이 경악했다. 특히 미국은 새로 핵보유국 대열에 들어선 파키스탄을 아주 혐오했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은 NPT(핵확산금지조약)는 물론이고 CTBT(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의 가입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두 나라에 대해 국제조약을 어겼다는 명분을 씌울 수도 없어, 경제봉쇄만 가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봉쇄는 국제정치 구조의 반전으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중국이 러시아를 라이벌로 생각한다면, 세계 2위의 인구 대국인 인도는 중국을 잠재적인 경쟁국가로 생각한다. 특히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인 1950년대 인도에서는 자국을 대국으로 생각하는 대국주의(大國主義)가 유행했다. 이러한 인도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나라가 중국이다. 1959년 8월 중국과 인도는 영토문제로 전쟁을 치렀는데, 인도가 패배했다. 그리고 1962년 10월 또다시 영토문제로 중·인전쟁을 벌였으나, 역시 인도가 열세인 가운데 끝을 맺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64년 10월 중국은 핵실험을 성공시켜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인도는 이에 자극을 받아 핵개발에 나서 10년 후인 1974년 핵실험에 성공했다. 인도의 핵개발에는 중국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소련의 지원이 있었다. 인도의 성공 24년 후 인도와 경쟁하는 파키스탄도 핵실험에 성공했다.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한 후 미국은 인도를 봉쇄했으나 유야무야 물러서고 말았다. 중국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인도를 원용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암묵적으로 핵보유를 인정받은 인도는, 지난 1월5일 인도군에 전략핵사령부(NCA)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핵보유를 공식화한 것이다.

    파키스탄은 2001년 9·11 테러로 인해 핵보유를 인정받는 결정적인 계기를 잡았다. 주시하다시피 9·11테러 직후 미국에 의해 테러세력으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지원을 받았다. 미국이 탈레반과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벌이려면 인접국인 파키스탄을 기지로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이러한 목적에 따라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봉쇄를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이 미국에 진 빚까지도 탕감해주었다. 파키스탄도 미국으로부터 핵보유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미국의 봉쇄를 받으면서도 핵개발에 성공했다. 두 나라의 성공이 북한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CTBT에 가입하지 않았고, 올해 1월10일에는 NTP를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풀뿌리를 캐먹는 ‘고난의 행군’을 한 끝에 핵개발에 성공하면 언젠가 국제정치 상황이 반전돼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아울러 체제보장까지 받을 수 있으리라는 매력을, 북한이 모를리 없을 것이다.

    인도 세관, 북 화물선서 미사일 적발

    김신애씨의 죽음을 몰고 왔던 북한-파키스탄 커넥션은 그후로도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김신애씨 저격 사건이 있던 해 파키스탄은 북한에 식량 3만t을 무상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김신애씨 저격 사건 3개월 후쯤인 1998년 9월22일, 제1차 지원분 1만4000여t의 식량을 실은 배가 북한 남포항에 입항했다. 이날 북한 중앙방송은 “파키스탄은 1996년에는 5천t의 쌀과 16만달러분의 원조물자를 지원했고, 1997년에 2천t의 쌀을 지원한 바 있다”고 보도했다.

    2002년 12월9일 아라비아해에서 작전중이던 스페인 해군의 나바라함 등은 정선명령을 거부하고 도주하던 북한 화물선 ‘서산호’(이 배는 영어 명칭을 Sosan으로 적었기 때문에 ‘소산호’로 잘못 보도됐다)에 경고사격을 가해 세운 후 검색했다. 이 검색에서 스페인 해군은 서산호 측이 시멘트를 실었다고 주장한 화물칸에서 예멘으로 가는 스커드 미사일 반(半)제품을 발견했다(반제품은 조립만 하면 완제품이 된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김신애씨 사건 1년 후쯤인 1999년 6월30일 인도에서 일어났다.

    이날 북한 화물선인 ‘구월산호’(선장 현태민)는 태국 방콕항에서 실은 설탕 1만3000t을 하역하기 위해 인도 서부의 칸들라항에 정박해 있었다. 설탕 하역이 끝나면 구월산호는 지중해 시칠리아 섬 남쪽에 있는 몰타로 가, 148개 상자에 담긴 정수여과기를 하역할 예정이라고 밝혔었다. 그런데 이날 인도 세관은 구월산호에 실린 148개의 상자에 정수여과기가 아니라 미사일 부품이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배를 억류하였다.

    수사에 나선 인도 경찰도 148개의 상자에서 사거리 300km의 지대지 미사일 반제품과 이 미사일 유도장비가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직후 인도 외무부의 라민더 싱 자살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열고 “구월산호에 실린 미사일 부품의 최종 목적지는 파키스탄인 것으로 판단한다. 이유는 148개 상자의 화주로 표시된 몰타의 회사는 유령회사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7월17일 구월산호 선장 현태민과 1등 항해사를 구속했다.

    인도 암살단은 왜 북한 외교관 부인을 저격했나

    2002년 12월9일 북한 화물선 서산호가 스커드미사일 반줜半)제품을 싣고 가다 스페인 해군에게 적발되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1999년 6월30일 인도에서 일어나 바 있다. 아래 사진은 스페인 해군이

    구월산호 사건이 있고 1년 반이 지난 2001년 1월22일 파키스탄 카슈미르주 리파지역에서는, 북한의 지원으로 건설된 수력발전소 준공식이 열렸다. 또 그해 5월29일에는 북한 공군사령관 오금철 상장을 비롯한 다섯 명의 북한군 대표들이 파키스탄을 방문해, 파키스탄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을 만났다. 다음날 카디어 하심 파키스탄 공군 대변인은 “이번 북한 대표단의 파키스탄 방문은 양국간 방위관계 구축에 돌파구를 제시한 면이 있다”는 발표를 내놓았다.

    북한과 파키스탄이 돈독한 협력을 강화하는 동안 한국의 국가정보원은 무슨 일을 했는가. 1990년대 초반 이스라엘은 북한이 이라크에 제공한 미사일로 인해 큰 위협을 느꼈다. 그러자 모사드 요원을 서울에 보내 안기부 측과 접촉하며 북한의 미사일 수출을 중단시킬 방안을 심도있게 논의하였다.

    그렇다면 국정원도 북한-파키스탄 커넥션이 강화되는 1998년부터는 인도의 정보기관 등과 협력해 차단하는 공작을 펼쳤어야 할 것이다.

    신건(辛建) 국정원장은 2002년 10월24일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1999년 3월 북한인 세 명이 파키스탄의 칸연구소에 파견됐다는 첩보가 입수돼 미국과 함께 북한 핵개발에 관한 첩보를 추적했다. 얼마 후 북한이 가스 원심분리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초합금을 수입한다는 첩보가 있어 미국 정보기관과 함께 이를 차단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로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원폭을 개발한다는 결정적인 정보가 없어,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국정원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파키스탄 커넥션이 강화되는 1998년 이후 국정원이 주력한 것은 남북관계의 복원이었다고 한다. 한 소식통은 “1998년과 1999년 국정원은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차관회담에 전력을 기울였다. 1999년 6월 발발한 연평해전으로 남북관계가 끊어진 다음에는 더욱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데 집중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열리게 하였다. 당시 국정원에 하달된 과제는 김대중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북한-파키스탄 커넥션에 대해 철저하게 추적하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국정원의 수수방관

    파키스탄처럼 북한이, 어느날 갑자기 핵실험에 성공한다면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인도 이상으로 중국을 라이벌로 생각하는 나라가 일본(원전 52기 보유)이다.

    일본은 독일과 함께 미국으로부터 핵우산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지금까지 핵무장을 포기해온 것이다. 그런데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하면, 일본도 핵무장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까지 도달하는 노동 미사일을 가진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일본 국민은 당장 핵무장을 외치게 될 것이고 정치권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부(國富)는, 일본을 제외한 모든 아시아 국가의 국부를 더한 것보다 크다. 더구나 일본은, 핵연료 제조로 사용목적을 한정하긴 했지만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재처리 공장과 고농축 우라늄을 만드는 실험용 농축시설을 갖고 있다. 또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전용될 수 있는 H-2A로켓도 완성했다. 일본보다 훨씬 경제력이 약한 인도가 핵무기를 개발했는데, 상당한 기술력을 가진 일본이 못할 이유가 없다.

    일본이 핵무장을 하면 중국은 즉각적으로 비상체제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러시아 역시 크게 긴장할 것이다. 또 일본에게 지기 싫어하는 한국도, 일본과 북한 양쪽으로부터의 핵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장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한국은 16기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다). 6기의 원전을 갖고 있는 대만도 생존을 위해 핵무장을 할지 모른다. 동북아의 주요 국가가 핵무기를 갖게 되면 미국의 세계 지배는 물 건너가고 동북아는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초긴장 상태로 치닫게 된다.

    미국과 일본은, 북한 핵무장이 동북아의 세력 균형을 깨뜨릴 가능성 때문에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론만 되풀이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권 교체기에 국정원은 과연 어떤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는 것일까. 국정원의 침묵이 ‘무대책’을 의미하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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