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찬탁론자’ 의심받던 이승만, 세력구축 위해 돌연 반탁운동 나서

  • 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입력2003-11-27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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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용 목사는 ‘살아 있는 한국 현대사’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 남북한을 두루 체험했고, 일본 제국주의, 미군정, 건국정부, 과도정부, 군사독재, 민주체제를 온몸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었다. 파란의 역사 고비고비에서 핵심적인 인물들과 교류, 접촉하면서 우리 현대사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 그가 ‘몸으로 쓴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역사 대담’을 연재한다. 신탁통치와 친일문제 등 광복 직후 정국에서부터 조봉암 사건 등 이념갈등, 박정희 시대, 1960∼80년대의 민주화 운동, 주요 정치인들의 행적, 남북관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가 강목사의 생생한 숨소리와 함께 다뤄질 것이다. 대화 사이의 괄호 안에 있는 설명은 대담자가 붙인 것이다.<편집자>
    ‘찬탁론자’ 의심받던 이승만, 세력구축 위해 돌연 반탁운동 나서
    박태균 : 목사님께서 최근 발간하신 저서 ‘역사의 언덕에서’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처럼 현대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유익한 읽을 거리가 될 듯합니다. 그런데 현대사 연구자로서 좀 욕심이 생기더군요. 목사님께서 방대한 내용을 쓰셨지만, 몇몇 대목에서는 좀더 자세한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아마 일반 독자들도 그렇게 생각한 부분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마침 ‘신동아’에서 좋은 기회를 만들어줬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 현대사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과 인물들을 중심으로 목사님의 소중한 증언을 듣고자 합니다.

    강원용 : 좋습니다. 제가 경험한 일을 책을 통해 정리하긴 했지만 그리 체계적이진 못했어요. 더욱이 관련자료를 일일이 찾아보고 쓴 게 아니라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으며 쓴 것이라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번 기회에 현대사 전문가와 함께 다시 과거를 돌아보면서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겼으면 합니다.

    박 : 책 앞쪽에서는 이승만 박사와 신탁통치 반대운동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의 평가와는 아주 다른 해석을 하셨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박사가 반탁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셨는데요.

    강 : 광복후 이승만 박사가 귀국했을 때만 해도 저는 그분을 거의 광신도처럼 지지했어요. 그 무렵 이박사 반대파가 ‘이승만은 일제시대에 해외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사람이다’는 얘기를 많이 퍼뜨렸습니다(실제로 이승만은 1920년대에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것이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직에서 탄핵되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저는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알기에 이박사는 신탁통치에 대해 김구 선생이나 김규식 박사처럼 단호하게 반대하진 않았어요. 그는 신탁통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겁니다.

    지지세력 없는 이승만의 선택



    박 : 신탁통치가 발표된 시점에는 이박사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강 :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토론이 시작된 것은 1945년 12월29일 밤 김구 선생의 거처인 경교장에서 큰 모임을 가지면서부터였어요.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으니까. 남로당 사람들까지 다 나왔어요. 다들 아주 격해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어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어요. 송진우 선생만은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했지만. 이박사는 그날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당시 그는 신탁통치에 대해 담화를 낸 일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나서서 뭘 하자고 한 적이 없어요. 그분의 정치적 판단으로는 신탁통치를 반대할 생각이 없었던 듯합니다.

    박 : 이박사가 예컨대 비상국민회의나 남조선대표국민의원 같은 데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반탁운동을 이용한 측면이 있다는 말씀이죠?

    강 : 제가 보건대 반탁운동이 고양되던 상황에서 누구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을 읽어보거나 면밀하게 검토한 사람이 없었어요. 방송만 들은 겁니다. 그저 다들 격해 있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을 자세히 알게 되면서부터 달라진 겁니다. 남로당과 좌익에서는 3상회의를 지지하고 나섰고, 온건세력은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어요. 이들이 3상회의 결정안에 반대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에 어떻게 통일정부를 세울 것이냐를 논의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를 해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해서 하자는 것이었어요. 김규식 박사 계열이나 안재홍씨, 그리고 한국민주당까지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탁통치 반대세력이 매우 강했던 거죠.

    그런데 당시 이승만 박사에겐 지지자가 별로 없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박사가 신탁통치 반대세력을 선택한 것이죠. 이박사는 그때서야 신탁통치 반대를 들고 나왔어요. 그 전까지는 신탁통치에 대해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지 않았거든요.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힘이 된다면 언제든지 끌어 쓸 수 있는 사람이니까 반탁세력을 끌어다 썼다고 생각합니다.

    박 : 당시 지식인들이 처음 경교장에 모였을 때는 3상회의 내용을 잘 모르고 반탁을 주장하다가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한 후에는 생각을 바꿨다고 하셨는데,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쯤입니까.

    강 : 경교장 모임 이틀 후인 1945년 12월31일 서울운동장에서 반탁궐기대회를 했어요. 그때 저도 강연 등을 했는데, 그때까지는 여론이 분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듬해 1월 초에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에서 3상회의를 지지하고 나왔어요. 여기에서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이 부딪쳤는데, 그때부터 5월 사이에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세력들이 차츰 내용을 알게 되면서 운동의 강도가 약해졌습니다. 5월 초순에는 양측이 남산과 서울운동장으로 나뉘어 모였는데, 저는 아무 데도 안 갔어요.

    암살의 배후는?

    박 : 혹시 좌우익으로 나뉘어 진행된 1946년 3·1절 기념식이 아니었습니까.

    강 : 제가 기억하기엔 5월 초순입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면 그 무렵 ‘강원용이 배반해 남로당이 모이는 남산에 가서 강연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경동교회에서 조향록 목사와 얼마 안 되는 교인을 모아놓고 예배를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테러단이 왔다”고 합디다. 당시엔 테러단이 자주 몰려다녔는데, 좌익 테러단인지 우익 테러단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요. 양쪽에서 다 몰려다녔으니까. 그날 테러단이 트럭을 타고 왔다길래 제 집사람과 조목사의 부인이 살펴보러 나가면서 저더러는 도망을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교회 뒤 울타리를 넘어 신당동으로 도망갔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어느 교회 청년들이라는데,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었대요.

    조목사 부인이 나가보니 인솔자가 이북에서 넘어온 인척 오빠더래요. 그래서 “오빠 여긴 어떻게 왔소?” 하니까 “너는 왜 여기에 있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과 나하고 이 교회에서 예배드린다고 하니까-그때 저는 아직 목사가 아니었어요-그 청년이 “좌익하는 놈을 왜 끼고 다니냐”며 “그놈이 남산에 가서 공산당 강연을 했다”고 했답니다. 저는 근처에도 간 적이 없어요. 당시에 우리는 대개 양쪽에 다 동의하지 않았어요. 지지운동도, 반대운동도 안 했죠. 물론 계속해서 반대하는 과격파도 있었고, 계속해서 지지하는 좌익들도 있었지만.

    박 : 경교장 모임으로 다시 돌아가서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날 송진우 선생이 반탁이 주조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자”고 했다고 하셨는데, 그는 경교장 모임에서 귀가한 직후 암살당했습니다. 암살자는 이전에 송진우 선생의 경호원을 하다가 그만둔 사람으로 밝혀졌죠. 그런데 나중에 장택상씨가 술자리에서 미군정 인사에게 “송진우 암살사건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 “경교장에서 모인 날 싸워서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겁니다(로빈슨 저 ‘미국의 배반’ 참조). 당시 그런 소문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강 : 김구 선생과는 무관하다고 봅니다. 송진우 선생을 죽인 한현우가 법정에서 한 얘기가 있습니다. “왜 송진우 선생을 죽였냐”고 물으니 “좌익에선 여운형, 우익에선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려 해서 둘 다 죽이려고 했다”고 했어요. 둘 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먼저 여운형 선생을 죽이려고 따라다녔답니다. 그러다 종로3가 파고다공원 근처에서 여운형 선생이 걸어오는 걸 보고 죽이려 했는데, 그가 멀리서 자신을 알아보고 “아, 현우군! 오랜만일세” 하고 다가와서는 어깨를 탁탁 두드리니 차마 못 죽이겠더라는 거예요.

    한현우가 두 사람을 다 죽이고자 했다면 김구 선생이 개입됐을 리는 없습니다. 김구 선생은 1947년 장덕수 선생 암살 배후로도 의심받아서 미군정이 그를 법정에 불러내 조사하려 한 일이 있죠. 미국 사람들이 송진우 선생을 죽인 배후에 김구 선생이 있다고 봤다면 거기에는 정치적인 음모가 있을 겁니다. 미군정은 김구 선생을 싫어했으니까. 그를 테러리스트로 봤거든요(송진우, 장덕수의 암살과 관련해서는 박태균 저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도진순저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참조).

    송진우의 혜안(慧眼)

    박 : 지금의 시각으로 모스크바 3상협정을 돌아본다면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강 : 저는 송진우 선생이 당시 정치가로서는 가장 머리를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밤 그는 “3상회의 결의문도 읽지 않고 방송만 듣고 떠들어선 안 된다”며 “길어야 5년 이내에 끝나는 신탁통치를 하고 결국엔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의논해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운다고 하는데, 이대로라면 우리가 5년을 왜 못 견딘다는 말이냐”고 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소련이 끼여들지 않고 우리끼리 정부를 세우라고 하면 과연 우리가 5년 안에 통일정부를 세울 자신이 있느냐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는데, 그때만 해도 저는 ‘저 사람이 무슨 저 따위 소리를 하고 있냐’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역시 송진우 선생 말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때 우리가 3상회의 결과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쉽게 통일정부가 섰으리라곤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3상회의 자체를 결사반대한 것은 잘못이었어요. 미소공동위원회에 들어가 당당히 우리 입장을 내세우다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몰라도 미리부터 반대한 건 옳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운동’깨나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누군가가 좌익이냐 우익이냐, 정통이냐 비정통이냐를 평가하는 데 있어 신탁통치에 반대했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아요. 이건 옳지 못해요. 물론 제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 모임에 적극 참여하며 연설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신중하지 못한 판단이었습니다.

    박 : 이승만 박사가 반탁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셨는데, 이박사가 종교를 이용했다고 볼 여지는 없습니까. 시간적으로 조금 뒤의 일이지만, 장면 박사도 그렇게 이용당한 측면이 있지 않나요.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사로서 말입니다.

    강 : 장면 박사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저와 기독교 모임에서 종종 만났어요. 그런데 제가 평가하건대 그분은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집안이 독실한 가톨릭인데, 이박사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끌어들이려 했어요. 개신교에서는 이윤영 목사를 끌어넣었어요. 이윤영 목사는 1948년 첫 국회가 열릴 때 개회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 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당시 가톨릭 지도자들이 중간파와 백범을 지지하니까 장면씨를 끌어간 겁니다. 이박사는 장면 박사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죠. 당시 국회는 제헌국회였습니다. 제헌국회 의장은 이박사 본인 아닙니까. 그런데 이박사가 사회를 보다 말고 단하로 내려와서는 장면 박사 곁에 가서 귀에 대고 무슨 얘긴가를 속삭이는 척하는 거예요. 장박사를 키우기 위해 ‘나와 이렇게 하는 사이다’는 걸 보여준 거죠.

    하지만 한마디로 장면 박사는 기본적으로 이승만, 조병옥 같은 사람들과 뜻을 같이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분을 해방 후의 여느 정치가들과는 다르게 봅니다. 대단히 선량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마침내 이박사, 자유당과 갈라지게 됐죠.

    친일에도 級이 있다

    박 : 장덕수 선생에 대해 잠깐 언급하셨기에 화제를 좀 바꿔볼까 싶은데요. 장덕수 선생은 친일 경력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친일파 처리를 놓고서도 많은 비난을 샀습니다. 목사님 저서에는 ‘푸른하늘 은하수’를 쓴 동요작가 윤극영 선생의 친일행각에 대한 얘기도 있더군요. 그런가 하면 김활란 박사에 대해서도 친일논쟁이 끊이지 않는데, 이런 분들의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강 : 저는 일제 때 해외에 나가지 않고 이 나라에서 산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상황을 경험했어요. 저 자신 일본 경찰에 잡혀가 있을 때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강목사는 1944년 겨울 일경에 체포되어 해방 직전까지 옥고를 치렀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살려면 이들이 강요하는 걸 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다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며 다시 이를 악물곤 했습니다. 결국은 죽는 길밖에 없다 싶어서 일주일간 단식하다 병보석으로 나왔죠. 그런 제가 보기에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버텨낸 분들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적극적이지 않게, 하는 수 없이 소극적으로 친일한 이들은 친일파로 매도하지 않았으면 해요.

    친일한 사람들을 세 부류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끝내 친일하지 않은, 정말 위대한 이들입니다. 안재홍 선생은 감옥에 아홉 번인가 드나들며 고초를 겪었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끝내 달관했어요. 여운형 선생도 끝까지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국내에 살면서 그렇게 한 사람들은 그저 위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두 번째는 살기 위해서, 혹은 가령 김활란 박사처럼 이화대학을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친일을 한 유형이죠. 이렇게 한 사람들을 지나친 흑백논리로 친일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칭찬을 할 수는 없지만, 개인이든 집단이든 한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것은 다른 시각으로 봐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능동적으로 친일을 한 부류입니다. 예를 들어 윤극영만 해도 그래요. 제가 간도 용정에 있을 때 그가 소위 ‘협화회’를 한 겁니다. 제가 보기엔 그걸 안 하면 잡혀갈 입장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본인이 능동적으로 한 거예요. 제게도 협조해달라고 하면서 안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협박했거든요.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제에 비행기를 바친 박흥식(화신 사장)도 이러한 부류라고 할 수 있죠. 노덕술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일제시대 총독부 아래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넣던 책임자였죠.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의 기밀을 들춰내고 잡아가고 죽인 일본의 앞잡이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용서하면 안 되죠. 그런데 노덕술은 미군정하에서 다시 정보과장을 했거든요.

    하지만 이들과 김활란 같은 사람들을 같게 볼 생각은 없습니다.

    박 : 그렇긴 합니다만, 예컨대 소극적으로 친일을 했더라도 그런 행위에 대해서 본인의 소명이나 반성이 있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강 : 그랬으면 좋았겠죠. 그 사람들을 몰아붙이고 싶진 않지만, 국민 앞에서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분명히 밝혔어야 해요. 제 친구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들추고 얘기한다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잘못은 청산되지 않고 남게 된다”고. 제가 늘 공감하는 말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반드시 청산을 해야 합니다. 안 했다고 우기면 안 되죠.

    박 : 그랬다면 지금 와서 친일파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흑백논리로 평가하는 상황은 빚어지지 않았겠죠?

    강 : 그랬겠죠. 김활란 박사도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정당화할 수는 없죠. 이 문제는 모두 덮어버린다고 해서 편한 게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히틀러 시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 히틀러와의 공범자라는 걸 알아야 된다”고 한 야스퍼스의 말은 옳아요. 살아남기 위해 공범행위를 어느 정도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그러니 이걸 역사적으로 청산해야지, 계속 끌고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걸 청산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탄압받던 나라 중에 해방되고 나서 그렇게 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못했습니다.

    서로를 이용한 이승만과 한민당

    박 : 그것이 제대로 안 된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강 : 미군정이 시작됐을 때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왔어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도, 첫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도 한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한국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그냥 들어온 겁니다. 들어와보니까 이북은 공산당이 차지하고, 이남에도 사방에 공산당 벽보가 붙어 있으니 어떻게 공산당을 막을 것인가에만 급급했어요. 그런데 공산당 조직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들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 밑에서 그 일 하던 친일파들 아닙니까. 그러니 공산당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우선 이들을 활용해야겠다고 판단한 거죠.

    미군정을 그렇게 만들고 또 그들과 함께 행동한 게 한국민주당입니다. 공산당에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미군정과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써먹은 겁니다. 이승만 박사가 귀국해서 살펴보니 한국민주당도 한국독립당도 자신을 이용하려는 세력이지, 자신을 정말 믿는 세력은 아닌 거예요. 그래도 그 중에서 자기가 써먹을 수 있는 정치세력이 한민당이라고 판단했기에 한민당을 잡은 겁니다. 한민당도 이박사를 좋아한 게 아니에요. 좋아한 건 아닌데, 김구, 여운형 등과 손잡을 수는 없으니 이박사를 등에 업은 거라고 생각해요.

    한민당과 이박사는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 것인데, 이들이 가장 잘못한 게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한 일입니다. 김상돈씨 등의 주장으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까지 만들었지만, 자동차 사고를 빌미로 일을 방해하기도 했잖아요(김상돈 의원은 당시 반민특위 부위원장이었는데, 1949년 4월17일 지프를 직접 운전하다 어린이를 치는 교통사고를 냈다. 이승만은 이례적으로 이 사건과 관련해 김의원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래서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죠.

    친공으로 처형된 반공경찰

    박 : 친일 경찰 논쟁도 뜨거웠습니다. 시민과 경찰이 유혈 충돌한 1946년 대구 10·1사건 이후 경무부에서 경무부장 조병옥씨와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씨가 친일파 경찰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죠. 당시 목사님께선 남조선 과도정부의 의뢰로 대구에 조사를 다녀오시기도 했는데, 목사님 책에서도 언급됐고 저도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인물인 최능진씨에 대해 말씀을 좀 해주시겠습니까(대구사건의 원인을 놓고 친일 경찰 문제가 제기됐을 때 최능진은 “친일 경찰을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병옥은 “그들은 대부분 직업을 위해 일했던 ‘Pro-Job’이지 친일을 한 ‘Pro-Jap’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강 : 미군정하 경찰의 수뇌로는 조병옥, 장택상, 최능진 세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색깔이 다 달랐어요. 조병옥과 장택상은 그리 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한민당 라인이었어요. 최능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반공임에는 틀림없지만 정치적으로는 한민당 라인이 아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최능진은 수사국장으로 일할 때 조병옥, 장택상과는 일하는 방식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죠. 저는 개인적으로 어려울 때 그분의 도움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찬탁론자’ 의심받던 이승만, 세력구축 위해 돌연 반탁운동 나서

    1948년 반민특위가 구성된 후 법정으로 끌려온 친일파들.

    박 : 어떤 도움을 받으셨습니까.

    강 : 그때 제가 미군정측에 “이북에서 넘어와 학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으니 건물을 하나 마련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미군정으로부터 서울 회현동에 있는 큰 기숙사를 얻게 됐어요. 거기에 고학생들을 머물게 했는데, 얼마 후 이모라는 사람이 미군정 요원을 등에 업고 그곳을 빼앗아버리는 바람에 쫓겨나게 됐어요. 그래서 최능진씨에게 그 얘기를 전했는데, 그 양반이 학생들 안 쫓겨나게 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좋아했어요.

    최능진씨에 대해서는 현대사 연구 하시는 분들이 관심을 기울여주기 바랍니다. 그분은 1952년 한국전쟁 당시 이적활동 혐의로 체포돼 처형됐는데, 왜 사형을 당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한 가지 짚이는 게 있긴 해요. 최능진씨는 1948년 5·10선거 때 이박사가 출마한 서울 동대문구에서 입후보했습니다. 그는 이박사를 꺾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단일 후보가 출마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이박사에 맞서 출마했던 겁니다.

    박 :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강 : 그렇지는 않았어요. 저는 최능진씨의 말을 믿습니다. 그분은 이박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최능진은 일제 때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고, 그로 인해 옥고를 치렀다. 수양동우회는 당시 이승만과 갈등관계였던 안창호 계열의 기독교인들이 만든 단체다). 박교수는 그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박 : 제가 알기로 최능진씨는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반전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9·28 수복 이후 인민군에게 협조한 혐의를 받게 됐고, 결국 처형됐습니다.

    강 : 그것은 조작이라고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는 수많은 사람이 조작으로 죽어갔습니다. 제가 아는 최능진씨는 사상적으로 진짜 우익입니다. 그건 틀림없어요. 우익이지만 이승만 라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병옥이나 한민당 계열도 아니었죠. 잘은 몰라도 안창호 라인이 아니었나 해요.

    여운형, 이승만 모욕받고 퇴장

    박 : 미군정 시기에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인물은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이던 버치 중위입니다. 미군정 관련기록들을 보면 버치 중위가 당시 정치공작의 핵심에 있었던 것 같아요. 좌우합작위원회 1차 모임이 열린 곳도 버치 중위의 집이었습니다. 여운형 선생이 조선인민당에서 나와 사민당을 만들 때도 그가 관련됐고, 남북협상 당시 김구·김규식 선생에게 북한에 가지 못하도록 종용했던 사람도 그였습니다. 버치 중위를 직접 만나거나 그에 관한 얘기를 들으신 게 있습니까.

    강 : 버치 중위와 사적으로는 몰랐지만, 그는 당시 제가 활동한 분야와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미군정에서 정치적인 역할은 그가 주로 했죠.

    박 : 겨우 중위 계급으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강 : 어떤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어요. 1946년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을 만들고 2월14일 첫 회의를 할 때 여운형 선생이 참석하기로 돼 있었어요. 그때 제가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좀 알죠. 그날 민주의원 회의를 라디오에서 중계했어요. 여운형 선생이 회의장에 좀 늦게 들어왔는데, 그때 이승만 박사가 짐짓 모른 체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누구죠?” 하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근로인민당 당수입니다” 하자 이박사는 “아, 피플스 파티(People’s Party), 피플스 파티” 하면서 “저쪽에 앉으시오” 하는 거예요. 그날 회의 참석자가 28명인가 됐는데, 가장 말석에 김선이라는 여성이 앉아 있었어요. 여운형 선생더러 그 옆에 가서 앉으라고 한 겁니다.

    박 : 여운형 선생이 회의장에 들어오기는 들어온 겁니까.

    강 : 제 기억으로는 그래요. 분명히 라디오에서 그렇게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박사가 그렇게 나오니까 여운형 선생이 화가 나서 나가버린 겁니다. 뒤에 박갑동이라는 당시 ‘경향신문’ 기자에게서 그날 상황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박기자는 좌익 쪽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 말로는 여운형 선생이 참석하기로 해서 명패까지 다 만들어 놓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안 오니까 버치 중위가 들어와서 여운형 선생의 명패를 들고 나갔다는 겁니다.

    ‘찬탁론자’ 의심받던 이승만, 세력구축 위해 돌연 반탁운동 나서

    광복 후 거리로 쏟아져나와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외치는 군중들.

    그런데 얼마 전에 작고한 송남헌씨(독립운동가이자 한국 근현대사 연구가)에 따르면 여운형 선생이 회의장 밖까지 오긴 했지만, 안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냥 갔다는 겁니다(여운형이 민주의원에 참석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좌익세력 중 일부가 그를 납치해 협박했다는 설도 있다). 누구 얘기가 정말인지는 모르겠어요. 여하간 버치가 명패를 가지고 나간 것은 사실인 듯한데, 버치가 민주의원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게 틀림없어요. 주로 그런 정치공작을 담당했던 거죠.

    당시 저와 자주 접촉한 사람은 미군내 정보 책임자인 로버트 키니였습니다. 그가 실제로 한국 정치관계를 총괄한 사람이에요. 그 다음으로는 예비역인 하우스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 생각으로는 버치가 현장에 나가서 활동했고, 키니와 하우스만이 이를 종합하는 식으로 역할분담을 한 것 같습니다. 저와 키니의 얘기를 글로 쓰면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나올 겁니다. 그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만났어요. 키니는 1980년대에 하와이에서 죽었는데, 그가 하와이에 살 때 그 사람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키니는 백낙준 박사와도 친했죠. 키니 얘기를 하면 박정희 시절 얘기까지 나오니까 길고 복잡한 사연이 많습니다. 이 사람과 관련된 얘기는 다음 기회에 나눠보기로 하죠.

    부안사건의 진실

    박 : 목사님의 책에 언급된 광복 이후의 정치적 사건 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 두 가지는 애국부녀동맹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관련됐다는 부분과 부안군 농민사건입니다. 먼저 애국부녀동맹과 정판사 얘기부터 들려주시죠.

    강 : 당시 서울 혜화동에 여자의학전문학교가 있었어요. 그 학교에서 제가 매주 화요일에 강연을 했습니다. 학생들이 꽤 많았어요. 거기에 박은성이라는 사람이 나이가 가장 많고 가톨릭 신자인데 위원장이었죠. 그 밖에 홍만길, 나신애 등 30명 정도의 젊은 여성이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애국부녀동맹을 조직해서 반공운동을 했죠. 그런데 이 여자들이 정판사 옆에서 잠복을 하다가 위조지폐를 찾아낸 겁니다. 이들 뒤에는 신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굴을 안 드러내고 뒤에서 이들을 조종했죠. 애국부녀동맹 사람들은 이들로부터 나와서 방향을 바꿨습니다. 제가 이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여운형, 김규식의 노선으로 방향을 바꾸는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우리 선에 들어와서 일하면서 저와 가까워졌어요.

    박 : 당시 좌익에서는 정판사 사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군정이 자신들을 탄압하려고 조작했다는 거죠.

    강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때 상황을 고려하면 미군정이 그걸 조작했을 리 없다고 봐요.

    박 : 1947년 3월에 일어난 부안군 농민사건은 그간 해방 정국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었는지 설명을 좀 해주세요. 그때 조사관으로 현지에 내려가셨죠?

    강 :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당시 신문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어요. 지방신문들이 조금 다뤘을 뿐입니다. 당시에는 미군정이 공출한 쌀을 배급받고 살았는데, 1946년에 전라도 산악지대에선 농사가 제대로 됐지만 부안, 김제 등지에선 형편없었어요. 평야지대에서는 질소비료를 써서 농사를 짓는데, 질소비료 공장이 함경도 흥남에 있었거든. 그런데 남북간에 교역이 끊겼으니 비료를 쓸 수가 없게 됐잖아요. 그러니 흉작도 그런 흉작이 없었지.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이 쌀 공출을 실시한 겁니다. 미군정은 현지 실정을 조사해 공출 기준을 마련하지 않고 일제시대 공출 문서를 가져다놓고 그것대로 밀어붙였어요. 농민들이 통지서를 받고 보니까 1년 지은 농사를 다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이었습니다.

    그 무렵 부안 인구가 15만쯤 됐는데, 글 못 읽는 사람이 9만이었어요. 사상이고 뭐고가 없었어요. 물론 거기에 공산당이 들어갔던 건 사실이에요. 그들이 농민들에게 “일제 때는 공출 다 하고도 먹을 게 있었는데, 해방된 마당에 이게 무슨 일이냐. 군산 앞바다에 미국 배들이 잔뜩 들어와서 우리 쌀 다 실어간다”며 공출 반대를 선동했죠. 경찰들도 그걸 단속할 만한 힘이 없으니 내버려둔 겁니다. 내버려두니 공출한 셈치고 먹자며 떡도 해먹고 술도 만들어 마셨죠. 그렇게 겨울을 났는데, 봄이 되면서 곡식이 들어오지 않으니 배급을 할 수가 없게 됐어요. 그제서야 정부가 경찰조직을 동원해서 강제로 걷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처음에는 우익청년단체들을 들여보내 테러를 하고 뒤이어 경찰이 투입됐습니다.

    박 : 청년단이 들어갔다고요? 대구 10·1사건과는 양상이 좀 다르네요.

    강 : 대구사건과는 달랐어요. 일단 청년단체들이 들어가서 한번 휩쓸고 난 다음에 경찰이 들이닥친 거예요. 그러니까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은 전부 산으로 도망가고 노인과 어린이들만 남았습니다. 산으로 도망친 이가 수만 명인데, 먹을 것도 없는 산에서 이 사람들이 뭘 할 수 있었겠어요. 그때 공산당이 다시 들어옵니다. 그들이 “어차피 죽을 것, 싸우다 죽자” 면서 폭동을 일으킨 겁니다. 처참했어요.

    누가 그들을 죽였나

    박 : 양쪽 다 피해가 컸겠군요.

    강 : 그랬죠. 경찰들이 몰려와서 산에 있는 사람이나 집에 있는 사람이나 마구잡이로 잡아들였어요. 쌀 보관할 창고에다 사람을 밀어넣고 죽였죠. 제가 현장 조사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연락을 했는데, “즉각 공출을 중지하고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요청했어요. 결국엔 군청에서 공출을 중단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으니까. 저는 부안사건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제주 4·3사건 등 광복 이후에 불거진 유혈사태들을 일컬어 한쪽에서는 공산당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하고, 운동권 좌익에서는 조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완전한 조작은 아니에요. 공산당이 개입한 건 분명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사람들이 공산당의 말을 믿고 들고일어났을까 하는 겁니다.

    박 :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씀인가요.

    강 : 그렇죠. 당시의 사회적 조건이,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대구사건도 그렇고, 4·3사건도 그런 겁니다. 이것도 현대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대구사건 때도 제가 현지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당시 총지휘자가 경북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재복 목사였고, 부위원장은 저의 중학교 때 스승인 최문식씨였어요. 미군정은 최문식 선생을 통해 사건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최문식 선생이 라디오에 출연해 “우리는 피를 나눈 동포 아니냐. 동포끼리 죽여서야 되겠냐.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말자”고 하고 나왔는데, 경찰이 바로 잡아갔던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흘러 박정희가 집권하고 난 뒤에 알아보니까 대구사건의 진짜 주동자는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 그리고 이북에서 넘어왔다 죽은 황태성, 조치기였어요.

    이런 사건들에서 희생된 사람을 다 합치면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만큼이나 될 겁니다.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해도 아직껏 그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어요. 그런 어마어마한 사건들을 다 덮어놓고 있어요. 나라가 바로서려면 이렇듯 숨겨진 역사를 밝혀내야 합니다. 이젠 관련자들도 거의 다 죽었을 테니까 처벌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사실을 밝히고 희생자들의 후손에게라도 명예를 회복시켜주자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들고일어날 환경은 이쪽에서 만들었고, 그것을 이용한 것은 좌익 아니었습니까.

    박 : 광복 직후의 얘기가 너무 길어져서 1948년 이후의 사정은 오늘 다 듣기 어렵겠군요. 조봉암, 박정희, 그리고 미국 대사관 등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호로 넘기겠습니다. 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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