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호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 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입력2003-12-29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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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보당 바람을 일으키며 두 차례나 대통령선거에 출마, 이승만과 맞선 죽산(竹山) 조봉암.
    • 두 번째 출마 때는 파렴치한 부정선거 속에서도 간발의 차로 낙선해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진보당은 풍비박산이 나고, 조봉암은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다.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박태균 : 지난호 ‘신동아’에 목사님과 나눈 대담 기사가 나간 이후 몇몇 독자께서 질문을 보내왔습니다. 하나같이 매우 수준 높은 질문들이어서 우리 현대사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께서 이승만 박사가 우익 내부에서 임시정부를 제치고 세력을 확장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이냐고 물어오셨습니다. 제가 보기엔 임시정부가 1946년 초에 조직한 비상국민회의가 민주의원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이승만이 우익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한 듯합니다만….

    강원용 :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에서 국내로 들어올 때 국민에게 공약을 한 게 있는데, 그 중 하나가 27년간 내려온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잇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해서 거기에다 정권을 넘기겠다는 것이었어요(1941년 제정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는 귀국 후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한다고 되어 있다).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비상국민회의가 1946년 2월1일 결성됐습니다. 서울 명동성당에서 결성식이 열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제가 가장 나이 어린 대의원이었습니다. 연도에 기마경찰들이 쫙 늘어서 있는 등 어마어마한 규모의 행사로 치러졌죠.

    후에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씨의 사회로 회의가 진행됐는데, 회의 시작 무렵 미술가인 고희동(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며, 4·19 이후에는 민주당 소속 참의원 역임)씨가 ‘긴급동의’를 했어요. “지금 시국이 긴급한 상황이라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이 조직을 오래 끌지 말고 이승만·김구 두 분에게 전권을 위임, 새로운 정부조직(최고정무위원회)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어나 “아니, 세상에 임시정부를 긴급동의로 세우는 나라가 어디 있냐”고 반대했지만, 고희동씨는 “빨리빨리 해야 된다”며 긴급동의안을 읽었어요. 내 기억에 당시 대의원이 202명이었는데, 102명의 도장을 받아서 내놨습니다. 그렇게 통과됐던 거예요(1946년 2월2일자 신문에는 201명 초청에 164명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2월3일자에는 권동진 외 100명의 연서로 이뤄졌다고 되어 있다). 나중에 내가 나갈 때 뒤에 앉아 있던 항일 국어학자 이극로씨가 잘했다고 어깨를 두드려줍디다.

    박 : 그것이 첫 회의였습니까?

    강 : 그렇지요. 그날 저는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새 정부를 세우면서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는 거죠. 우리가 정부를 세우는 날인데, 당시 미군정 책임자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뉴맨인가 하는 이름의, 별로 계급도 높지 않은 사람이 참석했을 뿐이에요(당시 신문에는 대령급 인사로 나와 있다). 그 사람이 군정사령관과 군정장관의 축사를 대독했어요. 그런데 그 축사란 게 ‘국민들은 굶고 있는 형편에 당신들은 여기에서 뭐 이런 짓을 하고 있냐’는 내용이더라고요. 축하하러 온 게 아니라 비꼬러 나왔던 겁니다.



    박 : 그때 임시정부와 미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미군정은 강력한 반탁운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임시정부 요인 경호원들의 무기를 압수하기도 했고, 김구 선생을 미군정으로 불러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죠.

    미군정과 臨政의 기싸움

    강 : 사이가 안 좋았어요. 미국은 임시정부가 들어오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니까. 미군정은 임정이 들어오려면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임정은 조직을 전부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임시정부 이름으로 비상국민회의를 여니까 미국 사람들 보기엔 약속위반이었던 거죠. 비꼬는 듯한 연설을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미국으로선 그 사람들을 모아 새 정부를 만들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인 버치 중위가 왔다갔다하면서 만든 게 민주의원(정식 명칭은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입니다. 28명인가, 30명인가로 만들었어요(민주의원 회의 참석을 거부한 여운형을 포함해 28명). 이승만 박사가 의장,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부의장을 했는데, 내용을 보면 이승만·김구 두 사람이 다 한 겁니다. 그때 국민들은 김규식 박사를 포함해서 ‘3영수’라고 불렀는데, 실제로는 두 사람에게 위임했기에 영 마뜩지 않았어요.

    박 : 민주의원을 만든 2월14일은 북한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된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3월로 다가온 미소공동위원회를 염두에 두고 미군정 쪽에서 민주의원을 급조했으며 이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강 : 명동성당에서 열린 비상국민회의에서 정부 조직을 이승만·김구에게 위임한 것은 미군정측이 조정한 결과입니다. 특히 버치 중위의 역할이 컸던 듯싶어요. 임시정부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비상국민회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미국측이 개입한 게 아닌가 싶어요. 북한에 대한 미군정청의 대응과 관련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 : 말씀 중에 이극로씨 이야기가 나왔는데, 유명한 국어학자이지 않습니까. 이극로씨는 중간운동을 좀 하다가 조봉암씨와 손잡고 제3전선인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독립전선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려 하자 김규식 박사가 거부한 것으로 압니다. 이쯤에서 본격적으로 죽산(竹山) 조봉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해방 직후 상황부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강 : 조봉암씨는 공산당 인천지구당 책임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박헌영하고 노선을 달리해서 신문에 ‘박헌영 동무에게 보내는 글’을 쓰고 탈당했죠. 그런 글을 두 번인가 썼어요(조봉암은 1946년 4월말 미군정에 체포됐고, 그 직후 미군정이 그의 사무실을 수색하다 편지를 발견했다. 그가 미군정에서 풀려난 직후 그 편지가 신문에 실렸고,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에서 탈당하고 전향하겠다고 선언했다). 조봉암씨는 탈당한 후 김규식 박사를 만나려고 했는데, 김박사가 이를 거부했어요. 그래서 제가 김규식 박사한테 “만나야지 왜 거부합니까” 했더니 “이 사람아, 한번 공산당 한 사람은 바뀌지 않아. 조봉암씨는 믿을 수 없어. 공산당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 하는 겁니다.

    그 무렵 조봉암씨가 공산당을 탈당한 게 아니라 박헌영이 이승엽을 인천지구당 책임자로 앉혔기 때문에 반발했을 뿐이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조봉암은 김규식 박사를 지지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김박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은 절대 안 돼”

    박 : 김규식 박사가 조봉암씨를 그토록 신뢰하지 않았습니까?

    강 : 김규식 박사가 중간노선을 취했다며 불그스레한 사람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 양반은 철저한 반공이었습니다. 미군정에서는 김규식 박사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래서 적십자사 총재를 시켰죠. 그런데 적십자사 이사로 각 정당 대표가 다 들어오는 바람에 박헌영이 이사가 됐어요. 그러니까 김규식 박사가 “나는 박헌영이 이사를 맡은 조직에 앉아서 일 못한다”는 거예요. 김규식 박사가 그런 사람이거든. 그래서 제가 김규식 박사더러 “그렇게 공산당을 싫어해서야 어떻게 좌우합작을 합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김 박사가 이런 얘기를 들려주더군요.

    “내가 러시아에 자주 다녀왔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참 선량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레닌이 1917년에 혁명을 일으켜 1922년까지 5년 사이에 700만명을 죽였다. 또한 알바니아라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공산당이 혁명을 일으켰는데, 단 하루 만에 6만명을 죽였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잔인하다. 만일 한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 피바다가 된다. 그러니까 절대로 공산당이 들어와선 안 된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보니 공산당이라고 하면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조봉암씨가 들어오지 못하고 이극로와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든 거죠. 여기에는 나중에 이북에 가서 거물이 된 사람들이 여럿 들어왔습니다.

    저는 독립전선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어요. 이 사람들이 중앙위원 명단을 발표하면서 거기에다 제 이름을 집어넣은 겁니다. 저는 독립전선에 가담한 일이 없거든요(강원용 목사는 여운형이 암살당한 후 김규식의 주도로 조직된 민족자주연맹에 기획담당 책임자로 참여했다). 당시 전북지방에 자주 강연하러 갔었는데, 한번은 거기에서 차를 세우려니까 잘 아는 장로 한 사람이 차에 뛰어오르더니 “내리지 마십시오” 해요. 왜 그러냐니까 “내리면 테러당해 죽습니다” 하는 거예요. 까닭을 물으니 제가 공산당 조직의 중앙위원이 돼서 그렇다더군요. 그 무렵 제가 전북 일대에 강연을 하면서 바람을 일으켰는데, 보수파에서 이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보수파에서는 저를 초청한 이승만 박사 계열의 김춘호라는 사람까지 징계했을 정도예요. 그런 분위기에서 조봉암과 이극로 같은 이들이 중간세력으로 나서려다 결국 와해되고 말았죠.

    박 :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란을 벌이다 와해된 듯합니다. 그 결과 이극로 계열은 북으로 올라가고, 조봉암 쪽은 남에 남았고요.

    강 :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때 조봉암씨가 이극로씨랑 그걸 하다 5·10 선거에 참가했어요. 5·10 선거는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빼놓고는 모두 반대했습니다. 저도 반대 일선에 섰고요.

    박 :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갔더니 이극로씨 묘지가 있더군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왜 북한행을 택했을까요?

    강 : 그 사람이 왜 북에 남았는지는 분명치 않아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는 대부분이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는 겁니다. 1948년 유엔총회 결의-유엔이야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던 시절이니-대로 단독선거를 하면 나라가 동강날 판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방되고 3년도 채 안 된 시점에서 분단이 되게 생겼으니 다들 반대할 수밖에요. 남쪽에다 정부를 세우면 이북에 또 정부가 설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전쟁으로 가는 것 아니냐, 그러니 이건 절대로 안 된다면서 들고일어났죠. 이승만 박사는 이미 1946년에 단독정부라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이 양반 머릿속엔 어떻게든 대통령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박 : 만약 장덕수씨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의원내각제로 갈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강 :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죠. 어쨌든 한국민주당과 서북청년회말고는 전부 5·10 선거에 반대했습니다. 미국도 순우익들만으로 선거가 치러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어요. 그래서 이승만 박사가 남한 정부에는 우익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조봉암씨를 끌어다 넣고, 그 다음에 김구 선생 계열에선 신익희씨를 끌어넣은 것이죠. 신익희·조봉암을 끌어넣음으로써 충칭 임시정부 계통에서 좌익 인사까지 망라됐다는 인식을 주려 했던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조봉암이라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그가 5·10 선거에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산당에서 탈당하더니 5·10 선거에도 참여했고, 거기에서 당선돼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했잖아요. 너무 왔다갔다한다 싶었습니다.

    요시다 총리도 혀 내두른 정략가

    박 : 저도 그 점이 1950년대의 소위 혁신세력들이 조봉암씨를 신뢰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와 갈등관계였던 박헌영이 북한에서 제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로선 남한에 남아서 선거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강 : 제가 보기에 조봉암씨는 원래부터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신봉했다기보다는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그 방편으로 내세운 듯합니다. 일제시대에는 공산당과 민족주의자 사이에 별로 갈등이 없었습니다. 저도 감옥에 있을 때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방을 쓰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피차 생각이 다르지 않았어요. 어떻게 민족을 독립시킬 것인가 하는 생각들만 했으니까.

    박 : 미군정 자료를 보면 조봉암씨가 전향하는 과정에도 미군정이 개입했고, 전향한 다음에도 조씨가 미군정 장관들을 여러 차례 만나 “내가 공산당을 누를 수 있는 당을 만들 테니 지원해달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이 조봉암씨에 대해서만 유독 ‘가짜 전향’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강 : 저는 가짜 전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조봉암씨를 위해 여러 번 증언하기도 했지만, 그 사람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확실한 증거를 하나 들어볼까요? 6·25가 나서 사흘 만에 서울이 무너지자 국회의원들이 다 도망가버렸어요. 그때 조봉암씨가 국회에 있던 비밀문서들을 자기 차에다 싣고 빠져나왔는데, 문서를 차에 가득 싣느라 부인을 태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부인이 거기서 죽었어요. 그 사람이 이북하고 통합하려 했던 사람이라면 인민군들을 영웅으로 맞이했지,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그 사람이 지조가 굳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변절을 모르는 지사형 정치가가 아니었어요. 그는 대단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현실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적어도 수십 년 앞을 내다보고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제까지나 이극로씨와 돌아다녀선 될 일이 없을 것 같거든요. 그렇게 판단하고는 마침내 이 박사와 손을 잡고 나온 겁니다. 물론 이 박사도 그 사람을 이용한 것이고. 이걸 봐도 알 수 있지만, 이 박사는 탁월한 정략가(politician)예요. 아마 정략가로서는 대한민국 역사에, 아니 미래에도 그런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무렵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나는 정치적으로는 이 박사의 상대가 못 된다”고 털어놨을 정도예요. 미국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는 미 의회에서 증언할 때 “이 박사 앞에 있으면 커다란 바위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고 했죠.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유세 도중 급서한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국민장이 열리고 있다(1956.5.23).

    조봉암씨가 그런 이 박사에 맞서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했는데, 저더러 선거사무장을 맡아달라길래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부산의 박기출-나중에 진보당 부위원장을 지냈는데-이라는 사람 집에 저를 초청했어요. 갔더니 이은상씨 등도 와 있더군요.

    박 : 노산(鷺山) 이은상 말입니까?

    강 : 그래요. 시인 이은상씨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봉암씨가 제게 또 선거사무장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당신이 그저 대통령 입후보자라는 이름이나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가. 그렇다면 당신 머리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승만하고 맞붙어 싸우려 한다는 말이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조봉암씨가 “정치적으로 이승만은 어른이고 조봉암은 어린아이다. 정치적으로는 내가 이승만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면서 이런 얘기를 들려줬어요.

    “농림부 장관 시절 나는 쌀 공출에 반대했고, 미군정은 쌀 공출을 주장해서 갈등이 생겼다. 그때 이 박사가 미군 책임자와 나를 불러서 의견조율을 했다. 미군정 사람들은 ‘쌀 공출을 안 하면 많은 국민이 굶게 된다’고 했고, 나는 ‘당신들은 카우보이 기질 때문에 밤낮 밀어붙이기만 하는데, 조선인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하고 맞섰다. 그때 얘기를 듣고 있던 이 박사가 손뼉을 짝짝 치면서 미군들에게 ‘우리 조 장관의 생각도 당신들과 같은데 영어를 못 해서 뜻이 잘못 전해졌다’며 미군들을 달래 보냈다.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 이 박사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 생각이 내 생각과 분명 다른데 왜 같다고 했냐’고. 그랬더니 이 박사가 ‘장관 마음대로 해, 뒷수습은 내가 할 테니’라고 했다. 이 박사는 그 정도로 고단수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런 사람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물러나지 않으면 나라도 안 되고, 또 이승만 자신도 불행해진다.”

    결국 조봉암씨는 이 박사를 견제할 목적으로 출마를 결정한 것 같아요. 그는 “이 박사가 언제까지나 혼자 해먹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조봉암의 야심

    박 : 제헌선거 후 조봉암씨가 농림부 장관을 할 때 식민지 시절 같이 활동한 분들이 농림부에 많이 들어갔더군요. 대표적으로 조봉암씨와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임원근씨도 농림부에 들어갔고. 그때 목사님은 제의받은 게 없습니까?

    강 : 제게는 농민운동을 한번 크게 일으켜보라면서 농림부 지도국장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농민운동 할 사람들을 훈련시키라면서 지금의 서울시립대학 자리를 내줬습니다. 제가 정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해서 경제학자 조동필 교수가 대신 들어갔어요. 조봉암씨는 농림부 장관을 맡으면서도 꿈이 있었어요. 그때는 노동자 세력이 크지 않았으니까 농민들을 조직화해 정치세력을 형성하려 했습니다. 5·10 선거에 나가 국회의원이 되고 농림부 장관이 됐지만, 그런 뜻을 품고 있었기에 이 박사 밑에서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농민과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조직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겁니다.

    조봉암씨는 농림부 장관을 그만두고 나와서 제2대 국회의원이 된 뒤 국회부의장을 했는데, 저는 그 과정이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2대 선거 얘기를 좀 하지요. 1950년 6·25가 일어나기 직전인 5월30일에 선거를 치렀는데, 이때는 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나왔어요. 서울 성북구에서는 조소앙씨와 조병옥씨가 맞붙는 등 지역마다 접전이었습니다. 또 중구에선 최동오, 성동구에선 김붕준, 경기도 평택에선 안재홍 등 중간파 거물급들이 다 나왔죠.

    그런데 5·30 선거는 정말 상상하기조차 힘든 부정선거였습니다. 이들에 대해 어마어마한 탄압을 했어요. 이 사람들이 죄다 공산당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면서 체포령을 내린 겁니다. 그래서 한동안 숨어지내야 했죠. 그랬더니 투표소 앞에다 후보 사퇴했다고 써붙였어요. 성동구에 출마한 김붕준씨는 체포령이 내리니까 숨어 있다가 선거 당일인 5월30일 아침에 차를 떡하니 타고 선거구로 들어갔습니다. 선거구 주민들이 그 광경을 보고서야 아, 저 사람이 사퇴한 게 아니구나 했던 거죠. 결국 김붕준씨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표 차이가 크지 않았어요.

    그때 김붕준씨 선거사무장이 제 친구인 이명하였는데, 선거사무위원회에다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개표 현장에 참석하지도 못하게 하니까 “우리가 보는 앞에서 개표하라”고 길길이 뛰었죠. “단 한 표 차이에라도 떨어지면 내가 자결을 하겠다, 우리가 분명히 다득표로 이겼다”면서. 그러는데도 끝내 개표를 안 하더군요. 개표하지도 않고 그냥 떨어진 걸로 만든 겁니다. 그런 탄압 속에서도 중간파 인사들이 많이 당선됐어요. 윤기석씨, 조소앙씨, 안재홍씨 같은 분들이었죠.

    제가 보기에 그런 인물들에 비하면 조봉암씨는 작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조소앙씨나 안재홍씨를 국회부의장에 앉혀야 한다는 생각에 제가 나섰습니다. 어느날 아침 조봉암씨 집엘 갔더니 목욕을 하고 나오더라고. “(조소앙씨나 안재홍씨를 국회부의장으로 앉히기 위해) 당신이 나서서 운동 좀 해주시오” 하니까 “잘 알겠다”고 합디다. 이의를 달지 않았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자기를 위해 운동해서 스스로 부의장이 됐거든. 그래서 제가 아, 이 사람이 공산당을 해봐서 그런지 정치적 술수가 대단하구나 싶었어요. 조봉암씨는 그처럼 철저한 현실주의자, 현실 정치가였어요. 나름대로 야심도 있었고.

    박 : 조봉암씨와 한국민주당은 사이가 아주 나빴던 것 같습니다. 그가 농림부 장관을 할 때는 한민당이 농림부 장관 사퇴 결의안을 냈고, 나중에 민주당 만들 때도 그가 민주당 만드는 데 참여하겠다고 하자 한민당 계열의 반대가 가장 심했잖습니까. 특히 공산주의 하다가 전향한 김○○씨가 극렬하게 반대했고 조병옥씨도 반대했죠.

    강 : 김○○은 일제시제 ML당이었는데, 이 사람은 공산당이 하는 못된 버릇이란 못된 버릇을 다 갖고 있던 자였어요. 길거리에 흑색선전 포스터 붙이고 하는 건 그 사람이 다 했는데, 가령 ‘김규식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적산을 팔아 돈을 벌었다’는 글을 써붙이기도 했어요. 김규식 박사는 부인이 재봉틀을 돌려 생계를 꾸릴 정도로 빈한했는데 그렇게 모함을 한 겁니다(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장 때 모함을 받은 사건). 그런가 하면 안재홍씨가 공창연합회에서 돈을 받아먹었다고 한 것도 김○○의 소행이었죠.

    서북청년단 출신 선거사무장

    박 : 1956년에 조봉암씨가 제3대 대통령후보로 나왔을 때 유력한 후보였던 신익희씨가 급서했습니다. 그래서 조봉암씨로 야당 후보가 단일화됐는데, 그때도 김○○씨가 신문에 성명을 냈더군요. ‘조봉암을 지지하느니 차라리 이승만을 지지하겠다’고.

    강 : 김○○은 한민당에서 가장 질이 안 좋은 사람이었어요. 저는 아예 관심도 안 가졌죠. 그래서 제 책에서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어요. 당시 서울시경 정보과장이 노덕술인데, 그 사람이 일제 총독부 밑에서 독립군 잡아넣던 인물 아닙니까. 그 사람과 밤낮으로 음모를 짜내던 게 김○○입니다. 모략을 해서 뒤집어엎는 일을 전문적으로 한 사람이니까 조봉암보다는 이승만을 지지했겠죠.

    박 : 다시 1952년의 2대 대통령선거 때로 돌아가보죠. 당시 조봉암 후보의 선거사무장은 서북청년단 부단장을 했던 김성주씨였습니다. 조봉암씨가 서북청년단 출신을, 그것도 부단장까지 했던 사람을 선거사무장에 앉히다니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강 : 제가 선거사무장을 안 한다고 하니까 윤길중씨와 김성주씨를 끌어들인 겁니다. 김성주씨는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6·25 후에는 평안남도 지사까지 한 사람이에요. 조봉암씨가 저를 끌어들이려 한 것은 사상적인 이유 때문이었는데, 김성주도 그런 이유로 끌어왔던 것 같아요. 저한테 무슨 정치적 역량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산당을 했던 조봉암으로선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게 급선무였기에 저를 택했던 듯합니다. 제가 기독청년운동을 했으니 저 같은 사람을 내세우면 사상 면에서의 부담이 줄어들 것으로 본 거죠. 그런데 제가 안 한다니 김성주를 시킨 겁니다. 이승만 정부는 그가 서북청년단 출신인 데도 결국 죽여버렸죠.

    조봉암씨가 대통령선거에 나오면서 저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많이 끌어넣었어요. 저는 그런 상황이 전개되던 1953년에 캐나다로 유학을 갔습니다.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한국 신문을 보면서 그가 진보당을 만들고 진보당 창당대회를 연 것도 알게 됐죠. 조봉암씨가 1956년 3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한 것도 미국에서 신문을 보고 알았죠. 신익희씨가 서거하자 신익희씨 지지표까지 끌어들여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여오는 목덜미

    박 : 귀국하신 것은 언제였습니까?

    강 : 1957년 10월입니다.

    박 : 진보당 사건이 터지기 두어 달 전이군요.

    강 : 그렇습니다. 그때는 김포에 비행장이 없었고 오산에 있었어요. 오산비행장에 내리니 여러 사람이 마중을 나왔는데, 이명하, 김기철 등 진보당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더군요.

    박 : 김기철씨라면 한국독립당에 관여했던 인물인데, 그가 쓴 통일론이 좀 급진적이어서 진보당 사건 과정에서 문제가 됐죠.

    강 : 김기철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기질이 곧은 사람이었어요. 아마 전기공 같은 일을 했을 겁니다. 머리가 비상하리만큼 좋았고, 사상적으로는 철두철미 중간파였습니다. 다 저와 친했던 이들이라 비행기에서 내려 반갑게 인사를 나눴는데, 그 중에 전혀 얼굴을 모르는 한 사람이 다가와서 손을 잡더니만 “아이구, 강 동지 오래간만이야” 하는 거예요. 제가 당황해하니까 마중나온 아내가 “인사 그만하고 얼른 차를 타라”고 하더군요. 차를 탔더니 차 안에서 아내가 사정을 들려줍디다.

    며칠 전에 경찰 정보과에서 누군가가 찾아와서 “당신 남편이 귀국할 때 조봉암이 비행장에 나간다고 하더라. 만약 조봉암이 비행장에 나가면 당신 남편은 한국에 와서 아무것도 못한다. 경찰이 눈여겨보고 있다”고 귀띔을 하고 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내가 조봉암씨 집에 찾아가서 싹싹 빌었대요. 제발 비행장에 나오지 말라고. 그랬더니 조봉암씨가 “그러면 내가 안 나가는 대신에 친구들을 내보내겠다”고 하더랍니다. 아내가 그래도 걱정이 돼서 당시 육군 소장으로, 저와 회령에 있을 때부터 친했던 박남표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답니다. 박남표는 생각 끝에 자신과 친한 자유당 국회의원 안동준(후에 관광공사 총재 역임)에게 “네가 비행장에 나가서 강원용과 친한 것처럼 행동해달라”고 부탁했대요. 그러니 저는 영문도 모르고 인사를 한 거죠. 그때 이미 진보당 인사 주변에 경찰이 쫙 깔렸던 겁니다.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는데 이명하가 찾아왔더군요. 이명하와는 부모님들도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이명하는 “오랜만에 귀국했다고 부모님이 당신한테 인사를 하고 싶다시는데, 여기에 앉아서 인사를 받겠냐, 아니면 나랑 같이 가서 인사를 드리겠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아, 내가 인사를 드려야지” 하면서 제가 따라나섰죠. 그런데 가다보니까 길이 좀 달라요. 대문도 다르고. 알고 보니 조봉암씨 집이었어요. 자기 부모를 만나게 한다면서 조봉암한테 데려간 겁니다. 집으로 들어가니 윤길중, 김기철 등이 죽 앉아 있어요. 그래서 같이 밥을 먹는데, 조봉암씨가 “강 동지가 돌아와 정말 반갑다”고 했습니다. 제가 “작년(1956년 대통령선거)에 상당히 잘 했는데, 아직도 대통령 꿈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사실은 내가 이긴 건데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해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나라인데,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목도한 매카시즘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당신이 대통령 되기는 틀렸다”고.

    미국 지지 확신한 조봉암

    박 : 매카시즘이 1950년대 후반에도 심했습니까?

    강 : 그럼요. 공산주의자들이 여는 독서클럽 같은 데 한번 참석하면 면서기도 안 시킨 게 그때 미국이었어요.

    박 : 1959년에 아이젠하워가 흐루시초프를 만났는데, 그 전부터 해빙 조짐이 보이진 않았나요?

    강 : 두 사람이 만나서 분위기가 좀 달라졌지만, 그 전까지는 매카시 선풍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우파들이 장악한 CIA의 경우에는 그런 성향이 더욱 강했어요. 제가 그 얘기를 하면서 “한국이 미국의 최일선 기지인데, 당신 같은 사람이 대통령을 할 수 있겠냐”고 했더니 조봉암씨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었어요. 자기가 미8군 사령관도 만나고 미국대사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남북 문제는 평화적 해결 외엔 방법이 없다. 그 일에는 당신이 적임자니까 당신이 해야 된다”고 했다는 겁니다.

    박 : 미국이 그렇게 내놓고 얘기를 했다는 겁니까?

    강 : 대사와 8군 사령관이 다 그랬다고 해요. 더구나 그들은 한술 더 떠서 “당신이 한국 대통령이 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힘들겠지만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8군 사령관이 매일 아침 자기 부하를 조봉암씨에게 보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어요. 그런 미국이 왜 자기를 싫어하겠냐는 얘기죠. 조봉암씨는 미국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확고하게 믿었어요. 그런데 미국이 정치하는 방식이 그렇잖아요. 이승만 박사의 정치가 영락없이 미국식이거든. 항상 양쪽을 나란히 붙들고 대립을 시켜요.

    윤길중 등은 그런 미국의 속내를 모르고 “미국이 조봉암 선생을 지지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대해선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건 믿기 어렵다”고 하고 말았는데, 조봉암씨는 “나는 당신이 좋으니까 당신 보러 주일마다 경동교회에 나가겠다”고 하더군요. 교회에 나오겠다는데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없잖아요. 그랬더니 제 아내가 또 조봉암씨를 찾아가서 제발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조봉암씨가 성당을 나가기 시작한 거예요. 그 사람은 결국 천주교도로 죽었을 겁니다.

    박 : 당시 미국대사관에 토머스라는 문관이 있었는데, 그 사람 얘기로는 자기가 조봉암 담당이었다고 합니다. 조봉암씨를 만나 얘기를 듣고 성향을 파악해서 본국에 보고하곤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마침 자기가 잠깐 한국을 떠나 있을 때 진보당 사건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 얘기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조봉암씨가 미국과의 관계를 그처럼 확신했던 건 사실인 모양이죠.

    강 : 자세한 사정은 저도 알지 못해요. 저는 귀국하자마자 교회를 맡았으니까 진보당 일에 관여할 수 없었죠. 그때 제가 아는 분 중에 김일사라는 할머니가 있었어요. 중국에서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오래 한 사람인데, 저를 무척 아꼈죠. 하루는 그분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제가 귀국했으니 점심을 사겠다며 반도호텔에서 만나자고 합디다. 그래서 할머니하고 유명한 추어탕집엘 갔는데, 거기에 조봉암씨가 앉아 있는 거예요. 할머니는 “두 사람이 얘기하라”며 곧 자리를 떴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봉암씨와 추어탕집에서 마주앉게 됐는데, 그게 조봉암씨가 체포(1958년 1월)되기 며칠 전이었어요.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1958년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조봉암.

    박 : 그 자리에서 조봉암씨가 어떤 얘기를 했습니까.

    강 : “진보당은 아주 탄탄한 조직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가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게 요지였어요. 그때 진보당 조직국장이 이명하였습니다. 이명하는 두 형이 공산당에 맞아 죽은 사람이라 중간파지만 반공의식이 있었어요. 이런 사람이 조직국장이다 보니 진보당은 공산당 출신은 물론, 과거에 공산당 관련단체에 좀 관계했던 사람도 절대 당원을 안 시켰어요. 그날 조봉암씨는 “진보당은 서민층을 파고든 탄탄한 조직인데, 내가 계속 붙들고 나가다가는 나도 죽고 진보당도 해체된다. 나는 죽더라도 진보당은 살리고 싶다”며 “그래서 나는 탈당할 테니 당신이 진보당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얼토당토않은 얘기 하지 마라. 내가 지금 목사 노릇을 하고 있는데 왜 거기엘 들어가냐. 못 하겠다”고 하니 조봉암씨 표정이 어둡습디다. 자기는 당을 살리기 위해 물러날 생각으로 처음에 신흥우씨를 교섭했는데 잘 안 됐대요. 그래서 나중에는 장택상씨한테도 부탁했는데, 장택상씨가 “그러려면 당명부터 고쳐야겠다”고 해서 그렇게까진 못 하겠다고 거절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까지 싫다고 하니까 “당신과 친한 사람을 소개해달라. 해외에 있는 사람도 좋다. 다만 진보당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된다”는 거예요.

    바로 그때 신문 파는 사람이 “신문이요, 신문” 하면서 지나가더군요. 조봉암씨가 신문을 한 부 사서 펴보더니 얼굴이 새파래지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물었더니 “나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 가봐야겠다”면서 급히 나가더라고. 그게 제가 조봉암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어요. 자신에게 위험이 닥쳐온다는 것을 직감했던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피하고 진보당은 살리려 했던 것이죠.

    박 : 그때 신문에 무슨 기사가 났길래 그렇게 놀랐을까요? 혹시 박정호 간첩사건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인 박정호는 체포되기 전에 조봉암씨 집을 방문한 것으로 밝혀졌거든요. 방문은 했어도 조봉암씨를 만나지는 못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강 : 그 때문이었을까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신문을 보더니 내용은 말하지 않고 놀란 얼굴로 사라졌으니까. 그 며칠 후에 잡혀가서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1979년 중앙정보부에 붙들려가서 일주일 동안 밤샘 조사를 받을 때도 조봉암씨 얘기가 나오더군요.

    박 :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조사받을 때 말이죠?

    강 : 조사관들은 조봉암씨가 김일성과 연결됐다고 했어요. 일본에 있는 교포를 통해서 돈을 받았다고 하더라고.

    박 : 아마 1952년 선거 때 조봉암의 선거본부에서 활동하다 일본으로 망명한 이영근을 지칭한 듯합니다.

    강 : 아무튼 그런 사건으로 엮어 조봉암을 죽였습니다. 조봉암이라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죽인 것은 전적으로 1956년 대통령선거 때문입니다.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조봉암씨가 실제로 떨어졌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었어요. 하지만 1956년 선거는 사정이 다릅니다. 사실상 조봉암이 이승만을 이긴 선거였거든요.

    조봉암 98표 + 이승만 2표

    박 : 말도 못할 부정선거였다죠?

    강 : 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낸 박종태씨(박종태 의원은 1969년 삼선개헌을 전후한 시기에 당에 항명했다는 이유로 공화당에서 제명당했고 이후 민주화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1967년 7대 국회의원선거가 끝난 무렵에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여·야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토론회를 가졌죠. 야당에서는 정일형, 양일동씨 등이 왔고, 여당 사람도 많이 왔어요.

    그날 정일형 박사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농민들을 계몽해야 된다. 도시는 야당을 지지하는데 농촌은 무식해서 여당을 찍으니 도리가 없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러자 제 기억으로는 박종태씨가 “야당 지도자가 그런 말을 하다니 놀랍다”며 “농촌이 무식해서 그런거라면 우리가 지금껏 공명선거를 했다고 인정한다는 것이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면서 1956년 선거 얘기를 들려주더군요. 박종태씨가 당시 여당 선거감시위원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 사람 얘기가 개표장에서 표를 100장 단위로 묶는데, 조봉암 표가 워낙 많이 나오니까 조봉암 표 98장에다 앞뒤로 이승만 표를 한 장씩 붙이고는 이승만 표 100장으로 계산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나중에는 양쪽에 붙일 이승만 표가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실제로는 조봉암이 압도적으로 당선된 것인데 이걸 뒤집는 게 한국 정치라는 거예요. 전국적으로 그렇게 개표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 얘길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결국 이승만이 그런 조봉암에게 위협을 느낀 것 아니겠어요. 조봉암씨는 죽을 때도 멋있게 죽었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냐고 물으니까 “내게 술 한잔 달라”고 해서 술을 한잔 마시고 처형당했다고 해요.

    박 : 아까 윤길중씨와 조동필씨를 잠깐 언급하셨는데, 그 두 분은 진보당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분의 성향은 어떠했습니까.

    강 : 윤길중씨는 원주 출신으로 법률 공부를 해서 일제시대에 고등고시에 합격해 군수를 지냈죠(해남 군수 역임). 해방 후에는 유진오씨를 도와 헌법을 만드는 데 참여했습니다. 머리가 좋고 문학적 재질도 있었어요. 서예도 잘해서 전시회도 몇 번 열었죠. 제가 미국에 간 뒤부터 조봉암씨와 친해진 모양이에요. 조봉암씨가 대선 출마했을 때 총책임자 격인 사무장을 맡았습니다. 조봉암에 대해서는 그렇게 극진할 수 없었어요. 별세하기 직전까지도 조봉암기념사업회장을 했죠. 국회의원을 역임했지만, 성품을 보면 정치할 사람은 아니었어요. 아주 부드러운 사람으로 예술가에 가까웠다고 할까.

    경제학자인 조동필씨는 윤길중씨와는 성향이 좀 다르죠. 머리가 비상하고 성격이 정겹고 사상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인 사람이에요. 조동필씨는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한다든지 해서 어울리면 음담패설을 끝도 없이 늘어놓곤 했습니다. 그 사람 얘기를 듣고 나서 다른 사람 음담패설을 들으면 재미가 없어 못 들을 정도였죠. 그래서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왜 만날 그런 소리만 하고 다니냐”고 면박을 줬더니 그 사람이 “내가 조봉암 장관 밑에서 농림부 지도국장을 하다가 당국의 주목을 받아왔는데, 하루는 밥 먹으면서 정치 얘기를 하다 붙들려가서 죽도록 매를 맞고 나왔다”며 “그래서 다시는 밥 먹는 자리에서는 정치 얘기를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겁니다. 밥 먹는 자리에선 정치 얘기 다음으로 재미있는 게 음담패설이라서 그런다고 하더군요. 좀 소심한 데가 있어서 책잡힐 일은 안 하고 살았어요. 그러더니 언젠가는 지방에 내려가서 농사를 짓고 살겠다더군요. 그후로는 자주 못 만났어요. 좋은 세월을 만나 경제기획원 장관을 시켰으면 참 잘했을 사람인데….

    미국의 양다리 걸치기

    박 : 좀 전에 조봉암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당시 미국 관련 자료들을 보면 미국이 우리 정치에 개입한 경우가 많이 눈에 띄더군요.

    강 : 물론이죠. 제가 김규식 박사나 여운형씨 등과 가까웠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저를 보자고 해서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이 그리 깊숙이 개입하진 않았습니다. 미국이 정말 사활을 걸고 한국 정치에 본격 개입한 것은 5·16 쿠데타 이후입니다. 굉장히 드라마틱한 얘기가 많지요. 조봉암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 미국은 어디 가서 뭘 하든 양다리를 걸쳐놓습니다. 이쪽도 저쪽도 다 자기 편인 것처럼 믿게 하죠. 그렇게 저울질을 하면서 자기 이해관계를 따지는 겁니다.

    박 : 지면관계상 미국과 1960년대 한국 정치에 대한 얘기는 다음호로 미뤄야겠군요. 다음 호에서는 박정희 시대와 야당, 미국대사관 관련자 등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기로 하죠.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 사이의 괄호 안에 있는 설명은 대담자 박태균 교수가 붙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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