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호

중국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울며 태어났는데, 살며 울 일 많았는데, 갈 땐 울지 말아야지…”

  •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 사진·김성남 기자

    입력2005-09-28 18: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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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고픔을 면하려 남의 땅으로 간 열네 살 소녀는 두 오빠를 따라 팔로군이 되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바친 꽃다운 청춘. 총탄 세례에도, 황하 도강에도 그는 모질게 살아남았다. 우리가 전장으로 보낸 소녀, 윤금선은 외려 마음의 평화를 얘기하며 조국에 돌아왔다.
    중국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열네살 소녀가 제 땅을 떠나 만주로 갔다. 나라는 남의 손에 빼앗긴 지 오래, 배고픔이라도 면하고 싶었다. 만주에는 먼저 이주한 큰집이 살고 있었다. 땅이 너르고 비옥하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꿈의 땅 만주는 소문과 달랐다. 풍요로운 고장이기는커녕 외려 영하 30℃가 넘는 강추위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래침을 타악 뱉으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얼어버리는 땅, 추웠고 배고팠다. 거칠고 낯설었다. 살길을 찾아야 했다. 두 오라버니는 군에 입대했다. 배라도 곯지 않으려면 그 길뿐이었기에, 여동생도 따라 입대했다. 중국 군대, 팔로군(1937~45년 일본과 싸운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이 바뀐다)이었다.

    일본이 전쟁에 지고 조국은 해방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돌아갈 길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어도 중국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인민해방군, 양쪽이 치열하게 대치하는 선봉에 소녀가 배치됐다. 간호병이었다. ‘호리반(護理班)’이라고 불렀다. 12명이 한 반이고 세 반이 한 패인 조직에서 반장과 패장 노릇을 했다.

    “반, 패, 련, 영, 단이 있고 그 위에 있는 게 사단이었어요. 반이 셋이면 패, 패가 셋이면 련, 련이 셋이면 영, 이런 식이었지. 난 선봉반 반장이고 강철패 패장이었어요.”

    7년을 전쟁 속에서 살았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다.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신물나게 경험했다. 남의 나라 전쟁이었다. 남의 땅이었다. 7년의 군 생활은 딴 사람의 일생보다 길었다. 삶을 보는 눈 자체가 달라졌다.



    “그걸 말로 다 하라고?”

    이제 일흔여섯이 된 그 소녀 윤금선(尹錦先)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바짝 다가앉는 날 보며 어이없어했다. 그러나 나 또한 만만찮은 사람. 윤금선에게서 숱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전에 단 한번도 말한 적 없다던 이야기, 차마 발설해서는 안 될 듯한 이야기,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세 아들의 신상이 염려되는 이야기들이 윤금선의 입에서 술술술 흘러나왔다.

    그를 세 번 만났다. 서울 방학동 네거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도 가봤다. 어떤 독지가가 무료로 빌려준 너른 공간에서 윤금선은 중국에서 배워온 기공술을 가르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기공은 좀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한다.

    “피부 빛깔이 어떻든, 어떤 시대에 살든 동서고금 모든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이지요. 그 방법을 내 나라 사람들에게 선사하고 싶어요. 나는 내 눈물로 조그만 강도 만들 수 있고 조그만 산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나온 사람이에요. 할머니들을 모아놓고 말해요. ‘노인의 눈물을 닦아주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이제까지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더라도 우리 지금부터는 재미있고 보람있게 삽시다. 내가 그 기술을 가르쳐드릴 게요’라고.”

    인생에는 조양(朝陽) 오양(午陽) 석양(夕陽)이 있는데 자신의 석양을 남들에게 기공을 가르치면서 보람을 찾고 싶다는 게 지금 남은 윤금선의 꿈이다.

    24시간 180리 행군

    군에 입대한 건 1947년 봄이었다. 만주 옌지(延吉)에서였다. 큰아버지가 이웃마을의 나이 많은 남자에게 자기를 시집보내려 한다는 말을 올케에게 들었다. 마침 팔로군 선전대가 마을에 들어왔다. 가면 밥도 먹여주고 가난한 인민을 해방시키는 장한 일을 하게 된다고 했다. 1930년생이니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엄마한테만 몰래 말하고 40리를 걸어갔다. 그 부대이름은 옌지 쌍하진 부대라 했다.

    “폭탄소리 탄알소리를 겁 안 내고 잘 걸을 수 있니?”라고 물었다.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머리를 요렇게 땋았는데 가자 말자 다 깎아버리데. 그리고 허술한 군복을 줘. 남자처럼 헝겊으로 갑빵(그는 ‘각반’을 이렇게 발음했다)을 치고…. 이튿날부터 바로 전쟁판이었어. 교육받을 새도 없이 상병자(傷病者)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데 말도 못하지. 피 닦아주고 붕대 감아주는 일만 해도 잠은커녕 변소 갈 틈도 없었어.”

    영화나 소설 속 같은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다. 국민당군과 직접 교전하는 부대였다.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이 이기는 중이었다. 전선이 바뀌므로 야전병원도 같이 이동해야 했다. 무조건 걸어야 했다. 24시간 안에 180리를 긴급 행군하는 날도 있었다. 높은 산도 넘었다. 산으로 이동할 때 기압이 낮아 다들 코에서 탁탁 소리가 나더니 코피가 터졌다. 대열에서 떨어지면 죽음이었다. 여름 두 벌, 겨울 한 벌 지급되는 군복이 보급품의 전부였다.

    부대는 말할 수 없이 가난했다. 그러나 인민의 물건은 바늘 한 개라도 탐할 수 없었다. 이동하다 빈 집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그 방안에 두터운 솜이불이 켜켜이 쌓였어도, 그 앞에서 떨며 밤을 지새울지언정 빈 집에 맘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게 규율이었다.

    “어느 집에서 물 한 모금을 얻어먹으려면 반드시 그 집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워줘야 했어요. 마당도 쓸어주고 집안청소도 깨끗이 해주고 나오라고 했어. 한번은 내가 어떤 마을에서 물을 긷다 두레박 끈이 뚝 끊어져 쇠로 된 바가지를 우물에 빠뜨렸어. 그럴 때 아무리 부대이동이 급해도 바가지를 건져놓지 않고는 마을을 떠날 수가 없거든. 선발대는 이미 출발했는데 두레박을 빠뜨렸으니. 간신히 두레박을 건져놓고 먼저 출발한 부대를 허겁지겁 따라가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던지….”

    마침내 황하를 건넜다. 물이 목까지 차는 바다 같은 강이었다. 부대원이 다같이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거대한 물살을 헤치며 건넜다. 황하 도강 중 숱한 사람이 죽었다. 지역사람들이 국민당군 몰래 배를 저어 와서 12명 한 반이 뱃전을 잡고 물을 건너게 도와주기도 했다. 그런 배가 뒤집어져 반원이 몰살하기도 했다. 윤금선의 반원은 한 톨도 흠결 없이 무사히 강을 건넜다. 그는 아래 전사를 잘 보살핀 공로로 훈장을 받는다.

    “인민군대엔 열서너 살짜리 어린애도 많았어요. 그 애들은 눈만 감으면 사는 줄 알고 위기가 닥치면 ‘마야(엄마)’ 하면서 눈을 꼭 감지요.”

    그렇게 늘 죽음이 목전에 있고 헐벗었어도, 아니 바로 그랬기에 부대원끼리 나누는 정은 하늘 아래 그만큼 뜨거울 수 없을 정도로 절절했다.

    “밥을 서로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나이든 반장들은 제 밥을 한 숟갈이라도 덜어내서 어린 병사에게 나눠주죠. 행군을 하고 나면 발바닥에 콩알같이 물집이 잡혀요. 이걸 그냥 두면 탈이 나거든요. 소독한 바늘에 머리카락을 꿰서 물집에다 살살 통과시켜요. 머리카락만 남기고 바늘을 빼버리면 그 머리카락을 타고 밤새 진물이 빠져나오거든요. 발바닥에 다들 스무 개 남짓의 머리카락을 늘이고 잠이 들지요. 날 좋으면 그걸 햇볕에 꾸덕꾸덕하게 말리고. 그런 걸 서로 해주면서 걷는 거지요. 반장이나 패장들은 반원들 발목 주물러주느라고 밤에 거의 잠도 안 자요.”

    업힌 부상자를 뚫고 간 총알

    큰 부상을 당하면 부상 자체보다 후방으로 후송되어 부대원들과 떨어지게 되는 걸 더 겁낼 만큼 부대원끼리 감정적으로 밀착해 있었다. 어려운 전투를 마치고 나면 서로 어깨를 붙잡고 울었다.

    “꼭 월드컵 때 축구공 하나 넣으면 서로 붙잡고 우는 것 같았지.”

    인민해방군은 연이어 승리했다.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런 만큼 부상자도 많았다. 일선의 야전 이동병원은 붐비고 바빴다.

    “야전병원이야 다 외과 환자지. 의사, 간호사 구별도 없어. 그저 지혈하고 소독하고 피 모자라면 수혈하고 15분 간격으로 붕대 갈아매주고 부상이 심한 환자는 후방 병원으로 이송하는 거거든. 핀셋으로 붕대를 집어주다 서로 꾸벅꾸벅 조느라고 허공에서 핀셋이 부딪치면 깜짝 놀라 깨어나고…. 각자 제 피를 100ml 주사기로 빼내서 돌아서서 환자에게 수혈하는 거예요. 피가 있어도 보관할 수가 없으니 그때 수혈은 다 호리반 전사들 피를 즉석에서 빼서 모자라는 사람에게 넣어주는 식이었지. 모자와 군복에 다들 제 혈액형을 써붙이고 다녔거든.

    팔다리가 끊어진 상병자도 많아. 그러면 일일이 밥도 떠먹여야 해요. 대변 보면 닦아줘야 하고. 아휴, 그걸 어찌 말로 다해요. 그래놓고는 금방 다시 행군을 시작하는 거지요.”

    부대에서 군의(軍醫)학교를 다녔다. 군사외과와 내과를 배웠다. 사상교육이 특히 철저했다. ‘3개 기율, 8대주의’를 늘 외고 다녔다. ‘인민의 물건을 건드려선 안 된다. 인민에게 손톱 끝만치라도 폐를 끼쳐서는 인민해방을 위한 군대가 아니다’는 것이 첫째 기율이었다.

    한번은 그가 쓰러진 부상병을 등에 업고 달렸다. 업힌 중에 그 부상자의 몸으로 다시 한 번 탄알이 관통하는 게 느껴졌다. 더욱 죽을 힘으로 달렸다. 막사 안에 내려놓으니 부상자는 이미 죽은 후였다. 몸이 피투성이가 된 것은 물론이었다. 나중 생각하니 업힌 부상자가 아니었으면 그 탄알은 자기 몸을 뚫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중국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기공수련에 열중한 윤금선씨.

    밥은 세 끼를 줬지만 수수쌀 아니면 옥수수밥이었다. 물이 없어 말 오줌을 마시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그냥 행군만도 아니었다. 짐을 져야 했다. 다른 보급수단이 있을 리 없었다. “길쭉한 자루를 기워서 제 먹을 식량을 넣어 각자 어깨에 메요. 이런 말은 한번도 한 적 없지만, 인민군들은 각량이라고 해서 동전을 길쭉한 자루에 넣어 메고 다녔어요. 전사들은 아니고 간부들만 그 돈을 70개씩 자루에 넣어서 멨어요. 그건 국민당이 다스리던 마을에 들어가면 그들에게 물건값을 치르기 위한 돈이었어. 우리는 물 한 모금도 인민의 것을 공짜로 취하는 법이 없었거든요. 이불을 또 한 꾸러미 메고 약통도 메고…간부일수록 짐이 무거웠다구.”

    인민부대 안에서 구타나 징벌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전사들을 진정 금쪽같이 위해줬다.

    “간부는 사병의 머슴이란 생각이 투철해요. 나중 6·25 때 우리나라 군인들이 아랫사람을 구타한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어. 아니 파시스트 군대처럼 왜 사람을 패요? 인민군대는 사병을 팼다가는 군사재판감이지. 조국을 위해 청춘과 생명을 바치러 나온 사람을 패기는 왜 패요?

    장제스 부대는 기계화 부대였어. 미국이 무기를 대줬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보총’이라는 길다란 구식 총밖에 없었어. 팔로군은 그걸로 결국 장제스 부대를 물리쳐서 본토에서 내쫓아버렸지. 그게 1949년 10월1일이었어. 마침내 전쟁이 끝난 거지요.

    그리고 이듬해 한국에서 전쟁이 났지요? 내가 어디로 갔냐고? 그건 차마 발설할 수 없어요. 아직 아이가 넷(3남 1녀)이나 중국에 살고 있으니 그들에게 해가 가면 어떻게 해. 그저 말로는 다 못할 고초를 겪었다고만 해둡시다. 그 후 6·25전쟁이 끝난 1954년에 제대했어요. 그러니 군생활 내내 최전선에만 있었던 셈이지.”

    “내가 우황청심환 팔러 왔나”

    소녀 윤금선은 2000년 서울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아흔둘의 나이로 중국 창춘(長春)에서 돌아가시며 유언을 했다.

    “내가 비록 몸은 여기서 죽지만 죽은 몸일랑 되놈들 사이에 묻지 마라. 가루 내어 송화강에 뿌려라. 뼛가루라도 내 고향 합천으로 흘러가보고 싶다….”

    어머니가 그토록 그리던 고향이란 도대체 뭘까. 돌아가보고 싶었다. 실은 1992년에 서울에 온 적이 있었다. 그 사연을 말하면서 윤금선은 갑자기 눈물을 보였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치열한 전투 얘기 때는 담담하기만 하던 그였다.

    “당시에는 한국에 나오기가 쉽지 않았어요. 친척의 초청이 있어야 했고 준비하는 데만 1년 넘게 내부 조사를 받아야 했거든요. 그런데 비자 시효가 석 달밖에 안 돼요. 청주 사는 친척이 초청해 나오긴 했는데 법무부에서 석 달 만에 떠나래요. 떠나려니 내 마음이 대단히 섭섭하더라고요.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항의했지요. 60년 만에 고향을 찾아온 사람을 이렇게 개 쫓듯이 내쫓는 법이 어디 있느냐, 내가 중국에 밥이 없어 온 것도 아니고 옷이 없어 온 것도 아니다. 내가 무슨 우황청심환이나 팔려고 온 사람인 줄 아느냐. 고향의 기운을 느끼고 고향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왔는데 어찌 이리 천대하느냐고.”

    그때 청와대 비서실에 근무하던 김선호라는 사람과 연락이 닿았다. 김씨는 소설 ‘단’의 주인공인 권태우 옹의 수제자로 기공수련의 고단자였다. 이미 중국에서 그를 한번 만난 적도 있었다.

    김씨는 출국을 연기해준 건 물론, 청와대에 데리고 가 국무위원들의 병을 보게 했다. 그는 중국 의사였다. 군 제대 후 창춘 관성 병원의 중서의(中西醫) 결합의사로 20년 넘게 근무했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함께 공부했고, 게다가 의사 재직 중 세계 최고의 대기공사 엄신 선생 문하에서 기공술을 배웠다. 동서양 의학의 결합에 기공이란 미세한 에너지 의학까지 통달한 기술이니, 김선호씨가 그의 기술을 아까워하고 자랑스러워했을 만하다.

    그해 청와대에 들어가 문화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의 병을 봤던 기억이 있다. 그 가족들의 병도 봤다. 처방도 떼고 음식과 운동법을 가르쳐줬다. 당뇨병이 중해 눈에 합병증이 온 장관에게는 국화꽃을 가만히 오래 들여다보라는 묘방도 내려줬다.

    “내가 특이공능(굳이 말하자면 초능력에 속하는 어떤 힘이다)이 있거든요. 병을 봐줬더니 그 사람들이 신기해하면서 할머니 이걸로 음료수나 사 드세요, 하면서 주머니에서 종이를 몇 장 꺼내줘. 지금 생각하면 그게 수표였다고. 내가 여기 돈을 아나, 그걸 선호가 모아놨다가 나중에 중국으로 별걸 다 부쳐주데요. 당시만 해도 창춘에는 냉장고니 텔레비전이니 하는 게 없었어. 그런 낯선 물건에다 전자레인지까지 다 사서 보내주더라니깐요.”

    김선호란 이는 기공수련이 상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민족정기가 뭉쳐 있다는 ‘소백두산’의 정체를 찾느라고 일부러 중국에 다녀가기도 했다.

    “선호와 함께 역사자료를 뒤져 지린성(吉林省)에 있는 소백두산이라는 곳을 찾아냈어요. 한국서 온 팀들과 거기서 밤새도록 수련을 했지요. 선호는 늘 말했어요. ‘선생님, 이 좋은 기술을 한국에 와서 쓰십시오, 우리나라에 기공을 보급해주세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이공능을 보여주세요. 언제까지 남의 나라에서 허송하고 계실 겁니까’….”

    삼풍백화점 붕괴가 한국행 좌절로

    중국 가지 말고 홍콩에 잠깐 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수속을 해주겠다고 말했지만 때가 마침 대통령 선거철(노태우 대통령에서 김영삼 대통령으로)이라 선호가 하도 바빠 보여 일단 중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김선호에게서 서류가 도착했다. 한국 입국 서류절차를 다 밟아 보낸 것은 물론 “선생님, 예쁜 옷 사 입고 좋은 신발도 사 신고 오세요” 하면서 돈도 상당액 넣어 보냈다.

    “우리 큰아들에게 병이 있었어요. 머리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했는데 수술 중에 운동신경을 건드려버렸거든요. 재수술하고 그러느라고 빚을 졌는데 선호 때문에 그 빚을 갚을 수 있었지요. 얼마나 고마웠던지….”

    시키는 대로 좋은 옷과 신을 샀다. 며칠 후면 한국으로 출발한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불길했다. 받아보니 선호 아내였다.

    “선생님, 백화점이 무너졌어요. 아범이 기표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간다고 나갔는데…. 선생님, 제발 우리 기표와 아범을 살려주세요.”

    삼풍백화점 붕괴였다. 따라서 그의 한국행도 붕괴됐다.

    “더 가까운 사람이 죽은 경험도 많았지만 선호 때처럼 슬프지는 않았어요. 정신이 확 나가서 밤새도록 기도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어. 다음날 자시쯤에야 선호와 애가 건물 더미에 깔려있는 게 어렴풋이 보였어요. 이미 희망이 없데요…. 구하산에 가서 법사 6명을 청해서 선호의 49재를 지내줬지요. 그러고는 한국 올 생각을 접었어요.”

    6년 후 한국정신과학연구소에서 외국인 연구원 자격으로 그를 초청했다. 늘 선호의 마지막 말이 귀에 쟁쟁했다. 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기술을 전해달라는 말. 앞에도 언급했지만 그는 중국 정부가 인증하는 고급 기공사, 특이공능 기공사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마침 출판사 ‘정신세계원’과 인연이 닿았다. 그곳에서 ‘양생 기공사반’을 만들어줘 사람들에게 기공을 가르쳤다. 나이를 초월한 젊음과 비상한 정신력의 원천이 기공에 있다는 것을, 엄신 선생에게 배운 이론과 실기를 가르쳤다.

    다섯 해 만에 400여 명의 제자가 생겼다. 제자들은 스승의 귀화를 간절히 원했다. 죽은 선호와 똑같이 소중한 기술을 조국에 풀어놔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는 지난해, 고국을 떠난 지 60여 년 만에 대한민국 국적을 되찾았다. 귀화해 법적 한국인이 됐다. 귀화하면서 방학동 네거리에 ‘난강(暖江·윤금선의 호)기공 양생 수련센터’문을 열었다. 며칠 전엔 제자들이 개원 1주년 잔치를 알뜰하게 마련해줬다. 그게 너무 고마워 그의 눈엔 또 눈물이 핑글 돈다.

    一日 一食

    그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난다. 그 시간에 수련한 지 아마 수십년이다. 음식은 하루 한 끼만 먹는다. 복기(復氣)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실은 인간은 음식을 먹지 않고 우주의 기를 흡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주장이다(일반인에게 권할 일은 못 되지만 어쨌든 음식량을 적게 섭취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란다).

    고기는 물론 입에 대지 않고 멸치조차 먹지 않은 지 오래다. 중국에선 오신채도 취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워낙 마늘 들어간 음식이 많아 손님이 오시면 유난떨지 않고 그냥 먹는 편이다. 단 하루 한 끼 이상은 먹지 않는다. 그 한 끼도 고구마나 누룽지 같은 걸로 가볍게 거쳐 간다. 허기지면 잣 몇 알 넣고 바나나를 갈아서 조금 마실 뿐이다. 그래도 그는 기운이 넘친다. 인간은 음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물구나무서기를 10분씩 하고 양다리를 가뿐히 180도로 펼쳐놓는다. 비호같이 산꼭대기에 오르고 6시간을 쉬지 않고 강의해도 지치는 걸 모른다. 피부와 머리칼은 거의 청년 같다. 윤기 흐르고 탄력 있다.

    “목욕탕에 가면 다들 머리칼도 만져보고 몸매도 만져봐요. 뭘 먹길래 이렇냐고 물어요. 이렇게 되는 방법을 공짜로 가르쳐줄테니 수련원에 나오라고 해도 다들 안 와요.”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건 인시(寅時·3∼5시)가 우주의 황금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루 중 그 시간대가 양중의 양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아까운 시간을 대개 잠으로 허비해버린다. 그게 그는 몹시도 안타깝다.

    중국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윤금선씨는 손가락 하나만으로 물구나무서기를 10분씩 하고, 양다리를 가뿐히 180도로 펼쳐놓는다.

    “인시가, 단전 기가 가장 활력 있을 때예요. 오늘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데 그 시간에 잠을 자다니. 생활시계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한국은 개인사업이 대단하니까 밤에 늦게 자느라고 3시에 못 일어나지요. 그러나 중국인들 중엔 인시에 일어나 도 닦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그는 고기를 많이 먹는 민족,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민족은 공업(共業)이 많이 쌓인다는 말도 했다. 내 생각에 그 말은 새로운 세기의 혼돈스러운 삶에 지표가 되는 이데올로기가 될 듯했다. 따로 자연보호니 환경인식이니가 필요 없는 선언이었다.

    “사람은 채식하고 소식해야 해요. 고기의 사료를 대느라고 지구에서 기른 채소의 절반 이상이 든다고 하잖아요. 채식을 하면 양식이 적게 들어요. 많은 사람이 나눠 먹을 수가 있어 좋고 개인이 병 없이 살 수 있어서 좋고 일부러 비육동물을 기르지 않으면 생태 평형이 이뤄져서 좋지요. 소식하고 채식하면 탐심이 없어져요. 탐심이 없어지면 만족감도 절로 따라오지요. 고기에는 죽으면서 품은 그 짐승의 한이 배어 있어요. 그게 우리 몸에 자꾸 쌓여서 좋을 일이 있겠어요?

    우주만물과의 대화

    노인들이 한을 품고 죽게 해선 안 돼요. 돌아갈 때 웃으며 화평하게 가는 노인이 많은 나라가 잘되는 나라예요. 불행하게 세상을 뜬 노인이 많으면 나라에 재난이 그치지 않게 돼 있어요.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고 힘없고 무력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나라가 복 받고 잘살 거예요. 그게 안 되면 이 나라가 아무리 전자제품을 잘 만들고 많이 팔아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에요. 원한을 품고 저세상으로 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 원한은 이 땅에 남게 돼요. 그 신호(시그널)가 나라 안에 공업이 돼서 남아 있으면 후손이 잘될 수가 없어요…. 자연에 자꾸 따스한 사랑을 줘야 해요. 그 따스한 사랑이 결국 세상을 화평하게 만들거든요.”

    이 말을 그는 아주 조용하게 했다. 기공을 모른다고 그의 이야기를 백일몽으로 취급해버릴 건가. 그는 세상 모든 생물이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니 암만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아니 생물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아침마다 높이 쳐놓고 뛰어넘는 고무줄에게도 얘기하고 빈 방과도 얘기를 나누고 빗소리에게도 말을 건다. 중국을 떠날 때 수련하던 곳에 서 있던 소나무에게도 작별인사를 하고 왔다.

    “안녕, 이번에 가면 몇 년 있다 오게 될 거야. 그동안 잘 지내렴.”

    분별심이 없기에 우주만물과 의념, 의식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그의 집 뜰엔 들고양이 가족이 새끼를 낳아 여남은 마리 모여 살고 있었다. 도무지 갈 생각을 안 해 그는 오늘 아침 그들에게 간곡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돈을 잘 벌지를 못한단다. 그러니 너희들이 먹어대는 식량을 감당 못하겠다. 제발 다른 집에 가다오. 미안하다 얘들아.”

    어느 날은 자다가 목이 말라 깨어보니 화초에 물 주는 걸 잊어버려 화분이 바짝 말라 있었다. 얼른 물을 주면서 사과했다. 미안하다. 얼마나 목이 탔겠니.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것은 외로워서가 아니다.

    “주변에 있는 사물을 천대해 보세요. 불만을 가지는 감각이 반드시 있거든요. 반대로 아껴주고 사랑해주면 주변이 반드시 환한 감각으로 보답을 해오거든요. 노인들을 만나면 늘 그렇게 권해요. 대화상대가 없어 외롭다고 자식들 원망하지 말고 꽃이라도 심어놓고 말을 걸어보라고. 그러면 집안에 화기가 절로 생겨난다고.”

    짐작했겠지만 그가 연마한 엄신기공의 근본은 신체수련이 아니다. 덕성수련이다. ‘덕성은 기공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황금열쇠다.’

    “기공수련자가 덕을 쌓지 않으면 모래를 삶아서 밥이 되라는 것과 같아요. 심성수련을 경시하고 공법에만 뜻을 두면 아무래 오래 수련해도 기술이 늘지 않아요. 모든 사람이 내 가족이요, 모든 만물이 내 스승이다, 이것이 엄신대사님이 요구하는 덕성입니다. 책갈피 하나도 나를 도와줬으니 감사하고 물컵 하나라도 나를 편하게 물 마시게 해줬으니 감사하다. 그래서 소중히 다루고 아껴준다. 그것이 덕성의 기본이 되는 겁니다.

    신체보다 마음 수련이 7이에요. 고수가 되면 마음이 9라고 하지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특이공능을 개발하고 천목(天目)을 열까를 먼저 생각해요. 그러나 천목은 누가 열어줘서 열리는 게 아니에요. 덕성이 높아져 내 몸의 진기가 날마다 쌓이는 어느 날 저절로 열리는 거지.”

    창춘병원에 근무할 때 그에게는 지병이 있었다. 만성 위염에 관절염에 목디스크에 중허증이라고 귀에서 소리가 나는 증세까지 있었다. 그러던 중 병원으로 날아온 기공수련 프로그램 안내서를 우연히 봤다. 1979년 처음 배운 건 학상장 기공이었다. 그걸 마스터한 후 다시 엄신대사를 찾아가 그에게 수련을 받았다.

    기공에 관한 공식 명칭도 여럿 얻었다. 중국기공과학연구회 특별회원, 지린성 기공과학 연구회 상무, 지린성 학상장 기공위원회 이사장 등. 기공을 배운 이후 약을 모르게 됐다. 지병이 싹 사라졌고 외려 몸이 젊어졌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서울 와서 롯데월드인가 아이들 노는 기구 많은 곳에 갔는데 공중에 빙빙 도는 그게 타고 싶더라고요. 머리가 허연 노인이라고 표를 안 끓어주는 거예요. 그건 50세까지만 타는 게 규정이래요. 하도 재미가 있을 것 같아 이쪽에 와서 모자를 하나 샀지요. 흰 머리칼을 모자 안에 다 감췄더니 암말 않고 표를 끊어주데요. 곁엣사람은 왝왝 구역질을 하는데 나는 좀더 탔으면 싶더라고요.”

    병원에서 신체나이를 측정해보니 45세 정도로 나오더란다. 젊은 시절 그토록 모진 고초를 겪었건만 그의 얼굴은 화평하고 웃음 가득하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이세상을 뜨는 그날, 미소를 띠며 단정히 앉아 ‘그동안 고마웠어요. 다들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직인사를 하고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생사관이다. 세상이 고해라지만 인간으로 탄생한 그 자체가 굉장한 축복인데 감사하고 가는 게 온당하지 않겠냐는 거다.

    세 가지 커다란 설움

    “내가 오랫동안 병자들하고 같이 지낸 사람 아닙니까. 곁에서 지켜보니 몸 아픈 게 가장 큰 고통입디다. 좀 모자라게 먹고 좀 춥게 입는 것은 아픈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돈도 없고 지위도 없어요. 중국 가면 혁명 유공자로 연금도 나오고 아무도 날 괄시하지 않지만 한국에선 중국교포를 좀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지요. 미국이나 일본 교포하고는 대우가 다르더군요.

    나는 일생 세 가지 커다란 설움을 당하며 사는 사람이에요. 어려서는 식민지 백성이라서 설움, 중국 가서는 소수민족이라는 설움, 돌아와서는 교포라는 설움. 가장 행복하고 충만했을 때가 그런 설움 없는 전쟁 중의 군대시절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비록 가진 것 없이 나이 먹었어도 나는 70 평생 살면서 터득한 바른 길을 알고 있어요. 그걸 죽은 선호 말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이세상에 울고 태어났는데 그리고 살면서 울 일도 많았는데 갈 때는 최소한 울지 말자는 겁니다. 나이 들면 자기 인생을 미소를 띠고 바라보면서 편안하게 죽을 준비를 해야지요. ‘나는 이렇게 사니까, 이렇게 먹으니까, 몸이 나날이 편하고 좋아지더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싶어요.

    여사님(그는 나를 ‘여사님’이라는 낯선 호칭으로 불렀다)은 영혼이 맑은 사람이지만 정기신(精氣神)이 많이 약해졌네요. 나는 이 나이에도 정기신이 충만해서 다 못쓸 정도로 남아도는데…. 어렵지도 않고 돈이 들지 않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도 아니에요. 기공을 해보라면 여기 사람들은 다들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왜들 그렇게 시간이 없는 거지요?”

    돈벌이 하느라고 시간이 없는 거라면 기공수련이야말로 진짜 돈벌이 아니냐고 그가 묻는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면 병원 갈 돈이 절약되고 국가적으로도 의료비 지출을 줄일 수 있어 큰 이득이 될 게 아니냐는 거다. 중국엔 의료비 지출을 줄이려 각 마을끼리 막대그래프를 그려가며 경쟁하는 제도가 있단다. 그 제도가 기공이나 체조로 건강을 지켜 의료비를 줄이자는 붐을 조성한다니 시민사회나 정책입안자들이 귀기울일 만한 지적이다.

    가난한 청년과의 결혼

    친정의 두 오라비는 다 팔로군에 나가 죽었다. 살아 돌아온 건 딸인 윤금선뿐이었다. 아들 대신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했다. 당시는 가부장제가 철저해 딸이 부모를 모시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정 부모님을 모시는 데 반대하지 않을 조선 사람을 찾았다. 병원의 동료가 가난한 청년을 소개했다.

    “집에 찾아왔어요. 나가보니 한겨울인데 얇은 재킷에 발가락이 나온 양말을 신고 서 있어요. 그게 마음이 찡해서 결혼을 결심하고 말았죠. 나중 알고 보니 그 재킷조차 형에게 빌려 입고 온 거더라고요.”

    결혼하니 양쪽 부모 형제 합해서 딸린 식구가 11명이나 됐다. 아이가 태어나자 식구 수는 더 늘어났다. 그는 창춘병원의 중견이었지만 공산사회의 의사 급료는 낮았다. 그는 전쟁에서 대공을 세 개나 따낸 유공자로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그렇지만 식구가 하도 많아 살림은 넉넉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들이 병이 났고 수술이 잘못됐고 그도 몸이 아팠다.

    “내가 기공 공부를 시작한 건 양의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걸 느꼈기 때문이에요. 양의는 단순히 주사 놓고 약 바르고 자르고 깁고 하는 것만 알잖아요. 한의를 배우면서 좀더 미세한 것을 알게 됐어요. 한의 자체가 기공과 연관되어 있었기에 자연스레 기공으로 관심이 흘러갔죠.

    중국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그의 집 뜰에 살고 있는 들고양이 가족. 이들과 대화하는 윤금선씨.

    ‘황제내경’에 보면 오운육기라는 게 있는데 그냥 의학책이 아니에요. 그 가운데 기공이 들어 있었던 거예요. 공부하면서 거기 무궁무진한 동방의 전통문화의 보물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노자 도덕경 80장 안에 들어 있는 말도 모두 기수련에 관한 얘기라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본초강목’을 쓴 이도 기공을 통해 비밀을 알아낸 거더군요. 백 가지, 천 가지 약의 쓰임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 약은 심경으로 들어가고 이 약은 간경으로 들어가고 감초는 어느 경락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일일이 실험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현대해부학에서는 경락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공 공능상태에서는 다 느껴지거든요. 양의사는 피를 빼서 확인하고 초음파 진단을 하고 기계를 이용해 객관적 확인을 하지만 한의사는 맥을 짚고 혀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기공은 완전히 의식으로 상태를 보는 겁니다. 손으로 이렇게 하는 것은 사실 필요 없는 동작이고 완전히 마음으로 보는 거지요.

    내가 기공을 배운 과정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경제적 여유도 없었고 시간을 쪼개기도 힘이 들었죠. 중국은 땅덩이가 하도 넓어 기공공부하기 위해서 사흘 밤낮을 기차를 타고 가야 했거든요. 1주일 공부를 위해 1주일을 차로 달려가야 했으니…. 그러나 양의와 한의와 기공을 다 해보니 그 효과를 누구보다 잘 알겠어요. 그래서 나는 의사들이 이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양의로 안 되면 한의 기술을 쓰고 그게 안 되면 기공을 또 같이 쓰라는 겁니다. 종합치료를 하면 정말 빠르고 훌륭하게 치유되거든요.”

    “암세포는 굶겨야 해요”

    중국 병원에서 암치료를 할 때는 단식이 포함돼 있었다. 말기암일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초기 진단을 받았을 때는 절대로 벽곡(?穀)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실제 벽곡으로 암환자를 여럿 치유했다. 암에 걸렸으니 체력을 보충해줘야 한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소식과 벽곡이 어느 약보다 낫다는 걸 직접 경험했다.

    “암세포는 굶겨야 해요. 반벽곡도 있고 과일만 먹는 법도 있지요. 건강한 사람도 가끔 단식을 하면 몸이 더 맑아져요. 나는 일일 일식(一日 一食)인데도 가끔 완전단식을 행합니다. 에너지는 먹는 것에서만 얻어지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을 필요가 있어요.”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무슨 수로 다 옮기랴. 화가 나면 그릇에 물을 떠놓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라. 물기운이 마음의 화(火)기운을 곧 다스려줄 것이다.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지녀라. 불편하거든 자기가 여섯 살인 아이(남자는 일곱 살)라고 생각해라! 그때의 몸과 마음의 생기와 약동을 떠올려봐라. 인생에 대해 미소를 지어라. 남에게 항상 좋은 파동을 전하라! 이런 충고들은 되씹을수록 주옥같다. 굳이 고급기공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도 우리 삶에서 유념할 만한 의미가 풍부하게 담겼다.

    오래 한국을 떠나 살던 사람이 본 우리는 어떤가. 그의 대답은 이랬다.

    “뭐랄까, 사람을 너무 ‘사용주의’로 대해요. 필요하면 당겼다가 필요 없으면 밀어 던져버린달까…. 중국 사람들이 텁텁하고 수더분하다면 여기 사람들은 너무 매끄러워요. 물론 민족마다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깊이 사귈 수가 없어요. 깊은 속을 안 보이고 마음이 자주 변해요. 거리가 깨끗하고 중국에 비해 공기가 맑고 도둑도 없어 처음에는 여기가 바로 천당인가 싶었는데….”



    그 지적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저건 우리가 일쑤 일본 사람들을 향해 내뱉던 지적과 닮았구나. 행복이란 게 뭔가. 건강과 죽음과 전쟁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숱한 생각을 다스리지 못한 채 윤금선 선생의 집 대문을 나선다.

    서울에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기온이 청량하고 하늘이 높아졌다. 우리가 전장으로 내보냈던 인민군 소녀는 죽지도 않았고 늙지도 않았다. 돌아와 외려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얘기하며 따스하게 손을 내민다. 역시 인간으로 태어나 산다는 건 그의 말처럼 ‘감사해야 할 대사건’임에 틀림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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