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3.01 통권 558 호 (p120 ~ 137)
[단독 공개]

전 북한 핵심 관료 육필수기 3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과 ‘6군단 사건’
KGB 비밀문건 들고 주석궁 찾은 김정일, “이젠 내가 군을 쥘 때가 됐습니다”
 

만경대학원 출신을 제거하라

최고사령관에 추대된 김정일은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군부 내 쿠데타 조직 척결사업을 시작한다. 사실상 최고사령관으로서 가장 먼저 벌인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사건을 가리켜 흔히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이라고 한다. 앞서 설명했듯 프룬제 아카데미아는 소련의 이름있는 군사종합대학으로, 무력부 보위국이 소련 KGB와 연결돼 있는 스파이들이라면서 숙청한 사람들 중 여럿이 이 대학 유학생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으로부터 최고사령관직을 넘겨받기 바쁘게 군부 장악과 정돈을 위해 이 사건을 최대한 이용했다. 물론 인민무력부도 당 조직부 13과로부터 당 생활지도를 받게 돼 있고 더욱이 당 조직부 간부4과에서 군 장령 인사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의 당 조직비서직은 이전부터 최고사령관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오진우가 인민무력부장 권좌에 앉아 있는 이상 김정일의 군부 장악은 완벽하다고 볼 수 없었다. 오진우는 김일성의 최측근이었고 더욱이 당내 반대파들을 물리치고 김정일을 당 조직비서로 내세우는 사업에서 공헌한 평생의 은인이었다. 김정일은 표면상 인민무력부장의 의견을 존중했고 오진우는 심술과 엄살을 배합해가며 교묘히 권한을 유지했다. 오진우의 권한은 전시체제를 유지하는 북한의 인민무력부장으로서 군만이 아닌 당, 정무원도 칼질할 만큼 막강했다.

매년 상반기, 하반기로 나누어 국방위원회 명령으로 진행되는 인민무력부 군수생산총회는 전국의 도·시·군당 책임비서들은 물론 제2경제 산하 연합기업소 책임자들도 다 참가하는 회의였다. 주석단에서 회의를 집행하던 오진우는 군수생산계획 미달자들이나 혹은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은 회의하다 그 자리에서 해임하고는 김정일에게 이러이러해서 목을 잘랐다고 전화 통보만 하는 정도였다. 김일성은 이러한 오진우를 통해 군부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오진우는 “무력을 쥔 군부 장령급에 대한 인사는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만경대 혁명열사유자녀 학원 출신을 많이 선발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항일투사나 김일성과 연고가 있는 인물의 자녀들이었다. 수령 신격화가 시작되지 않았던 김일성 정권 초기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김일성과 항일투사들의 지위가 비교적 평등했다. 그런 까닭에 투사들 자녀들은 수령의 아들이라고 어려서부터 사치와 자만자족을 일삼던 김정일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따돌리기도 했다.

이러한 악연은 김정일에게 증오심과 야심을 키운 영양소가 되었다. 하여 1970년대까지 권력 일선에 있었던 항일투사들을 의식한 김정일은 당 조직비서 자리에 앉자마자 그들 자녀의 권력장악 의도를 뿌리째 뽑기 위해 중앙당에서 근무하던 항일투사 자녀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내각 부수상을 하던 김일의 아들과 민족보위상을 지낸 최현의 맏아들, 단 두 명만을 허용했다. 다른 항일투사 자녀들은 대부분 정무원이나 중앙기관에서 현상유지나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소련·동독 군사유학생 700명 체포

그래도 아직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던 김정일에게 다음으로 시급한 과제는, 김일성이 군부 장령으로 인사조치한 만경대학원 출신들을 솎아내는 것이었다. 김정일은 KGB 문건을 이용해 그 숙제를 할 때가 왔다고 계산했다. 김정일은 보고서를 작성한 인민무력부 보위국장 원응히 중장에게 반혁명 분자들을 무자비하게 색출,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인민무력부 보위국 요원들은 ‘반항하거나 도주하면 현장에서 사살한다’는 행동 지침을 내걸고 대대적인 체포작업에 들어갔다.

1992년 중반 우선 군 고위급 인물 수십 명이 긴급 체포됐다. 4군단 참모장으로 있다가 위르쉴로프 총참모부 아카데미아 2년제 과정을 마치고 인민무력부 부총참모장으로 승진한 상장 홍계성, 김일성의 외가 친척인 평양시당 책임비서 강현수의 아들인 인민무력부 작전국 교도지도국(게릴라 부대) 담당 부국장 강운용, 소련 주재 북한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다가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국장으로 일하던 김학산 등이었다.

이후 조사는 총정치국, 총참모부는 물론 각 군단 사령부와 사단, 여단에서 지휘군관으로 근무하는 소련 군사대학 유학생으로 뻗어나갔다. 국방분야 연구소의 수재급 인재들이나 장산병원(고급군관병원), 어은병원(장군병원), 김형직 군의대학, 조선인민군 11호 병원 등의 고급 군의관들도 폭풍을 피할 수 없었다. 이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숙청으로 인민무력부 전반이 심대한 인적 손실을 입어 지휘체계가 거의 마비될 정도였다.

KGB가 실제로 포섭한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했으며 그들에게도 당장 북한 정권을 뒤집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KGB의 미인계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서약서에 지장을 찍은 사람도 있었고, 비록 서약서에 서명은 했지만 민족의식을 가지고 양심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당에 더욱 충성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늘 “한번 변절한 자는 열 번 변절한다”고 말하는 김정일이 그들을 용서할 리 없었다. 무력부 보위국은 KGB에 서약을 했건 안 했건 단지 소련 및 동독 군사대학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700명에 가까운 인원을 체포하여 매우 혹독하게 예심하고 고문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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