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4.01 통권 559 호 (p620 ~ 635)
[역사 탐구]

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세종의 위업 살리려 나는 살았고 세종의 유훈 지키려 그는 죽었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신숙주(申叔舟·1417~75)와 성삼문(成三問·1418~56)은 세종의 전폭적 지원 아래 집현전에서 ‘신흥강국 조선’의 꿈을 현실로 옮긴 당대 최고의 엘리트 학자였다. 두 사람에게 세종은 현실 세계를 초월한 ‘영원한 주군’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으로 가족보다 더 가깝던 두 사람의 우정은 깨지고 신숙주는 부귀영화의 길로, 성삼문은 ‘사육신’의 길로 갈라선다. 신숙주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옛 동무 성삼문을 보며 회상에 젖는다.

1445년경 중국 화공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신숙주의 초상화 (보물 제613호).
2002년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성삼문.

“네가 어떻게 그 말씀을 잊을 수 있단 말이냐!”

두 손이 오랏줄에 묶인 채 이미 만신창이가 된 성삼문이 나를 쏘아보며 던진 한마디였다. 시뻘건 쇳조각이 배꼽 위에서 지글지글 끓는 상태에서도 그는 태연히 “다시 달구어 오라, 나으리(세조)의 형벌이 참 독하다”며 독기를 부렸다. 그의 허벅지는 쇠꼬챙이로 뚫린 지 오래고, 팔도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도승지로서 주상(세조) 앞에 입시한 내게 그가 던진 말은 내 가슴을 깊숙이 뚫고 들어왔다.

“옛날에 너와 더불어 집현전에 숙직할 때 영릉(英陵, 세종)께서 원손(元孫, 단종)을 안고 뜰을 거닐며 말씀하지 않으셨더냐. ‘내가 죽은 뒤라도 너희들은 이 아이를 잘 돌보라’는 그 말씀이 아직 귀에 쟁쟁하거늘, 네가 이토록 악할 줄 미처 몰랐다.”(이긍익, ‘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396)

“도승지는 뒤편으로 피하라.”

곤혹한 처지의 나를 구해주려는 주상의 배려였다(‘연려실기술’).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 매죽헌(梅竹軒, 성삼문의 호)에게 따져묻고 싶었다. 세종의 ‘잘 돌보라’는 말씀이 꼭 왕위에 앉혀놓으라는 말씀이었는지를. 오히려 당신 사후에, 또는 적어도 2년이 겨우 지난 뒤 문종께서 훙(薨)하셨을 때, 사직을 보존할 수 있는 분에게 왕위를 돌렸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세종께서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임금과 세자에게 유고가 있을 시 반드시 왕자가 섭정하라”(세종실록 32년 1월18일조, 이하 ‘32/1/18’ 형태로 표기)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런데 문종께서 승하하셨을 때 김종서 등은 ‘유훈’을 어기고 왕자, 곧 수양대군이 아닌 혜빈 양씨(楊氏, 세종의 후궁. 나중에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됨)를 내세우지 않았던가(문종실록 2/5/14). 그 후 단종조에 이르러 수양께서 섭정하게 되셨지만, 처음 잘못 끼운 단추는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켰다.

박팽년(朴彭年). 그는 나와 동갑내기(1417년생)로 평소 조용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녀 주위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25세 때(세종 24년, 1442년) 삼각산 진관사에서 박팽년과 나, 그리고 한 살 연하의 성삼문이 왕명을 받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할 때, 우리는 틈만 나면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

성삼문이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하면, 박팽년은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좇을소냐”(‘추강집’)라고 받는 식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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