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01 통권 563 호 (p290 ~ 307)
[조성식 기자의 ‘실전 대련’ 인터뷰]

75세에 송판 깨는 美 태권도 황제 이준구
“내 주먹은 바람, 내가 인정한 유일한 고수는 ‘싸움꾼’ 이소룡”
 

기자에게 옆차기를 하는 이준구씨.

“이소룡 죽음은 타살”

그는 지금까지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73년 제작된 홍콩영화 ‘흑권’과 1980년 한국에서 만든 ‘돌아온 용쟁호투’다. 이소룡이 주선해 출연한 ‘흑권’은 한국에서도 개봉됐다. 그런데 그해 이소룡이 죽었다. 33세였다.

“홍콩에서 영화 촬영이 끝나고 미국에 돌아간 게 7월6일이에요. 이소룡이 공항까지 나와 배웅했지요. 그런데 7월21일엔가 죽었어요. 죽기 전날 그가 미국으로 전화를 걸어왔어요. 영화 편집작업이 끝났다면서 감독이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만들려는 걸 자기가 싸워서 나를 주연으로 만들었다고, 신이 나서 떠들더라고요. 다음날 여자(친구) 집에서 죽었지요.”

▶이소룡의 사망원인에 대해선 약물중독설 등 지금까지도 뒷말이 많아요. 혹시 죽기 전 무슨 이상한 조짐이 없었나요.

“노! 그건 누가 죽인 거지. 난 그렇게 봐요.”

그는 이소룡의 출현으로 사업상 막대한 피해를 봤다는 홍콩 배우의 이름을 꺼내며 추론의 근거를 댔다. 하지만 말끝에 “확실한 건 모른다”고 덧붙였다.

▶일본 극진가라테의 최영의씨와는 만난 적이 없나요.

“1967년인가 한 번 봤어요, 일본에서. 그런데 별로 반가워하지 않더라고. 난 그래도 같은 한국인으로 가라테 하는 사람이라고 일부러 찾아갔는데. 악수만 하고 말았지.”

▶‘나보다 고수’라고 인정한 무술인이 있다면.

“이소룡이에요. 몸이 빠르고 뚝심 있고 힘이 좋았으니. 호리호리하지만 강철 같은 몸이었어요. 참 타고난 무술인이었지요. 나 같은 사람은 노력해서 된 거고.”

이씨는 2000년 이전까지는 한국에 거의 오지 않았다. 미국이 주 활동무대인데다 소련 등 세계 각국에 태권도를 보급하느라 바쁜 탓도 있었지만, 한국 태권도계와의 불편한 관계도 한 이유였다. 정통 태권도계에서 보면, 뒤꿈치를 든 채 주먹을 지르고 음악에 맞춰 발레하듯 발차기를 하는 준리 태권도는 이단이었다.

“한국 태권도계는 지금도 나를 싫어하지. 내가 전통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태권도를 개발했으니.”

1972년 초대 대한태권도협회장이자 ITF(국제태권도연맹) 총재인 최홍희씨가 유신(維新) 반대 명분을 내걸고 캐나다로 망명한 후 박정희 정권은 ITF에 맞설 국제기구 창설을 지원했다. 이듬해 탄생한 WTF(세계태권도연맹)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이야 올림픽에 참가하는 WTF의 세력이 훨씬 크지만 당시만 해도 ITF가 주류였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과 기네스북에 태권도 창시자로 이름이 올라 있는 최씨의 영향력 덕분이었다.

최씨 망명 이후 한국 태권도계의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사람은 청와대 경호실장 보좌관 출신인 김운용씨였다. 박종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김씨는 대한태권도협회장,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국기원장이라는 태권도의 빅3 단체장을 모두 거머쥐고 이후 30여 년간 태권도계의 황제로 군림했다. 반면 ‘친북인사’로 낙인찍힌 최씨는 한국 태권도사(史)에서 그 흔적이 거의 지워졌다.

태권도와 ‘코리안 가라테’

이씨는 김운용씨를 좋지 않게 평했다.

“그는 태권도의 ‘태’자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나는 평생 태권도 이미지를 고양하기 위해 뛰었는데, 그 사람이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관련 비리에 연루되는 바람에 태권도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어요.”

그는 최홍희씨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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