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5.01 통권 488 호 (p374 ~ 401)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전쟁은 술로 시작됐다
 
[ 제2편 서울 함락 ]

38선에서 서울에 이르는 최단거리는 개성-문산 축선(국도 1호선)이지만, 이곳에는 임진강이라는 자연 방어선이 있다. 하지만 38선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길은 큰 강이 없는데다, 동두천 축선(국도 3호선)과 포천 축선(국도 43호선) 두 개가 있다. 이런 이유로 육본은 인민군 주공(主攻)이 의정부 축선에 투입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육본은 ‘작전명령 38호’에서 ‘동두천과 포천에서 적을 막다 여의치 않으면 동두천과 포천 축선이 합쳐지는 의정부에서 최후 결전을 벌인다’는 결정을 내려 놓았다. 이곳 방어는 전방 사단장 중 유일한 장성인 유재흥(劉載興·당시 29세) 준장이 이끄는 7사단이 맡았는데, 7사단 예하에는 한국군 최선봉이자 최정예인 1연대(동두천)를 필두로 3연대(예비)와 9연대(포천)가 배속돼 있었다. 그만큼 7사단이 육군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그런데 전쟁은, 육본의 부대 이동 명령에 따라 7사단이 3연대를 수도경비사령부(사령관 李鍾贊 대령) 예하로 보내놓고, 온양에 있는 2사단 25연대가 배속돼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터졌다. 당시 7사단도 비상경계령 해제에 따라 상당수의 장병을 외출·외박 보낸 상태였다. 7사단 사(師團史)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로 기록될 ‘서울 함락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6월25일 새벽 4시 국군 7사단 1연대 지역에 인민군이 쏜 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5시30분이 되자 인민군 105전차여단 예하 107연대 소속 전차 40대가 동두천 축선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이권무(李權武)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4사단이 따라 들어왔다. 비슷한 시각 국군 9연대가 포진한 포천 축선으로는 105전차여단 예하 107연대가 진격해오고, 그 뒤로 이영호(李英鎬)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3사단이 진격해왔다.

이때 인민군이 구사한 것이 소위 말하는 ‘일점양면(一點兩面) 전술’과 ‘양익포위(兩翼包圍) 전술’이다. 일점양면 전술은 인민군 1개 연대가 정면에 있는 국군 1개 연대를 향해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사이, 다른 연대는 인접 도로로 우회해 같은 시간에 국군 연대 옆구리로 ‘훅’을 날리는 연대 단위 전술이다.

양익포위 전술은 2개 사단이 협동해서 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 것. 인민군 6·1사단이 국군 1사단을, 인민군 3·4사단이 국군 7사단을 포위해 각각 섬멸한 후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군 2·12사단이 국군 6사단을 공격해 춘천과 홍천을 점령한 것이 양익포위 전술이다. 이러한 포위전술 덕분에 개전 첫날 인민군은 동두천과 포천을 각각 장악할 수 있었다.

“지금 취침 중인데…”

이날 술에 취해 잠든 채병덕 총참모장을 깨운 것은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이었다. 새벽 5시20분쯤 임중령이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있는 총참모장 관사로 전화를 걸자, 전속부관인 나(羅)모 중위가 전화를 받았다. “총참모장 각하를 대주시오.” “지금 취침중이신데 급한 일입니까?” “그렇소. 우리 7연대 전방에 포탄이 낙하하고, 인민군이 대거 남침중이오.” 이 전화는 나중위가 거세게 혀끝을 차는 소리를 끝으로 잡음을 내다 끊어지고 말았다.

작취미성(昨醉未醒)의 채병덕 총참모장이 110㎏의 거구(巨軀)를 흔들며 의정부에 있는 7사단 사령부로 달려온 것은 이날 새벽이었다. 인민군의 전면 남침임을 확인한 채총참모장은 수도경비사로 배속한 3연대를 다시 7사단으로 재배속시켜, 포천 방면을 방어하는 9연대를 지원케 했다. 육본의 배속 변경 명령에 따라 서울에 와 있던 2사단 예하 5연대와 수경사 예하 18연대도 7사단에 배속시켰다.

이날 전쟁 발발 소식을 들은 2사단장 이형근(李亨根·당시 30세) 준장이 대전에서 서울 육본으로 올라왔다. 이때 매우 당황한 채총참모장이 이준장을 보고 “잘 왔소. 곧 의정부로 가서 반격을 해주시오”라고 청했다. 채총참모장은 경황이 없는 듯 광주에 있는 5사단(사단장 李應俊 소장·당시 60세)과 대구의 3사단(사단장 劉升烈 대령·당시 60세)에 대해서도 총출동 명령을 내렸다. 외출·외박을 간 병력이 모이는 대로 달아오른 전장에 투입하는 것을 ‘축차(逐次)투입’이라고 하는데, 축차투입은 ‘선두를 따라 계속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들쥐 떼’와 같은 결과를 낳기 때문에 군사학에서 첫번째 금기 사항으로 꼽힌다.

채총참모장의 지시가 축차투입이라고 판단한 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날이 저무는데 적정과 지형도 모르는 후방 부대를 축차투입해서는 안 된다. 후방에서 올라오는 3개 사단은 영등포에 집결시켜 한강 방어선을 펼치고 이어 질서 있는 반격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범석·김홍일·이응준·김석원 등 50∼60대 원로 장군들도 후방에 새로 방어선을 만들자는 이준장 의견에 동의했으나, 채총참모장은 “대통령 명령이다. 2사단은 당장 의정부로 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형근 준장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군사영어학교 동기로 이준장은 대한민국 군번 제1번인 10001번이고, 채총참모장은 10002번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인데 채총참모장은 49기, 이준장은 56기였다. 일본군에서 최종 계급은 이준장은 대위, 채총참모장은 소좌였다. 채총참모장은 일본군에서 후배인 이준장이 한국군에서 선임 군번을 받은 것을 매우 못마땅해했다. 따라서 채총참모장은 먼저 진급했음에도 사사건건 이준장과 부딪쳤다. 6·25전쟁 개전 첫날 두 사람의 다툼도 거의 싸움으로 변질되다시피 했다.

축차투입

채총참모장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며 성을 낸 데다가, ‘계급 끝발’에 이준장은 밀려 의정부 7사단으로 갔다. 이때 7사단 9연대를 지원하러 달려간 7사단 3연대의 연대장은 이준장의 동생인 이상근 대령이었다. 유재흥 7사단장은 이준장을 붙잡고 “동생을 봐서라도 역습해달라”고 부탁했다. 군 지휘관은 언제나 냉정해야 하는데 여기서 이준장은 흔들렸다. 동생을 생각한 그가 축차투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접고 2사단 예하 부대를 축차투입해버린 것이다.

채총참모장의 일관된 주장은 “역습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6월26일) 7사단은 동두천으로 진격하고, 2사단은 포천 쪽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7사단은 순조로이 동두천을 탈환했다. 단지 몇 시간 만에 승리를 얻었는데, 이것이 언론에 ‘마치 국군이 북진에 성공한 것’으로 과장 보도되었다. 이날 방송은 “국군의 총반격으로 인민군은 퇴각하고 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다”라고 떠들었다.

하지만 포천으로 진격한 2사단은 중과부적으로 인민군 3사단에 밀려, 의정부 방향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2사단이 대오도 없이 흩어져 의정부로 도주해오자 인민군 3사단의 선두가 2사단 꼬리를 물고 6월26일 저녁 의정부로 진입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동두천까지 진격한 국군 7사단은 퇴로가 차단됐다고 판단하고 일부는 의정부를 뚫고 창동으로 철수하고, 나머지는 삼송리 쪽으로 후퇴해버렸다. 도미노처럼 2사단의 붕괴가 7사단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이로써 인민군 4사단과 3사단, 105전차여단은 의정부를 장악했다. 전쟁은 결코 감정 싸움이 아닌데, 여기서 국군은 또 한 번 만용을 부렸다. 청주에 주둔하다 급히 창동으로 올라온 2사단 25연대에 날이 밝자(6월27일) 의정부 탈환 명령을 내린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실패는 실패의 어머니’인데, 또다시 축차 투입을 범한 것이다. 이미 집단으로 ‘전차 공포증’에 감염된 국군 병사들은 맥없이 무너져, 미아리고개 쪽으로 철수했다. 미아리고개마저 무너지면 서울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육군에서 보병-포병-기갑-공병 등 전투에 투입되는 병과를 전투병과라 하고, 병참이나 경리-병기처럼 비전투병과는 지원병과라고 한다. 전투병과 장병들이 연이은 패전으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자, 육본은 지원병과 장병을 미아리고개로 총출동시켰다. 그리하여 3000여 병력이 모이자, 고개 좌측에 포진한 부대는 5사단 이응준 소장이, 고개 우측에 모인 부대는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지휘를 맡았다. 생도 1기로 불리는 육사 10기 교육생도와 일부 패잔병은 육사교장 이준식(李俊植) 소장 지휘하에 불암산 일대로 배치시키고 경찰대대까지 출동시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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