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01 통권 586호(p548~556)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 독도 영유권 국제적 재선언
‘석도(石島)는 독도(獨島)’
 
 

국제적 고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항의하는 시민단체 회원들.

대한제국 정부는 우용정 일행 국제조사단의 현지조사 보고에 기초해 울릉도를 승격시켜서 ‘군’을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1900년(광무 4년) 10월22일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로 개정하는 것에 관한 청의서’를 내각회의에 제출했다.

이 청의는 1900년 10월24일 의정부회의(내각회의)에서 8대 0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다음날 전문 6조로 된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을 관보에 게재하고 전국에 반포했다. 이 칙령에 의해 울릉도는 강원도 울진군수의 행정을 받다가 이제 강원도의 독립된 군으로 승격됐다. 그리고 울도군의 초대 군수로는 배계주가 임명됐다.

1900년 칙령 제41호에서 주목할 것은 제2조 ‘울도군의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할 일’라고 한 부분이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석도는 독도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당시 울릉도 주민의 절대다수는 1883년 울릉도 재개척 정책에 의해 이주한 전라도 경상도의 남해안 출신 어민들이었다. 그들은 종래의 우산도가 두 개의 큰 바윗돌로 구성된 암서(岩嶼)임을 주목해 그들의 관습대로 ‘돌섬’이란 뜻의 사투리인 ‘독섬’이라고 불렀다.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41호에서 울릉도 주민들의 호칭인 ‘독섬’을 의역하여 ‘石島’라 한 것이다. ‘독섬’을 뜻을 취해 한자 표기하면 ‘石島’가 되고, 발음을 취해 한자 표기하면 ‘獨島’가 되는 것이다. 즉 ‘우산도=독섬=石島=獨島=리앙쿠르島(프)’인 것이다.

울릉도 어부들의 이러한 명명방식은 독도를 리앙쿠르島라고 이름 붙인 프랑스 탐험선 리앙쿠르(Liancourt)호의 명명 방식과 일치한다. 이 탐험선은 우산도=독도를 자기 배의 이름을 따되, Liancourt ‘Islands’라고 하지 않고 Liancourt ‘Rocks’(岩嶼)라 하여 ‘바윗돌섬’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을 울릉도 어민들의 방식으로 보면 역시 리앙쿠르岩=‘돌섬·독도·岩嶼’인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1882년(메이지 15년) 발행한 ‘日支韓航路里程一覽圖’에서는 독도를 아예 리앙쿠르‘石’이라고 표기해 수록했다는 사실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관제를 개정해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킬 때 국제조사단에 참가한 영국인 부산해관 세무사 라포트의 복명서도 참조했다. 그는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서양인이 제작한 한국지도에 친숙한 인물이었으며, 우산도를 리앙쿠르‘Rocks’(岩, 石)라고 부른 표기에 친숙했을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칙령 제41조를 발표할 때 각 섬의 명칭을 약간씩 수정했는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고, 죽서도를 죽도라고 했으며, 우산도에 대한 어민들의 명칭인 ‘독섬’ ‘독도’를 의역해 한자로 ‘石島’로 번역 표기했다. 이때 국제조사단의 영향으로 서양인이 우산도를 ‘리앙쿠르石島’라고 호칭한다는 사실도 참고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1900년 칙령 제41호로 독도(石島, 獨島)의 울도군수 행정관리를 통한 영유를 중앙정부의 관보에 게재한 것은 ‘국제적 고시’의 성격을 갖는다. 왜냐하면 중앙정부 관보는 의무적으로 대한제국의 체약국 공사관에 발송되고, 각국 공사관도 이 중앙정부의 관보를 반드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1900년 칙령 제41호의 관보 고시는 대한제국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를 재선언한 것이었다. ‘재선언’이라고 한 것은 이미 15세기에 ‘동국여지승람’에서 우산도(독도)의 조선 영유가 당시 조선의 교역국가에 선언됐기 때문이다.

무주지(無主地) 선점

대한제국 정부가 1900년 10월 칙령 제41호에 의해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하나의 군으로 독립시켜 울도군을 설치하면서 ‘독섬’을 한자로 의역해 ‘石島’로 표기했지만, 당시에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음을 취해 ‘獨島’라고도 표기됐으며, ‘石島’와 ‘獨島’가 병용되고 있었다.

보통 ‘獨島’라는 명칭은 일제가 1905년 ‘독도’를 침탈한 사실을 알게 된 울도군수 심흥택이 1906년 3월 중앙정부에 보고서를 낼 때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전부터 울릉도 주민들은 ‘獨島’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는 일본 해군이 독도 침탈에 욕심을 내기 시작해 군함(新高號)을 울릉도에 파견, 처음으로 ‘독도’에 대한 탐문조사를 했을 때인 1904년 9월25일자 보고에 ‘리앙쿠르岩을 한인은 獨島라고 쓰고 本邦(일본) 어부들은 약하여 리앙쿠르島라고 칭한다’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松島(울릉도-인용자)에서 리앙쿠르岩 實見者로부터 聽取한 情報. 리앙쿠르岩은 韓人은 이를 獨島라고 書하고 本邦 漁夫들은 ‘리앙꼬島’라고 호칭한다.(‘軍艦新高行動日誌’(日本防衛廳戰史部 소장) 1904년 9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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