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01 통권 586호(p532~547)
 
‘독도 사나이’ 안용복 탐구
일본섬 끌려가 50일간 뱀 잡아먹으며 영유권 주장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조선 숙종 때 일본에 붙잡혀 갔으나 오히려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확인받고 돌아온 국민영웅 안용복. 그는 조선 땅인 울릉도에서 일본인이 자기를 잡아간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라 주장하면서 소송을 걸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부산시 수영동 경상좌수영 터 안에 있는 안용복 동상(왼쪽)과 그를 기리는 사당 ‘수강사’. 안용복이 오른손에 든 것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한 일본 에도막부의 ‘서계(문서)’이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학교 사회과 교사용 지침서인 ‘학습지도요령’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명시할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한국 사회가 들끓었다. 그러나 일본을 성토하고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데 그쳤을 뿐 실질적인 해법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을 노리는 일본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분노한 국민을 달랠 방안은 없을까.

동북아역사재단은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창설된 싱크탱크다. 안용복(安龍福)은 조선 숙종 때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을 확인받은 국민영웅이다. 독도 영유권 문제로 시끄럽던 지난 5월말 이 재단은 안용복의 도일 행적을 연구해온 충남대 권오엽 교수(일문학)의 안내로, 독도 문제에 천착해온 시민단체 대표들과 안용복의 일본 기행을 추적하는 행사를 열었다.

안용복은 장보고나 이순신만큼 화려한 지휘관이 아니다. 고려의 서희는, 고려라는 큰 세력을 등에 업고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을 지어 강동6주를 확보했다. 그러나 안용복은 조선이라는 세력을 업을 수 없는 평민이었다. 조정의 부탁이나 지시를 받은 것도 아닌데, 그는 혼자만의 복심(腹心)과 지혜로 조선 조정이 방기한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을 되찾아왔다. 권 교수가 밝혀낸 그의 기행에선 인간 안용복의 기백과 이성이 배어난다.

안용복은 무슨 생각으로 일본에 건너갔고, 일본에서 어떤 행동을 하며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을 되찾아 왔는가. 치열했던 안용복의 세계로 들어가본다.

큰 호수 안의 섬, 아오시마

일본의 시마네 현은 1905년 현(縣) 고시(告示)를 통해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했다고 주장한다. 지금 시마네 현에 있는 마쓰에(松江) 기차역 광장에는 ‘다케시마는 우리나라의 고유 영토입니다(竹島はわが國の固有領土です)’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 광고판이 서 있다.

시마네 현 바로 동쪽에 붙은 곳이 돗토리(鳥取) 현이다. 지금은 시마네 현이 독도를 그들의 땅이라 주장하지만 과거에는 돗토리 현이 울릉도·독도와 관계를 맺어왔다. 따라서 돗토리 현도 시마네 현 못지 않게 다케시마 영유권을 외치고 있다.

돗토리 현의 현청 소재지인 돗토리 시에 우리말로는 ‘호산지’, 일본어로는 ‘고야마이케(湖山池)’로 발음하는 호수가 있다. 호산지는 재첩 산지로 유명한데, 이 호수의 물은 돗토리 항으로 이어진 아주 짧은 물길인 ‘호산천’을 통해 바다로 빠져나간다. 호산지 한가운데 조선 숙종 때 일본으로부터 울릉도 독도 영유권을 확약 받고 돌아온 ‘평민’ 안용복의 통한이 서린 유적지 ‘아오시마(靑島)’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군인 신분의 안용복은 울릉도 영유권을 확인하러 울릉도에 갔다가 납치돼 일본으로 끌려갔으나, 오히려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이라는 확약을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조국’에서 그는 허가 없이 국경을 넘은 혐의로 2년형을 살았다. 그리고 석방되자마자 그는 ‘내가 내 땅에 갔는데 왜 일본이 나를 납치해갔느냐’며 소송을 걸기 위해 다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이 섬에 유폐돼 50여 일간 뱀을 잡아먹으며 버티면서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돗토리 시 교육위원회가 세운 이 섬 안내판에는 ‘이곳에서는 신석기 유물이 발굴됐고 고대에는 제사 터로도 이용된 것 같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지만, 안용복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돗토리 시는 둘레가 1.8㎞밖에 되지 않는 이 섬에 벚꽃 산책로를 만들고 정상에는 청소년 수련장을 만드는 등 잘 가꾸었지만, 이 섬에서는 안용복의 ‘안’자도 찾을 수 없었다.

담대했던 사내 안용복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당시 일본의 정치 상황부터 살펴봐야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인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세력은 교토(京都) 북동쪽 80여㎞쯤에 있는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2년 전 숨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따르는 세력과 일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일본을 통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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