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호

대선 캠페인 700일, 현장에서 본 오바마 리더십 요체

경청과 배려로 말단까지 파트너 만드는 ‘풀뿌리 조직관리’

  • 김동석 뉴욕뉴저지한인유권자센터 소장 dongsukkim58@hotmail.com

    입력2008-12-04 17:4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21세기 최대의 정치스타.’ 버락 오바마 당선자에 대한 열광과 인기는 미국 대륙을 넘어서는 분위기다. 정치경력 12년, 중앙무대 데뷔 4년 만에 백악관에 입성한 능력의 요체는 과연 무엇이며, 이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대선기간 내내 오바마 캠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뉴욕뉴저지한인유권자센터의 김동석 소장이 선거 현장에서 드러난 그의 리더십을 꼼꼼히 분석해 ‘신동아’에 보내왔다. 20여 년간 미국에 머물며 한인 유권자운동에 힘써온 김 소장은 오바마 당선자의 대표적인 한국계 인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대선 캠페인 700일,                                         현장에서 본  오바마 리더십 요체
    2006년 중간선거를 통해 이전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을 가장 비약적으로 확장한 지역을 꼽자면 일리노이 주, 바로 시카고다. 1991년 이른바 ‘아칸소 사단’의 일원으로 클린턴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 노릇을 한 바 있던 이스라엘 이민자의 아들 램 이매뉴얼은 바로 이 200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전국의 유대계 정치조직을 기반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시 민주당의 하원 장악은 이매뉴얼의 지휘 덕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1980년대 중반 시카고 지역에서 소비자권리 운동으로 명성을 날린 사회운동가 출신의 이매뉴얼은, 클린턴 행정부의 백악관에서 보좌관으로 활약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2002년 선거에서 일리노이 제5지역에 출마해 연방하원에 진출했다. 영원한 참모에서 선출직 현역의원으로의 신분 상승. 그러나 싸움이 붙으면 무조건 이겨야 직성이 풀린다는 이 승부욕의 화신은, 2004년 이후 또 한 명의 사내에게 자신의 정치인생을 걸고 다시 한번 도박에 나선다. 바로 버락 오바마다.

    이매뉴얼은 오바마 당선자보다 나이가 두 살 많다. 정치 경력으로 봐도 한참 선배다. 그러나 전국 정치판에 혜성처럼 등장한 같은 지역 내의 오바마에게서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정파적 이익과 이해관계에 허우적대는 워싱턴 군상과는 다른 ‘큰 정치인의 리더십’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때 빌 클린턴의 킹메이커였고 당연히 힐러리 클린턴의 조력자가 될 것이라 모두 확신했던 이매뉴얼은 알게 모르게 점점 오바마의 사람이 되어갔다. 그는 훗날 그 과정을 “의지로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

    오바마로부터 그러한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고 고백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그의 핵심 측근 대부분이 비슷한 종류의 ‘신앙고백’을 내뱉은 적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상과 철학이 같다”고 선언하며 일찍부터 정치인 오바마에게 모든 것을 내던진 데이비드 액설로드만 해도 그렇다.



    오바마 캠프의 수석전략가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2004년 당선 가능성이 높은 쟁쟁한 후보들을 마다하고 아무도 당선 가능성을 점치지 않았던 버락 오바마를 택해 상원의원에 당선시켰다. 이후 액설로드는 캠프를 구성한 뒤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 데이비드 플러프를 끌어들여 캠페인 매니저를 맡겼고, 대선 기간 두 사람은 모든 전략을 책임졌다. 뉴욕 출생이지만 시카고에서 생활한 액설로드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시카고 트리뷴’의 정치기자로서 정치감각을 익혔고, 1980년대 정치권에 진출한 이래 민주당 정치인들의 선거를 맡아서 의회에 진출시켰다. 그런 그가 오바마와 “철학과 이상이 딱 들어맞는다”며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함께 한다”고 말한다.

    흔히 그를 부시 대통령의 선거전략가였던 칼 로브와 비교하곤 하지만, 차원이 다르다. 칼 로브가 부시의 두뇌였다면 액설로드는 오바마와 동지다. 이는 이제는 액설로드보다도 더 오바마와 가까운 사이가 됐다는 플러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바마 당선자와 액설로드, 플러프 세 사람은 서로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통하는 파트너십을 만들어갔고, 오바마 당선자는 11월4일 당선 연설에서 두 사람의 실명을 특별히 지목해 감사를 표했다. 이렇듯 당선 연설에서 캠페인 전략가를 거명하는 일은 일찍이 없던 사례였다.

    일리노이 주 제2지역구 하원의원이자 흑인운동의 대부 제시 잭슨 목사의 아들인 제시 잭슨 주니어의 경우를 보자. 올해 43세인 잭슨 하원의원은 흑인 정치권의 1세대 원로들이 오바마 지지에 머뭇거리자 직접 나서서 차세대 흑인 지도자들을 대거 오바마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1996년 상원에 진출해 상원에서 오바마의 정치파트너 역할을 했던 리처드 더빈 의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지난 1월8일 뉴햄프셔 예비경선장에서 그와 만난 적이 있다.

    필자가 뉴욕에서 왔다는 사실만으로 힐러리 지지자로 생각한 더빈 의원은 “오바마는 기존의 정당 정치인과는 다르다. 그는 당이 내세우는 후보가 아니라 국민이 추대하는 후보”라고 강조했다. 오바마에게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있다는 것이다. 계파정치의 색깔이 엷은 미국정치 분위기에서 현역 상원의원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오바마 당선자가 가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은 짐작을 불허한다.

    이러한 능력은 정치 데뷔 12년, 중앙무대 진출 4년 만에 대권을 거머쥔 오바마 당선자의 가장 큰 자산이다. 돌이켜 보면 200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회 탈환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오바마의 힘이었다. 선거 총지휘를 맡은 이매뉴얼이 2004년 보스턴 전당대회 연설로 일약 스타로 떠오른 오바마를 전국 곳곳의 지원유세에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중간선거 기간 그는 공화당 강세지역을 민주당 쪽으로 돌려세우는 데 톡톡한 전공을 쌓았다. 오바마의 대중친화적인 얼굴과 탁월한 연설능력은 대륙 전체에서 지지자를 만들며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이 공화당으로부터 빼앗아 온 하원 20석 가운데 적어도 15개 지역의 지지율 반등은 오바마의 지원유세 덕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1. ‘당신에게 귀 기울이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라

    그의 이러한 힘은 어디서 오는가. 사람들은 왜 그의 포로가 되는가. 액설로드가 중간선거 대승 후에 ‘뉴스위크’에 전한 에피소드는 그 한 단면을 보여준다.

    “지원유세 동안 시카고의 어느 방송사 스튜디오 대기실에서 우연히 오프라 윈프리와 마주쳤습니다. 우릴 알아보고 동석을 요청하더군요. 나와 오바마를 포함해 열 명쯤 모여 앉았는데 모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더군요. 모두 오바마의 입에 주목했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분위기를 이해하면 그냥 웃음만 지어 보이는 습관이 있어요.”

    그의 가장 큰 자산은 상대에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주는 능력이다. 다른 정치인들이 장황한 논리와 현란한 말로 상대를 설득하는 동안, 그는 상대를 온 마음으로 이해한다는 뜻의 미소로 그들에게 첫인상을 심어준다. 물론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그 미소를 뒷받침하는 정치인으로서의 ‘내용’이 없다면 좋은 인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 첫 번째 만남의 힘은 상대방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고, 다음 순간 사람들은 “이 사람은 내 얘기를 듣고 싶어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대선 예비경선이 한창이던 4월 중순, 가장 치열한 경쟁지인 펜실베이니아 경선을 1주일 앞둔 상황에서 액설로드는 뉴욕과 필라델피아, 워싱턴DC의 아시아계 지역사회 활동가 100여명을 펜실베이니아 주도(州都)인 해리스버그에 1박2일 초청한 적이 있다. 필자 역시 이 자리에 참석했다. 당시 오바마 후보는 “여러분의 사회활동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기존의 로비를 통한 시민사회와의 소통방식을 대신해 지역사회 활동가들과 직접 소통하고 싶다”면서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면서 정책 브리핑을 했다.

    필자는 지난 20여 년 동안 대통령선거 다섯 번을 겪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대선본부와 직접 접촉해 후보 본인을 유세장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고, 최측근 전략가의 초청을 받아 장시간 마주하는 일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다. 미국 전역의 시민사회가 왜 오바마에 열광하는지 직접 깨닫게 한 경험이었다.

    필자가 처음으로 오바마 후보를 만난 것은 2004년 그가 보스턴 전당대회를 앞두고 한창 연설연습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 바로 그 연설이었다. 그는 필자가 몸담고 있는 뉴욕뉴저지한인유권자센터(Korean American Voters´ Council)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로부터 꼭 2년이 지난 후 대권 도전 결심을 굳힌 그는 다시 한번 연락을 주었다. 동부지역 아시아계 유권자를 공략하기 위한 첫 포인트로 한인유권자센터를 꼽은 것이었다. 이후 필자는 한인을 대표해 집요하리만큼 줄기차게 오바마 캠프에 요청했다. 한미관계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미국 내 200만 한국인이라는 요지였다.

    ‘정직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선거전이 본격화된 지난 2월12일, 오바마 당선자는 상원의원 자격으로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서면발언을 했다. 그 안에는 ‘한미관계는 200만 재미한인과 10만 재한미국인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우리의 의견이 유력 대선후보의 입을 통해 상원에서 공론화되고 곧바로 유세장에서 언급됐다.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이런 경험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값지고 뿌듯하다.

    이렇듯 ‘당신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태도, 혹은 상대방에게 그런 믿음을 심는 그의 능력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11월4일 시카고 그랜트파크에서 한 당선연설에서 오바마는 이러한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액설로드는 이 연설문을 검토하면서 오바마와 깊게 공감했다고 했다. ‘정직하게 그리고 단호하게’라는 이제까지의 원칙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고도 했다. 오바마 당선자는 이 연설에서 “메인스트리트(서민층)의 고통으로 월스트리트(부유층)가 풍요를 누려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우리가 맞닥뜨린 도전에 대해 여러분에게 솔직하게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 더욱 더 여러분의 의견에 귀 기울이겠습니다(But I will always be honest with you about challenges we face. I will listen to you, especially when we disagree).”

    오바마 리더십의 요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리더십이 어떻게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이 한 문장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2. 조직 일선까지 부하 아닌 파트너로 만들어라

    앞서도 언급했지만, 오바마의 참모들은 그의 부하라기보다는 정치적 동반자에 가깝다. 놀라운 것은 캠프 지휘부뿐 아니라 전국 곳곳의 일선 선거운동원까지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바마 캠프의 힘은 팀워크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의 당선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우선으로 삼는다는 믿음을 운동원들에게 심어주었다. 오바마 캠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군살이 없고, 사무실에 앉아 입으로만 선거운동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민주당 예비경선 당시 오바마 캠프의 목표는 초전(初戰) 승리였다. 아이오와에서 기선을 제압하고 뉴햄프셔를 거쳐 1월26일 사우스캐롤라이나까지 이긴 뒤 그 여세를 몰아 2월5일 슈퍼화요일에 승부를 결정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전략이 가능해진 것은 중앙당의 징계 덕분에 1월15일 열릴 예정이던 미시간 예비선거와 1월29일의 플로리다 예비선거가 생략됐기 때문이었다. 힐러리의 텃밭이었던 데다 각각 79명과 105명의 선거인단이 걸린 두 대형 주의 예비경선이 생략되면서 분명 오바마 캠프는 중요한 기회를 얻었다.

    그렇다면 관건은 경선의 시발점인 아이오와였다. 캠페인의 총지휘를 맡은 데이비드 플러프가 2002년 이 지역에서 상원의원 선거를 치른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이오와의 민주당 대의원은 95%가 백인인 데다 민주당 지역조직은 이미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탄탄하게 장악하고 있던 상태였다. 아이오와 예비경선은 당원대회(Caucus) 방식이기 때문에 사실상 조직선거가 승부를 결정해왔다.

    그러나 아이오와 예비경선 현장에서 직접 상황을 마주하자 필자는 오바마가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오바마 운동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이었다. 힐러리 후보 운동본부에는 사람들로 사무실이 북적거렸다. 반면 오바마 본부에는 사무실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모든 선거운동원이 현장을 누비며 득표활동을 펼치느라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오바마 운동원들은 1월 칼바람이 몰아치는 아이오와의 눈밭을 헤매며 각 카운티의 당원대회장을 찾았다. 결국 이 경선에서 오바마 후보는 2차 투표를 거쳐 9%의 격차로 힐러리를 따돌렸다. 닷새 후 뉴햄프셔에서 이기고 곧바로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겨냥한다는 전략이 비로소 가능해졌다.

    배려 또 배려

    캠프 전략회의에서 그는 언제나 가장 조용한 사람이라고 한다. 후보가 나서서 떠드는 것이 아니라 회의의 과정을 꾸준히 지켜본다는 것이다. 특히 회의석상에서 말수가 가장 적은 사람을 주목하고, 마지막에는 꼭 그의 의견을 묻는 식이다. 이너서클(inner circle)이 아닌 사람의 의견을 회의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한다. 전체 논의방향을 혼자서 결정하지 않고, 혹은 몇몇 사람이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모든 구성원의 생각을 듣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오바마 상원의원실의 법률고문을 지낸 루치 보미크는 “오바마 의원은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싫어한다. 누군가 ‘항상 그런 식으로 일해왔는데요’라고 말하면 ‘왜 우리가 꼭 그렇게 해야 하나요?’라고 되묻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과묵하지만 부드럽고, 신중하지만 단호하다. 사색이 많지만 발언은 간결하다. 캠페인 매니저인 데이비드 플러프가 취재기자들에게 “오바마만큼 타인을 배려하는 정치인을 만난 기억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모든 참모와 직원들에게 상하관계가 아닌 동지관계임을 실감하게 만든다. 그가 운동원으로부터 얼마나 깊은 존경과 애정을 받고 있는지에 관한 얘기가 선거판의 입과 입을 거쳐 내내 흘러나온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배려하는 그의 태도에 관한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7월초 오바마 후보가 뉴욕 맨해튼을 방문했을 때 그와 가족이 탄 차를 운전하면서 시내를 안내했던 한인자원봉사자 라이언 김(한국명 김대용)씨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거리낌 없이 대하기 편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잘나가는 후보가….?’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가족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오바마 후보는 내가 한국인이란 것을 알고는 한국말로 인사를 하더군요. 자기도 하와이에서 한국 식당엘 자주 갔었다고 하면서요.”

    힐러리, 매케인 캠프의 전략가들은 엄청난 연봉을 받는 선거전문가들이었다. 캠페인 비용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인건비다. 반면 오바마 캠프가 무보수 직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그간 민주, 공화 어느 당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정치권의 고급인력이었다. 이러한 고급인재들이 ‘자신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는’ 후보를 위해 전국의 각 주로 배정, 파견됐다. 상대 캠프가 자금부족에 허덕이는 동안 오바마 캠프는 온라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기부금의 거의 전액을 홍보비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것이 오바마 팀을 이끄는 리더십의 근간이었다.

    대선 캠페인 700일,                                         현장에서 본  오바마 리더십 요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11월4일 당선 확정 직후 시카고 그랜트파크에서 열린 ‘선거의 날 축제’ 행사에 참석해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3. 위기에 울지 말고 기회에 흥분 말라

    오바마 후보가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승리를 거두어 ‘초전승리 전략’에 박차를 가할 무렵, 힐러리 측에는 비상이 걸렸다. 힐러리 선거본부는 동북부 지역 내 힐러리 운동원 전원을 다음 경선장인 뉴햄프셔에 집결시켰다. 냉혈여인으로 소문난 힐러리가 눈물을 비치며 등장하자 뉴햄프셔는 2%라는 박빙의 차이로 힐러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어서 펼쳐진 슈퍼 화요일에 박빙승부가 전개되면서 경선을 조기에 마무리하겠다는 오바마 캠프의 전략에도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3월4일 오하이오와 텍사스에서도 힐러리에게 패하자 이번에는 오바마 캠프에 비상이 걸렸다. 2000만달러를 쏟아 부은 승부처에서의 대패였다.

    예전의 다른 캠프 같았다면 수석 전략가나 캠페인 매니저를 경질함으로써 분위기를 일신해야 했을 상황이었다. 실제로 많은 언론과 선거전문가들이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바마 후보의 결정은 달랐다. 그는 시카고 본부에서 열린 긴급전략회의에 직접 참석해, 우선 후보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모두의 책임’이라고 결론지은 뒤 침울해진 전략팀의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는 고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주의한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문제가 생기면 자신부터 쉽게 동요하지 않고 침착을 유지하는 태도를 구성원들에게 보여준다.

    그가 20여 년간 몸담았던 교회의 담임목사인 제러마이어 라이트 목사의 이른바 “갓댐 아메리카” 발언 비디오가 공개됐을 무렵은 그가 겪은 가장 큰 위기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버락의 당부”

    이 무렵 오바마 캠프의 분위기는 정말로 침울 그 자체였다. 이때 필자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인디애나대학 호텔 로비에서 오바마 캠프의 모임을 잠깐 들여다볼 수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로 출발하는 후보 부인 미셸 오바마가 인디애나폴리스에 남게 될 선거 관계자들에게 부탁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버락의 당부”라고 거듭 강조한 그는 “다음 웨스트버지니아 경선까지 남은 1주일 동안 어떻게든 휴식을 좀 취하시라”고 거듭 이야기했다. 최악의 위기에도 동요하지 않고 조력자들의 안위부터 챙기는 태도였다.

    대선을 열흘 앞두고 오바마 캠프는 인종적 네거티브 공격에 다시 한번 시달렸다. 이 무렵 오바마 후보는 접전지역의 방문유세 일정으로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바마 후보는 네거티브로 인해 전략팀이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눈치 채고 “그런 일은 늘 있었다. 우리에게 지지를 보내는 국민의 뜻은 그게 아님을 나는 확신한다”는 메시지로 캠프 직원들을 일일이 다독였다고 한다.

    미국의 대선 캠페인이 후보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그 긴 여정에서 오바마 당선자는 단 한 번도 냉정을 잃거나 침착함을 놓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선 토론회에서는 물론 계속된 네거티브 공격이 신경을 자극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폭풍을 타고 온 기린아’를 우려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던 보수적인 백인 유권자들이나 성공한 흑인계층에게 안도감을 주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불만 어린 흑인계층의 리더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다.

    반면 선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사안이 발생해도 단기적인 이익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태도 역시 조력자들의 마음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9월14일 부시 대통령이 월스트리트 금융위기를 공개적으로 시인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경기침체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면서 “미국 경제는 이상이 없다”고 언급해온 매케인 후보의 지지율이 큰 타격을 입었다. 오바마 진영으로서는 반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정작 후보 본인은 더 침울해 했다고 한다. 경기불황과 경기침체, 그로 인한 실업사태의 피해와 고통을 고스란히 서민층이 떠안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실제로 금융대란 직후 대선후보 토론회에 등장한 오바마 후보는 내내 표정이 침울했다. 지지자들의 동요를 염려한 캠페인 매니저인 데이비드 플러프가 전국의 7000여 열성 지지자에게 일제히 e메일을 보냈다. “후보는 지지율 변화 이전에 금융위기로 인해 일반 시민이 받게 될 고통 때문에 표정이 달라진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물론 고민 끝에 나온 선거전략의 일환이기도 했겠지만, 최고의 순간 혹은 최악의 순간에도 잊지 않는 이 같은 세심한 ‘배려’는 그의 리더십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다.

    대선 캠페인 700일,                                         현장에서 본  오바마 리더십 요체

    9월26일 미국 미시시피 주 옥스퍼드에 있는 미시시피대 포드센터에서 열린 대선후보 TV토론회에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왼쪽)와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격돌하고 있다.

    4.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라

    그의 리더십을 구성하는 다른 한 축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신뢰다.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정치적 견해를 자기 정체성의 본질과 밀착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사람’이라는 신뢰를 주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흑인이라는 소수인종으로서 갖는 생래적 정체성이고, 다른 하나가 지역운동가 출신이라는 젊은 시절의 사회적 정체성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뉴욕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직후 시카고로 갔다. 중앙무대에서 활약하는 대신 지역사회를 선택한 것은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혼자’로는 별 의미가 없다는 분명한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대신 그는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에서 쟁취한 투표권에 주목했다. 커뮤니티(지역 서민사회)의 유권자운동을 통해 시민사회를 사회중심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렇게 해서 이 무렵 그의 활동은 유권자운동을 통한 ‘정치참여’에 중심을 두게 됐다.

    특히 흑인 커뮤니티 ‘빈곤의 악순환’은 그를 가장 괴롭힌 부분이었다. 오바마 당선자가 이라크전 등 전쟁에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흑인 청소년들이 돈 때문에 전쟁터로 달려가기 때문이었다. 이는 베트남전을 반대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철학과 맥이 닿아 있다.

    이전에도 각 분야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주류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흑인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바마는 늘 ‘평균적인 지위 향상’을 고민했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책에 파묻혀 있는 동안에도 그는 늘 자기 개인과 흑인사회를, 혹은 흑인사회와 전체 미국사회를 연관지어 생각했다. 상층부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역할도 분명 의미가 있겠지만, 본인은 ‘평균으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한다’는 결심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가 대권 도전을 공식 선언한 직후 필자는 오바마가 컬럼비아대 재학시절 기숙했던 동네에서 할렘가까지 여러 차례 걸어서 다녀봤다. 지금은 맨해튼 125번가의 할렘이 번창해 오히려 다른 지역에 비해 경기가 좋지만, 그가 대학을 다니던 당시에는 그야말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천국과 지옥이 나뉘는 지역이었다. 백인 동네와 흑인 동네의 격차는 그처럼 어마어마했다. 필자는 흑인인 오바마가 이 거리를 오가며 얼마나 큰 비애와 갈등을 겪었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때 받은 느낌이 필자가 오바마에 주목하고 그의 정치행보에 기울게 된 한 원인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그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 정치’는 흑인 주류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고, 그가 단시일 내에 이들 진영에서 리더십을 획득할 수 있게 된 주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콜린 파월이나 오프라 윈프리처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자랑하는 흑인 인사들이 특정 대통령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미국의 정치문화에서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윈프리만 해도 오바마 지지를 선언한 뒤 백인 중산층 여성으로부터 엄청난 시달림을 당했다. 여성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막아섰다며 그를 배반자라고 지칭하는 공격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2007년 12월 아폴로 극장

    선거일 꼭 열흘 전에 오바마 지지를 공개 선언한 파월 전 장관은 “오바마의 리더십은 (미국 사회의) 역사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들의 결심에 앞서 설명한 오바마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 정치인’이미지가 크게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흑인이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다. 오바마가 대선 출마를 결심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역시 오바마 정치적 리더십의 밑바탕을 이루는 이러한 철학적 배경에 주목해 그를 신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바마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기반은 견고하다. 일부 흑인 지성인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피 한 방울의 법칙’을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냉혹한 현실이다. ‘유색인종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백인이 아니다’라는 뿌리 깊은 묵계가 그것이다. 농장주인 백인 남성이 노예인 흑인 여성을 겁탈해 태어난 아이는 여지없이 노예가 되는 시절의 유산이다.

    대선 캠페인 700일,                                         현장에서 본  오바마 리더십 요체

    예비경선 유세 중이던 2월,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의 윌리엄스 고교에서 열린 연설회 도중 영화 ‘리멤버 더 타이탄스’를 언급하며 눈물을 닦고 있는 오바마 후보. 이 영화는 흑백 갈등이 극심하던 1971년 윌리엄스 고교의 신설 풋볼팀 ‘타이탄스’에 부임한 흑인 지도자가 흑백 갈등의 분열을 이겨내고 우승을 이뤄낸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끔찍했던 역사를 뚫고 미국의 흑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른 뒤에야 민권법을 통과시키고 투표권을 쟁취할 수 있었다. 2006년 뉴저지의 호보컨에서 만난 오바마는 필자에게 대뜸 아시아계의 투표율에 관해 말을 꺼냈다. “투표권이 아니면 총탄을 달라”는 외침으로 획득한 투표권이니만큼 무엇보다 유색인종의 투표율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7년 12월6일 오바마 후보는 자신이 대학 시절을 보낸 뉴욕 맨해튼의 할렘을 찾았다. 이를테면 그의 정신적인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곳의 아폴로 극장은 1960년대 흑인문화의 한 상징이다. 이 거리 뒷골목에서 맬컴 엑스가 청년기를 보냈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미국의 본질을 파헤치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들 이후 40년 만에 유색인종의 영웅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흑인 후보가 아폴로 극장에 나타난 것이다.

    미국의 흑인사회는 여전히 1960년대 킹 목사의 민권운동 세대들이 리더십을 움켜쥐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에선 더욱 그렇다. 제시 잭슨, 앤드루 영, 찰스 랭글, 조 루이스 등 연방 수준의 주요 흑인 정치지도자들은 대부분이 민권운동 세대이고, 이들은 좀처럼 은퇴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바마 후보가 뉴욕 맨해튼에 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준비가 필요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은퇴 후 자신의 사무실을 아폴로 극장 바로 옆에 마련할 정도로 흑인사회 공략에 힘을 쏟았다. 이미 뉴욕의 흑백을 막론하고 뉴욕 전체가 힐러리 클린턴의 수중에 들어있다시피 한 상황에서, 섣불리 뉴욕 유세를 감행했다가 뚜렷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충수가 될 판이었다.

    가시화되고 있던 ‘오바마 바람’에도 불구하고 친(親)클린턴으로 분류되는 흑인 지도자들은 미동도 없었다. 필자가 2007년 상반기 내내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워싱턴 의회에 상주할 때 흑인의원들을 만날 때마다 누구를 지지하는지 물었지만, 오바마의 가능성을 점치는 흑인의원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오바마는 이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맬컴 엑스가 흑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던 바로 그 아폴로 극장의 2층 테라스에 오바마가 올라섰다. 그 자리에서 오바마는 단순히 민주당 경선을 앞둔 정치인이 아니었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선지자 같은 이미지로 비쳤다. 그는 흑인사회, 나아가 미국 전체의 유색인종 리더십의 완전한 세대교체를 알리고 있었다.

    이 유세를 계기로 그는 뉴욕의 흑인사회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유력 후보로 확고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5.‘우리 편’의 범주를 넓혀가라

    투표 결과 분석을 살펴보면 오바마 후보는 흑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히스패닉이나 아시아계 등 다른 유색인종에게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언뜻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이는 평소 불편하기 짝이 없는 유색인종 그룹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단순한 흑인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유색인종, 혹은 미국 서민층 전체의 빈곤 문제를 고민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오바마가 맨해튼의 할렘이나 시카고의 슬럼가에서 맞닥뜨린 문제는, 구체적인 대안이 없으면 대대손손 빈곤을 이어나가는 대도시 빈민층의 현실이었다. 누구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겠다고 나서기 어려웠다. 오바마 후보는 대선토론회에서 빠짐없이 공교육 문제를 언급하며 이 구조적 현실을 타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빈곤층 자녀들에 대한 교육대책이 없으면 그들의 빈곤은 대대손손 반복될 뿐이란 이야기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겨우 1만달러 남짓의 연봉을 받으며 시카고 빈민가에서 커뮤니티 활동가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사람들을 정부의 구제에 기대게 만드는 커뮤니티 서비스만으로는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다른 방안이 필요했다.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로부터 심화된 미국의 빈부격차와 소외문제는 역시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심이었다. 그가 정계 진출을 결심하게 된 동기였다.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후 19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된 이래 그의 정치활동은 일관되게 저소득층의 세금 경감, 복지 향상, 정치윤리 개혁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한 그의 일관된 이미지가 2000년 연방하원 낙선에도 불구하고 주 상원의원 3선(選)을 가능케 했고, 마찬가지로 2004년 연방 상원 입성을 가능케 했다. 그가 2004년 보스턴 전당대회에 존 케리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초청을 받아 연설자로 나서 단숨에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 같은 배경 때문에 가능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소수인종은 유대인이다. 유대계의 정치적 영향력이 그들의 정확한 상황판단 덕분이라면, 흑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집단적인 역사인식에 근거한다. 대부분의 선출직 정치인에게 유대계는 지원세력으로 만들어야 할 대상이고 흑인계는 반대세력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목표였다. 지지후보에 대한 결집력은 약하지만 반대후보에 대항하는 결집력은 무섭다는 게 흑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정설이었다.

    ‘인맥 찾기’의 함정

    이제 그 공식은 깨졌다. 단순히 깨진 게 아니라 전체 유색인종을 포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오바마 후보가 생각을 달리하는 흑인계 지도자들은 물론 아시아계 등 다른 인종들에게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리더십을 보여주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물론 여기에는 인도네시아와 하와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소수인종이 우수하다고 역설할 정도로 높은 그의 인종적 이해도도 한몫했다.

    이렇듯 그는 이제까지 정치인들이 보여주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전략을 펼쳐왔고, 이제는 이를 워싱턴 정치의 작동방식 변화로 이어나가려 하고 있다. 그가 2년 동안 이어진 대선 캠페인에서 줄기차게 주장한 것이 바로 워싱턴을 바꾸겠다는 공약이다. 지난 30여 년, 돈 있는 사람들이 돈으로 권력을 움직여 기득권을 유지해온 구조를 뜯어고치겠다는 것이다.

    그의 이 같은 정치철학이 앞서 설명한 리더십과 불가분임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소수의 의견,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의견을 모두 경청하고 함께 가겠다는 새로운 스타일의 리더십이다. 그의 대선캠프가 철저하게 풀뿌리(grass root) 방식으로 구성됐던 것도, 그 하나하나의 풀뿌리가 후보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게 만든 것도 모두 마찬가지 이유다.

    대선 캠페인 700일,                                         현장에서 본  오바마 리더십 요체
    김동석

    1958년 강원도 화천 출생

    춘천고 졸업, 성균관대 입학

    1985년 도미, 뉴욕시립대 수학(정치학)

    現 뉴욕뉴저지한인유권자센터 소장


    당선 이후 많은 한국의 정치인이 이른바 ‘인맥 찾기’를 통해 그에게 접근하려 하지만 필자의 눈에 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바마 권력의 작동방식은 철저하게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이다. 핵심 측근과의 인맥을 통해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해 오바마 당선자는 수차례 유세에서 일찌감치 ‘워싱턴의 오염물’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의 리더십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과 성찰만이 오바마 행정부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