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난 축복받은 비정규직 엄살 부리지 않겠어요”

‘연기의 신’ 미스 김 김혜수

  •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입력2013-06-20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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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권의 가창력, 오지호의 유머센스에 반해
    • 드라마는 협업…연기 호평 다 내 것은 아니다
    • 첫눈에 꽂힌 남자처럼 미스 김에 끌렸다
    • 논문 표절은 무지해서 빚어진 일…잘못은 잘못
    • 시청률 따라 대본 새로 쓰는 제작환경 개선 절실
    “난 축복받은 비정규직 엄살 부리지 않겠어요”
    김혜수(43)는 지난해 1200만 관객을 들인 영화 ‘도둑들’에 이어 또 한 편의 화제작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올렸다.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을 원작으로 한 KBS-2TV 드라마 ‘직장의 신’이다. 드라마가 막을 내린 지 꼭 1주일 만인 지난 5월 말, 서울 강남의 한 카페테리아에 모습을 드러낸 김혜수는 “종영 후에도 못 쉬었다”는 사람 같지 않게 생기발랄했다.

    ‘직장의 신’에서 그는 스스로 계약 인생을 고집하는 ‘자발적 비정규직’ 미스 김을 연기했다. 미스 김은 사무실 청소와 커피 타기, 타이핑, 인쇄 등의 잡무를 도맡지만 포클레인 운전, 비행기 정비, 조산 등 ‘미스 김 사용설명서’에 명시한 자격증만 124가지요, 칸이 부족해 적지 못한 자격증도 170가지나 보유한 능력자다. 어디 그뿐인가. 정규직 전환을 간청하는 상사의 호의를 “회사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며 저버리고, 회식 참여 조건으로 수당을 요구하는 간 큰 여자다.

    만화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캐릭터지만 이 시대 을(乙)의 갑갑한 속을 뻥 뚫어준 그의 언행은 방영 내내 열렬한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 특히 “회식은 몸 버리고, 간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 테러입니다” “회사란 생계를 나누는 곳이지, 우정을 나누는 곳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책임감으로 오버했다간 자기 목만 날아갑니다” 같은 명대사는 지금껏 직장인이 새겨야 할 어록으로 회자된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며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을 펼친 김혜수를 향해 대중의 환호와 호평이 끊이지 않는다. 그를 주연으로 한 ‘직장의 신 2’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이도 적잖다. ‘직장의 신’이 일본으로 역수출된다는 낭보도 들린다.

    미스 김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기자와 마주한 김혜수는 최근 석 달 동안 진행된 촬영 뒷얘기를 거침없이 풀어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돌직구로 응수하는 미스 김처럼.



    탬버린 신공의 비밀

    ▼ 드라마 종영 후 못 쉬었다고요? 뭐 하느라고….

    “5월 21일 마지막회가 방영된 날에도 촬영을 했어요. 상대 역인 장규직(오지호 분)을 구하러 가는 신을 마지막으로 찍었어요.

    그날 저녁 회식에 참석하고, 다음 날은 새 영화 ‘관상’ 포스터를 찍고, 그 이튿날엔 ‘직장의 신’ 식구들과 1박2일 일정으로 MT(단합대회)를 다녀왔어요.”

    ▼ MT에서 찍은 사진 때문에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올랐던데요. 조권(아이돌그룹 2AM의 리더)의 허리를 감싼 ‘김혜수 나쁜 손’이라고.

    “배우들끼리 참 돈독했어요. 서로 카톡(카카오톡)하고 사진 올려서 돌려보고 그랬는데, 기사가 날 줄은 몰랐어요. 근데 내 손이 착한 손이지 무슨…(웃음).”

    ▼ MT는 재미있었나요.

    “아무도 자고 싶어 하지 않아서 날 새는 줄도 모르고 놀았어요. 좋은 얘기도 나누고 게임하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조권 씨가 정말 괜찮았어요. 원래 이 친구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참석하기가 힘들었는데 첫 드라마니까 밤새울 각오하고 왔더라고요. 나중에 합류해서 현란한 댄스 실력도 보여주고 노래도 들려주고. 예능프로를 안 봐서 몰랐는데 재능이 참 많더라고요. 전혜빈 씨는 정말 정열적이에요. 쉼 없이 노래해요. 그 친구들 덕에 분위기가 콘서트였어요. 동영상을 찍다가 배터리가 방전된 것도 모를 정도로 빠져 있었어요. 감동….”

    MT 때도 탬버린 신공(神功)을 보여줬는지 묻자 “거기선 명함도 못 내밀죠”라며 손사래를 친다. 극중에서는 달인 수준의 탬버린 댄스를 비롯해 게장 담그기, 홈쇼핑 내복쇼, 유도로 엎어치기 등 다채로운 ‘묘기’를 직접 선보였다. 무슨 수로 다 해냈을까.

    “나오미 캠벨처럼…”

    “난 축복받은 비정규직 엄살 부리지 않겠어요”

    드라마 ‘직장의 신’의 한 장면.

    “특기가 많은 캐릭터라 부단한 연습이 필요했죠. 사실 미스 김의 업무가 특별한 건 아닌데, 그녀만의 방식으로 신속하고 완벽하게 하는 게 포인트죠. 그래서 단순 업무를 할 때도 누가 봐도 입이 쩍 벌어질 만큼 현란한 동작과 기술적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연기했어요.”

    ▼ 탬버린 신공도 연습의 결과인가요.

    “미리 받은 대본에 탬버린 신이 있었어요. 지문이 무척 재미있고 디테일했어요. ‘신내림 받은 무당이 감정이 올라 작두 타는 것처럼’이라고 돼 있었죠. 그냥 흔들어서 될 일이 아니었어요. 평소에 탬버린 흔들 일이 없으니까 감도 안 왔고요. 파주 세트장에 있는 소품실에서 탬버린을 미리 가져다가 수시로 연습했어요. ‘탬버린을 저렇게도 쳐?’ 하고 놀랄 만한 동작을 인터넷을 뒤져서 찾아보기도 했고요. 그러다 욕심나는 동작 몇 가지를 찾았는데 그건 난도가 너무 높아서 도저히 흉내 낼 수가 없었어요.”

    ▼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탬버린 신은 지하에서 스모그 피우면서 6시간을 찍었어요. 몸을 그렇게 움직여본 적이 없어서 너무 힘들더라고요. 진짜 탬버린 달인이 오셔서 시연을 했는데 확실히 소리도 다르고 박자도 딱딱 맞았어요. 하도 테크니컬해서 잠깐 보고는 따라 할 수 없었지만. 얼마나 연습해야 이 정도가 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 달인도 6개월이 걸렸대요. 도무지 안 되겠어서 즉석에서 생각해낸 게 방송에 나온 동작이에요.

    홈쇼핑 방송에 출연해 내복 신을 찍을 땐 2장을 겹쳐 입었어요. 속살이 다 비쳐서요. 원래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독특한 워킹을 하고 싶었어요. 나오미 캠벨처럼 무릎을 직각으로 세워 걸어가다가 그대로 다리를 위아래로 쭉 찢으려고 했어요. 시청자가 화들짝 놀랄 정도로 내복의 신축성을 보여주려고요. 근데 무대가 원형이라 몇 발자국 못 걸었어요. 대신 작가 선생님이 주문한 대로 다리를 앉아서 쫙 찢은 다음 김연아의 ‘마지막 무도’ 같은 동작을 미스 김의 방식으로 재현해서 마무리했죠. 우리의 요정 김연아만큼 우아하고 아름답지는 않았지만(웃음).”

    ▼ 미스 김 임무가 속 좀 끓였겠네요.

    “누구나 하는 일을 미스 김처럼 시각적으로 특별해 보이게끔, 한 번도 보지 않은 형태로 표현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처음에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탬버린 한번 치고 나면 일주일씩 몸살이 났고, 몸이 좀 풀릴 때쯤 또 새로운 미션을 수행해야 하니까요. 이번 미션이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요거 하면 내가 얼마나 아플까도 염두에 둬야 하고, 또 이걸 하려면 내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 걱정됐지만 그런 고민을 하는 게 재밌기도 했어요. 미스 김 캐릭터의 최대치를 뽑아내기 위한 건설적인 고민이잖아요.”

    ▼ 빨간 내복 차림이 민망하지 않던가요.

    “안 그래도 작가 선생님이 내복 신이 곧 있을 거라면서 매니저를 통해 물어봤어요 ‘내복 입고 나오는 게 불편하지 않으냐’고. 전혀 괘념치 않았고 촬영하면서도 민망하지 않았어요. 미스 김 캐릭터가 굉장히 완성도 높게 집필되고 있어서 작가선생님이 그 수위를 현명하게 지키면서 캐릭터의 품격을 유지해줄 거라고 믿었거든요. 다만 홈쇼핑의 메커니즘을 몰라 물어봤어요. 완판은 어떻게 하는 거냐고. 짧은 생방송 시간 내에 전화주문을 유도해 다 파는 거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대본의 힘

    ▼ 홈쇼핑에서 물건 산 적 없나요.

    “보고 마음에 들어도 직접 구매한 적은 없어요. 언니나 친구가 사준 적은 있지만. 이건 아주 개인적인 취향인데, 사실 제가 TV 시청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나온 방송은 다 모니터링하죠. 재미있게 보는 프로도 있고요. 근데 집에서 나는 TV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아요. 거실에 아무도 없는데 TV가 켜져 있으면 꺼요. 그럼 엄마가 불쑥 ‘지금 듣고 있어’ 그래요(웃음). 많은 어머니가 드라마를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더라고요. 혼자 사는 분이나 어머니들은 TV 소리가 위안이 된대요. TV 소리가 나야 잠든다는 친구도 있어요.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다큐멘터리는 좋아해요. 놓친 영화는 IPTV로 챙겨 보고요. 근데 TV랑 친하진 않아요. 어릴 때부터 TV를 즐겨 보지 않았어요. 그러니 홈쇼핑 채널을 틀어놓을 이유가 없죠. 여럿이 나와 얘기하는 거 보면 다 좋아 보이잖아요. 아주 저렴하게 사서 유용하게 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니까.”

    그가 드라마에 출연한 것은 2010년 MBC-TV ‘즐거운 나의 집’ 이후 3년 만이다. 소감을 묻자 27년차 배우의 입에서 뜻밖의 얘기가 나온다.

    “오랜만에 하는 드라마라 열심히 준비해서 나왔지만 요즘 드라마 동향이나 시청자의 취향을 몰라 두려웠어요. 방송 초반에는 캐릭터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미스 김은 매우 독특한 전대미문의 캐릭터라 내 연기력이 미치지 못해 너무 비현실적으로 가공된 인물로 비칠까봐요. 시청자가 이질감이나 괴리감을 느끼면 캐릭터를 잡는 데 어려움이 있거든요. 오랜만에 하는 건데 만날 연기가 똑같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한 건 대본이 주는 신뢰감이 굉장히 컸기 때문이에요.”

    ▼ 대본이 어땠기에?

    “처음 대본을 봤을 때부터 윤난중 작가선생님의 집필 코드가 저랑 잘 맞는 느낌이었어요. 그동안 대본을 숱하게 봤지만 그런 느낌이 드는 작품은 흔치 않거든요. 1회 대본을 다 읽지도 않고 출연하는 걸로 했어요. 기내의 퍼스트클래스 신을 읽다가 문자메시지를 보냈죠. 어떻게 보면 섣부르고 무모한 결정이죠. 지금껏 그렇게 결정해본 적도 없고요. 근데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어요. 연출자는 누구야? 연출자는 뭐 했어? 작가는 누구야? 상대역은 누가 한대? 미니시리즈야? 내 출연료가 얼마래?…같은 생각을 할 짬도 없었고 상관도 없었어요.”

    ▼ 첫눈에 꽂힌 남자처럼?

    “정말이지 그런 지문에 그런 대사에 그런 캐릭터는 처음이었어요. 오래 본 것도 아닌데 이 캐릭터가 뭔지 알 것 같고 되게 흥미로웠어요. 16부까지 하는 내내 매회 대본을 기다렸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스태프와 연기자가 다 그랬어요. 본방송을 못 보고 촬영할 때가 많으니까 어떻게 나왔을지가 너무 궁금한 거예요.”

    웃음 참느라 고생

    그는 작가의 재기 넘치는 필력과 함께 이름 짓는 솜씨를 높이 평가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김씨 성에 미스라는 수식어를 붙여 시청자의 공감을 유도한 것도 놀랍거니와 홈쇼핑에 등장한 제품명에조차 의미심장한 뜻을 담은 것도 기발했다는 것.

    “홈쇼핑 신에서 제가 시식한 라면이 광대승천 쌈닭면인데 이름을 듣고 한참 웃었어요. 쌈닭면이라고 하니까 불닭처럼 엄청 매운 느낌이 들잖아요. 광대승천은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폭발적인 매운맛을 표현한 말로 이해했는데 알고 보니 ‘너무 웃어서 광대가 승천한다’는 뜻의 신조어였어요. 그 얘기를 촬영 직전에 메이크업하는 친구에게 듣고 ‘광대를 움직여서 매운맛을 표현해야 한다’는 힌트를 얻었죠. 내복 이름은 더 재미있어요. 신축성이 뛰어나다고 ‘느라지아’예요, 하하.”

    ▼ 웃겨야 한다는 강박감은 없었습니까.

    “이 캐릭터는 웃겨야겠다고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었어요. 자신이 만든 원칙을 고지식할 정도로 철저히 지키면서 살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거든요. 또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고 있고. 드라마의 전체적인 색깔은 코믹이었지만 미스 김 자체가 코믹한 인물이라기보다는 회사 안과 밖의 캐릭터가 확연하게 달라서 양면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었을 거예요. 1인2역이나 다름없으니까. 미스 김이 다른 사람을 도우며 영웅처럼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업무였어요. 대신 돈을 받은 만큼 완벽하고 신속하게 해내고, 계약서에 명시돼 있지 않은 시간외업무에 대해서는 정당한 수당을 요구하죠. 그를 통해 이 드라마가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도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일한 만큼 대가를 공정하게 지불해야 하는데, 너희 고용자가 정말 그렇게 하느냐에 대한 풍자죠.”

    ▼ 촬영장 분위기는 좋았나요.

    “스태프들과 그렇게 정들기도 힘들어요. 드라마 ‘스타일’이랑 ‘즐거운 나의 집’ 스태프들에게서 각별한 애정을 느꼈는데 이번에도 그랬어요. 잠깐 씻으러 가거나 잘 때 빼고 대부분의 시간을 스태프들과 같이 보내서 정이 안 들 수가 없었죠. 우리 스태프들은 다 저를 ‘미스김’ 아니면 ‘미스 김 씨’ ‘미스 김 선배님’ ‘서김이 형’이라 불렀어요. 그게 너무 좋고,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미스 김을 연기하는 김혜수를 굉장히 아끼고 응원해줬어요. 시청자한테 검증받기 전에요. 그건 배우한테 큰 용기를 주는 거예요.”

    ▼ 원래 웃음이 많다고 들었는데 감정 절제하기가 버겁진 않았나요.

    “사실 웃음 참느라 혼났어요. 오지호 씨랑 붙는 신이 많았는데 보기만 해도 웃기더라고요. 파마머리도 웃기고, NG를 내도 웃기고, 소리를 질러도 웃기고. 오지호 씨가 애드리브를 참 잘해요. ‘야이, 김씨’ ‘내가 얘기할 때 가지 좀 마’ ‘에잇 들개인간 같으니라고. 지가 무슨 깡통 로보트야. 왜 감정이 없어!’ 이런 게 너무 웃겼어요. ‘어떻게 저런 생각이 나지?’싶을 정도였어요. 저는 애드리브를 잘 못해요. 유머나 풍자에 특별한 센스를 가진 사람이 아닌데 다른 배우들, 특히 파트너였던 오지호 씨의 유머 타이밍과 센스에 많이 놀랐어요. 제게 좋은 자극이 됐죠.”

    “난 축복받은 비정규직 엄살 부리지 않겠어요”
    상처의 영광

    ▼ 오지호 씨의 매력은 뭔가요.

    “완전 잘생겼잖아요. 몸도 되게 예뻐요. 근데 장규직처럼 좀 빈 듯한 캐릭터를 전혀 거부감 안 들고 호감 가게 연기하는 게 그 사람의 장점이에요. 장동건 씨나 정우성 씨를 보면 진짜 멋지지만 왠지 우리가 한 발짝 떨어져서 봐야 할 것 같은데, 오지호 씨는 친근하게 느껴지잖아요. 쾌활하고 건강하고 굉장히 착해요. 촬영 현장이 늘 밝았던 것도 오지호 씨 덕이에요. 그렇게 웃음이 많고 성실한 배우도 드물 거예요. 물론 단점도 있지만 그걸 본인이 매우 잘 알고 있고. 액션 신을 찍을 때 오지호 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액션을 이렇게 많이 할 줄 몰랐어요. 액션물은 기본적으로 안 해요. 다치는 것을 무서워하거든요.”

    ▼ 의외네요.

    “저뿐 아니라 제 주위의 누군가가 다치면 너무 불안해서 집중이 안 돼요. 위험한 스포츠를 즐긴다거나 오토바이를 탄다거나 운전할 때 너무 속도를 내는 친구는 안 만나고 싶어요. 근데 촬영 현장에서는 다들 일에만 빠져 있다보니 사고가 나기 십상이에요. 사고는 미리 조심하는 수밖에 없죠. 다쳐도 주연배우나 관심을 받지, 스태프나 단역배우는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티도 안 나고 보상도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그런 상황을 겪는 것도, 목격하기도 싫은데 이번에는 만날 별것도 아닌 일로 다쳤어요.”

    ▼ 많이 다쳤나봐요.

    “처음에 사무실 신을 찍을 때 의자 고치며 잭나이프 같은 걸 썼잖아요. 그걸 다뤄본 적도 없는데 잘 해보려다 손을 베었어요. 지금 팔다리에 흉터가 많은 것도 다칠 만한 데서 다친 게 아니라 평소 그런 일을 안 해봤으면서 잘하는 것처럼 하려다 보니 수시로 다쳐서 그래요. 손이 지금은 좀 괜찮아졌지만 온통 상처투성이였어요. 스테이플러 심을 빼다가도 다치고, 유도하다가 어깨 탈골되고…. 정수기도 ‘허헙’ 하고 큰 소리로 기압을 넣으면서 가뿐하게 들려고 했는데 떨어뜨려서 박살냈어요. 그래서 새 정수기를 갖다놓고 거뜬히 드는 것처럼 연출해서 찍었어요.”

    ▼ 보약이라도 좀 챙겨드시지.

    “드라마 촬영도 체력전이라 일단 보약을 먹고 시작했어요. 근데 맛이 없으니까 나중엔 안 먹게 돼요. 대신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음식을 잘 먹었어요. 기본적인 게 무너지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못하는 상황이 오는데 최소한 그 지점을 스스로 만들진 말자는 생각으로요. 배우는 최상의 컨디션에서 최상의 연기를 뽑아내야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잖아요. 이건 사실 굉장히 불합리한 시스템 때문에 생기는 문제예요.”

    시청률의 불편한 진실

    “난 축복받은 비정규직 엄살 부리지 않겠어요”

    미스 김 캐릭터에 몰입한 김혜수.

    그는 채시라, 하희라, 이상아와 함께 하이틴 광고스타로 활약하다 1986년 영화 ‘깜보’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돼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데뷔 후 줄곧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연기 외길을 걸어왔기에 ‘쪽대본’으로 생방송처럼 촬영하는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듯했다. 그는 “방송 운영진도 아니고, 드라마도 드문드문 해서 내부적인 사정은 잘 모른다”고 전제한 뒤 “드라마의 성패를 시청률에 따른 광고수익으로 판가름하는 한 제작환경이 개선되기는 힘들 것 같다”고 꼬집었다.

    “저와 친한 언니가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어요. 얼마 전 그 언니한테서 미스 김을 응원하는 문자가 왔기에 ‘드라마 준비는 어떻게 돼가느냐?’고 물었더니 ‘곧 촬영해야 하는데 대본이 2부까지 나왔다’고 해요. 내가 하는 드라마도 아닌데 화가 막 나는 거예요. 배우나 스태프는 그것만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데 10분의 1도 안 되는 내용으로 어떻게 전체를 판단하겠어요? 그건 도박이에요. 잘되면 다행이지만 잘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거든요.

    이게 방송가의 현실이에요. 시청률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사전제작은 안 하려 하고, 미리 써놓은 대본을 새로 쓰는 일이 비일비재하죠. 이러니 안정적으로 글을 뽑아낼 수 있는 검증된 작가, 시청률이 보장된 작가한테만 매달리는 거예요. 우리 윤난중 작가 같은 경우는 재능을 알아보고 기회를 주는 PD를 만났지만 연출자나 제작자 대부분이 작가에게 재능이 있어도 드라마 경력이 없으면 믿질 못해요. 드라마 경력이라는 게 필력이 아니라 ‘한 주에 두 편 분량을 써낼 수 있느냐’죠.”

    가당치도 않은 이런 기준이 능력 있는 작가를 옥죄는 게 사실. 그는 “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이냐”며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오해하고 등 돌리게 만들고, 방송이라는 대중매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당장 수익을 내야 유지되는 제작사의 처지는 이해하지만, 시청자의 기대치는 자꾸 올라가는데 콘텐츠나 시스템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으니 다양성과 발전을 기대하기 힘든 거예요. 작가와 배우가 바뀌고 연출의 형태가 좀 바뀔 뿐이지, 만날 그렇고 그런 드라마만 하니까요. 시청자에게 피해를 주고 작가와 배우, 스태프가 제 기량을 발휘하기 힘든 제작환경이 하루빨리 바뀌어야죠.”

    ▼ 배우의 연기력도 제자리걸음인 경우가 많은데.

    “예전엔 저도 연기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은 없지만 그때는 제가 연기로 보여줄 수 있는 역량이 고만큼이었겠죠. 하지만 아무리 연기 잘하는 배우라도 매번 발전할 순 없어요. 우리 일이라는 게 협업이라 좋은 베이스, 좋은 대본, 그런 것들을 잘 조율할 수 있는 연출자, 배우들 간의 화학반응, 그리고 개인적 역량이 합쳐져서 연기로 평가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내 것도 아니고, 다 내 칭찬도 아니고, 다 내 탓도 아닌 거예요. 그런데 뭐가 하나 잘되면 다음에는 으레 그 이상을 요구하도록 조장하는 분위기가 돼버려 무서워요.”

    ‘3개월 계약직’

    “난 축복받은 비정규직 엄살 부리지 않겠어요”
    ▼ 무섭다?

    “요즘 ‘드라마가 성공하고 열렬한 환호를 받아서 다음 작품이 힘들겠다’ ‘다음 작품이 무척 기대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기대는 긍정적인 관심이고, 누군가가 나에게 기대감을 갖는다는 건 고맙죠. 근데 드라마가 이만큼 사랑받은 건 저 혼자 잘해서가 아니라 협업이 이뤄낸 결과예요. 물론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김혜수니까 가능한 건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김혜수가 다른 배우보다 월등해서가 아니에요. 미스 김을 다른 배우가 했다면 그 배우밖에 할 수 없는 미스 김이 나왔을 거예요. ‘직장의 신’이 잘돼서 기쁘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할 때마다 미스 김을 계속 뛰어넘을 순 없어요. 저도 바라는 바지만 그렇게 살아지지 않아요. 그건 당연한 게 아니거든요.”

    ▼ 연기자도 고용이 불안정한 직업인데, 연기하면서 공감이 가던가요.

    “미스 김도 3개월씩 계약하지만 저도 3개월 계약하고 촬영해요. 리허설 때 동료들이 ‘미스 김 씨는 왜 3개월만 일하고 떠나세요?’ ‘미스 김 선배님은 왜 3개월만 일하고 연장계약을 안 하세요?’ 하고 묻기에 ‘연속극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미니시리즈 찍기는 3개월이 딱 적당합니다만’이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어요(웃음).”

    ▼ 틀린 말도 아니네요.

    “많은 사람이 비정규직으로 일한다고 해요. 현재 정규직, 비정규직, 자영업이 각기 1대 1대 1인데 비정규직 비율은 점점 더 높아질 거예요. 고용주는 인력이 계속 필요한데 가능하면 비용을 절감해야 하니까 비정규직으로 채용하려고 하겠죠. 또 생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에 원하지 않지만 비정규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고요. 배우도 엄밀히 말하면 계약직이고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요. 그중에서도 저는 매우 축복받은 소수에 포함된다고 생각해요. 어른들 대부분이 성년 이후 신체와 두뇌와 정신이 가장 건강할 때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일을 하는데,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게 다행이고 고맙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미안한 생각마저 들어요.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엄살 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할 거예요. 매번 열렬한 지지와 좋은 평가를 받진 못하겠지만, 그게 배우로 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해야 할 도리가 아닌가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기 전 “조금 아픈 얘기를 꺼내겠다”고 운을 떼자 그가 단박에 알아채고 “논문 표절이요?” 한다. 2001년 성균관대 언론대학원에서 받은 석사학위 논문이 지난 3월 ‘직장의 신’ 방영 직전 표절 논란에 휩싸였던 그는 드라마 제작발표회장에서 홀로 단상에 올라 잘못을 인정하고 “학위를 반납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일로 “과연 김혜수다운 정공법”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논란을 잠재웠지만 드라마 촬영 내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 터. 그는 기자가 표절 논란의 배경과 당시 심경 등을 일일이 물어야 하는 민망한 상황을 만들지 않고 고백성사를 하듯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놨다.

    김혜수다운 정공법

    “처음에는 ‘표절이랑 나랑 무슨 상관이지? 이게 뭐지?’ 하고 무척 놀랐어요. 표절이란 게 심각한 단어잖아요. 소속사에서 나보고 ‘논문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대조를 해봐야 한다면서. 근데 제 논문이 생각이 안 나요. 너무 오래전이어서 그게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전문가가 대조해봤는데 문제가 있었고, 그게 어제 일이건 10년 전 일이건 잘못된 거면 잘못인 거죠. 물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무지해서 그런 거죠. 하지만 이유 불문하고 잘못된 거니까 그냥 잘못했다고 인정한 거예요. 심플하게.

    다만 개인적으로 타이밍이 몹시 난처한 상황이었어요. 며칠 후에 제작발표회가 열리고 방송이 곧 나가야 해서 하차를 하려야 할 수도 없었어요. 제가 주인공인데 하차하면 드라마 관계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거니까요.

    묵과할 수 없는 물의를 빚었으니 제작발표회 때 질문이 나올 텐데, 함께 자리한 다른 배우들이 얼마나 괴롭고 불편할지 생각하니까 이대론 안 되겠더라고요. 그런 상황을 만들기 싫어서 제작진에 물어봤죠. 내가 먼저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 제작발표회를 시작해도 되겠느냐고요. 그래서 제작발표회 전날 하고 싶은 얘기를 종이에 썼어요. 원래 간결하게 쓰려고 했는데 말이 길어졌죠. 그 일을 두고 ‘김혜수는 역시 당당하다’고들 하던데, 이건 당당한 거랑 상관없는 거예요. 잘못한 건 되돌릴 수 없는 사실이고, 그 일로 누군가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죠.”

    배우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기고 ‘직장의 신’을 통해 ‘연기의 신’으로 거듭난 그는 오는 9월 스크린에 컴백한다. 차기작은 그가 ‘직장의 신’보다 앞서 촬영한 영화 ‘관상’. 조선의 운명을 바꾸려는 천재 관상가의 이야기다. 송강호, 백윤식, 이정재 등 걸출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이 작품에 김혜수는 홍일점 주인공 연홍으로 등장한다. 지난 석 달 동안 입었던 정장을 벗고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은 이 여자가 또 어떤 매력으로 관객을 홀릴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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