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호

“내가 시청자라면 ‘차범근 해설’ 들었을 것”

독점 인터뷰 이영표의 2막 1장

  •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입력2014-08-21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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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송 메커니즘 ‘공부’하려 해설 맡아
    • ‘해설자 이영표’와 ‘인간 이영표’가 싸웠다
    • 10.5km 체력으로 11km 뛴 국가대표팀
    • 이번 월드컵 팀이 2002년 팀보다 실력은 나아
    “내가 시청자라면 ‘차범근 해설’ 들었을 것”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축구대표팀 못지않게 관심과 주목을 받은 이가 있다. KBS 해설위원으로 월드컵 현장을 누빈 이영표다. 아직도 이영표라는 이름 뒤에 붙은 ‘해설위원’이란 타이틀이 낯설기만 하다. 여전히 ‘이영표 선수’라고 칭해야 할 것 같은 느낌.

    해설위원 이영표는 월드컵 경기마다 뛰어난 예측력을 발휘하고 때로는 경기의 스코어까지 맞히는 바람에 ‘문어 영표’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축구를 해온 경험과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대표팀 생활, 설득력 있는 말솜씨, 경기를 전체적으로 읽어내는 해석 능력은 KBS 월드컵 중계가 SBS의 차범근 해설위원과 MBC의 송종국-안정환 해설위원을 제치고 시청률 1위에 오른 배경이 됐다.

    월드컵 경기 해설을 마치고 귀국한 이영표는 무척 바빴다. 박지성의 은퇴식을 겸한 K리그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KBS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축구와 관련한 장외 행사를 소화하느라 스케줄이 빡빡했다.

    8월 5일 그의 모교인 건국대 인근의 한 커피숍에서 기자와 만난 이영표는 월드컵 이후 방송 프로그램 등을 제외한 오프라인 매체와의 인터뷰는 ‘신동아’가 처음이라고 밝혔다. 인터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그와 얘기를 나누다보면 기자가 학생이고, 그가 교수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방송 해설은 그의 축구인생 2막의 1장이었다.

    이영표와의 인터뷰를 Q&A 형식으로 정리했다.



    Q: 은퇴 후 밴쿠버에 남아 유학 생활을 이어갈 것이라고 했을 때는 정해진 수순을 밟는 듯했다. 그런데 브라질 월드컵 중계방송 해설을 맡았다는 소식에는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들더라. 워낙 공부하고 싶어 하는 열정이 강했던 사람이라 밴쿠버에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돌아온 게 의아했다.

    A : 먼저 밝혀둘 게 있다. 내가 공부를 포기한 건 절대 아니다. KBS 측에서 학업과 방송을 병행하게끔 많은 배려를 해줬다. 앞으로 3년간 밴쿠버에서 생활하며 A매치 경기나 중요한 축구 중계에 해설위원으로 투입될 예정이다. 브라질 월드컵은 그 과정의 ‘예외’ 사항이었다. 내가 해설위원직을 수락한 이유는 하고 싶은 ‘공부’란 범주에 방송 일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선수일 때는 축구만 잘하면 됐지만, 은퇴 후에는 축구를 둘러싼 주변 환경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고, 학교에서의 공부 외에 해설도 방송을 통해 축구를 배우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봤다. 방송이 어떤 시스템으로 이뤄지고, 축구에서 중계가 왜 중요하며, 거기서 해설위원의 역할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어 도전한 것이다.

    Q: 선수가 아닌 해설위원 자격으로 지켜본 브라질 월드컵은 어떠했나.

    A: 선수 시절 월드컵을 세 차례 경험했다. 그런데 그 세 차례의 월드컵보다 이번에 해설위원으로 만난 월드컵이 공부 면에선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걸 얻게끔 만들었다. 선수 시절의 월드컵은 경기에만 집중했다. 그 나라의 문화, 월드컵 분위기, 준비 과정 등은 머릿속에 없었다. 오로지 경기에서의 승부에만 매달렸다. 이번에는 그라운드 밖에서, 그것도 높은 곳의 중계석에서 월드컵을 지켜봤고 흥분했다. 아마 최근 6개월의 현대 축구 흐름을 아는 가장 ‘핫’한 사람 중 한 명이 나일 것이다. 전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지금이 제일 ‘핫’하다.(웃음)

    중학생 눈높이 맞춰 해설

    Q: 선수 시절, 중계방송을 통해 해설을 듣는 것과 자신이 직접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 같은데.

    A : 사실 선수 때는 해설위원의 해설보다는 경기 장면에 몰두했기 때문에 해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분의 해설이 더 좋은지, 안 좋은지 판단조차 없었다. 그러다 덜컥 해설을 맡고 난 다음부턴 화면보다 해설위원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더라. 그런 현상이 재미있었다.

    Q: 브라질 월드컵 때 방송 3사 시청률 경쟁이 대단했다. 항간에서는 대표팀 선수보다 해설위원이 더 관심을 받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A : 처음에는 시청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내가 모르는 방송을 배운다는 게 첫 번째였다. 내 능력 밖의 일에 관심 두는 건 다른 일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브라질에 가보니까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방송 관계자들이 시청률 경쟁에 신경을 집중하더라. 그걸 알고 나니 심하게 부담이 됐다. 해설하면서 시청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안)정환이 형, (송)종국이, 차범근 감독님과 만나 식사도 하고 축구 얘기도 나누면서 이전과 다름없이 편안하게 지냈다. 방송3사 시청률의 승자가 어느 쪽이든 그것은 한국 축구 발전과 무관하다. 그러면서도 사람이다보니 KBS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기분은 좋더라. 중계를 위해 고생하는 스태프들을 위해서라도 시청률이 잘 나오길 바랐다.”

    Q: 바람대로 시청률 1위에 올랐고, 덕분에 다른 방송사 해설위원들은 죽을 맛이었다고 하더라.(웃음)

    A : 방송하다보니 내가 가진 지식과 생각을 잘 포장해 전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방송국 측에선 축구를 보는 시청자의 수준을 중학교 1, 2학년에 맞춰 준비해달라고 요구했다. 시청자의 폭이 다양하기에 어려운 설명보다 쉬운 얘기로 풀어주길 바랐다. 축구인이나 전문가가 봤을 때는 내 해설이 수준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영표가 저것밖에 못해?’ 하는 시각도 있었을 것 같다. 실제 내 해설이 중학생 정도가 이해할 수 있는 해설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많은 분이 좋아한 것만은 분명하다.

    “해설하며 마음 편치 않았다”

    Q: 그렇다면 이번 월드컵에서 누가 해설을 가장 잘했다고 보나.

    A : 나나 정환이 형, 종국이는 선수로서의 경험밖에 없다. 그러나 차범근 감독은 선수는 물론 지도자로서의 경험을 가졌다. 따라서 자연스레 다양한 경험과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깊이 있는 해설은 타 방송사가 따라갈 수 없었다. 해설 자체의 수준만 놓고 보면 차 감독 이 최고였다. 만약 내가 시청자였다면 난 당연히 차 감독 해설을 들었을 것이다.”

    Q: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축구선수였고, 2010 남아공 월드컵 때는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다보니 선배 홍명보 감독과 후배 선수들이 뛰는 대표팀에 대해 객관적 시각을 갖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A : 중계하는 내내 부딪힌 부분이다. 해설자 이영표와 인간 이영표가 서로 치열하게 다퉜다. 인간 이영표 처지에선 후배들의 실수가 충분히 이해되고, 그들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그리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다보니 그때 선수들이 얼마나 절망하고 아파할지를 느끼니 절로 감정이입이 되더라. 해설하면서 선수 개인의 실수에 대해선 지적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단순 실수인지, 정신적인 준비 부족에서 나온 건지, 위축된 상태에서 저지른 것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단순 실수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심리적인 실수라면 설명해야 했고, 정신적인 준비 부족이라면 따끔히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알제리전이나 벨기에전을 마치고 아파하는 후배들에게 직접 가서 등도 두드려주고, ‘수고했어’라고 얘기도 해주고 싶었지만 해설하는 이영표의 처지는 달랐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라는 말처럼 치열하면서도 냉정한 분석과 해석이 필요했다. 결국엔 난 해설자 이영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보니 정작 브라질 월드컵이 끝났을 때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Q: 대표팀의 부진이 안타까웠을 텐데.

    A: 사실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하고 탈락한 데는 대표팀뿐 아니라 나를 포함해 한국 축구와 관련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도자, 선수, 심지어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나 같은 경기인 출신들이지만 말이다.”

    빛 잃은 점유율 축구

    “내가 시청자라면 ‘차범근 해설’ 들었을 것”

    이영표(왼쪽)는 KBS를 월드컵 중계방송 시청률 1위로 이끌었다.

    Q: 이번 브라질 월드컵의 전체적인 특징을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A : 세계 축구가 2000년대 초반 추구하던 스리백의 재평가, 재발견이었다. 옛날 축구라고, 과거의 철 지난 축구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던 스리백이 브라질 월드컵에서 완벽히 부활했다. 스리백은 양쪽 측면 수비수가 주로 공격에 가담하는 포백과 달리 대인 방어에 전념하는 전술이다. 공수를 오가며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야 하기에 강한 체력이 필수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스페인을 5-1로 물리친 네덜란드, 16강전에서 브라질을 괴롭힌 칠레, 죽음의 조로 손꼽힌 D조의 코스타리카, 멕시코 등이 압박과 역습을 이용한 스리백으로 아주 효율적인 경기를 펼쳤다.”

    Q: 독일의 우승과 스페인의 몰락이 인상적이었는데.

    A : 2010년부터 세계 축구는 FC 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 뮌헨으로 상징되는 점유율 축구가 대세를 이뤘다. 그러나 스페인이 점차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점유율 축구도 빛을 잃게 됐고, 그것이 이번 월드컵을 통해 여실히 증명됐다. 독일은 역습과 수비가 동시에 되는 유일한 팀이었다. 그래서 우승했다. 스페인은 선수들이 이미 많은 대회에서 우승을 맛본 터라 간절함 또한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스페인을 상대하는 팀이라면 모두가 스페인이 강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철저한 준비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해서 나온다. 반대로 상대를 만만하게 본 스페인으로선 고전을 면치 못했다.

    브라질은 4강에 진입한 것만 해도 최고의 성적을 냈다고 본다. 이전의 브라질 팀은 개인 능력으로 팀 분위기를 바꿀 만한 선수가 5, 6명 됐다. 호나우두, 호나우딩요, 호나우지뉴 등이 뛰면 상대 선수들은 누구를 막아야 할지 도통 답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네이마르 한 명 정도다. 그렇다보니 네이마르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았고, 그가 부상으로 쓰러졌을 때 브라질도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그게 브라질이 우승하지 못한 가장 큰 요인이라고 본다.”

    히딩크의 셔틀런과 ‘뻥’

    “내가 시청자라면 ‘차범근 해설’ 들었을 것”
    Q: 한국대표팀과 관련해선 사전에 질문을 주고받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한 가지는 꼭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한국대표팀이 월드컵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이영표는 한국대표팀에 관해선 가급적 질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인터뷰에 응하는 일종의 전제조건이었다. 대표팀에 대해 어떤 얘기를 꺼내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A :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다. 브라질 월드컵 4강에 오른 팀 중 선수들이 경기에서 뛴 평균 활동거리 톱10 안에 독일 선수가 5명이나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가장 많이 뛴 팀이 이긴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똑같이 11km 뛰었다고 해도 13km를 뛸 수 있는 선수가 11km를 뛰는 것과 11km 뛰는 게 버거운 선수가 11km를 뛰는 것은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린 독일대표팀 선수들처럼 효율적으로 뛰지 못했기 때문에 패했다. 상대랑 비교해서 별다른 차이가 안 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10.5km밖에 뛸 수 없는 상태에서 11km를 뛰었다. 이건 정말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11km의 평균 활동거리가 질적인 면에서 다른 팀과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Q: 얘기를 듣다보니 갑자기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고집스럽게 실행에 옮긴 체력강화훈련이 생각난다. 일명 ‘셔틀런’!

    A : 운동하면서 훈련이 두려웠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틀 하고 하루 쉬고, 이틀 하고 하루 쉬는 걸 반복했지만 훈련 강도가 어마어마하게 셌다. 그다음의 훈련에 부담을 느낄 정도로 엄청났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와 스페인전은 연장 포함해서 120분을 뛴 경기였다. 그럴 때마다 히딩크 감독이 강조한 얘기가 있다. ‘너희는 원래 180분을 뛸 수 있는 체력이다. 그 체력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이를 악물고 체력 강화 훈련을 했기 때문에 90분 뛰고 나서 그다음 90분을 더 뛰어야만 너희 체력이 안정된다. 따라서 너희가 120분을 뛰었다는 건 절대 힘든 일이 아니다. 지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120분을 넘어가면 더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다.’ 한마디로 ‘뻥’이었지만(웃음), 선수들의 심리를 아주 잘 이용하셨고, 감독의 말씀 덕분에 우린 180분을 뛸 수 있는 체력을 가졌다고 착각하면서 월드컵 경기를 치렀다.”

    “한국 축구 성장 속도 더뎌”

    Q: 브라질 월드컵을 통해 한국 축구가 퇴보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전의 월드컵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았기에 비난이 더 거셌던 것 같다.

    “어느 나라나 대표팀 성적에는 높낮이가 있게 마련이다. 오르락내리락하며 계속 발전하는지, 아니면 다른 팀의 발전 속도보다 뒤떨어졌는지 파악해야 한다. 난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뛴 우리 선수들이 2002년의 대표팀 선수들보다 축구를 훨씬 잘 한다고 본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 팀에 만족하지 못했느냐 하면 우리의 성장 속도가 주변국의 성장 속도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실력만 발전한다고 해서 축구를 잘하는 게 아니다. 협회, 연맹, 지도자 등 주변 환경이 도와줘야 한다.

    지금의 한국 축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지한다. 그렇다면 그 문제가 무엇이고, 그 문제의 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파헤치다보면 근본적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원인을 바꿔줘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Q: 한국대표팀을 이끌 사령탑으로 네덜란드의 판 마르바이크 감독이 거론된다. 외국인 지도자를 다시 선임하는 것에 대한 견해는.

    “아무리 유능한 지도자가 와도 한국에서 20~30년씩 팀을 맡을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일시적인 부분이라 ‘사람’보다는 그가 한국 축구에 어떤 걸 남길 수 있는지 봐야 한다. 또한 좋은 지도자가 한국에 와서 대표팀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게끔 좋은 환경, 바람직한 지원을 해주는 게 중요하다. 어느 때보다 미디어와 포털 사이트의 책임 있는 자세와 시각이 필요하다. 특히 가장 많은 포지션을 차지하는 네이버의 역할은 새삼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한국 축구를 괴롭히고 자극적으로 몰아가는 기사가 아닌, 진정한 메시지를 던지는 기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기사를 게재하고 노출함으로써 미디어가 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도해야 한다.”

    Q: 얼마 전 축구협회로부터 기술위원회 자리 제안을 받은 적이 있나.

    A : 정식 제안을 받은 적 없다. 단, 기자들이 그런 내용의 질문을 해와 ‘난 지금 배울 때지, 뭔가를 할 수 있는 때가 아니다’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지금은 부족한 것도, 배워야 할 것도 너무 많다. 공부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쌓였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 한국 축구를 위해 일하고 싶다. 그 대상이 구단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단체가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이 한국 축구와 연결됐다는 사실이다. 그때가 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Q: 밴쿠버 화이트캡스에서 감독과 선수로 인연을 맺은 마틴 레니 감독이 K리그 신생팀 이랜드의 초대 사령탑으로 선임됐다. 2년 전 기자도 미국 프로축구(MSL) 취재차 화이트캡스 경기를 찾았을 때 직접 만난 적이 있어 감회가 새롭다.

    (7월 17일 이랜드 프로축구단은 “초대 감독으로 밴쿠버 화이트캡스를 이끌었던 마틴 레니 감독을 선임했으며 계약기간은 2017년까지 3년”이라고 밝혔다. 레니 감독은 2010년 MLS 최하위에 머물러 있던 화이트캡스의 감독으로 선임돼 부임 첫해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쾌거를 이뤘다)

    A : 마틴 레니 감독은 내가 추천했다.

    “한국 시스템 장점 잃지 말아야”

    Q: 사실인가. 금시초문이다.

    A : 만약 최고의 지도자를 모시고 싶다면 당연히 첼시의 무리뉴 감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클럽마다 재정의 한계가 있고, 또 한국에서 감독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분을 찾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외국인 지도자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난 주저 없이 마틴 레니 감독을 추천했다. 그는 겪어본 감독 중 최고의 지도자였다. 나하고 나이 차이가 2살밖에 나지 않는 젊고 유능한 지도자다. 성품이 아주 훌륭하다. 선수들의 창의적 사고를 막지 않고, 오히려 창의력을 발전시키게 하는 감독이다. 자유 속에서 절제를 찾는 합리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 듣기론 이랜드 측에서도 굉장히 흡족해한다더라. 낯선 한국 생활의 어려움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분이 K리그에 제대로 뿌리내리면 좋겠다. 개인적으론 이런 젊고 유능한 외국 지도자가 한국 축구에 좋은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 게, 무조건 외국인 지도자나 외국 시스템이 더 좋고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이 가진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서로 어울리면서 함께 발전해나가길 바란다.

    Q: 지난해 10월 28일, 밴쿠버 화이트캡스의 홈경기에서 선수 생활 마지막 무대가 펼쳐졌다. 은퇴 경기에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했고, 90분 풀타임을 소화하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했다. 팬뿐만 아니라 동료 선수, 소속팀이 은퇴식을 위해 펼친 깜짝 이벤트가 화제를 모았다.

    A : 한마디로 결코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은퇴식이었다. 페널티킥에 성공해 득점한 선수가 나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공을 바치는 세리머니를 펼쳤고, 구단에선 은퇴 경기 티켓에 내 얼굴을 새겨 발매했다. 은퇴 경기 시작 전 대기실과 출전 직전의 모습, 교체로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동영상을 내보내면서 감동을 자아냈다. 더욱이 경기장에는 팬들이 준비한 대형 태극기가 걸렸고, 감독은 은퇴하는 선수에게 주장 완장을 채워줬다. 많은 사람의 정성과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은퇴식이었다. 화이트캡스가 1974년에 창단됐는데, 나와 같은 은퇴식을 치른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고 하더라. 참으로 많은 걸 선물해준 팀이다.

    Q: 그래도 한국의 팬들은 이영표의 마지막 경기는 K리그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A : 나도 왜 그 생각을 안 했겠나. 화이트캡스와 계약하기 전 FC서울에 들어가 6개월가량 훈련한 적이 있다. 한국말로, 한국 선수들과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정겨운 분위기에서 훈련하는 생활이 정말 만족스러웠다. 아내와 아이들도 한국에서 생활하기를 바랐고, 고단한 외국 생활이 이어지는 데 대한 부담도 나타냈지만, 결국 내 선택은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기보다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이트캡스와 2년 계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그 2년여 동안 말로 표현 못할 축복을 받은 것 같다. 아주 적당한 시기에, 적절한 은퇴식을 치렀다. 그래선지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이나 회한이 남아 있지 않다.”

    이영표와 대화를 나누면서 기분이 좋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2002년 월드컵을 마치고 황선홍, 홍명보가 은퇴를 선언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다. 당시 두 레전드의 은퇴 소식을 듣고, 아쉬움도 컸지만, 그에 못지않은 기대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아, 이토록 경험 많은 선수들이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한다면 앞으로 한국 축구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이영표와 박지성도 마찬가지다. 그래선지 두 사람은 은퇴 전보다 은퇴 후가 더 기대되는 축구인으로 꼽힌다.

    이에 대해 이영표는 “지성이와 나 둘 다 한국 축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선수 때 우리가 한국 축구에 얼마나 많은 걸 기여했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은퇴 후의 삶도 한국 축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이다. 둘 다 공부 많이 해서 앞으로 한국 축구에 뜻깊은 역할을 하는 축구인이 되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영표는 9월 초,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다시 밴쿠버로 돌아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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