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호

다시 안 올 내 붉은 청춘 그저 술잔만 기울일밖에

백설희 ‘봄날은 간다’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석재현 | 경일대 교수, 사진작가 동아일보

    입력2015-05-20 17: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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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의 심장을 가진 냉혈한도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까지는 그런대로 견딘다. 그러나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가 끝날 때쯤이면 얼굴이 젖은 물빛을 띤다. ‘봄날은 간다’는 그런 노래다.
    다시 안 올 내 붉은 청춘 그저 술잔만 기울일밖에

    5월 12일 서울 여의도 윤중로를 찾은 시민들이 벚꽃놀이를 즐기고 있다.

    얼마 전 정현종(76) 시인의 등단 50주년 축하연에서 일어난 일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주최한 50주년 기념 시집 출간 파티였다. 시인 황동규 , 소설가 복거일, 김원일 선생 등 쟁쟁한 문인들이 참석했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행사가 마지막을 향해 치닫던 때였다. “지금부터 축하 공연이 있겠다”라는 말과 함께 소설가 복거일 선생이 하모니카를 들고 등장했다. 시끌벅적한 식당 안, 처연하고도 명징한 하모니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아, ‘메기의 추억’이다. 이어 귀에 익숙한 노래가 나온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봄날은 간다.’ 모두가 흥을 참지 못하고 뛰어나와 둥실둥실 어깨춤을 췄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문인들이 함께 ‘떼창’을 하며 잔치는 끝났다. 어느 일간지가 전한 그날의 풍경을 줄여 옮겼다.

    꽃처럼 지고 만 짧은 봄

    이날의 주인공인 노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시 ‘섬’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1980년대, 서울 신촌 이화여대 후문 건너편에 ‘섬’이란 카페가 있었고 나는 그곳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이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 정문 그린하우스 빵집 뒤편에 있다 쫓겨 온 ‘템테이션’ 등등 몇몇 카페가 이화여대 후문 주위에 웅크리고 있던, 이른바 ‘장미여관’의 시대였다.

    ‘섬’이란 카페에는 커다란 광목천에 검은 붓글씨로 쓴 시 ‘섬’ 전문이 걸려 있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신촌 밤무대를 어슬렁거리며 하릴없이 술과 음악에 절어 있던 내가 시인 정현종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다.

    정현종 시인의 시집 출판 기념회 저녁 풍경이 증명하듯 문인들은 ‘봄날은 간다’를 좋아한다. 전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몇 년 전 시인 100명에게 애창곡을 물었더니 ‘봄날은 간다’가 단연 1위였다. 계간 ‘시인세계’ 조사 결과다. 고상하기 그지없다는 시인들에게 대중가요가 최고의 노래로 인정받은 셈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 노래를 부르면, 철의 심장을 가진 냉혈한도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까지는 그런대로 견딘다. 그러나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가 끝날 때쯤이면 얼굴은 젖은 물빛을 띠게 된다.” ‘봄날은 간다’는 그런 노래다.

    다시 안 올 내 붉은 청춘 그저 술잔만 기울일밖에

    박시춘 노래비에 새겨진 ‘봄날은 간다’ 노랫말. ‘소리꾼’ 장사익이 썼다.

    1953년 발표된 손로원(시원) 작사, 박시춘 작곡의 ‘봄날은 간다’는 많은 가수가 불렀다. ‘불후의 명곡’이란 이름값을 하는 노래 중 단연 최고의 노래가 아닐까. 백설희에서 시작해 조용필, 장사익, 최백호, 한영애, 심수봉, 이동원, 김도향 등 한국 가요사를 관통하는 명가수들이 모두 자기만의 음색으로 불렀다. 전제덕은 하모니카로 구성지게 불렀고, 바이올린 가야금 색소폰 등 수많은 연주곡도 있다.

    다양한 연령대의 가수들이 서로 다른 음색으로 부르지만 ‘봄날은 간다’는 기가 막히게 한결같은 정서를 준다. 나는 그중에서 ‘장사익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 폐부에서 솟구치는 절절한 서러움을 ‘꺾는’ 창법으로 불러대니 가슴이 아려온다. 꽃처럼 지고 만 짧은 봄의 아쉬움, 다시 오지 않을 내 청춘에 대한 절망감과 한이 고스란히 표출된 노래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불렀고, 불렀다 하면 모두 노래 속에 첨벙 빠지게 되는 묘한 노래다.

    노래로, 詩로, 영화로

    그러나 내가 ‘봄날은 간다’를 좋아하게 된 것은, 누구나 그랬겠지만 폭풍 같은 청춘기를 지내고 인생의 신산함을 알게 된 중년 이후다. 노래가 안겨주는 깊고 유장한 의미를, 아서라, 청춘들은 모른다. 구성진 멜로디에 깊은 페이소스가 녹아 있는 노랫말에 이 땅의 중년들은 인생의 고비고비 맘이 괴로울 때 폭탄주에 취해 귀갓길에 훌쩍이며 불렀다. 젊은 날 들었던 그 모든 노래를 위압하며 다가온 노래가 바로 ‘봄날은 간다’다.

    노래 ‘봄날은 간다’는, 이 땅에서는 하나의 신드롬이다. 고상하기 그지없는 시가 대중가요를 따른다는 게 조금은 이상하지만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을 단 시도 있다.

    ‘이렇게 다 주어버려라/ 꽃들 지고 있다…지상에 더 많은 천벌이 있어야겠다/ 봄날은 간다.’

    시인 고은은 자조 섞인 탄식으로 봄날의 정한을 노래했다. ‘가는 봄날’이라는 순간성과 맞물리면서 허무의 극치를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허무 속에서 퇴폐와 탐미를 찾았다. 안도현은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고 탄식했다. 29세에 요절한 기형도는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는 몇 장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라는 시를 남기고 서른 즈음, 생의 봄날에 떠났다.

    “라면 먹고 갈래요?” “내가 라면으로 보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같은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사랑의 영원함’을 찬미해 한동안 회자되던 같은 이름의 영화도 있고, 인기 TV 드라마도 있었다. 이 노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곡조가 처연하고 가사의 울림이 그만큼 한국인에게 깊고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들 결혼식 때 입겠다던 연분홍 치마

    다시 안 올 내 붉은 청춘 그저 술잔만 기울일밖에

    강원도 춘천 남이섬에 있는 작곡가 박시춘의 노래비(위). 노래비를 보는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봄날을 기다리며 살았을까.

    ‘봄날은 간다’는 1953년 전쟁 막바지에 대구 동성로 유니버셜레코드사가 제작한 유성기 음반으로 발표됐다. 화가이자 작사가인 손로원(1911∼1973)이 지은 노랫말에 박시춘(1913∼1996)이 곡을 붙였다. 비장미 넘치는 노랫말은 손로원이 부산 용두산 판자촌에 살 때 연분홍 치마를 입은 어머니 모습이 담긴 사진이 화재로 불에 타는 걸 보고 써뒀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가 타계하기 전,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한 연분홍 치마 한복을 아들 손로원의 결혼식장에서 입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사실을 당시 시대 상황과 함께 떠올리며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뜻 화사한 봄날에 어울리는 밝은 봄노래 같지만, 오히려 노래 저편에는 처연한 슬픈 봄날의 역설이 가득하다. 시인 김영랑이 이야기한 ‘찬란한 슬픔의 봄’에 버금가는 대목이다. 발표되자마자 전쟁에 시달린 가난한 한국인들의 한 맺힌 내면 풍경을 대변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름값 하는 국민가요쯤으로 인정되는 ‘봄날은 간다’ 흔적을 찾는 길은 지난하다. 봄날만 간 게 아니라, 세상의 변화가 워낙 빠르다보니 그 시절 그 노래의 풍경은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됐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대중가요의 명맥을 이어간 1950년대 초 유니버셜레코드사가 있던 대구 동성로와 교동은 이제 대구의 구시가지로 남아 조악한 영세 상점이 늘어서 있을 뿐이다. 조그만 표지석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행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잦아든다.

    피난민의 애환이 서린, 손로원이 살던 부산 용두산 기슭의 판자촌은 옛날얘기다. 재개발 바람에 아파트와 상가가 빼곡하다. 봄이면 온 국민을 놓았다 들었다 하는 노래치고는 그 대접이 영 시원찮다.

    기실 ‘봄날은 간다’만큼 대중의 심금을 울린 노래는 많지 않고, 그만큼 우리 정서에 실체적인 영향을 끼친 대중가요도 드물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세대를 아우르는 노래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이중적이다. 클래식에 대한 태도와는 달리, 정작 자신의 슬픔을 달래주는 대중가요는 낮추보는, 이른바 ‘미적 야만주의(aesthetic barbarism)’가 여전하다. 실제로 한국인이 대중가요보다 클래식을 더 좋아하고, 고상한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은 이 노래를 공부하다가 알게 된 큰 ‘소득’이었다. 오래전 서울대 음대 교수인 테너 박인수가 대중가요를 불렀다는 이유로 국립오페라단에서 축출당한, 황당한 옛 역사가 떠오른다.

    이 봄도 가고 있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른 고(故) 백설희 선생은 경기도 광주 삼성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플라스틱 조화 옆에 있는 작은 표지석이 안개비에 젖어 있다.

    노래 ‘봄날은 간다’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기념비는 춘천 남이섬에 있다. 요즘 말로 ‘썸’을 타던 이 땅의 중년들이 젊은 날 한때 단골로 찾던 추억의 공간이다. 서울과의 지정학적인 거리 탓에 잘만하면 기차가 끊어진 것을 핑계로 여자친구와 어떻게 하룻밤을 같이 보낼 수도 있던, 가슴 떨리던 ‘가능성의 장소’이자 사연 많은 유원지. 지금은 중국 관광객 천지다. 드라마 ‘겨울연가’ 이후 몰아닥친 일본 관광객에 이어 이제는 중국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섬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 나오는 동안 모국어를 듣기 어렵다.

    남녘에서 올라온 할머니들이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쉬는 모습이 가끔 눈에 띈다. 검푸른 강물을 뒤로하고 양산을 든 할머니는 몇 번이나 떨어지는 봄꽃을 돌아보고 또 돌아다본다. 할머니는 또 그 얼마나 많은 세월 아지랑이 같은 봄을 기다리며 살았고, 또 봄날을 보냈을까.

    ‘꽃은 피기는 힘들어도 지는 것은 순간’이라는 시인 최영미의 시구가 벼락처럼 다가오는 봄날이다. 맞다. 아련한 봄날이 가고 있지만, 우리는 가는 봄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 올해 봄날도 간다. 아쉬운 작별의 인사도 없이 벌써 저만큼 가고 있다. 인생도, 청춘도, 꿈도 봄날처럼 간다. 잡으려 할수록 더 빨리 간다. 그래서 아쉽다. 소월의 시구처럼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 못한다. 기껏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노래를 핑계 삼아 속절없이 가버린 청춘을 그리워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일, 우리네 봄날이 속절없이 가고 있다. 맞다, 열아홉 순정은 황혼 속에 슬퍼지고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다시 안 올 내 붉은 청춘 그저 술잔만 기울일밖에

    노래 ‘봄날은 간다’가 처음 발표된 대구 교동시장 골목. 6 · 25전쟁 때 유니버셜레코드사가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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