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호

사랑도 우정도 아닌 값싼 금욕적 관계

‘20대의 대세’ 줄타기 연애 ‘썸’

  • 김규연 | 고려대 경제학과 yoyosis@korea.ac.kr

    입력2015-08-20 1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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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식품 내지 장난감”
    • “달달함은 OK, 진지한 연애는 NO”
    • “변덕 부리고 멋대로 하다 안 보면 그만”
    • “썸남썸녀 유행…너도나도 따라 해”
    사랑도 우정도 아닌 값싼 금욕적 관계
    고려대 여학생 K(23)씨는 지난 5월 같은 학교 남학생 D(22)씨를 미팅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자리를 파할 때쯤 연락처를 교환했다. 이후 둘은 자주 만났다. 같이 학교 앞 카페에서 공부하고 술을 마시고 기말고사 기간엔 도서관에서 밤을 새웠다. 함께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쇼핑도 했다. 여느 연인처럼 매일 카카오톡 메신저를 주고받는다. 주위에선 둘에게 “달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은 서로 사귀는 연인관계가 아니다. 만나도 신체적 접촉은 거의 없다. 여학생 K씨는 “사귀자고 고백할 만큼 D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남학생 D씨도 K씨에게 “진지하게 만나보자”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남녀가 이렇게 친구도 연인도 아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두고 ‘썸탄다’라고 한다. 썸은 ‘썸씽(something)’의 준말로 연애 이전의 호감을 느끼는 상태에 머무르는 것인데, 상대를 ‘사랑과 우정 사이의 장식품 내지 장난감’쯤으로 여긴다. 소유·정기고는 가요 ‘썸’에서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너”라고 썸을 묘사한다. 수많은 젊은이가 연애 대신 썸타기를 택한다. 이성을 안 만날 순 없지만 진지한 연애보단 가벼운 만남인 썸이 더 좋다고 한다.

    “그냥 이대로 지내”

    여성지 ‘코스모폴리탄’에 따르면 썸은 대중문화의 인기 코드로 부상했고 ‘썸남썸녀’는 새로운 트렌드가 됐다. 한 작가는 “썸 관계의 남녀 사이에도 ‘핑크빛 감정’이 오간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여학생 K씨도 “D에게 어느 정도 설렘을 느꼈다”고 말한다.



    “D에 대한 설렘은 초반에 가장 컸어요. 시간이 갈수록 D가 점점 편해졌는데, 어쩌다 남자다운 면모를 보여줄 땐 또다시 설·#47132;죠. 물론 반대의 경우엔 마음이 확 식었지만. 이렇게 제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면서 ‘이 친구를 많이 좋아하진 않는구나’라고 느꼈어요. 진지하게 사귀기보단 그냥 이대로 지내도 괜찮을 것 같았죠. 가끔 집에 늦게 들어가거나 술을 마실 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싫지는 않더군요.”

    K씨와 D씨는 서로의 암묵적 합의 아래 썸타기를 하는 셈이다. 반면 많은 커플은 어느 한쪽이 ‘진지한 만남’을 거부하기에 썸타기를 한다.

    영국의 한 대학에 유학 중인 Y(23)씨는 얼마 전 서울의 한 클럽에서 여학생 E(20)씨를 만났다. 알고 보니 둘은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이었다. 둘은 서슴없이 호감을 표현했고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 4개월 뒤 Y씨는 둘의 관계에 대해 명확히 정의 내리고 싶어 했다. E씨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냥 이대로 지내”였다. Y씨는 별로 서운해하지 않으며 E씨의 말에 따랐다. 이후 둘은 각자 다른 이성을 만나고 있지만, 서로 어느 정도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S대생 I(20)씨는 지난해 미팅에서 대학생 C(20)씨를 만났다. 둘은 여러 번 데이트를 즐겼다. C씨가 “정식으로 사귀자”고 고백했을 때 I씨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녀는 “C에게 호감이 있지만 진지한 관계는 싫다. 내가 원하는 건 썸의 설렘”이라고 말했다. “남자가 고백할 기미가 보이면 일부러 거리를 두는 편”이라고도 했다.

    젊은이들 사이에 썸타기가 유행하는 것은 ‘책임지지 않으려는 심리’와 무관치 않다. 연인관계는 장점도 많지만 행동에 구속이 따른다. 예컨대 자주 통화해야 하고, 자주 문자메시지 보내야 하고, 자주 만나야 하고, 마음이 변치 않았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다. 이런 속박은 싫고 이성관계의 달달함은 느끼고 싶어 고안된 것이 썸타기 관계라는 것이다.

    “금방 만날 것처럼 굴고…”

    박진표 감독의 영화 ‘오늘의 연애’에서 남녀 주인공은 함께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며 스킨십까지 하지만 연인 사이임을 부정한다. 여자주인공은 다른 남성과도 썸을 탄다. 젊은 관객은 여기에 공감한다. 가요 ‘밀당의 고수’엔 “금방 만날 것처럼 굴고 약속할 땐 오빠 나중에 만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마음대로 변덕 부리고 멋대로 해도 되며, 정 안되면 안 보면 그만인 것이다. 썸타기는 ‘이성관계의 모든 의무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한다. 동국대생 J(25)씨는 이렇게 말한다.

    “호감을 비치는 듯하다가 막상 관계를 진전시키려 하면 마음을 닫아버리는 모습은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 비일비재하다. 한없이 가벼운 인간관계를 지향한다. 관계를 끊기도 쉽다. 나는 주로 연락 횟수를 줄인다. 그러면 상대가 알아서 연락을 끊는다.”

    몇몇 대학생은 “썸의 상대가 어떤 마음을 갖든 그 관계 자체를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를 금방 정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일부 대학생들은 처음부터 ‘쉽게 끝낼 대상’을 찾는다. 대표적인 게 교환학생과의 썸타기. 고려대생인 L(22)씨는 1년 코스로 한국에 온 외국인 교환학생과 썸타기를 했다. 그는 “시한부 연애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환학생과의 연애는 끝이 정해져 있기에 기본적으로 가볍게 만날 수 있다. 감정 소모를 많이 안 해도 된다”고 했다.

    김연수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은 “썸타기의 성행엔 심리적 요인이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자라다보니 이성관계에서 파생될지 모르는 어려움을 우선 피하려 든다”는 것. 연애를 아예 안 함으로써 실연에 따르는 좌절감을 경험하지 않으려 한다는 얘기다. 그는 다른 요인으로 군중심리를 꼽는다. ‘내 친구도 이성을 가볍게 만나니 나도 그래볼까?’ 하는 동조심리가 20대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등장이 썸타기의 기술적 터전을 제공했다고 본다. 과거엔 전화통화와 대면접촉으로 이성을 사귀었다.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과 비용, 진정성이 요구됐다. 요즘엔 카카오톡 메시지 같은 SNS를 주로 이용한다. 대신 전화통화와 대면접촉은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남녀 간 가벼운 관계 형성이 용이해졌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리스크(risk)’로 여겨 동거로 눈을 돌리는데, 사회적으로 아직 동거에 관용적이지 않으므로 가벼운 만남으로 귀착되고 있다고 한다. 방송 분야를 연구하는 한 대학교수는 “TV의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가 썸타기를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연애 못해 죽을 상황 아니면…”

    취업이나 결혼을 하기 힘든 사회적 환경도 썸타기 양상을 부채질한다. 동국대생 L(23)씨는 “취업 준비 때문에 진지한 연애를 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한숨을 내쉰다.

    “20대 취업적령기 몇 년이 지나면 ‘절벽’으로 떨어져요. 그전에 갖춰야 할 스펙도 많고 경쟁도 치열하고. 취업 준비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취업 준비는 인풋과 아웃풋이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연애는 아웃풋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니죠. 그러니 연애에 신경 쓸 시간도 에너지도 없어요. 삼포세대, 칠포세대가 과장이 아니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S대생 O(23)씨도 취업 준비 때문에 연애를 미룬다고 했다. O씨는 얼마 전 취직이 보장된 A씨를 만났다. 스펙 쌓기로 전전긍긍하는 O씨로 인해 둘은 자주 다퉜고 결국 헤어졌다. O씨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연애하지 않고선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취업준비와 연애를 병행해야 한다. 그런 게 아니라면 취업 준비만 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썸타기는 사랑도 우정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지정된 궤도만 도는 ‘값싼 금욕적 관계’다. 로버트 스턴버그 미국 예일대 교육심리학과 교수는 진정한 사랑이 친밀함, 열정, 개입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본다면 썸타기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람은 파트너와의 취약한 관계로 인해 한층 초조해질 뿐이며 점점 부서지기 쉬운 상태로 변한다”고 했다. 썸타기는 개인을 더 자유롭고 강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묘약이기는커녕 그 반대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수많은 젊은이는 오늘도 썸을 탄다.

    ※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수강생이 박재영 교수의 지도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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