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호

뭍 그리던 섬처녀 가슴 짙푸르다 못해 검게 탔다

이미자 ‘흑산도 아가씨’

  • 글·김동률 |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석재현 | 대구미래대 교수, 사진작가 | 동아일보

    입력2015-10-22 09: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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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산도 아가씨’를 함께 불러본 이들은 안다. 이 노래는 중반을 넘어가면 대개 합창으로 바뀐다는 걸. 폭탄주에 취해 졸던 이도, 손바닥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이도 마지막 대목에선 저마다 목청껏 냅다 따라 지른다.
    뭍 그리던 섬처녀 가슴 짙푸르다 못해 검게 탔다

    하늘에서 본 흑산도 풍경. 드론을 이용해 100m 상공에서 촬영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이른바 ‘문화교실’이라는 것을 갔다. 문화교실이란 한 달이나 한 학기에 한 번 단체로 영화 보러 가는 것을 말한다. 문화라는 말 자체가 사치스럽던 1970년대, 문화교실로 영화 한 번 보면 문화인이 되는 줄 알았다.

    작게는 한 학년이, 크게는 전교생이 모두 가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학년별로 행진하며 극장엘 가게 했다. 교통편은 아예 없고, 당연히 40~50분 거리를 걸어서 간다. 새끼줄처럼 꼬여서 이리저리 신작로를 돌고 돌아가는 그 순간의 즐거움을 엄청난 양의 콘텐츠를 손바닥에 쥐고 있는 지금의 풍요로운 세대가 알기나 하겠는가. 바로 어제 일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섬마을 선생님’의 섬?

    그때 본 영화가 ‘작은 꿈이 꽃필 때’였다. 지금의 교육부 격인 문교부가 강제로 보게 하는 이른바 계몽영화. 그래서 지금의 중년세대는 대부분 기억할 것으로 짐작된다.

    남해안 다도해의 어느 외딴섬에 사범학교를 갓 나온 풋내기 남녀 선생이 부임한다. 고아 출신인 총각 선생과 부잣집 외동딸인 처녀 선생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외딴섬에 꿈을 심어주기 위해 무지와 가난을 상대로 끈질긴 투쟁을 벌인다. 우여곡절 끝에 섬사람들의 협조를 얻어 교사(校舍)를 신축하지만, 예기치 않은 폭풍으로 좌절을 맞게 된다. 하지만 그 시절 영화들이 대개 그랬듯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자료를 뒤적여보니 1972년 작품이고 11회 대종상 장려상, 고(故) 김희갑 선생이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가 극중 섬마을 고집불통 영감으로 나와 주인공들을 사사건건 애먹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 어린 시절 한동안 김희갑 선생을 무척 미워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영화의 주인공은 ‘섬마을 선생님’이다. 그 영화에 이미자 선생이 부른 ‘섬마을 선생님’이 흘러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봐도 거기까지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영화의 얼개는 국민가요쯤 되는 노래 ‘섬마을 선생님’과 많이도 닮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는 언젠가 또 다른 유년 시절, 역시 이미자 선생의 ‘흑산도 아가씨’라는 노래를 어머니의 콧노래를 통해 듣게 되고, 대뜸 아득한 시절 본 그 영화의 무대가 틀림없이 흑산도일 거라고 단정하게 된다. 흑산도. 매년 홍어축제를 여는 홍어의 본고장이자 상록수림 산이 푸르다 못해 바다 멀리서 바라다보면 검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나는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만 보다 가슴이 검게 타버렸다’는 노랫말이 흑산도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흑산도 대통령’ 이미자

    흑산도로 가는 길은 서울에서는 가장 먼 길이 된다. 용산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목포행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 다시 목포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연락선을 타야 한다. 흑산도의 위성 격인 홍도까지 포함한다면 적어도 사나흘 일정은 잡아야 하는 간단치 않은 여정이다. 부두에서 탄 배는 두 시간 조금 더 걸려 (대)흑산도에 내려준다. 프로펠러를 사용하지 않고 제트 엔진을 사용해 물을 뒤로 뿜어내는 쾌속선 덕분이다.

    그러나 안심하면 안 된다. 두 시간 뱃길은 결코 녹록한 일정이 아니다. 중간 기착지인 도초도와 비금도까지는 내해(內海)여서 잔잔하지만, 나머지는 외해(外海) 구간이라 사방에 파도가 넘실대는 완전한 망망대해다. 바람이 없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배는 마치 돌고래가 유영하듯 거친 파도에 높이 올랐다 내동이쳐지기를 반복한다. 평생 멀미를 해본 적이 없어 자신만만하던 나도 속이 울렁거려 무척 고통스러웠다. 흑산도고 뭐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눈만 감고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한참 만에 부두에 닿았다.

    흑산도는 이미자 선생의 세상이다. 이미자 선생은 이 섬의 도주(島主)요 대통령, 알파요 오메가다. 흑산도에서 이미자 선생은 고전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커츠 대령(말론 브랜도 분)과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극중 커츠 대령은 미국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한 전설적인 군인인데도 메콩 강 정글에 숨어들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군림한다.

    흑산도에서 이미자 선생은 절대지존이다. 섬사람들의 사랑을 몽땅 차지하는 영원한 아이돌이다. 10대가 많지 않은 흑산도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딱 3가지,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동백아가씨’다. 모두 이미자 선생의 노래다. 일설에 의하면 그나마 연전에는 ‘흑산도 아가씨’ 딱 한 곡뿐이었는데 노래비 옆의 노래 자동 생성기가 고장 나 수리하면서 세 곡으로 늘었다고 한다. 공중화장실 문을 열면 ‘흑산도 아가씨’가, 식당에 들어서면 ‘섬마을 선생님’이, 버스 정류장에선 ‘동백아가씨’가 구성지게도 흘러나온다. 가히 ‘이미자 천하(天下)’라 하겠다.

    뭍 그리던 섬처녀 가슴 짙푸르다 못해 검게 탔다

    열창하는 이미자와 ‘섬마을 선생님’이 수록된 앨범.



    뭍 그리던 섬처녀 가슴 짙푸르다 못해 검게 탔다

    (왼쪽) 1961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흑산도 주민의 가족사진. 일제 때 일본인 어부 15가구가 정착해 고래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고래뼈로 만든 일본식 기둥문(도리)이 보인다. (오른쪽) 1972년 9월 육영수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에 온 흑산도 성무중학교 학생들.

    흑산도는 홍도가 불편하다

    흑산도에서 가장 사람이 붐비는 곳은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 예리항이다. 배가 부두에 들어서면 건너편 터미널 귀퉁이에 붙은 구닥다리 양철 스피커에서 자동으로 흘러나온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만번 밀려오는데….” 아득한 옛날 어머니 치맛자락을 쥐고 따라다니며 듣던 그 노래다.

    그러나 노래의 탄생 계기는 섬 아가씨의 절절한 사연과는 거리가 멀다. 작사가 정두수 선생이 1965년 봄 어느 날 여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다방에서 우연히 동아일보 석간 사회면 톱기사를 보게 된다. 섬 아이들이 거센 풍랑 때문에 수학여행을 포기하게 됐다는 딱한 소식을 접한 청와대의 육영수 여사가 해군에 부탁해 함정을 동원해서 아이들의 소원, 즉 서울 구경을 시켜줬다는 뉴스였다. 정두수 선생과 콤비를 이룬 작곡가 박춘석 선생이 곡을 붙여 이 노래가 탄생하게 된다. 노래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탄생 배경이야 어찌됐든 노래는 이촌향도(離村向都)의 광풍 속 1970년대 보통 한국인들의 고달픔을 위무하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가 농촌에서 도시로 떠난 청년을 노래했다면, ‘흑산도 아가씨’는 섬마을에서 떠나지 못한 채 서울로 상징되는 도시를 그리는 섬처녀의 애환을 담은 셈이다. 그래서 노래는 산업화 시대 한국인들에게 엄청나게 불려졌다. 아득한 외딴섬 아가씨의 숙명적인 슬픔과 그 시대의 애환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노랫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1절에서는 흑산도가 고향인 ‘진짜’ 흑산도 아가씨의 뭍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함께 아파했는데, 2절은 육지에서 흑산도까지 강제적으로 팔려온 작부(酌婦)들, 이른바 ‘색시’들의 귀양살이와 다를 바 없는 강퍅한 운명을 노래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흑산도 아가씨와는 전혀 상관없이 흑산도 어린이 때문에 이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게 신기하다.

    흑산도는 옆구리에 끼고 있는 홍도와 더불어 관광업으로 먹고산다. 그런데 흑산도 사람들은 홍도에 대해 좀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다. 대개 ‘내지 손님’들이 널리 알려진 홍도를 가기 위해 잠깐 거쳐가는 섬으로 흑산도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사실 홍도와 흑산도는 여행 방법부터 다르다. 홍도는 해상에서 유람선을 타고 섬 외곽을 둘러봐야 한다. 기암괴석이 특징인 홍도는 바다에 나가서야 그 진경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정작 홍도에 발을 딛고 서면 그저 그런 보통 섬에 불과하다. 많은 육지 사람은 여행 하이라이트로 단연 홍도를 꼽고, 이 때문에 흑산도를 저평가하는 손님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흑산도는 고군분투하고 있다. 돌아다니다 보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갖가지 노력이 섬 전체에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된다.

    뭍 그리던 섬처녀 가슴 짙푸르다 못해 검게 탔다

    흑산도 중앙 방파제에 설치된 ‘흑산도 아가씨’ 조형물.

    정약전, 波市, 니나노 장단은 가고…

    고래공원도 그중 하나다. 흑산도 예리항 방파제로 가는 길은 고래 파시(波市, 생선시장)의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고래 파시가 성행할 때 고래 위판장과 해체장이 있었다. 지금 흑산도에서 고래 파시를 추억하기는 어렵다. 타일로 복사된 사진 몇 장과 고래공원이 적힌 안내표지판 하나가 그 시대를 보여주는 전부다.

    하지만 200여 년 전 흑산도 인근 바다는 엄청난 수의 고래가 몰리는 번식장이었다. 희귀종인 귀신고래도 흑산 바다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다 무분별한 남획으로 고래 파시는 1960년대 후반을 끝으로 사라졌고, 그 대신 조기 파시가 연평도와 함께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게 된다.

    노래 ‘흑산도 아가씨’는 활황을 누리던 조기 파시와 시대적으로 일치한다. 파시가 절정이던 1960~70년대 흑산도는 풍요로운 부자 섬이었다. 예리항은 요릿집, 술집, 색싯집에서 흘러나오는 ‘니나노 장단’으로 밤마다 들썩거렸고, 때맞춰 나온 ‘흑산도 아가씨’가 공전의 히트를 한 것이다.

    흑산도는 왕조시대 귀양지로도 유명했다. 당시 악명 높은 귀양지이던 제주도처럼, 육지에서 멀고 바닷길이 험해 귀양을 가는 도중에 많은 사람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무사히 섬에 도착해도 식량을 구할 길이 없어 굶어 죽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정약전이 있다. 그래서 흑산도에선 일단 정약전 유배지부터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초가집 하나만 덜렁 복원됐지만, 그의 삶은 지금 시대에도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불어닥친 천주교 탄압으로, 당대의 명문가이던 정약전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정약종은 처형당했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살이를 떠났다.

    당대의 학자인 정약전이 이 궁핍한 절해고도에 왔을 때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자. 그럼에도 그가 남긴 국내 최초의 해양생물 안내서 ‘현산어보(자산어보)’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아마도 무지한 왕조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슬픔을 그는 물고기 관찰로 삭혔으리라.

    뭍 그리던 섬처녀 가슴 짙푸르다 못해 검게 탔다

    노래 ‘흑산도 아가씨’의 모티프가 된 심리초교 자리. 폐교 후 교실은 닭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初秋 陽光의 멜랑콜리

    앞서 언급한 노래 탄생의 결정적 모태가 된 심리초교는 처참하다. 저마다의 색동 꿈을 가지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떠난 그 시절의 초등학교는 이제 폐허에 가깝다. 운동장의 철봉은 녹슬다 못해 아예 무너져 내렸고, 바닥엔 망초, 개망초, 벌개미취, 산국, 쑥부쟁이가 가득하다. 대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황폐한 교실들은 닭장으로 변했고, 토종닭 수십여 마리가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에 깃을 다듬고 있다. 그 한쪽 귀퉁이 낡은 벽면에 무슨 시 구절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끝없는 푸른 하늘 지붕을 삼고/ 가없는 푸른 바다 울타리 삼아/ 희망의 샛별등대 우러러보며/ 우리는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심리 심리 심리 어린이/ 외딴섬에도 우리들은 자란다.’

    아, 아득한 과거가 돼버린 이 학교의 교가다. ‘외딴섬에도 우리들은 자란다’는 마지막 후렴구가 찾는 이의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

    섬을 둘러보는 일정은 아쉬움 속에 끝났다. 드론을 이용해 촬영한, 하늘에서 본 섬은 여전히 검다. 떠나는 여객선 선창은 다시 이미자다. 흑산도에선 아이비도, EXID도 들을 수 없다. 노래에서만큼은 시간이 딱 멈춰 있다. 섬 여행은 이미자 노래로 시작해서 이미자 노래로 끝난다. 섬 여행도, 노래도 당연히 빠른 비트는 없고 끊어질 듯 말 듯하다 이어지는, 몸을 휘감는 유장함이 있다.

    그 노래 속엔 섬사람들의 슬픔이 배어 있다. 그래서 ‘흑산도 아가씨’를 듣노라면 (낱)잔 소주를 사서 들이켜던 그 시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러나 잠시 깊은 페이소스와 멜랑콜리가 함께하는 노래는 항구를 한 바퀴 휘돌다 잦아들고 여객선은 점차 넘실대는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아, ‘흑산도 아가씨’를 함께 불러본 사람들은 안다. 이 노래는 중반을 넘어가면 대개 합창으로 바뀐다는 것을. 폭탄주에 취해 졸던 사람도, 손바닥 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사람도 마지막 대목에서는 저마다 목청껏 냅다 따라 지르게 된다.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그 옛날 아득한 육지를 바라보던 흑산도 처녀의 눈은 짙푸르다 못해 검게 타버렸을 것이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짧은 가을도 저만치 떠나간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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