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호

“MB가 하도 말 안 되는 얘길 하기에…”

환경운동가 최열

  •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kimhoki@yonsei.ac.kr

    입력2015-02-24 09:4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리우환경회의 계기로 ‘지구적 연대’ 절감
    • 4대강 사업 추진 논리는 엉터리
    • 가장 결속도 높은 집단이 원전 관계자들
    • ‘대재앙’ 핵과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MB가 하도 말 안 되는 얘길 하기에…”
    최열(66) 환경재단 대표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환경운동가다. 공해추방운동연합, 환경운동연합, 환경재단 등 주요 환경단체를 창립했고, 동강 살리기 운동, 새만금 방조제 반대 운동, 4대강 반대 운동 등 환경운동을 주도해 왔다. 환경 이슈에 관한 일본, 중국 등 이웃 나라와의 국제 연대를 활발히 모색하기도 했다. 광복 70년을 돌아보면서 최 대표는 빠른 산업화가 가져온 환경 파괴에 주목하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생태·문화적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민주화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운동가이자 지식인인 최 대표에게 원전과 기후변화 등 주요 환경문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는 1월 26일 서울 서소문에 있는 환경재단에서 진행됐다.

    김호기 1949년에 태어나셨죠? 어느새 예순여섯이 되셨습니다.

    최열 만 예순여섯 생일을 지난주에 치렀어요.

    김호기 광복 70년을 거의 함께한 셈인데, 소회가 어떻습니까.



    최열 제 연배가 시대적으로 보면 마지막 전통 세대 같아요. 어릴 때 인스턴트 가공식품 안 먹고 모유를 먹고 자란 세대인데, 우리보다 한 10년 밑은 우유도 먹고 인스턴트 가공식품을 먹고 자랐어요. 우리는 대가족 제도에서 살았던 반면 지금은 완전히 핵가족 시대에 살고 있어요. 우리 세대는 전통과 현대를 동시에 경험한 세대죠.

    김호기 환경문제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최열 1970년대 중반 감옥 안에서였어요. 강원대 농화학과를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때 친구들과 토론하면서 앞으로 뭘 할지 고민했어요. 많은 친구가 노동 현실이 열악하니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말했는데, 저는 전공이 농화학이라서 그걸 살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환경’보다는 ‘공해(pollution)’란 말을 더 많이 썼어요. 당시 일본에서 미나마타병이 심했고, 우리나라도 산업화가 진행되면 그런 질병이 생길 것으로 생각해 공해를 다루고 싶다고 한 거지요. 그랬더니 친구들이 “야 인마, 공해라도 배불리 먹고 싶다” “뭔 이상한 걸 한다는 거야?” 하면서 놀렸어요. 문제는 당시 공해를 공부하려 해도 책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본어를 배우고 환경을 다룬 일본책을 구해 3년 가까이 읽었어요.

    ‘나를 제외한 모든 것’

    김호기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입니다. 경제성장에 성공해 가난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고, 유신체제에서 보듯 민주주의를 억압한 군부독재 체제였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습니다.

    최열 제가 춘천중학교 시험을 볼 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문제로 나왔어요. 우리가 중학교 시험 볼 때가 (1961년 5·16군사정변 이전인) 1961년 2월이에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군사정권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독자적으로 세운 게 아니라 이전 정권 때의 것을 받아들여서 한 거예요. 당시 개도국이나 저개발 국가에서 그 정도의 경제 발전을 한 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정치적 탄압은 지금 사람들이 생각도 못할 정도였어요. 공포정치였지요. 요즘 커피숍 같은 데 가면 환하고 좋잖아요. 그때는 모든 다방이 깜깜했어요. 어둑어둑한 데다가 탁자 밑에 도청장치가 있는지를 살펴볼 정도였거든요. 잡혀가면 ‘박살’날 때였으니까요. 그런 시절이었기에 박정희 시대의 정치적 탄압 문제는 역사적인 재조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호기 1982년 공해문제연구소, 1988년의 공해추방운동연합, 1993년 환경운동연합 창립을 주도했습니다. 이 단체들은 선생의 개인사이기도 하고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다른 나라의 사회운동을 둘러봐도 한 개인의 삶과 사회운동의 역사가 이렇게 일치하는 것은 드문 사례입니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한국 환경운동을 이끌어오셨는데요, 선생에게 환경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초창기에는 공해 문제로 시작했을 듯합니다만.

    최열 처음에는 환경문제를 오염 문제로 생각했어요. 오염은 우리 인간이나 생명체에 나쁜 영향을 주는 거지요. 환경이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에요. 그런데 이 환경이란 말은 인간 중심의 단어예요.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디디고 있는 땅, 먹는 식품,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이런 것들이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너무 나빠졌어요. 우리나라엔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오염이라는 게 특별한 경우 말고는 없었지요. 책도 보고 활동도 하면서, ‘아, 인간 중심의 시스템으로 가는 건 안 된다’ ‘인간도 생태의 한 부분으로 생각할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공해 문제와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85년 온산병 사건이에요. 울산 온산에 공해산업이 들어와 몇 년 만에 주민 1만 명 중 700명에게 뼈마디가 아픈 병이 생긴 사건이에요. 우리가 이것을 사회문제화해 온산병 논쟁이 일어났고, 결국 많은 주민이 즉각 이주했어요. 저는 온산병 사건에 대해 1985년부터 대학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당시 강연 요청이 굉장히 많이 들어왔거든요. 공해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민 개개인의 의식도 중요하지만, 정부 정책이나 기업 환경이 변화하지 않고는 안 돼요. 그래서 그때부터 기업 감시와 정부 정책 비판을 하게 된 거죠. 그러다 터진 게 1991년 페놀 사건이에요.

    “MB가 하도 말 안 되는 얘길 하기에…”

    배재공원에서.

    환경주의와 생태주의

    김호기 환경문제를 다룰 때 ‘환경주의’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생태주의’란 말을 쓰기도 합니다. 전자가 사회구조를 크게 바꾸지 않고서 환경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온건한 관점이라면 후자는 근본적인 관점입니다.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지 않으면 환경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생태학의 기본 논리입니다. 이 생태주의에는 심층생태학(deep ecology),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 정치생태학(political ecology) 등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이런 흐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최열 저는 심층생태학이 중요하다고 봐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녹색평론’이나 외국 학자들의 생태 근본주의는 이론으로서 분명 필요해요. 그런데 모든 대중에게 그렇게 요구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요.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려요. 그래서 저는 환경운동의 경우 일단 국민의 의식수준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대중성과 전문성이라는 양 날개를 달고 그다음에 그것을 추진하는 운동성이 있어야 해요. 정부 쪽에서 계속 얘기하는 게, 우리가 전문성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시민환경연구소를 꽤 일찍 만들었어요. 1992년 창립했지요.

    김호기 민주화 시대에 국민 다수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제대로 계몽한 것은 1991년 낙동강 페놀 사건과 1992년 리우 환경회의입니다.

    최열 저와 공해추방운동연합이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90년 지구의 날 행사였어요. 남산에서 열렸는데, 큰 관심을 끌었지요. 그러고 나서 1991년 페놀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것은 기업이 환경문제를 잘못 대하면 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처음으로 안겨준 사건이지요. 페놀 사건을 통해 국제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는데, 1992년 리우 환경회의가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했어요.

    리우 환경회의에 가서 보니까 환경운동이 노동운동, 여성운동, 인권운동 등 다른 사회운동과 활발히 연대하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또 지구적 차원에서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요. 그래서 돌아와 국내에 있는 환경단체들을 통합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비교적 규모가 큰 환경단체 8개를 통합해 만든 게 1994년 4월 2일 창립한 환경운동연합입니다.

    김호기 환경운동연합이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시민단체 중 하나가 된 것은 선생의 열정과 헌신 덕택입니다. 2000년대 들어와 환경재단을 만들어 또 하나의 지평을 열었는데요.

    최열 2000년 골드만 환경상 수상자 50~60명이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분교에 모여 워크숍을 하는데, 미국 대표가 미국에는 환경 관련 재단이 700개 있다는 거예요. 환경운동을 하려면 환경운동을 받쳐줄 수 있는 재단이 있어야지, 운동하는 사람들이 돈을 모으는 것은 너무 힘들다는 거지요. 그 사람 얘기를 듣고 환경재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해서 2002년 말 창립했어요.

    김호기 환경재단은 환경운동연합과 함께 우리 환경운동의 양대 축입니다.

    최열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아시아 환경운동의 허브가 되자고 생각했어요. 아시아 국가들이 가장 빠르게 개발되고 있잖아요. 그리고 지구 전체 인구의 3분의 2가 아시아에 살고 있는데, 사회운동도 약하고 정치적으로 독재체제인 나라도 적지 않기 때문에 아시아를 지원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시아 환경운동의 그린허브가 되자는 게 우리 계획이에요. 그다음에는 깃발 들고 싸우는 환경운동을 해서는 국민이 부담을 느낀다는 점도 고려했어요.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 거죠. 그래서 서울환경영화제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NGO를 공부하는 석·박사 학생들도 꾸준히 지원해왔어요.

    모순투성이 4대강 사업

    김호기 환경과 관련해 최근의 가장 큰 관심사는 4대강 사업입니다. 제가 보기엔 발전국가 시대의 전형적인 토건산업인데요.

    최열 사람들은 결국 자기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해요.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청계천 복원사업을 했잖아요. 청계천을 덮은 시멘트 를 일단 뜯어낸 건 잘했다고 봐요. 하지만 그 과정에 시민이나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CEO의 관점에서 마구 추진한 건 잘못입니다.

    4대강과 관련해선, 처음에는 대운하를 얘기했어요. 국토의 64%가 산인데 산에 운하를 만들려면 자연을 많이 훼손해야 하기에 반대했어요. 또 낙동강과 한강은 완전히 다른 물줄기인데 이 둘을 연결하려 터널을 뚫고, 또 거기에 들어가는 돈을 골재를 채취한 수익으로 충당하겠다고 그랬어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얘기하니까 저건 안 되겠다 싶어 반대한 거예요. 결국 대운하를 그만두고 4대강을 추진하게 됐는데, 그 장애물이 개인으로는 최열이고 단체로는 환경운동연합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건 세 가지예요. 수량을 많이 확보하고, 수질을 좋게 하고, 홍수를 막는다는 거지요. 이명박 정부 이전에 우리나라 환경 예산의 절반이 상·하수도에 들어갔어요. 30조 원을 투입해 수질은 상당히 좋아졌어요. 한강은 일급수에 가깝고 나머지도 이급수인데, 수질을 개선한다는 건 자기모순이란 말예요. 자기네들이 원래 수질이 좋다고 얘기해놓고, 수질 개선할 때는 강이 죽었다고 얘기한 거예요. 홍수도 마찬가지인데, 지난 20년 동안에 홍수를 막으려 준설도 많이 해서 실제로 홍수가 난 것은 상류지역이거나 새로 개발한 곳이었어요. 본류에서는 홍수가 거의 안 났어요. 4대강에 대한 얘기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들에게 이견을 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77인 선언을 하기도 했어요.

    “MB가 하도 말 안 되는 얘길 하기에…”

    정동교회 앞에서.

    김호기 알선수재 혐의로 징역 1년이 확정돼 실형을 살았습니다. 표적수사 논란이 일었죠. 한편에선 시민운동가로서 조심스러웠어야 했다는 얘기도 있었고, 한편에선 정치적 탄압이라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검찰 수사와 법원 판결에 대한 소회가 있다면.

    최열 쟁점은 세 가지였어요. 제 이름으로 된 통장, 업자로부터 돈을 빌린 것, 그리고 장학금 유용 문제였어요. 통장의 경우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을 할 때 단체 이름으로 안 돼서 제 이름으로 개설한 것입니다. 회계사가 검토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1심에서 무죄가 나왔어요. 그리고 업자로부터 돈을 빌린 혐의에 대해서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는데, 항소심에서 아예 심리도 하지 않고 유죄를 선고했어요. 장학금의 경우 이세중 변호사가 증인이 돼서 2심에서 무죄가 나왔어요. 대법원 판결은 저로서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어요.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겠지요.

    후쿠시마 사태의 충격

    김호기 환경과 관련해 최근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입니다. 충격이 상상을 초월했는데, 국민의 환경의식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후쿠시마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도 탈(脫)원전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습니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독일은 탈원전으로 나아가고, 일본은 사고 당사국임에도 여전히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2012년 대선에서 이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 됐는데, 진보세력은 탈원전을 강조했고, 보수세력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후쿠시마 사태가 준 교훈은 무엇인가요.

    최열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방사능이란 물질은 색깔도, 냄새도, 맛도 없어요. 하지만 그 피해는 다른 것과 비교가 안 돼요. 원전 문제를 다루고 그 심각성을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은 참 힘들어요. 사고가 나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지요. 저는 1983년부터 반핵운동을 했어요. 그때 미국 잡지 ‘멀티내셔널 모니터’잡지 편집장을 만났는데 “한국은 미국 원전 판매의 천국”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원전 지역을 다니면서 그 문제점을 알게 됐고 원전 반대 운동을 벌이게 됐어요.

    후쿠시마 사태가 터졌을 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3일 후 긴급토론회를 열고, 선언을 하고, 일본 관련 단체와 연락을 취했어요. AP통신이 뽑은 지난 20세기의 첫 번째 사건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 투하예요. 체르노빌 사건도 10대 사건에 들어가요. 21세기 들어와 제일 큰 사고는 2011년 3·11 후쿠시마 사태와 2001년 9·11 테러 사건이지요. 3·11은 문명의 근본적인 전환을 촉구했어요. 앞으로 역사가가 시대 구분을 한다면 아마도 3·11을 문명사회의 큰 전환을 가져온 사건으로 평가할 거예요.

    저는 원전을 이용한 에너지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이런 경향이 나타났고, 일본이나 중국, 개도국들도 결국 그렇게 갈 거라고 생각해요. 원전은 대형 사고를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원전에서 나오는 플루토늄을 농축해 핵무기가 훨씬 많은 나라로 확산되고, 이렇게 확산되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종국에는 핵 테러가 분명히 일어날 거예요. 핵 테러가 발생하면 그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돼요. 그 충격은 우리가 지금 보는 테러와는 비교가 안 되지요.

    핵발전소와 핵무기는 뿌리가 하나입니다. 핵발전소의 평화적인 이용을 얘기하지만, 그것으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어요. 게다가 40~50년 쓸 수 있는 원전에서 나온 폐기물은 10만 년 이상 다음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것이라 윤리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아요.

    “MB가 하도 말 안 되는 얘길 하기에…”

    환경재단 사무실 입구에서 인사하는 최열 대표(오른쪽)와 김호기 교수. 벽면에 환경재단의 아시아 지역 태양광 전등 보급 캠페인 사진이 걸려 있다.

    원전 위험 체감도

    김호기 ‘세대 간의 정의’에도 맞지 않겠지요. 우리는 값싼 전기를 쓰면서 모든 위험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도 이 나라의, 이 지구의 또 다른 주인입니다.

    최열 일본은 현재 원전을 가동하지 않지만 결국 다시 할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지금 23기에 추가로 4기를 건설하고 있고, 또 할 거예요. 중국도 더 많이 건설할 것이므로 정말 걱정이 돼요. 빈곤, 양극화, 질병 이런 것도 큰 문제지만, 가장 심각한 재앙은 핵과 기후변화라고 생각해요.

    김호기 원전은 생명과 지구에 가장 중대한 위협인데도 위험에 대한 인식은 상대적으로 낮아 걱정입니다.

    최열 원전으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체감도에서 20대 여성과 50, 60대 남성은 100배 이상 차이가 나요. 그게 가장 문제예요. 젊은 사람들은 실제 객관적인 위험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반면 나이 든 세대는 ‘터져봐야 죽기밖에 더하겠느냐’는 식으로 받아들여요. 제가 이런 현상에 대해 법륜스님에게 얘기했더니 그분도 그러더군요. 자기도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젊은 세대하고 나이 많은 세대가 원전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김호기 현재 논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수명이 다한 고리 1호기 원전이잖아요.

    최열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 문제에 대비해 첫 번째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뭐냐고 물었더니 거의 모든 국민이 고리 원전이라고 했어요.

    “MB가 하도 말 안 되는 얘길 하기에…”

    기후변화에 대한 사회적 각성에 뜻을 같이한 사회학자와 환경운동가.

    김호기 ‘하인리히 법칙’에 따르면, 대형 사고에 앞서 스물아홉 번의 예고 조짐이 나오는데 실제로 세월호 참사가 스물아홉 번의 하나일 수 있거든요. 정말 무서운 게 원전 사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열 고리 원전은 노후했고, 이에 관한 부정부패 사건이 있어요. 고리 1호기에 들어가는 케이블, 관, 원자로 등에 대해 실제로 국민은 잘 몰라요. 고리 1호기는 당장 비용을 따져봐도 맞지 않아요. 원전 건설을 계속했기 때문에 전기 잉여율도 일정 부분 있습니다. 원전을 더 가동할지 중단할지는 국민이 판단해야지, 그런 고려 없이 연장 가동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영국과 프랑스가 합작해 콩코드 비행기를 만들었는데 초음속기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굉장히 많이 들어가고 이착륙 때 소음이 심한 문제가 있었어요. 추진하는 사람들은 (비용이) 많이 들어갔으니 계속 밀고나가자고 했지만, 결국 운행이 중단됐어요.

    김호기 매몰비용이 아깝다 하더라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해야 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손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정책 결정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최열 우리나라에서 가장 결속도가 높은 집단이 원전 관계자들입니다. 원전 관련 박사가 무지무지 많아요. 제가 알기에는 1000명도 넘을 거예요.

    문명사적 대전환

    김호기 사회학에서도 기후변화에 관한 책이 많이 쏟아져 나옵니다. 기후 변화는 미래 과제라기보다 현재 과제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후변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매우 작은 것 같습니다.

    최열 기후변화는 모든 것과 연결돼요. 예를 들어 비가 많이 오면 평소 1000~2000원 하던 배추 값이 1만 원이 넘어가요. 이런 현상도 기후변화 때문에 나타나는 거지요. 2010년 아프리카 재스민 혁명도 빈곤, 일자리, 양극화가 도화선이 됐지만, 배경에는 식량 문제가 있어요. 그해 러시아에서 대폭염 탓에 1억t이던 밀 생산량이 6000만t으로 줄어 식량 수출을 금했어요. 그러자 밀 가격 폭등이 일어나 그게 큰 영향을 준 겁니다. 기후변화는 식량, 홍수, 가뭄, 재난, 해양 생태계 등 거의 모든 문제와 연결돼 있어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타격을 받게 되지요.

    김호기 기후변화에 대해선 지구적 차원의 대응이 매우 중요합니다. 더불어 지역적 차원의 대응도 시급하고요.

    최열 아시아 지역을 보면, 일본이 큰일을 해야 하는데 일본에는 큰 단체가 없어요. 중국은 아직도 통제사회이고, 인도의 경우 단체는 많지만 재정적 기반이 취약해요. 그래서 저는 아시아 지역의 환경운동을 활성화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호기 아시아의 빠른 산업화는 지구 환경의 일대 시험대입니다. 결국 지역 거버넌스를 어떻게 구축할지가 핵심이겠지요.

    최열 방글라데시 같은 국가는 한 번 재난이 오면 1000만~2000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해요. 중국도 그렇지요. 우리나라 환경단체와 운동의 임무가 매우 중요한 시점입니다.

    김호기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오셨습니다. 2013년에는 세계적인 환경운동단체 시에라 클럽이 주는 치코멘데스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 소망과 사회적 소망을 하나씩만 들려주시죠.

    최열 개인적 소망은 ‘피스 앤 그린보트’예요(*피스 앤 그린보트는 환경재단과 일본 시민단체 피스보트가 2005년부터 공동 주관해온 해상 시민교류 프로그램이다-편집자). 이번에 여덟 번째 피스 앤 그린보트를 띄우는데, 이게 굉장히 많은 노하우를 필요로 해요. 사람을 모으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모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 수백 가지를 만들어야 하지요. 육지가 아닌 망망대해에 떠 있으면 나라는 존재는 뭔가, 국가라는 게 뭔가, 그리고 우리가 같이 해야 할 게 뭔가를 생각하게 돼요. 개인적으로 크루즈 배를 만들어 대학과 제휴해 배 위에서 인문사회과학을 배우고 익히게 하고 싶어요. 일반 시민 대상도 좋고 기업 연수도 좋을 것 같아요.

    사회적 소망은 우리 미래에 관한 것이에요. 우리는 돈에 아주 길들어 있고 물들어 있어요. 그런데 생명이나 환경은 가치거든요. 결국 우리가 가치 중심으로 가야 하는데, 가치라는 게 아름다움, 공동체, 다른 생명체를 존중해야 하는 거지요. 예를 들어 나무 같은 건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좋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게 최고의 삶은 아니에요. 자연과 같이하면서 문화적인 삶을 즐기는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문명사적 대전환을 모색하는 게 제 사회적 소망입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