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호

한 글자로 본 중국 산시성

長安의 봄이여 秦의 영광이여

陕 - 중국을 세상에 알리다

  • 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6-05-04 14: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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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을 ‘장안의 화제’라 한다. 여기서 ‘장안’은 산시성 시안의 옛 이름이다. 산시성은 중국 초기 통일왕조 주, 진, 한, 당나라가 근거지로 삼은 땅이다. 당나라 때 시안은 외국의 인재도 흔쾌히 등용하며 개방과 자유로움의 정신을 구현했다. 오늘날 옛 영광을 다시 찾으려는 시안은 ‘산시 속도, 시안 효율’을 내세우며 달린다.
    ‘주·진·한·당(周秦漢唐)’

    큰 글자 몇 개가 셴양(咸陽) 국제공항에서 시안(西安)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풍당당한 비석처럼 줄지어 서 있다. 셴양에서 시안으로 가는 길은 곧 진(秦)의 수도 함양에서 당(唐)의 수도 장안으로 가는 길이다. 중국 초기 통일왕조는 모두 이 땅을 근거로 삼았다. 중화의 인문학을 태동시킨 주나라,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 대통합을 통해 한족 문화를 만든 한나라, 세계로 열린 대제국 당나라. 마오쩌둥 역시 이 땅을 근거지 삼아 끝내 장제스를 물리치고 신중국을 세웠다. 산시성은 혁신의 바람을 일으키며 천하를 제패한 땅이다.



    商周革命=人文革命

    산시(陝西)성의 약칭은 ‘땅 이름 섬(陕, 번체는 陝)’자다. ‘陜’자는 ‘언덕과 언덕(阜/阝) 사이에 끼어(夾) 있는 골짜기가 좁다’는 뜻으로 ‘좁다/골짜기 협’으로 쓰기도 한다. 지도를 살펴보면 그 뜻대로 산시성이 골짜기 사이에 끼인 분지임을 알 수 있다.

    산시(陝西)는 허난성 산현(陕县)의 서쪽으로, 여기서부터 지형이 크게 달라진다. 허난성이 황토평원이라면 산시성은 황토고원이다. 산시의 동쪽으로는 진진대협곡(秦晉大峽谷), 남쪽으로는 북중국과 남중국을 가르는 진령산맥이 펼쳐진다. 그 사이에 놓인 관중평원(關中平原)은 3만9000㎢(한국의 약 39%)의 면적에 황하 최대의 지류인 위수(渭水)가 흘러 농사가 잘된다.



    유목민족인 북적(北狄)과 서융(西戎)으로부터는 중요 전략자원인 말을 얻을 수 있다. 동쪽의 함곡관만 막으면 산시는 철벽의 요새다. 약할 때는 굳게 방어하고 관중에서 착실히 힘을 키우다가, 강할 때는 불시에 밖으로 치고 나왔다. 산시에서 팽팽하게 압축된 공기는 함곡관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태풍이 되어 중원을 삼키고 대륙을 휩쓸었다. 주·진·한·당은 산시에서 일어나 천하를 호령했다. 18로 제후군에게 몰린 동탁이 재기한 곳도, 8개국 연합군을 피해 서태후가 달아난 곳도 산시다.

    산시의 중원 공략사를 살펴보자. 중원의 상나라는 강한 국력과 높은 문화 수준을 갖췄지만 시대의 한계 역시 컸다.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노예를 확보했고, 상제(上帝)를 기쁘게 하기 위해 숱한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그 결과 주위를 온통 적으로 만들었다. 주나라는 주변 세력을 규합하고 목야대전 한 판의 싸움으로 강대한 상나라를 물리친다.

    주는 ‘덕이 있는 자만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천명(天命) 사상을 내세우고 무력 지배보다는 덕치와 교화를 중요시했다. 상은 우연히 불에 갈라지는 흔적으로 길흉을 점치는 갑골점(甲骨占)을 애용했고 사람을 죽여서까지 하늘을 기쁘게 하려 했지만, 주는 64가지 상황 속에서 최선의 길을 찾는 주역(周易)을 썼고, “조상을 믿지 말고 스스로의 덕을 닦으라”는 노래를 시경에 남겼다. 이 같은 합리성, 인본주의, 덕치교화의 사상은 공자의 유가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이처럼 상주혁명(商周革命)은 단순한 왕조교체를 넘어선 인문혁명이었다.



    秦, ‘근간’을 세우다

    그러나 무왕·주공 등 사려 깊은 창립멤버가 세상을 뜨자, 못난 후손들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원정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했다. 중원이 약해지자 변방이 나래를 폈다. 산시·간수 일대의 융(戎)은 이름 그대로 ‘갑옷(甲)과 창(戈)’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전사였다. 유왕 때 융족이 주의 수도 호경(오늘의 시안)을 함락해 주가 낙양으로 천도하자, 서주(西周) 시대가 끝나고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됐다. 동주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지방정권이 난립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으니, 당시를 그린 소설이 바로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다.

    융족이라고 다 같은 융족은 아니다. 주에 협력적이던 융족 일파는 목축 전문가로 인정받아 지역 정권인 진을 세웠다. 주가 망할 때 진의 지도자는 왕실을 호위한 공로로 진나라 최초의 제후인 진양공(秦襄公)으로 봉해져 융족으로부터 주의 서쪽을 지키는 울타리가 됐다. 일찍부터 찬란한 발전을 이룬 중원은 진을 오랑캐로 여겨 ‘진융(秦戎)’이라 불렀다.

    그러나 진나라는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혁신할 수 있었고, 중원에서 잉여 취급받던 인재들을 재상으로 삼았다. 25명의 진나라 재상 중 외국 출신이 17명, 평민 출신이 9명이었다. 상앙의 변법개혁, 장의의 연횡책, 범저의 원교근공(遠交近攻)에 진시황의 웅대한 비전과 추진력이 더해져 전국칠웅 중 가장 낙후국이던 진은 6국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진의 천하통일은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황하 중류에 국한된 중국은 진부터 비로소 광활한 대륙 전역에 세력이 미쳤다. 엄청난 변화를 가혹하게 밀어붙인 탓에 진 자체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때 진이 창조한 질서는 중국 역대 왕조의 근간이 됐다. 사마천은 말한다. “배운 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에만 얽매여 진의 통치기간이 짧은 것만 보고 진을 조롱할 줄만 알았지 진지하게 그 처음과 끝을 살피지도 않으니, 이야말로 귀로 음식을 먹으려는 격이다.”

    잔인했지만 근면성실한 군주 진시황이 죽자마자 진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왕후장상에 씨가 있더냐”라고 외친 진승·오광의 뒤를 항우·유방이 이어 진은 멸망한다. 패권을 차지한 항우는 함양을 버리고 고향인 강남과 가까운 팽성(장쑤성 쉬저우)을 근거지로 택했다. 신하 한생은 철벽 요새인 데다 관중평원에서 인력과 자원을 풍부하게 조달할 수 있는 산시를 근거지로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항우는 “성공하더라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錦衣夜行)”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생은 사리분별을 못하는 항우를 “모자 쓴 원숭이”라고 비웃다가 끓는 물솥에 삶겨 죽었다.


    “중원을 차지하라”

    촉(쓰촨)에 갇혀 있던 유방은 명장 한신을 기용해 항우의 세 명장을 격파하고 산시를 얻었다. 관중과 촉의 풍부한 물자 덕분에 유방은 패왕 항우를 물리치고 한을 건국할 수 있었다. 다만 유방도 수도를 정할 때 갈등을 겪었다. 신하들이 관중파와 낙양파로 갈렸다.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고 사방으로 탁 트인 중원은 수도로서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논의를 최종 정리한 장량은 관중의 손을 들어줬다. “관중은 옥토가 천리에 펼쳐져 있고, 한 면만 막으면 동쪽으로 제후들을 모두 제압할 수 있습니다. 제후들이 안정되면 황하와 위수를 통해 도읍으로 천하의 물자를 공급하고, 제후들이 변란을 일으키면 물길을 따라 내려가니 쉽사리 군수품을 댈 수 있습니다. 이를 금성천리(金城千里)요,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나라 초기 아직 황실이 안정되지 않았을 때, 지방 제후들의 반란이 있었다. 그러나 장량의 혜안대로 관중의 중앙정부는 지방 반란을 수월하게 진압할 수 있었다. 최대, 최후의 반란인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한 후 한은 광활한 대륙을 통치하고 90여 민족을 융합해 한족을 탄생시키며 대제국의 위용을 뽐냈다.

    그러나 흥망성쇠는 덧없이 흘러간다. 오래 나눠져 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고, 오래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갈라진다(分久必合 合久必分). 400년 한실이 쇠퇴하고 중국사에서 가장 치열한 군웅할거의 역사가 펼쳐진다. 유비·조조·손권의 삼국이 정립했지만, 세 나라의 국력이 모두 같지는 않았다. 중원을 차지한 조조가 단연 최대·최강의 세력이었고, 강동을 장악한 손권이 2등, 촉(쓰촨) 하나만 차지한 유비가 꼴찌였다. 가장 약한 세력으로 어떻게 가장 강한 세력을 꺾을 수 있을까. 제갈량의 타개책은 산시 공략이었다. 촉과 관중을 아우르면 다시 한 번 진한(秦漢)의 통일을 재현할 수 있다.

    물량이 풍부한 위(魏)가 지구전으로 촉의 침공을 거듭 막아내자 제갈량은 아예 산시 남부의 오장원(五丈原)에서 농사를 지으며 주둔했다. 섬남(陝南) 지역을 실효지배하면서 틈만 생긴다면 바로 관중을 장악하고 여세를 몰아 중원을 차지한 후 천하를 통일한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그의 전략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촉의 승상으로서 나라와 대규모 원정군의 크고 작은 일까지 도맡아 처리하니 몸이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큰 별은 오장원에서 스러졌다. “공명은 여섯 번이나 기산으로 나아갔으나(孔明六出祁山前)” “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出師未捷身先死)” 제갈량은 산시성을 차지하려 애쓰다가 결국 산시성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마염의 진이 삼국을 통일하자마자 5호 16국의 난세를 맞았고, 수(隋)가 천하를 재통일했지만 기반이 다져지기 전에 고구려 원정, 대운하, 궁전 건설 등 무리한 사업을 한꺼번에 벌이는 바람에 역시 곧 망했다. 한나라 이후 진정한 안정기를 확립한 것은 당(唐)나라였다.



    大唐長安의 영광

    시안은 사각형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둘레 14km에 달하는 성벽 위에선 매년 11월 시안 성벽 국제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1993년부터 개최된 이 대회는 빼어난 유적을 십분 활용하는 문화상품이다. 마라톤이 힘든 일반인은 자전거로 성벽 위를 달린다.

    한 초로의 미국인은 시안에 반해 영어교사로 일하며 살고 있었다. “저 성벽을 보라고. 눈요기용 관광지일 뿐인 베이징의 자금성에 비하면, 시안은 전통이 생활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야. 스케일도 더 크고.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도시야.” 시안 토박이 중국인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화답했다. “당나라 때의 장안성은 이보다 열 배는 더 컸답니다. 지금 성벽은 명나라 때 축소해 지은 것이에요.” 10배는 과장 아니냐고? 정확히 말하면 9.1배 컸다.

    주·진·한·당 모두가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산시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로 꼽는 것은 당나라다. 시안 시내 곳곳에 ‘대당장안(大唐長安)’을 기리는 흔적들이 있다. 시안인은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園)으로 나들이 가고, 쇼핑하러 대당서시(大唐西市)에 가고, 아프면 대당의원(大唐醫院)을 찾는다.

    중국의 중심이 동부로 옮겨간 후 시안은 서쪽 변방이 되어 이름에 ‘서(西)’자가 붙었다. 그러나 당나라 때는 중국의 중심을 넘어 세계의 중심인 장안이었다.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면 ‘장안의 화제’라고 할 만큼, 장안은 수도의 대명사였고 세상의 중심이었다.

    우리는 고구려를 치고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군기 빠진 군대를 ‘당나라 군대’라 부르고, 고구려를 치다 실패한 당태종을 수양제와 마찬가지로 여긴다. 그러나 당태종 이세민은 ‘막장 군주’ 수양제와 전혀 다르다. 그는 고구려 침공 이외에는 전쟁에서 져본 적이 거의 없고, 중국의 오랜 난세를 끝내고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열었다. 덕분에 국력이 신장된 당나라는 화려한 성당기상(盛唐氣象)을 자랑할 수 있었다.

    당의 영광을 뒷받침한 것도 산시다. 산시는 진왕(秦王) 이세민의 근거지였고, 부병제(府兵制)의 핵심이었다. 60% 이상의 부병이 수도권 관중에 집중돼 관중 이외의 모든 병력으로도 관중을 당할 수 없었다. ‘관중의 힘으로 사방을 다스리는’ 전략이 천하를 안정시키자 “구주(九州)의 도로에는 도적이 없어 먼 길을 떠나는 데 길일을 택할 필요가 없었다.”


    활력, 개방, 자유

    명재상 위징, 적인걸 등의 인재가 나라를 튼튼히 하자 당나라의 국력은 세계 으뜸이 됐다. 당률(唐律)의 율령격식(律令格式)은 동아시아 법전의 전형이었고, 장안성은 동아시아 도성의 모범이었다. 신라의 서라벌, 발해의 상경용천부, 일본의 나라·교토가 모두 장안성을 본받아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한 사각형 도성을 세웠다.

    5호 16국은 중국사 최고의 혼란기이기도 했지만, 다양한 민족이 서로 섞이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 활력의 시기이기도 했다. 당은 왕족·귀족들이 모두 한화(漢化)한 호인(胡人)들로서 외래 문화에 거부감이 없었다. 그 결과 당은 놀라운 개방성과 자유로움을 보여줬다.

    장안의 봄은 화려했다. “도성의 대로마다 꽃피는 시절, 만 마리 말과 천 대 수레가 모란을 보러”가니 “비단수레 구르는 소리, 마른천둥이 치는 듯” 했다. 꽃놀이하던 이들은 낙화를 즈려밟으며 페르시아 여자의 술집으로 향했다. “피부는 옥 같고 콧날은 송곳 같”은 호인이 “흰 뿌리 잘린 다북쑥이 회오리바람에 구르듯” 빙빙 도는 호등무(胡騰舞)를 췄고, “푸른 옥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 황금빛 곱슬머리에 붉은 구레나룻”의 호인이 피리를 불었다. 구당서(舊唐書)는 민관(民官)을 초월한 아랍문화 사랑을 이렇게 전한다. “개원 이래 태상(太常, 국가의전 집행부서)의 음악은 호곡(胡曲)을 숭상하고, 귀인의 밥상은 모두 호식(胡食)을 올리며, 사녀(士女)는 전부 호복(胡服)을 입는다.”

    여성들도 외출할 때 얼굴을 드러내고 말을 즐겨 타는 등 자유롭고 활달한 기풍을 한껏 누렸다. 중국 유일의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이때 나타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에서 인재도 쏟아져 나왔다. 당 태종과 위징은 정관지치를 열었고, 측천무후를 보필한 적인걸은 1만7000여 건의 장기 미결 과제를 1년 안에 해결했는데 단 한 명도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다. 역사는 신화가 됐다. 현장법사가 불경을 얻어온 여행담은 중국 4대 기서인 ‘서유기’가 됐고,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는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가 됐다. “봄에는 봄놀이에 밤에는 잠자리에, 후궁에 미인이 3000이나 되지만, 3000명에 내릴 총애를 한 몸에 받았네.”



    ‘밥그릇 모임’

    개방적인 당나라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인재를 품에 안았다. 세계 70여 개 국과 교류하며 외국 상인이 중국에 장기간 머무르고 중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했고, 외국인 유학생들도 과거로 채용했다. 당에는 3만 명의 유학생이 있었고, 당 말기 최치원 등 과거 급제한 신라 선비가 50여 명이었다. 신라의 의상, 일본의 엔닌 등 승려들도 당에서 불법을 닦았다. 고구려계 고선지 장군은 안서사진절도사(安西四鎭節度使)가 되어 서역 전선을 관할했고, 안사의 난을 일으킨 하동절도사 안록산은 이란계였다. 대당장안은 백만 인구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대도시였다.


    그러나 성장은 극에 달하면 쇠퇴한다. 장안의 봄은 성장의 한계 역시 명확하게 보여줬다. 관중평원은 비옥하긴 해도 중국 기준으로는 그리 넓지 않아 당나라 때 불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당 전반기인 고종 때부터 이미 황제들은 이따금 문무백관을 이끌고 허난성 낙양까지 행차해서 곡식을 얻어갔기에 ‘식량을 쫓아다니는 천자(逐糧天子)’란 말을 들었다. 결국 송나라가 개봉을 수도로 삼은 후, 장안은 더 이상 천하의 중심이 되지 못했고, 서쪽의 대도시인 ‘시안(西安)’은 중심에서 멀어져갔다.

    따라서 산시인들이 21세기에도 세계의 중심이었던 옛날을 그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나라의 영광이 민초에겐 얼마나 실질적으로 이익이었을까. 국가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민초들은 큰 희생을 감수하고 열악한 삶을 견뎌야 했다.

    산시인은 호방하다. “국수 면발이 허리띠만 하고 밀전병 하나가 웬만한 가마솥 뚜껑만 하며 찐빵은 큰 사발만 하고 사발은 세숫대야만 하다.” 그러나 그 호방함은 풍요와 여유가 아니라 열악함에서 나왔다. 산시의 음식에 얽힌 전설을 들어보자.

    양러우파오모(羊肉泡馍)는 찢은 빵을 양고기 탕에 넣고 끓여 먹는 요리다. 일설에 따르면,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때 6국의 군대는 매번 밥을 짓고 반찬을 하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한 반면, 진나라는 빵을 양고기 국물에 넣어 잽싸게 식사를 마치고 전쟁해서 6국을 제압할 수 있었다. 솥뚜껑만한 밀전병 궈쿠이(鍋盔)의 전설도 비슷하다. 당고종의 무덤 건릉(乾陵)의 공사 시간 규율은 매우 엄했다. 한 병사가 요리하고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급한 김에 밀가루 반죽을 투구에 넣고 구워 먹은 게 궈쿠이의 유래라고 한다.

    요즘도 산시 시골사람들은 세숫대야만한 대접(老碗)을 든 채 쪼그리고 모여앉아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한다. 이를 ‘밥그릇 모임(老碗會)’이라고 한다. 밥을 양껏 먹은 다음에 농사일을 나가면 밥 먹으러 다시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탁자에 그릇을 놓고 의자에 앉아 식사하지 못하고, 그릇을 든 채 쪼그려 앉아 밥을 먹는다니, 얼마나 마음이 급하면 그럴까.

    이를 종합해보면 산시인들은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전쟁, 토목사업, 농사 등 바깥일에 쫓기며 살아왔다. 덕분에 성격 역시 급하다.



    산시 사람들은 직설적이므로 이쪽에서도 우회전략 대신 정공법으로 대해야 한다. 그들은 할 말이 있으면 기피하지 않고 바로 해버리며, 이야기를 하다가 뜸을 들이는 것을 절대로 참지 못한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조바심이 나서 견디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뜸 들이는 사람은 틀림없이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해서 멀리한다.

    -왕하이팅, ‘넓은 땅 중국인 성격지도’

    일은 바쁘고 성격은 급하니 한가롭게 미식을 만들고 즐길 여유가 없다. 대신 최대한 시간을 절약하며 생존할 수 있는 음식을 개발했다. 워낙 열악하게 살다보니 웬만한 일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것이 산시인의 호방함이라고 할까.

    2010년 시안 여행을 할 때 숙소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마트에서 찐빵과 오리구이를 샀다. 점원이 찐빵을 꺼내고 슬라이드식 유리덮개를 옆으로 닫으려 할 때 덮개가 쪼개지며 떨어지다 말았다. 원래 금이 쩍 가 있는 유리덮개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놨는데, 테이프의 접착력이 약해서 떨어지다 만 것이다. 이제 덮개와 빵을 모두 치우겠지? 그런데 웬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빵 위에 떨어진 비교적 굵은 유리 파편 한두 개 골라내고는 덮개를 다시 닫았다.

    아니 세상에, 미세한 유리 파편이 떨어졌을 텐데, 고객이 그걸 먹고 다치면 어쩌려고?! 허름한 시골 구멍가게도 아니고, 대도시 시안시 중심의 큰 쇼핑몰에 있는 번듯한 마트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다니!!! 그다음부터 중국에서 물건 살 때 유리진열대가 온전한 지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다행히도 숱한 중국 여행 중 이런 일은 단 한 번만 겪었지만, 중국의 안전불감증은 여간 충격적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산시인의 열악함에 대한 인내력, 호방함이 한몫하기도 했으리라.



    열악해서 호방하다

    관중평야는 비옥하되 그 산출물은 민중에게 돌아가지 않고 군량미로 쓰인 것처럼, 산시의 역사는 찬란하되 그 영광은 민중의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것이었다. 진의 정복전쟁, 아방궁·병마용·만리장성 등의 대규모 건축 등으로 가장 큰 희생을 한 것 역시 산시인들이었다. 그럼에도 산시인에게 진이 흑역사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산시의 또다른 약칭이 바로 ‘진(秦)’이다. 산시인은 노래한다. “팔백리 진천(秦川)에 흙먼지 휘날린다. 삼천만 민중이 진강(秦腔, 민요)을 불러댄다. 국수 한 그릇에도 기분은 그만이야. 고춧가루 안 넣어도 후룩후룩 잘도 먹네.”

    사람이란 참으로 묘한 존재여서 꼭 나 자신이 직접 겪어야만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의 천하통일을 떠올리면 웅장한 패기가 용솟음친다. 열악함 속에서도 대업을 성취했음을 떠올리면 자신감이 넘친다. 당의 영광은 오래전에 사라졌어도 그 시절의 영화를 상상하면 나 자신도 페르시아 여자와 술을 마시던 부자처럼 느껴진다. 장안의 봄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지만, 산시인들은 아직도 따뜻하던 봄날의 꿈을 잊지 못한다.

    꿈은 약일까, 독일까. 둘 다 된다. 꿈은 현실도피의 몽상이기도 하고, 현실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이상이기도 하다. 관건은 어떤 현재를 만들어가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산시가 만들고 있는 오늘은 어떤 모습인가.



    삼성이 시안으로 간 이유

    당 이후 산시의 전성기는 끝났지만, 이 땅에 서린 왕기(王氣)는 죽지 않았다. 산시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은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비록 그는 군율을 바로잡지 못해 민심을 잃고 청나라에 패해 사라졌지만, 마오쩌둥은 그를 농민반란 지도자로 높이 평가했다. 정규군이 아닌 공산당의 홍군을 이끈 마오에게는 주·진·한·당보다 이자성의 중원 정복이 더 많은 힌트를 줬으리라.

    장시의 징강산에서 양산박을 재현하려던 마오는 장제스의 토벌을 피해 도망 다녔다. 마오가 9600km의 대장정을 마치고 정착한 곳은 산시의 옌안(延安)이다. 한편 장쉐량은 화청지에 있던 장제스를 연금하고 국공합작을 종용했다. 대장정이 끝나고 시안사변이 일어난 산시는 공산당의 기적적인 승리가 시작된 땅이 됐다.

    이때 활약한 걸출한 산시인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다. 그는 1913년 산시의 푸핑현 시자좡(富平縣習家莊)에서 태어나 13세 때 농민운동에 참여했고, 14세 때 공산당원이 됐으며, 17세에 량당 무장봉기(兩當兵變)를 일으켰다. 42세의 젊은 혁명가 마오도 22세의 시중쉰을 처음 만나고 깜짝 놀랐다. 쟁쟁한 명성을 날리고 착실한 기반을 닦은 시중쉰이 이토록 어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시중쉰은 서북 지역을 호령하던 서북왕이었으며, 부총리로서 저우언라이의 오른팔이었다.

    시진핑은 금수저를 물고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권력의 심장 중난하이(中南海)에 놀러갔다. 중난하이는 당정 주요 기관, 최고 지도부의 거주지와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민초들은 절대 갈 수 없는, 현대판 자금성이다. 그러나 시중쉰이 하루아침에 실각하며 가족들도 고난을 겪게 된다. 마오쩌둥이 시중쉰을 모함하고 정치사건을 일으켜 대약진운동 후 잃은 권력을 되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반동가족의 일원으로 몰린 시진핑은 15세 때 생산대에 자원입대해 산시에 갔다. “밭을 매러 가려면 20리 길은 족히 걸어야 밭이 나오고, 땔감을 주우려면 30리 길을 걸어야 숲이 보이며, 소금을 사려면 40리 길을 걸어야 시장이 나오”는 깡촌에서 7년을 보내며 주위의 신임을 얻었다. 부친이 태어나고 묻힌 고향인 데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인생의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곳이기에 시진핑은 “산시는 나의 뿌리이고, 옌안은 나의 영혼”이라고 했다.

    삼성이 70억 달러를 투자해 시안에 반도체 공장을 세우고, 연달아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세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이 국가를 이끄는 중국에서 공산당 최고권력자의 환심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대놓고 뇌물을 주는 것은 수준 낮은 일이다. 뭘 하면 시진핑이 좋아할까. 현재 중국의 과제는 전 국토 균형개발이고, 산시는 시진핑의 고향이다. 따라서 시안에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면 국가시책인 서부 대개발에도 부합하고 최고권력자의 애향심도 만족시킬 수 있다.



    ‘China’와 ‘唐人街’

    최고권력자가 좋아하는 것은 부하도 좋아하기 마련이니, 사업하며 생기는 온갖 문제에 대해서 중국의 전폭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산시의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서부 개발에 협조하며 이미지도 높일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2015년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 공장은 연간 생산액 100억 위안(약 2조 원)을 돌파했다. 중국은 2년도 안 되는 사이에 거둔 대성공을 두고 ‘산시 속도, 시안 효율’이라고 부른다.

    산시는 문화·외교기지로도 각광받는다.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이 병마용을 보고 “피라미드를 못 봤다면 진정 이집트에 간 것이 아니고, 병마용을 보지 않고는 진정 중국을 본 것이 아니다”라고 찬사를 보낸 후, 중국은 레이건, 클린턴, 박근혜 등 숱한 외국 정상들을 ‘병마용 외교’로 맞이했다. 지난해 시진핑은 인도의 모디 총리를 시안에서 영접하고 자은사 대안탑을 찾았다. 대안탑은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구해온 불경을 보관한 곳으로, 중국과 인도의 뿌리 깊은 교류와 협력의 역사를 보여준다. 비록 최근 들어 양국 관계는 서먹했지만, 오랜 친구이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으냐는 메시지가 읽힌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에서 산시는 핵심적 위치에 있다. 중국의 낙후한 서부지역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자원과 유럽의 시장을 차지하려는 대전략은 당의 실크로드를 재현하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의 영어 이름 ‘China’는 진나라의 중국식 발음 ‘친(秦)’에 기원을 뒀다. 또한 ‘차이나타운’의 중국식 명칭은 ‘당인가(唐人街)’다. 일찍이 중국을 해외에 알린 산시는 다시 해외를 향해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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