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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과 예산 사면석굴의 비밀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무령왕과 예산 사면석굴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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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백제는 서해 북부의 제해권 탈환을 위해 고구려와 끊임없는 각축전을 벌이다 결국 반세기 만인 무령왕(武寧王, 461∼523년) 21년(521)에 비로소 완전히 이를 되찾는 듯하다. 무령왕이 양(梁) 무제(武帝)에게 사신을 보내면서 “여러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비로소 더불어 통호(通好)하게 되었으며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한 말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로부터 서해 북부의 제해권을 회복하여 해양강국의 면모를 되찾아놓은 무령왕의 왕릉이 1971년 7월에 발견되고, 능 안에서 출토된 (도판 6)으로 무령왕의 생존연대가 정확히 밝혀졌다. 세로 35cm, 가로 41.5cm, 두께 5cm의 석판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동(寧東) 대장군 백제 사마(斯麻)왕이 나이 62세로 계묘년(523) 5월 병술이 초하루인 7일 임진에 돌아가셨다. 을사(525)년 8월 계유가 초하루인 12일 갑신에 등관(登冠)대묘에 편안히 모시고 묘지를 왼쪽과 같이 써서 세운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申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이고 영동대장군은 양 무제가 무령왕을 백제왕으로 인정하며 더 보탠 양나라 벼슬이름이다. 이 내용은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14에서 웅략천황(雄略天皇) 5년(461) 6월1일에 사마왕이 탄생했다는 기록과 일치하여 더욱 신기한데, ‘일본서기’ 권16 무열(武烈)천황 4년(502)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 ‘삼국사기’ 백제본기 중 무령왕의 계보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백제신찬(百濟新撰)에 이르기를 말다(末多, 삼국사기에서는 牟大 혹은 麻大라 한다 하였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을 포악하게 대하니 나라사람들이 함께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 이는 곤지(琨支, 삼국사기에서는 昆支라 하였다). 왕자의 아들이니 곧 말다왕의 배다른 형이다. 곤지가 왜국으로 가는데 축자(築紫)의 섬에 이르렀을 때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되돌려 보냈으나 서울에 이르지 못하고 섬에서 낳았다 하여 그런 까닭으로 사마(斯麻 ; 섬이란 의미의 백제어)라 이름지었다(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王立. 諱斯麻王, 是琨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 琨支向倭, 時至筑紫嶋, 生斯麻王. 自嶋還送, 不至於京, 産於嶋, 故因名焉).”



‘삼국사기’ 무령왕 본기에서는 무령왕이 가림(加林)성주 백가(加)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된 동성왕의 둘째 왕자라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오히려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 하고 있다. 이때 무령왕의 나이가 41세인 점을 감안하면 이 기사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또 앞서 든 ‘일본서기’ 권 14 웅략(雄略)천황기에서는 곤지왕자가 개로왕의 왕제(王弟)로 개로왕 당시 군사권을 총괄하던 군군(軍君)이었는데, 개로왕이 임신시킨 후궁을 산달이 가까운 시기에 하사받아 함께 왜국으로 가던 중 6월1일 축자의 각라도(各羅島)에 이르러 무령왕을 출산하였다 하고 있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왕자로 숙부인 곤지왕자의 양자가 된 인물이다. 그러니 곤지왕자의 적자이던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 볼 수도 있는 관계였다. 무령왕은 이렇게 복잡한 출생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어떻든 무령왕은 해양왕국 백제의 최고 사령관인 군군 곤지왕자의 아들로 항해중에 왜국 섬에서 탄생한 왕자였으니 나면서부터 바다와 인연이 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유년시절에 벌써 대선에 올라타 선단을 지휘하는 훈련을 받고 있었을 터인데, 그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해가던 15세 때에 대참상을 겪게 된다. 대양을 누비던 강화만의 백제선단이 고구려 수군에 의해 모두 박살나고, 백부이자 부왕인 개로왕이 고구려의 앞잡이가 된 재증걸루(再曾桀婁)나 고이만년(古萬年) 등 반역자들에게 무참히 시해당하는 참상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소년왕자가 가지는 통한과 적개심이 어떠했겠는가.

무령왕은 등극하자마자 고구려 정벌에 적극성을 보여 한강 일대의 고토(故土) 회복에 열을 올리는 한편, 제해권 탈환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래서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머리가 합쳐지는 조강구(祖江口), 즉 강화만 일대에 포진한 고구려 수군 선단의 주력부대를 깨기 위해 내해가 깊숙이 파고든 내포의 큰물현(今勿縣, 현재 예산군 고덕면 봉산면 일대)에 수군 본영을 설치하고 전선(戰船) 건조에 국력을 기울였던 듯하다. 가야산 연맥에 울창하게 들어 찬 나무숲과 물산이 풍부한 내포평야가 그런 일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결국 무령왕은 끝내 그 21년(521)에는 강화만의 고구려 선단을 깨고 제해권을 되찾은 다음 신라사절단까지 데리고 당당하게 양나라로 찾아가서 동방 해양왕국의 재건을 과시하였던 것이다. ‘양서(梁書)’ 권 54 신라전(新羅傳)에 기록된 다음 내용이 이를 증명한다.

“보통(普通) 2년(521)에 성이 모(某), 이름이 진(秦)인 왕이 비로소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은 백제를 따라와서 방물(方物, 지방 특산물)을 바쳤다.”

또 무령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제해권(制海權)을 되찾은 다음 실지 회복의 꿈에 부풀어, 다음해인 22년(522) 9월에는 호산(狐山, 지금의 예산)벌에서 사냥대회를 크게 열고 23년 2월에는 옛 수도가 있던 한성을 찾아가서 한성 이북 주군의 15세 이상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하는 등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감행해 나간다. 그러나 이런 강행군이 62세의 노인에게는 무리였던지 3월에 한성에서 공주로 돌아와 바로 병석에 눕게 되어 5월7일에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태자인 명농(明)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성왕(聖王, 523∼553년)이다. 성왕은 무령왕의 추복(追福)을 위해 수군 본영으로 전함 건조의 중심지였던 큰물현 요지에 백제 최초의 사방불을 조성하게 한 듯하다. 이는 북위에서 이미 문성제 화평(和平) 원년(460)부터 운강석굴(雲岡石窟)에 역대 황제들의 추복을 겸해 그 얼굴의 초상조각으로 불상을 조성하여 추선굴(追善窟)로 삼던 풍습을 그대로 수용해들인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 사방불의 중심불(도판 7) 모습은 바로 무령왕의 초상이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현재 남면하도록 중수해 놓은 좌불이 바로 무령왕의 모습이라 해야 할 터인데, 중국화된 불의(佛衣)인 포복식(袍服式) 불의를 입고 포수좌(袍垂坐)를 지으며 좌정한 모습이다. 거의 정삼각 형태의 안정된 비례를 갖춘 앉음새나, 가사 형태의 불의를 두 벌 덧입으면서 겉옷을 오른쪽 어깨 뒤쪽으로만 걸쳐 내려 겨드랑이 아래로 빼내고 있는 착의법(着衣法) 등이 중국 낙양 용문석굴(龍門石窟) 빈양중동(賓陽中洞)의 주불좌상(도판 8)과 방불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예산 사면석불은 무령왕릉이 완성된 뒤인 성왕 5년(527)경에 조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빈양중동의 주존불이 북위 효문제(471∼499년) 추선굴로, 선무제(宣武帝) 연창(延昌) 4년(515)경에 조성을 완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방불의 불두는 파괴된 채로 공주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한편 성왕은 태자로 있으면서 부왕이 국권 회복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충분히 보아왔던 터라, 즉위하자마자 선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고구려 정벌에 앞장섰다. 지식이 뛰어나고 결단력이 있었다는 평가대로 성왕은 즉위년 8월에 고구려가 임진강으로 쳐내려오자 좌장(左將) 지충(志忠)으로 하여금 즉시 1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격퇴하게 하였다. 그리고 3년(525) 2월에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고 임진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고구려 안장왕(519~530년)은 성왕 7년(529) 10월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와 비혈성(鄙穴城)을 빼앗는데 좌평 연모(燕謨)가 이끄는 백제의 3만 군사는 오곡(五谷, 황해도 서흥)벌에서 벌인 전쟁에서 크게 패해 2000군사를 잃는다.

[ 신라에 배신당한 성왕 ]

백제와 고구려가 이와 같이 강화만 일대 3강(예성강, 임진강, 한강) 유역 쟁탈전에 여념이 없는 사이에, 무령왕 21년(법흥왕 8년) 백제를 따라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제무대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라는 드디어 법흥왕 15년(528, 성왕 6년) 불교를 공인하여 이념기반을 다지더니, 법흥왕 19년(532)에는 백제와 오랜 동맹관계에 있던 낙동강 하구의 해상왕국인 금관가야를 일거에 합병해 들인다. 고구려와의 쟁패에 여념이 없던 성왕은 배후에서 허를 찔린 것이다. 동맹관계만 믿고 신라를 과소평가하고 있던 성왕이 방심한 사이에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에 가야와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연합이 허물어지면서 백제의 제해권은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성왕이 16년(538) 봄에 수도를 사비(泗, 지금의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가야의 상실을 보상하려면 남해안 일대를 철저히 장악해야 하는데 강화만과 아산만의 수군으로는 거리상 그 신속한 제압이 불가능하였기에 금강구에 수군기지를 강화할 필요성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백제와 신라는 이 사건으로 동맹관계가 일시 파기되는 듯한데, 마침 성왕 18년(540) 7월에 법흥왕이 돌아가고 진흥왕이 불과 7세의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백제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장군 연회(燕會)로 하여금 5000병력을 이끌고 고구려 우산성(牛山城, 황해도 우봉)을 공략하나 실패하고 만다. 이에 성왕은 고구려와 영토분쟁이 쉽게 결말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19년(541) 진흥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고 다시 동맹을 맺는다. 신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의 영토분쟁을 종식시키려는 심모원려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왕 26년(548) 1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6000병력으로 한북 독산성(獨山城, 지금의 포천)을 포위 공격해 오자 성왕은 신라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진흥왕은 장군 주진(朱珍)으로 하여금 3000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돕도록 한다. 주진은 밤낮으로 달려와 독산성 아래에서 고구려군을 일전으로 대파하여 신라의 위세를 과시하는데, 이를 계기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쪽으로 영토확장의 가능성을 감지하게 된다.

성왕 28년(550) 1월 백제 성왕이 1만 군사로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자 3월에 고구려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백제의 구원요청을 빌미로 신라는 그 틈에 끼어들어 두 성을 모두 빼앗고 만다. 성왕은 또 한 번 철저한 배신을 통감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다음해(551년)에는 신라 진흥왕이 18세의 어엿한 장부가 돼 영토 확장의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승세를 몰아 고구려로부터 10군을 빼앗게 하고, 9월에는 고구려가 돌궐의 침입을 받자 이 틈을 타서 다시 10성을 빼앗아 한강과 임진강 일대를 모두 차지한다.

그리고 성왕 31년(553) 7월에는 백제 동북부인 현재 충청북도 일원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금관가야 백성을 이주시킨 다음 금관가야 구해(仇亥)왕의 막내 왕자인 김무력(金武力, 김유신 부친)을 군주(軍主)로 삼아 이 지역을 통치하게 한다. 물길에 익숙한 가야 백성을 이주시켜 백제를 견제하게 한 것이다. 이는 백제로부터 제해권을 탈취하여 숨통을 죄려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에 성왕은 10월에 왕녀를 진흥왕 소비로 출가시키는 화친외교로 일단 신라침공의 예봉을 피하면서 다음해인 성왕 32년(554) 7월에 아직 남해안과 낙동강 이서에 잔존한 가야세력과 연합하여 3만 군사로 신라를 침공해 들어가는 대공세를 취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옥천)전투에서 대군과 유리되는 전략적인 실수를 범하여 한낱 필부인 삼년산(三年山, 지금의 보은)군의 비장 고간도도(高干都刀)에게 피살되는데, 이는 신주 군주 김무력의 신속한 구원군이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성왕은 고구려로부터 고토를 회복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물거품으로 돌린 채 신라의 배신에 통한을 품고 일생을 마친다. 이때 호종했던 좌평 4인과 장졸 2만9600인이 모두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한다. 그래서 백제는 개로왕이 잡혀 죽고 공주로 남하해오던 때보다 더 심각하게 국망의 위기에 몰리게 되니, 고구려는 이해 10월에 대군을 몰아 공주까지 침공해 내려오고, 신라는 다음해 1월에 비사벌(比斯伐, 지금의 전주)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할 정도였다.

[ 태안(泰安)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

그러나 아산만과 태안반도에 본영을 두고 있던 수군세력이 굳건하게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위덕왕(威德王, 554∼597년)이 등극하여 민심을 수습해 가면서부터는 점차 국세를 회복해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위덕왕은 부왕인 성왕의 불행한 죽음을 위로하고 백성들의 울분을 달래기 위해 당연히 그 추선공양 불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민심을 수습하여 국가를 재건하는 구심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왕이 고토회복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었던 태안의 진산 백화산 상봉에 불상 높이가 250cm나 되는 거대한 (도판 9)을 건립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마애삼존불은 특이하게도 같은 크기의 양대 불입상 사이에 180cm의 작은 보살 입상이 끼워 서 있는 이상한 구도를 보이고 있어 사계의 전문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의 존재는 1927년에 간행된 ‘서산군지(瑞山郡誌)’ 권 1 산악 백화산(白華山)조에 “산 중복에 태을암(太乙庵)이 있고 암자 뒤에 암각(岩刻) 고불상(古佛像) 2좌가 있다”라고 하여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학계에 소개된 것은 1962년이며 1969년에 추보(追報)가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중국 제(齊) 주(周) 양식의 영향으로 600년경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발표되었다. 그 이유는 백제 불교의 흥륭기인 성왕과 위덕왕 양대에 작은 석상을 시험 조성한 다음 무왕(武王, 600∼640년)대에 융성의 추세에 따라 대불(大佛)을 조성해 갔으리라는 추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혹은 수(隋)·당(唐) 초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거나 북위불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이견이 나오게 되었는데, 최근에는 수나라 불상양식의 영향을 받은 7세기 초기작이라는 데 동조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남제(南齊) (제5회 도판 11)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새끼손가락과 그 다음 무명지를 구부리는 독특한 수인(手印) 양식을 보이고 있다든지, 포복식 불의(袍服式佛衣) 양식을 철저히 계승하고 있는 것 등으로 보아서 6세기 중반을 넘어서지 않는 양식적 특색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는 왼손으로 옷자락을 잡는 데서 연유하였을 이런 곡지(曲指) 양식은 중국에서 북위 효문제 태화(太和) 원년(477)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 운강석굴의 포복불 양식에서 비롯되고, 포복불 양식과 함께 에 이어지고, 이어 용문 초기 양식으로 계승되어, 북위 선무제 연창 4년(515)경에 완성되는 효문제 추선굴인 빈양중동(賓陽 中洞)의 주불과 (도판 10)에 이르며, 북위 효명제(孝明帝) 신귀(神龜) 원년(518) 조성의 (도판 11) 등을 거쳐 동·서위에서 535년경에 만들어진 불상에까지 표현되다가 이후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양대 불입상과 그 사이에 끼여 있는 보살 입상의 당당한 체구와 네모진 어깨가 마치 빈양중동의 남북벽 협시 삼존불의 양대 중앙입불과 그 곁의 협시보살입상의 그것과 너무 흡사하다. 즉 태안 마애불의 삼존구도는 이로부터 촉발된 영감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남북벽 양대 주불을 취하고 그 사이에 협시 보살 하나를 취한다면 바로 태안 마애삼존불 형식의 구도가 되기 때문이다.

동향한 삼존불의 북쪽 불입상은 왼손으로 보주(寶珠)형의 지물(持物)을 받쳐들고 있어 이를 약사여래로 보고, 남쪽 불입상을 아미타여래로 보아 새 중간의 보살입상을 관세음보살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양불은 그렇다 하더라도 보살이 반드시 관세음보살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이 산의 이름이 백화산인 것과 연결지어 관음 주처(住處)인 보타락가(小白華樹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관음보살로 확정짓는 빌미를 제공한 듯한데, 사실 백화산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당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당 중종(中宗) 사성(嗣聖) 12년(695)에서 사성 16년(699) 사이에 번역한 80권본 ‘신역화엄경’에서부터이니, 이 삼존불상이 조성될 당시에는 그 산 이름과 존상은 아무 관련이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행하던 법화신앙에 따랐다면 ‘관세음보살본문품’이나 ‘약왕보살본사품’에 따라 관세음보살상일 수도 있고 약왕보살상일 수도 있다. 특히 두 손으로 보주를 받들고 있으니 말이다. 무릎 이하가 땅에 묻혀 있었는데 1995년에 발굴하여 일시 이를 노출시켜 조사한 다음 다시 묻어놓았다.

신동아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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