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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진단|노동의 경제학

휴일이 늘어야 나라가 산다

  •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휴일이 늘어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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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자치부의 허명환 서기관이 쓴 ‘강제퇴근’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일과 여가’에 대한 미국인과 한국인의 의식 차를 읽을 수 있다.

일리노이주 정부에서 ‘흑인 고아문제’ 해결을 위해 관련 목사와 전문가들을 불러 세미나를 개최하기로 했다. 세미나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그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다면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저녁 7시에 개최하는 세미나를 누가 맡아서 준비하고 진행할 것이냐였다. 주공무원의 퇴근시간은 5시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연방 정부, 주 정부, 시군 정부에서 전 공무원이 진지하게 토론을 하며 끙끙거렸다. 특근수당을 더 주자, 임시직을 구하자, 예산확보가 되겠는가 등등…. 별나라 이야기 같았다. 우리나라였으면 당연히 해당과 직원들이 모두 남아 일을 하고, 일 끝나면 소주 한 잔 걸치고는 ‘오늘 정말 보람있는 일 했다’면서 퇴근할 일인데, 뭐가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이들에게 한국에서는 93년 최형우 장관이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후 공무원 근무행태 개혁의 일환으로 정시 퇴근, 연가 20일 확행, 일요일 근무 지양 등을 개혁과제로 내세우고, 장관이 6시만 되면 복도를 돌아다니면서 퇴근 안 하는 공무원에게 빨리 퇴근하라고 호통을 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에 대해 미국 공무원들의 반응은, 일국의 장관이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란다. 퇴근시간 되면 모두 나가고, 일요일은 쉬고, 휴가도 가는 것이지, 당연한 일을 장관이 챙기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얘기다. (허명환 ‘관료가 바뀌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



최장관의 ‘강제퇴근’ 해프닝은, 한두 시간 연장근무는 필수고, 일요근무도 마다 하지 않으며, 연월차 휴가는 그저 일주일 정도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허서기관은 미국인의 노동경제학은 철저하게 하루 24시간을 근로와 여가로 양분한다고 말한다. 노동시간은 임금으로 되돌아오고, 여가는 돈벌기를 포기하는 대신 개인생활을 하는 데 쓴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여가를 단순히 ‘논다’는 개념이 아니라 임금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한다.

반면 한국의 기업풍토는 일단 경영자나 관리자부터 휴가 사용에 인색하고 부정적이다. 아더앤더슨코리아의 이충노 부장은 변화를 위해서는 경영자와 노동자의 의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관리자 중에 상습적으로 ‘나는 입사 이래 휴가 가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면서 남에게도 은근히 강요하죠. 직원이 휴가를 내면 농담조라도 ‘휴가 간다면서? 일이 별로 없는 모양이지?’ 라고 빈정거립니다. 오후 4~5시가 돼서야 업무를 지시하고 무조건 오래 잡아두면 일이 되는 걸로 압니다. 성과측정 수단이 없으니 근태관리로 통제할 수밖에 없죠.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노동자들 또한 노동시간에만 집착하고 근로윤리도 희박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1일 표준 노동시간 중에서 정말 일하는 시간은 50%도 안 될 겁니다. 업무시간 중 치과에 다녀온다, 집을 보러 다닌다 하면서 사적인 일을 하고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풍토죠. 우리 회사를 예로 들면 휴가계산을 시간 단위로 하기 때문에 매우 합리적입니다. 개인업무를 보려면 1시간짜리 휴가를 내는 거죠. 그러면 앞으로 휴가는 ‘18일 22시간 남았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윤은기씨는 일과 휴식에 대한 개념은 사회의 성숙에 따라 변화한다고 한다.

“제가 공군장교를 마치고 처음 종합무역회사에 입사하니까 무역상사는 해가 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무슨 뜻인가 했더니 매일 야근하라는 말이에요. 별도 지시가 없으면 일요일은 정상출근이고, 오후 3시에 결혼하는 사원이 오전 근무를 마치고 식장에 갔죠. 그때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렇게 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요. 오히려 일요일에 나와 일하니 수당 받아서 좋고, 회사 돈으로 점심 먹으니 좋고, 집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는데 아내 눈치 안 봐도 되니 좋다고 생각했죠.

만약 요즘 그렇게 일을 강요하면 회사 그만두겠다고 할 겁니다. 과거에는 노동시간의 양이 생산량을 결정했지만 이제는 시간의 질, 즉 시간에 어떤 성과를 냈느냐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몇 시간 일했느냐는 의미가 없어졌어요.”

내 안의 적, 성공신화

●미국 노동자의 42%는 하루가 끝나면 ‘기진맥진’함을 느낀다.

●69%는 좀더 편안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30년 전보다 40% 줄어들었다.

●최근 20년 동안, 1인당 소비 증가는 45%에 이르지만, 사회건강지수에 나타난 삶의 질은 51% 감소했다. (찰스 핸디의 ‘헝그리 정신’)

영국의 경제평론가인 찰스 핸디는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전문가와 경영자들의 ‘일중독’에 주목했다. 이들은 시간으로 관리되는 생산직 노동자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일에 얽매여 있다. 영국 정신노동자들은 36%가 일주일에 48시간 이상 일하며 그들은 자유의지로 일하고 있으므로, 법정근로시간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지만 93년 영국경영협회가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77%가 일로 스트레스를 느끼며, 77%는 가족관계를, 74%는 배우자 관계를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일단 쉬거나 미끄러지면 영원히 패배하고 말 거라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페달을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핸디는 “생산성이 사회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생산성과 그가 속한 경제모델은 고차원의 굶주림, 즉 삶의 이유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고 경고했지만 그의 지적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직 소수다.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각각 1966, 1731시간에 불과한 미국과 영국이 이 정도라면 ‘일 권하는’ 한국사회의 실상은 더욱 심각하다. 아주 조금만 쉬고, 너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성공신화’가 이 나라 전체에 만연해 있다.

“벤처기업 사장 ○○○씨. 그의 하루는 아침 8시 사무실 잠자리를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조간신문의 관련 기사를 꼼꼼히 훑어보고나면 9시반께가 된다. 이때부터 울려오는 전화벨소리. 보통 사람들의 일과가 끝나는 저녁 6~7시가 돼도 숨 돌릴 틈이 없다. 이때부터 사업기획, 사내팀별토론, 서류작업 등 회사 내부의 일처리를 해야 할 시간이다. 토론을 하다 자정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이젠 퇴근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시간이다. 각종 보고서 점검, 전자우편을 체크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과에 대한 되새김까지 하고 나면 새벽 3~4시. 이때가 그의 퇴근시간이다. 주말이라고 쉴 수 있을까?”(한겨레)

매스컴은 이와같은 ‘노동 예찬’을 통해 새로운 성공신화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에게는 은근히 ‘좀 더 오래 좀더 열심히 일하라’고 부추긴다. 여성들도 이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화과학’ 99년 겨울호에 신경아씨(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는 이처럼 무자비할 정도의 장시간 노동체제를 숭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가정생활까지 꾸려나가야 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작은 성공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르고 있다고 말한다.

“근무시간은 9시반에서 5시반이지만 책임자는 9시까지 와야 돼요. 보통 8시반에 와서 6시에 퇴근해요. 관리자는 오티(연장근로수당)도 안 주게 돼있어요…. 주위에서 책임자 직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희생을 거친 사람들이에요. 시간적으로 투자해야 돼요. 출퇴근 시간 지키고 중요한 것은 가정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그만두게 되는 거예요.”(정영애의 ‘생산중심적 조직내의 성별관계’)

강내희 교수(중앙대 영문과)는 지난해 우리사회에 유행처럼 번진 ‘신지식인 담론’도 따지고 보면 생산성 증대를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은, 즐겁게 자기 착취를 하는 인물형을 바람직한 상으로 내세우는 지배담론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강수돌 교수(고려대 경영학과)도 “처음에는 정말로 일에 흠뻑 빠져 일을 즐기다보면, 주변의 응원(성실하고 정력적인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는)에 나도 모르게 더 몰입하게 되고 어느날 ‘과로사’의 위기에 빠지는 것이 일중독증”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성공신화’를 만들기 위해 쓰러지는 순간까지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실제로 지난해 성공가도를 달리던 30대 은행 지점장이 “나는 은행만을 위해 일한 결과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한강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은 ‘일 권하는 한국사회’가 몰고온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는 유서에 “사랑하는 당신,그리고 ○○,○○야,미안하다.미안하다.하지만 아빠는 최선을 다했다.바보같은 아빠의 삶을 살지 마라.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기를 바란다”고 썼다. 최선을 다했는데 왜 그는 바보같은 삶이라고 했을까, 그리고 가족에게는 무엇이 그리도 미안했을까.

개미의 비극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게으른 자, 놀기 좋아하는 자에게 가혹한 저주를 퍼붓는다. 하지만 현실은 여름철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개미에게 안락한 집과 풍성한 양식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역설은 ‘노역에 시달려 디스크에 걸린 개미와 최신 곡이 떠서 잘 나가는 베짱이’이다(강내희 ‘노동거부의 사상’). 일중독자에게는 억울한 일이지만 그것이 더 현실에 가깝다. IMF 상황에서 퇴출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맹목적으로 매달려온 노동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고병권씨(연구공간 ‘너머’회원)는 ‘노동거부의 정치학’에서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노동으로부터 은퇴한 개미들의 비극을 이렇게 설명했다

“개미는 베짱이가 놀 때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지금 놀 수도 있으나 또한 그것을 억제할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인내가 수고로운 삶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내력과 금욕의지, 그것은 내게 있는 것이고 베짱이에게 결여된 것이다’라고. 그러나 노동을 하지 못하게 된 개미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나서면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수행하던 ‘노동’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 ‘내일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휴식’을 위해 ‘오늘 열심히 일하고자’ 했던 개미의 믿음은 ‘내일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 ‘오늘 푹 쉬어야 하는’ 현실의 삶과 도치돼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강수돌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젊을 때 일하고 늙어서 인생을 즐기기는 꿈에 불과하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일하는 시간과 인생을 즐기는 시간을 우리의 시간표에서 주중과 주말 또는 직장생활과 정년 이후 생활 등으로 분리하여 진정한 삶의 시간을 자꾸 뒤로 ‘유보’할 게 아니라, 일상적 노동생활의 하루하루를 ‘일하는 동시에 삶을 음미하며 사는’ 것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강수돌 ‘작은 풍요’)

그는 삶의 질 차원에서 반드시 확보돼야 하는 4가지 요소로 ‘인격(인간의 존엄성), 건강, 공동체(더불어 살기), 생태계의 건강성, 삶의 여유’를 꼽았다.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생산성을 위해 이 4가지 요소를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지만, 이것이야말로 삶의 질을 위해 버려야 할 생각이라는 것이다. 또 현대인의 ‘일 중독증’을 치료하려면 먼저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라는 내면을 향한 물음이다. 찰스 핸디의 말처럼 인간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왜 사는가’라는 ‘고차원적인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강교수는 노동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열 번 설명하는 것보다 이야기 한 편이 훨신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들려준 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부 이야기.

어느 조용하고 아늑한 어촌의 아침. 햇빛이 내리쬐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고기잡이 노인이 평화롭게 단잠을 자고 있었다. 휴양을 온 한 관광객이 바닷가를 거닐다 노인의 잠자는 모습을 보게 됐다….

“할아버지는 고기 잡으러 나가지 않으세요? 벌써 해가 저만치….”

“벌써 새벽녘에 한 번 다녀왔구먼.”

“아, 그러세요. 그러면 또 한 번 다녀오셔도 되겠네요.”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 뭐하게?”

“…참, 할아버지두, 고기 많이 잡으면 저 낡은 거룻배를 새걸로 바꾸실 수 있잖아요.”

“그래가지고?”

“새 거룻배로 고기를 잡으시면 훨신 빨리, 한결 많이….”

“음… 그 다음에는?”

“그야, 크고 좋은 배를 몇 척 더 사시고, 사람도 많이 부리고…. 돈 버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니겠습니까?”

“옳거니, 그래서는?”

“…이 마을에 생선가공공장도 세워 싱싱한 통조림도….”

“음, 그리고나서는?”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께서는 아무일도 안하고 가만히 누워, 그저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지요.”

“지금 내가 바로 그렇게 잘 지내고 있네.”

신동아 200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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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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