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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은 미륵보살의 화신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신라 선덕여왕은 미륵보살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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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동남쪽 귀퉁이에서 일어난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켜 경상도 일원을 아우른 다음 차츰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분쟁에 끼어들어 한반도의 심장부인 한강유역과 척추에 해당하는 강원도와 함경남도까지 차지하게 되자, 이 영토확장을 달성해낸 진흥왕은 천하를 통일하고 왕권을 절대화하려는 야욕을 보이기 시작한다.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후의 보호 아래 거칠 것 없이 성장하면서 시운(時運)을 잘 만나 고구려와 백제의 물불 가리지 않는 혈투 사이에서 힘들이지 않고 양대 강국의 땅을 잠식해 그 요지를 모두 차지하는 행운을 만났으니 어찌 그런 야욕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때맞춰 수용된 불교가 인과(因果)와 윤회(輪回)라는 충격적인 논리로 기존 사고의 틀을 파괴하기에 이르자 유교문화 충격을 거치지 않은 신라사회에서는 샤만의 신정일치(神政一致) 전통과 맞물리며 절대 순수혈통의 신족(神族) 관념이 되살아나 절대왕권의 출현을 합리화해갔을 터이니, 진흥왕의 이런 태도를 당시 신라사회가 당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듯하다.

이에 본래 평등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웠던 불교의 인과와 윤회설은 신라사회에서 정반대로 전도되어 계급제도를 절대화하는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더구나 불교가 타파의 대상으로 여겨 불경 곳곳에서 언급한 인도의 4성제(四姓制)를, 신라사회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일상적인 사회제도로 수용해 들이려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 진흥왕은 자신이 참된 뼈대(眞骨)를 타고난 절대 유일의 군주로 이를 처음 일으킨 왕이란 의미에서 스스로 진흥왕이라 일컬었던 듯하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아들대에 가서는 천하를 통일하는 왕중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큰아들의 이름을 동륜(銅輪), 작은아들의 이름은 금륜(金輪)이라 지었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5, ‘중아함경(中阿含經)’ 권41,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 권 상 등에서는 만약 32상을 타고나서 재가(在家)하면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出家)하면 불타가 된다고 하였다. 또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권30이나 ‘구사론(俱舍論)’ 권 12 등에서는 전륜성왕의 종류가 금, 은, 동, 철의 4종이 있는데 금륜성왕이 나오면 금륜보(金輪寶)가 따라 나오고 은륜성왕이 나오면 은륜보가 따라나오는 등 각기 그 이름에 따른 윤보가 따라나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나 금륜성왕은 4주(洲)를 다스리고, 은륜성왕은 3주, 동륜성왕은 2주, 철륜성왕은 1주를 각각 다스린다 하였다. 진흥왕이 큰왕자 이름을 동륜이라 짓고 막내 왕자 이름을 금륜이라 지은 의도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태자로 있다가 진흥왕보다 앞서 돌아간 동륜태자의 아들들 이름에 이르면 진흥왕의 의도가 무엇인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큰왕손은 백정반(白淨飯), 둘째 왕손은 백반(伯飯), 셋째 왕손은 국반(國飯)이다.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왕 형제들 이름이다.

그런데 동륜태자가 요절하니 막내 왕자 금륜이 왕위에 올라 진지왕(眞智王, 576∼578년)으로 진자(字) 왕호를 계승하고, 동륜태자의 장자인 백정반이 왕위에 나가서는 진평왕(眞平王, 579∼631년)이란 이름으로 진자 왕호를 다시 잇는다.

그런데 진평왕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버지 이름을 가진 것이 아니다. 진평왕비마저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인 마야(摩耶)부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서는 당연히 석가모니불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석가불은 이미 1000여년 전에 인도 가비라성에서 태어났던 과거불이다. 그러니 신라에서는 당래불(當來佛; 미래에 마땅히 출현할 부처님)인 미륵불이 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중국문화권으로 들어오며 여체(女體)로 인식되기 시작한 미륵보살의 화신(化身)으로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출현하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종래에는 신라가 모계사회 전통이 강하여 여왕이 출현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는 일제 사학자들이 일본이 섬나라라는 특수성 때문에 모계사회 전통에 의해 여왕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그대로 우리 역사 연구에 적용해서 생긴 오류인데, 우리는 이를 이제까지 아무 생각없이 수용해 들이고 있다.

모계사회는 아비를 알 수 없는 자식이 태어나는 사회환경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유목사회나 섬 지역에서 주로 형성된다. 즉 정착생활이 불가피한 농경사회에서는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삼국지(三國志)’ 권30 왜전(倭傳)에 보이는 여왕국 기사나 왜여왕(倭女王) 비미호(卑彌呼) 얘기가 이를 대변해 준다. 위(魏) 명제(明帝) 경초(景初) 2년(238) 6월에 왜여왕 비미호가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와 도시우리(都市牛利)를 대방군에 보내 천자에게 조공을 바치므로 12월에 조서를 내려 비미호여왕에게 친위왜왕(親魏倭王)의 인신(印信; 도장)을 내리고 난승미에게는 솔선중랑장(率先中郞將), 도시우리에게는 솔선교위(率先校尉)의 벼슬을 주며 조공에 답하는 응분의 하사품을 내린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일본은 국제사회에 그 존재가 알려질 때부터 여왕국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시조 이래 선덕여왕 때까지 여왕이 존재한 적이 없으며 왕태후의 섭정도 진흥왕 태후가 처음이니 북위 문명(文明)태후 풍씨(馮氏)나 영(靈)태후 호씨(胡氏)의 전례를 듣고 행한 개화(開化; 개방변화) 행위였을 듯하다.

따라서 신라는 모계사회라고 단정지을 수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여왕이 출현하였다는 것도 당연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이 미륵의 화신으로 출현했을 가능성에 대해 근원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 먼저 미륵의 존재에 대해 구체적인 이해를 하고 나가야겠다.

미륵보살은 누구인가

미륵(彌勒)은 범어(梵語) 마이트레야(matreya)의 음역(音譯)으로 자씨(慈氏)라고 의역(意譯)하기도 한다. ‘현우경(賢愚經)’ 권12 바파리품(波婆梨品)에 의하면, 중인도 바라나국(波羅奈國, V?r?n?si)의 바라마달왕(波羅摩達王)에게 한 재상이 있어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삼십이상(三十二相)을 타고 났으며 그 어머니가 애를 가진 다음부터 마음이 자비롭게 변하였다.

그래서 관상사(觀相士)의 뜻에 따라 미륵(자비의 의미)이라고 이름하였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기 때문에 당시 바리불다라국(波梨弗多羅國) 국사(國師)였던 외숙부(外叔父) 바파리(波婆梨)에게 나아가 경서(經書)를 배우게 된다. 오래지 않아 여러 경전을 꿰뚫어 알게 되자 바파리는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이름을 떨치는 석가모니불이 왕사성(王舍城) 기사굴산중(耆山中)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미륵 이하 총명한 제자 16인을 보내어 석가불을 시험하게 한다.

여기서 바파리(波婆梨)의 16제자는 모두 석가불에게 감화되어 불제자가 된다. 그런데 미륵을 제외한 15인은 즉시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지만 미륵은 장차 석가모니불의 교화(敎化)가 끝난 다음 이 사바세계에 다시 출현하여 교화(敎化)할 부처님이 될 인연이 있으므로 일생보처불(一生補處佛; 중생을 모두 이끌고 대각을 이루기 위해 한 생만 더 후보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불타), 즉 보살로 남게 된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에게 입히려고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사파제(摩訶波波提)가 당신의 유성출가(踰城出家) 이후 긴 세월을 두고 금실로 정성들여 짜놓은 금루직성가사(金縷織成袈裟; 금실로 짜낸 가사)를 받아서 미륵에게 전해 주면서 장차 이 지구상(閻浮提)의 인간 수명이 8만4000세가 될 때, 즉 56억7000만 년 후에 미륵이 다시 지구상에 태어나서 성불(成佛)하고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삼회(三會)의 설법을 하여 널리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들은 ‘중아함경(中阿含經)’ 권13 설본경(說本經), ‘잡보장경(雜寶藏經)’ 권4 대애도시불금루직성의병천주사연(大愛道施佛金縷織成衣幷穿珠師緣) 등 원시경전에도 수록되어 있어 미륵보살은 실재했던 석가세존의 제자였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대승사상의 진전과 더불어 미륵보살은 당래불(當來佛; 미래에 마땅히 와야 할 불타)로의 중요성 때문에 대승보살(大乘菩薩)로도 각광을 받게 되어, ‘법화경(法華經)’ 권6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이나 ‘구화엄경(舊華嚴經)’ 권60 입법계품(入法界品) 등 대표적인 대승경전에서도 석가 회상의 상수보살로 등장하게 되며,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과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서는 경전의 주역으로 부상한다.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 즉 ‘미륵상생경’은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상생(上生)하여 때를 기다리는 정황을 서술한 내용이고, ‘미륵하생경’은 미륵보살이 지구상에 하생(下生)하여 성불하고 중생을 제도하여 가는 과정을 서술한 내용이다.

그런데 미륵보살상의 상호(相好)를 규정짓는 경전은 ‘미륵상생경’이다. 경문(經文) 일부를 옮겨 보겠다.

“그때에 도솔천 칠보대내(七寶臺內) 마니전상(摩尼殿上) 사자좌(獅子座)의 연꽃 위에 홀연히 화생(化生)하여 가부좌를 틀고 앉으시니 몸은 염부단금색(閻孚檀金色)과 같고 키가 16유순[由旬, 1유순은 성왕(聖王)의 하루 행정(行程)인 40리 혹은 80리]이며 32상 80종호를 모두 갖추시었다. 정수리 위에는 육계(肉)가 있고 머리칼은 검푸른 유리색이며 석가비릉가보주(釋迦毘楞伽寶珠)와 백천만억 견숙가보(甄叔迦寶)로 천관(天冠)을 장식하니 그 천관에서 백만억색이 나오고 하나하나의 색 중에는 한량없는 무수한 화불(化佛)이 나오는데 여러 보살들로 시자(侍者)를 삼았다.”

이런 내용을 기본으로 하여 2세기 중기에 쿠샨제국의 간다라 지역에서 미륵보살상을 처음 만들어내고 있다. 입상(도판 10)과 두 다리를 교차시키고 앉아 있는 교각좌상(橋脚坐像)(도판 11), 한 발은 땅에 딛고 한 다리만 가부좌를 튼 반가좌상(半跏坐像)(도판 12) 등 3가지로 만들었다.

위 경전에서는 이 보살상 자체가 부처님의 특상인 32상 80종호를 두루 갖추고 있으며, 특히 정수리 위에 육계(肉)가 있고 머리칼이 검푸른 빛이라 하여 높고 큰 상투 내지 그것을 틀 수 있는 훌륭한 머리칼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 석가비릉가(釋迦毘楞伽)라는 보주와 견숙가(甄叔迦)라는 보석들로 화려하게 꾸민 천관을 썼다고 한다.

이것이 이미 만들어진 간다라 미륵보살의 머리 모양을 보고 서술한 것인지, 이 내용에 따라 간다라 미륵보살의 머리 모양이 만들어졌는지 그 선후관계는 명확지 않으나 경문 내용과 현존한 미륵보살의 머리 모양은 거의 일치한다. 도판으로 보여준 미륵보살상들의 머리 모양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위성(舍衛城)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이 경전을 설하면서 이 경전이 설해지고 난 12년 후에 미륵은 자신이 출생한 바라나국(波羅奈國) 겁바리촌(怯波利村)으로 돌아가 결가부좌하고 입멸(入滅)할 것이고 그 몸은 전신이 주금상(鑄金像; 금을 부어 만든 형상)과 같이 되며 그 사리상(舍利像; 전신이 그대로 사리가 되어 몸매를 원형대로 유지하고 있는 형상)을 위하여 제천(諸天)이 보탑(寶塔)을 세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석가모니불의 애제자이던 미륵은 세존에 앞서 입멸하고 그 전신상(全身像)이 보존된 듯한 느낌이 든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44 십불선품(十不善品)과 ‘미륵하생경’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이 미륵에게 전해준 금루가사(金縷袈裟)는 석가모니불의 상수(上首)제자인 마하가섭(摩訶迦葉)이 열반에 들지 않고 마가다국 비제촌(毘提村) 계족산중(鷄足山中)의 굴 속에 보관하고 있다가 미륵보살이 도솔천의 천수(天壽)인 4000세를 채우고(도솔천의 1일은 인간의 400년에 해당하므로 5억7400만년이 된다. 56억7000만년은 잘못된 계산이다)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대각(大覺)을 이루고 난 다음 미륵에게 전수된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 소개하는 보살상의 옷차림은 상생한 도솔천주(兜率天主)의 차림새이거나 하생하여 성불(成佛)하기 전의 태자(太子)인 미륵보살의 차림새일 것이다. 그래서 당시 왕자(王者)들의 호사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는데 갖은 보배로 장식한 천관(天冠) 외에 귀고리와 이중의 목걸이, 이중의 팔찌, 오른쪽 어깨와 겨드랑이 사이를 둘러 왼쪽어깨로 넘긴 구슬걸이 및 향주머니, 소도구(小道具)가 든 주머니들을 잇대 달아맨 가슴걸이 등으로 요란한 치장을 하고 있다.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식지(食指)와 중지(中指) 사이에 끼워 들고 있는데 이것은 제액구고(除厄救苦; 재앙을 없애고 고난에서 구해줌)를 상징하는 물병이거나 관정(灌頂; 정수리에 물을 뿌려주는 세례 의식)을 위한 향수병이라 생각된다. 그것이 무엇이건 미륵보살의 명호(名號)를 부르거나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들이 곧장 도솔천으로 상생하는 것에 대비하여 늘 지니고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3종의 미륵보살상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다른 보살상과 마찬가지로 수염이 소멸하여, 거의 여체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화려한 보관장식과 몸치장에 동원된 각종 영락(瓔珞)장식 때문이다. 뒤로 늘어뜨린 머리카락도 한몫 거들었다. 더구나 중국의 전통적인 음양오행 사상이 삼존상일 경우 일양이음(一陽二陰; 양은 하나이고 음은 둘임)의 음양조화로 이해하여 좌우협시 보살을 여체로 표현하는 것을 당연시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미륵보살이 여자이리라는 생각은 북위에서 황제가 곧 지금 세상의 여래라고 생각하며 불교 발전이 극에 이르렀던 시기인 문성제(453∼465년) 이후에 문명태후와 영태후가 차례로 나와 여자이면서 섭정으로 대권을 잡고 천하를 호령하면서 더욱 일반화되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런데 최근 돈황 막고굴의 보수와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중국인 학자 단문걸(段文傑)은 미륵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돈황 제275굴을 조사 연구하면서 교각좌상은 상생미륵보살상이고 반가좌상은 하생미륵보살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한다. 타당한 견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북위 후반기부터는 상생보살인 미륵교각상보다 하생보살인 미륵사유반가좌상이 더욱 많이 만들어진 듯하다.

그 양식적 특색은 아직 유방이 생기지 않은 소녀상이나 여성적 용모를 갖춘 미소년상과 같이 가냘픈 몸매를 갖는 것인데, 청정무구한 법체(法體)를 연상시켜 극도의 추상적 세련미를 도출해 낸다(도판 13).

이런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 양식이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장차 신라에 전해지게 되고 미륵의 화신으로 실제 출현한 선덕여왕의 초상조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와 백제에서 먼저 만들어져 유행하였을 이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은 금동이나 활석 등 석조로 만들어진 유례가 상당히 남아 있지만 그것이 대개 소형의 독립상이라서 이동이 가능하므로 출토지만 가지고는 만든 곳을 확정짓는 데 충분조건이 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도판 14)에서 좌협시보살로 이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이 등장하고 있어 백제 미륵상의 표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로써 고구려와 신라의 미륵상까지 분류해 낼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었다. 이에 우선 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서산마애삼존불

한반도의 정기(精氣)를 한데 모아 중국 대륙을 향해 불끈 힘주어 뽐내듯 서해로 돌출한 것이 태안반도다. 이를 만들기 위해 백두산으로부터 동해변을 따라 남진해온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속리산에서 다시 남진으로 바뀌면서 그 역세(逆勢)를 몰아 일지맥(一支脈)을 나누어 북상시키니,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정맥은 남한강 물을 몰고 북진하다가 경기도 죽산 칠현산을 지나 장항령에 이르러서는 한가닥을 서남쪽으로 틀어 금북정맥을 만들어나간다.

금북정맥은 경기 충청 양도의 도계를 이루며 서진해 가다가 천안 성거산에 이르면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보령 오서산까지 오는데, 이곳에서 돌연히 일지맥을 서북쪽으로 뻗어올린다. 그래서 가야산(伽倻山) 연맥이 남북으로 길게 우뚝 솟아 바다를 제압하면서 무수한 낙맥(落脈)을 사방으로 뻗어내려 태안반도를 만들어내며 복잡한 만곡(彎曲)을 이루어 놓으니 아산만(牙山灣), 당진만(唐津灣), 가로림만(加露林灣), 천수만(淺水灣)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만곡들은 대체로 가야산 연봉(連峰)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이 합수(合水)되어 흘러 들어오는 큰 시내와 연결돼 있고, 이곳 서해는 조석간만 차가 크기 때문에 바닷물을 내륙 깊숙이 밀어넣는 작용을 한다. 이것은 넓은 평야와 구릉지대로 이루어진 가야산 주변의 내포(內浦)평야 일대를 더욱 기름지게 하고 교통을 편리하게 하여 일찍부터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하였으니 신석기시대부터 그 문화유적을 곳곳에 남겨 놓고 있다.

특히 해양세력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던 백제시대에는 이곳의 중요성이 더욱 고조되어 국제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던 듯한데, 백제가 한강 유역과 강화만 일대의 해상통치권을 상실하고 나서 금강 유역으로 밀려났던 문주왕(文周王, 475∼476년)대 이후로는 거의 백제 해상활동의 전진기지화하는 느낌이 짙다.

그래서 한강 선단(船團)의 궤멸로 일시 제해권(制海權)을 고구려에 빼앗겼다가 이를 다시 찾아 해상활동을 재개함으로써 해양왕국(海洋王國)의 체면을 되살리던 무령왕(武寧王) 21년(521) 이후에 이곳의 번영과 발전은 눈부신 것이었으니, 그 결과 성왕(聖王, 523∼553년) 초년에는 큰물현(今勿縣) 안개(內浦) 깊숙한 가야산 기슭인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 (제7회 도판 7)이 조성되고 위덕왕(威德王, 554∼597년) 초년에 (제7회 도판 9)이 가로림만 깊숙한 물길 좋은 태안의 진산(鎭山) 백화산(白華山) 상에 조성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과 에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이제는 태안반도 북쪽 당진만에서 역천(驛川)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서 그 물길의 발원처에 가까운 가야협(伽倻峽)에 한층 세련된 마애삼존불을 조성해 이 시대 이곳의 문화역량을 과시한다.

이곳 마애삼존불이 조성된 가야협은 가야산 연봉이 남북으로 달리면서 북쪽으로 터놓은 계곡인데 일찍이 상왕국(象王國)의 도읍터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뒷날 신라 통일 이후에는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의 하나인 보원사(普願寺; 講堂寺)가 세워지는 곳이다. 화엄십찰은 신라가 통일을 성취한 뒤에 왕국 내의 오악(五岳) 사진(四鎭)에 해당하는 각 지방의 요충에 세운 절이다. 이는 통일왕조의 정치·군사·문화적 우위를 각처에 과시하여 민심을 진압하고자 하는 의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 십찰 중의 하나로 보원사가 건립되었다면 이곳이 통일 후에 정치·군사·문화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던가를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다. 이는 곧 그 이전 백제 때 이곳이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요지(要地)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백제 시기에 조성된 마애삼존불의 존재가 이를 증명해준다.

뿐만 아니라 이 마애삼존불이 있는 곳에서 산봉우리 두어 개를 넘어 동쪽으로 가면 10여 리 남짓한 곳에 무령왕의 초상 조각으로 추정되는 예산(禮山) 화전리(花田里) 이 있고, 그곳에서 다시 50리쯤 동남쪽으로 가면 백제 최후의 항전이 있었던 임존성(任存城)이 존재하여 이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명해 준다.

어떻든 이 은 백제가 제해권을 탈환하여 중흥의 기치를 높이 들던 성왕과 위덕왕 시대 어름에 조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보다는 훨씬 세련된 양식기법을 보이고 있어 적어도 30여년의 양식적 시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니 위덕왕 말년경이나 위덕왕이 돌아간 직후의 제작으로 보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가야협의 내수구(內水口)에 해당하는 암벽이 동서로 솟아 있는 중에 동편 암벽의 남면에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이 마애삼존상은 근본적으로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이 보이던 양불협시(兩佛脇侍)라는 불합리성이 청산되어 1불2보살이 이루는 삼각구도의 정통 삼존불(三尊佛) 양식을 갖추게 되면서 조각 기법이 크게 진전되고 있다.

주불(主佛)은 얼굴 윤곽이 살아나서 의 오목한 특성을 극복하였고, 이목구비를 모두 시원시원할 정도로 분명하게 표현하여 통 크고 명랑 쾌활하며 넉넉한 인품을 가진 대장부의 기상을 드러내게 하였다. 그러나 귓불은 오히려 축소되어 사실감(寫實感)을 더해주고 있다. 크게 뜬 눈, 넓은 눈두덩과 수려한 눈썹, 들창코에 가깝게 드러낸 콧구멍과 넓은 콧방울, 한껏 긴장시킨 아래위 입술과 양볼 근육, 이런 표현들이 정말 반가워 미소짓는 애정어린 표정을 짓게 하였다. 이것을 일러 백제의 천진한 미소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포복(袍服)의 옷주름 표현도 가능한 한 억제하였다. 다만 대여섯 줄의 물결무늬를 음각 처리하였으되 오히려 포복불의(袍服佛衣)의 본질이 제대로 드러난 듯하고 신대(紳帶; 중국 문화권에서 상류층이 예복인 도포 위 가슴 부근에 매던 띠)의 매듭도 자연스럽다. 어깨가 매우 넓어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지만 의 양불(兩佛)보다는 날이 죽어서 경직감(硬直感)이 조금 해소되었고, 시무외(施無畏) 여원인(與願印)을 한 양 손의 높이도 오른쪽이 높고 왼쪽이 낮도록 차이를 두는 동시에 여원인을 한 왼쪽 손만 끝의 두 손가락을 구부리게 하는 변화를 주어 자세를 천연스럽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둥글고 부드러운 백제 특유의 연꽃잎을 가진 복련(覆蓮)의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맨발로 가지런히 서 있는 모습으로 발가락들이 너무 분명하여 큰 발을 연상케 하니 혹시 이는 불족적(佛足跡)을 의식하여 일부러 이런 표현을 시도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느낌이 든다.

광배는 촛불꽃 모양으로 겉테 안에는 불꽃의 표현이 있고 그 속에 3구의 화불(化佛) 표시도 있으며 안테 속은 둥근 테 안에 활짝 핀 연꽃이 머리를 싸고도는 형태다. 두광(頭光; 머리에서 솟아나는 빛)의 의미를 충실하게 드러내면서도 단순화시킨 이상적인 표현이다. 좌우협시의 두광에 이르면 불꽃의 표현조차 생략되어 더욱 단조로워지지만, 이는 오히려 보살의 복잡한 보관(寶冠) 장식과 대비를 이루어 시각 효과를 높여 준다.

보통 삼존불 양식과는 구성요소가 사뭇 달라 좌협시가 보살반가사유상(菩薩半跏思惟像)이고 우협시가 구슬을 받쳐든 봉주보살입상(捧珠菩薩立像)이다. 이런 삼존 구성은 아직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어 의 삼존 구성과 함께 학계에 불가사의로 남아 있는데, 당시 가장 널리 신앙되던 관세음보살과 미륵보살로 추정하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주장이다.

좌협시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을 살펴보면, 의자에 앉아서 왼발을 땅에 딛고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는 반가좌세를 취하며 오른쪽의 구부린 무릎을 약간 들어올린 듯하면서 오른쪽 팔굽을 그 위에 기대 세워 오른쪽 턱을 받쳐 생각에 잠긴 자세를 짓고 있다. 그러나 얼굴 표정은 환희에 가득 차서 웃음기로 활짝 펴 있으니 고뇌하는 사유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오히려 법열(法悅)에 가득 찬 열락(悅樂)의 정취가 물씬 풍겨난다.

상반신은 천의(天衣) 한 조각 걸치지 않은 알몸인데 목에는 불꽃 모양의 큼직하고 단순한 목걸이가 걸려 있고 허리에 느직하게 치마 허리가 매어져 있어 치마폭이 그 아래로 흘러 내려와 무릎 아래로 덮어 내려갔다. 그 흘러내린 옷자락 표현은 층단을 이루는 포복 형태다.

마치 접시꽃같이 만개한 둥근 꽃장식을 산모양으로 휘어놓은 모자테의 아래위로 장식하여 복잡한 듯 단순하게 만든 화관을 쓰고 있는데, 그 뒤로는 연꽃잎이 둘러진 두원광(頭圓光)이 표현되고 그 둘레에는 마치 해무리처럼 둥근 불꽃무늬가 표현되며 촛불모양의 불꽃이 그 위로 다시 새겨져 이른바 촉염광(燭炎光; 촛불꽃 형태의 광배) 형태의 두광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은 태안반도 특유의 둥글고 넉넉하여 후덕한 모습이다. 화관의 끈이 좌우로 늘어져서 어깨 아래 가슴 부위까지 내려와 있다.

오른쪽 협시인 관세음보살 입상도 거의 같은 모습인데 다만 두 손으로 보주(寶珠), 즉 구슬을 정면에서 가슴 근처까지 높이 받쳐들고 있으며 구슬을 받쳐든 두 손의 양팔뚝 위로 천의가 걸쳐져 내려온 것이 다를 뿐이다. 화관도 정면 중앙에 꽃술 형태가 높이 양각되고 그 주변으로 꽃잎이 덩굴 형태로 변형되어 둘러싸며 양쪽 아래로 활짝 핀 접시꽃 두 송이가 장식된 형태라서 미륵보살의 화관과는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 협시보살 모두가 너무 활짝 펴서 꽃잎이 아래로 뒤집혀진 듯 엎어진 연꽃(覆蓮)의 씨방 위에 올라서 있다.

이 삼존불상은 1959년에 학계에 공식 보고되었으나 이미 선조(宣祖, 1568∼1608년) 때에 이루어진 서산구지(瑞山舊誌)인 ‘호산록(湖山錄)’의 상왕산(象王山) 조에 “강당(講堂) 불상이 두 번 땀 내고 문현봉(門懸峰)이 방포성(放砲聲)을 내 내포 일대의 병화(兵禍)를 막아주었다”고 기록하여 이 삼존불상이 인근 내포 일원의 주민에게 얼마만큼 존숭되었던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삼존불상의 정면에 솟아 있는 바위가 ‘인(印)바위’라 하는 것으로 상왕(象王)의 인보(印寶)가 감춰져 있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으니 이도 전통적인 큰 바위 숭배 신앙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신동아 200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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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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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은 미륵보살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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