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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옥! 老子 말하면서 버터냄새 풍기지 말라

  • 박현 한국학연구소 소장

김용옥! 老子 말하면서 버터냄새 풍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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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동양학은 동양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동양 문화의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 우주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서양 역사를 연구하더라도 그 관점에 따라 동양학이 될 수 있는 반면, 아무리 동양의 문화와 사상을 연구하더라도 서양학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주체적 동양학이며, 그런 주체적 동양학과 김용옥 씨의 객체적 동양학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빚어내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는 어떻게 다를까? 김용옥 씨의 사상적 바탕이 서양학이요, 객체적 동양학이라고 매도(!)했으니, 이제 필자에게는 이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

객체적 동양학은 동양 문화와 동양 사상의 연구를 통해 서양학의 영역을 크게 넓힐 것이다. 그것은 서양 중심의 세계 질서가 드러내는 사상적 독단성을 상대적으로나마 개방성으로 전환시킬 것이고, 그 무대의 문화적 편협성을 크게 넓히는 데 기여할 것이다. 실제로 김용옥 씨의 학문은 이미 그런 구실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서도동기(西道東器)의 동양학은 이를 연구 대상으로 살펴볼 따름이기에, 그런 입장에서는 서양학의 재생산이 진행될 뿐, 동양학 자체는 재생산되지 않는다. 물론 언젠가는 같은 꼭지점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 이루어지는 많은 비주류 사람들의 삶은 주류의 그것과 견주어 주체성이라는 면에서, 또 삶의 고통이라는 면에서 크게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그것을 무시한다면 세속을 철학화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주체적인 동양학은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학문이어야 한다. 그런데 김용옥 씨가 제시한 동양학의 3대 특질은 결코 동양학을 재창조하는 동양학 고유의 동력이 아니다.



“동양학은 어떻게 스스로를 재창조해왔던가?”

이것이야말로 동양학을 규정하는 본질이다. 그런데 그의 저서와 강의에서 우리는 동양학의 자기 재창조와 관련된 어떠한 언급도 찾을 길이 없다. 거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며 인생을 걸고 연구한 동양학이 이미 그에게서는 죽어버린 학문이라는 점이다. 그가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에게서 동양학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동양문화를 접붙이기한 서양학을 가리킬 따름이다. 그는 동양학을 해부 대상으로 올려놓고 서양학적 철학방법론에 따라 여러 가지 이론적 조작을 진행하면서 그의 철학인 ‘몸철학’(또는 기철학)을 내놓았던 바, 그것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살아 있는 동양학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서양학의 한 갈래일 따름이다.

거기에는 동양학 특유의 방법론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운동체가 그러하듯, 서양학에는 서양학을 재창조하는 동력이 있고, 동양학에는 동양학을 재창조하는 독특한 동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김용옥 씨의 몸철학에는 동양학 다운 자기 재창조의 동력과 방법론이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다만 동양학적 요소로 풍부해진 서양학적인 자기 재창조의 방법론만 확인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객체적 동양학과 주체적 동양학이 내놓을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객체적 동양학은 결국 서양 중심의 세계 무대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질적으로 개선하고 양적으로 풍부하게 함으로써,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보완적인 대안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기 문화를 나름대로 재창조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주체적 동양학은 자기 자리에서 세계 무대의 질서를 다시 구축하는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객체적 동양학과 주체적 동양학은 현실적인 세계 무대를 놓고 개혁과 혁명을 다투는 문화적 축으로 등장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배경에는 지금까지 진행된 서양 중심의 세계 질서가 인류의 삶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로 놓여 있다.

[ 동양학은 자신을 어떻게 재창조하는가 ]

그 렇다면 주체적 동양학은 어떤 혁명을 불러 일으킬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이제 동양학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차례다. 흔히 동양학이라 하면, 유학이나 도가사상 및 불교사상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동양학이라 하면,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학문과 사상을 가리키는 경향도 있다.

동양의 생활문화를 동양학의 테두리에 집어넣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동양학이라 하면 철학적 이론을 생각하게 된다. 즉 동양학은 동양철학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은 편견이다. 유학이나 도가사상이나 불교사상이 동양학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느 것도 동양학 자체일 수는 없다. 동양학이란 그런 사상들을 포괄하고 있는 전체인 것이다.

또 그런 사상들을 포괄할 수 있는 뿌리가 있고 그 뿌리로부터 동양학은 끊임없이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는 주체적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뿌리를 바탕으로 살펴볼 때에만, 동양학은 참으로 동양학다울 수 있다. 즉 유학과 도가사상 및 불교사상이 동양학답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들을 꿰뚫고 있는 뿌리부터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동양학에는 그들이 키워온 꿈과 과학과 믿음과 삶에 대한 사랑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다. 물론 거기에는 호화찬란한 이론과 깊이 있는 철학적 논리가 있으며, 전문가가 아니면 제대로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지적 유희도 적지 않다. 오늘날의 동양학에는 살아 있는 꿈이 없으며, 사람 중심의 과학은 흔적만 남아 있고, 믿음과 사랑은 거론조차 되지 않기 일쑤다. 이미 서양화해버린 거기에서 주체적 동양학의 참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공자와 맹자께서는 뭐라고 하셨는데, 주자와 정자는 그것을 이렇게 풀이했다”, “노자와 장자께서는 또 뭐라고 하셨는데, 왕필은 뭐라고 풀이했다”, “달마께서는 이런 전통을 남기셨는데, 육조 혜능 선사께서는 그 전통을 이렇게 이으셨다” 등에서 동양학의 바탕과 핵심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학과 노장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르다” “불교의 어떤 갈래는 동양사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 “융(C. Jung)은 동양학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꽁체(E. Conze)는 불교를 어떤 관점에서 이해했다” 등에서도 동양학의 핵심을 찾을 수 없다.

동양학의 핵심은 탐구자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동양학과 서양학을 굳이 나누고 그 특징을 찾아낸다면, 동양학이란 “대상을 분석함으로써 자신을 바꾸고, 바뀐 자신의 눈으로 다시 대상을 분석함으로써, 마침내 대상과 내가 발전적 하나로 되는 곳을 찾아가는 삶의 방법론”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오늘날의 동양학에서 이 어울림 찾기는 쉽지 않다. 학술을 내세우며 이론과 분석을 중시하는 객체적 동양학자들은, 대상에 대한 논리적 분석과 현대적(서양철학적) 해석이 마치 동양학의 정수인 여기면서, 동양학의 전제인 자기 혁명의 방법론과 그 실천을 가볍게 여긴다. 그리고 학술과 이론적 분석을 가볍게 여기는 이른바 ‘동양학 수행자’들은 이론적 체계를 떠나 공허함을 즐기고, 그들의 영향을 받는 대중들은 ‘신비의 동양학’을 찾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 두 갈래의 경향성들은 결코 동양학의 정수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어느 공자와 어느 맹자가 이론과 분석 및 학술에 매달려 실천을 팽개쳤으며, 어떤 노자와 어떤 장자가 우주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 공허함과 신비를 쫓아다녔던가? 또 그들의 어떤 계승자들이 그처럼 편향적인 삶을 살았던가?

동양학은 학문의 길이자 스스로를 ‘다시하는’ 수행의 길이다. 수행은 주체혁명을 지향하는 실천의 길이며, 학문은 주체혁명의 방법론과 그 삶의 방식을 탐구하는 길이다. 이 두 갈래는 결코 독자적일 수 없다. 그것은 동양학이란 수레를 받쳐주는 두 개의 바퀴다. 두 바퀴가 달린 이 수레 위에는, 수레를 타고 이상을 향해 앞으로 나가려는 주체적인 동양 문화가 타고 있다. 그렇기에 동양학은 사람 자체를 이상적인 세계로 이끌어들임으로써, 사람과 사람이 영위하는 대상을 모두 바꾸어버리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동양학은 두 바퀴로 끌고 가는 큰 수레이며, 수레 밖에서 수레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수레를 타고 앞으로 나감으로써 자아를 한 단계 높이는 ‘삶의 양식’이다. 즉 동양학은 단순한 이론이나 학문이 아니라 하나의 독특한 삶의 양식으로, 그 성격상 주체혁명보다는 객체혁명에 치중하는 근세 이후의 서양학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두 바퀴가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동양학이다. 이 두 가지가 통일되지 않는 한, 동양학은 영원히 절름거릴 것이며, 스스로를 재창조하지 못하고 나아가 현실 세계의 문제를 풀어내는 데 주체적으로 기여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삶을 근본적으로 진보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한 갈래는 동양학을 신비주의로 포장할 것이고, 다른 한 갈래는 그것을 사회적 인간관이나 지성사적 성과로 한정시킬 것이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동양 문화를 바라보는 서양 철학자들조차 자신의 학문이 동양학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데도 그런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

[ 동양학과 민족주의의 문제 ]

다 음으로 동양학은 동양학이기에 앞서 우리의 사상이어야 한다. 우리가 동양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동양학을 살펴보아야 한다. 서양 학문이나 중국학 및 인도학의 입장에서 동양학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한국학의 입장에서 동양학을 살펴보아야만 온전한 동양학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동양학이 중국과 인도 중심의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동양학이라 하면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입장도 하나의 편견이지만, 한국 사회의 경우 중국을 동양학의 뿌리로 여겨 중국학이 곧 동양학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실 객체적 동양학자인 김용옥씨도 예외는 아니다.

동양학은 하나의 범주로 이해되기도 하고 또 주체혁명의 방법론이란 측면에서 그런 공통성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도 다양한 입장이 있는 바, 우리는 우리 사상을 중심으로 동양학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즉 동양학의 넓은 테두리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입장, 곧 한국학의 입장에서 그것을 주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당위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의 세계 문제를 풀어가는 부분에서도 이런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의 세계 질서는 서양 중심의 세계 질서이며, 이 질서를 세우기 위해 서양 문화는 자기 이외의 모든 문화를 세계화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계 질서가 더 이상 자기 내부에서 마땅한 미래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 민족문제를 방기한 채 서양 문화 일변도로 진행한 탓이다. 그 결과 각 민족이 누리고 있었던 독특한 문화가, 아니 범위를 좁혀서 토인비(A. J. Toynbee)가 말한 스물 몇 개의 문화권이, 더 좁혀서 슈펭글러(O. Spengler)가 지적한 8개의 문화권이 세계화의 진행 과정에서 거의 배척되었고, 마침내 인류 사회는 자신을 보다 이상적으로 재창조할 문화적 가능성을 줄여 놓는 대신 위험성만 높여 놓았다.

그러므로 이제 각 민족 또는 각 문화권은 먼저 자신의 문화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재조직해야 한다. 이처럼 재조직된 문화와 생활양식을 가지고 세계라는 무대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 물론 자신을 재조직하는 일과 세계라는 무대에서 만나는 일은 현실적으로 동시에 진행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민족문제의 핵심 아닐까? 따라서 동양학이라는 공통된 입장을 바탕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독자성 위에 한국학을 세우고 탐구하며 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세계 무대의 당당한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

앞서 오늘날 한국학의 경우에도 동양학을 살펴보면서 지적했듯이 객체적 동양학이 주류가 되고 있다. 한국 문화가 다만 탐구의 대상으로만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문화적 피갈이가 많이 진행되었음을 알리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용옥씨는 한국학을 중요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의 전공이 중국학이어서 그렇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역사로부터 미래를’ ‘겨레로부터 세계를’ 생각하는 동양사상가라면, 그의 접근 방법과 문제 의식의 출발점은 우리 사상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또한 서양철학자의 학문적 사고방식과 동양학의 사고방식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이다. 이것이 세 번째로 그의 한복을 서글프게 바라보는 까닭이다.

[ 주체적 문화 부흥을 위해 ]

어쨌든 동양학이 다시 대중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동양학이 우리 사회의 문제, 나아가 인류의 문제를 풀어 가는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동양학 스스로가 자기 재창조력을 갖추어야 한다. 동양학을 지식의 창고에서 풀어내 삶의 터전으로 되돌려야 한다.

세계라는 무대를 독점적으로 이끌다 결국 근본적 문제에 부딪혀버린 서양학, 아니 유럽시대의 종언과 더불어 세계 무대의 평등한 한 축으로만 남았어야 할 서양 문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세워 임의대로 문화적 독단을 감행했던 무모함,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 문제라면, 동양학에 대한 접근에서도 한결 주체적인 관점이 거듭 요구된다 하겠다.

자신의 문화적 주체성을 상실하고 따라서 주체적인 미래 설계를 가지지 못한 채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뜻없는 유희에나 빠져 살 수밖에 없었으며, 서양 문화의 껍데기만 넘실대는 매체에나 만족해야 했던 상황에 김용옥씨와 같은 방대한 지적 능력을 가진 대중적 스타가 나타나자 문화적 피갈이에 의해,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문화적 이중성에 의해, 우리의 대중들이 그에게 관심을 쏟아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동양학에서 참다운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려 한다면, 이제 더 나아가 주체적 동양학을 재창조하는 혁명적 삶의 방식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며, 마침내 주체성을 가진 문화적 세력이 세계 무대를 독단의 무대에서 공존의 무대로 뒤빠꿀 것이다.

동양학에는 분명 그런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에 대한 탐구야말로 각 문화 주체들의 피할 수 없는 몫일 것이다. 아울러 이런 몫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먼저 주체적 동양학, 나아가 한국학적 동양학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들의 문화부흥을 진행해야 할 때다. 그렇기에 서양학자가 동양학을 넘어서는 것은 어쩌면 그 첫걸음일 수도 있다.

신동아 200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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