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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잘 하는 나라 아이를 왜 공부 못 하는 나라로 보냅니까”

재미 황용길 박사가 한국 학부모에 보내는 쓴소리

  • 황용길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교수·특수교육

“공부 잘 하는 나라 아이를 왜 공부 못 하는 나라로 보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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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의력도 기초가 있어야 생긴다

창의력의 결핍이 학교의 주입식 교육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창의성은 하늘에서 떨어지듯 저절로 나타나는 능력이 아니며 무릇 모든 종류의 배움과 마찬가지로 기초가 있어야 생겨나는 노력의 결과다.

또한 지식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주입식 교육은 기초지식의 배양을 극대화할 수 있는 좋은 교육방법이다. 진절머리나는 일제의 살인적 교육방법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탁월한 학습효과를 발휘하는 가장 근본적인 학습방법이라는 말이다. 한국 교육은 주입식 교육의 장점을 잘 이용하여 우리의 아이들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수준의 기초학력을 지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축적된 지식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사가 별로 없다는 데 한국교육의 문제가 있다. 미적분 공식을 줄줄이 꿰고 물리와 화학 문제를 떡 먹듯 풀어대면서도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이런 지식들이 쓰이는지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사 훈련에 커다란 구멍이 있으며 이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배양된 지식과 실제적 응용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능력 있는 교사들이 배출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주입식 교육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쌓인 지식을 어떻게, 왜, 그리고 언제 쓰는가를 가르치지 않는 점이 폐단이다.



그럼에도 현재 한국의 교육계는 주입식 교육을 마치 뱀 대하듯 하며 “오로지 창의력”을 외치고 있다. 못하는 분야만 우러르며 잘하는 분야를 천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자학이다. 주입식 교육과 창의력 교육은 별개의 학습이 아니다. 두 분야는 어울려 공존하며 서로를 돕는다. 기본지식이 풍부할수록 창의력 발달의 소지가 높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경쟁을 북돋워라

교육이 잘못돼서 경쟁에 처지고 주눅드는 아이들이 생긴다는 비난은 학교를 아예 없애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우수한 학력을 추구하지 않는 교육제도는 학교가 아니다. 탁아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어떤 교육제도에서든 경쟁에 처지는 아이들은 생긴다. 모두가 한결같이 일 등을 할 수는 없고, 모두 다 명문일류대에 합격할 수는 없다. 정해진 입학정원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의 가장 큰 책임은 우수한 인재를 될수록 많이 길러내는 일이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정녕 못 따라오는 아이들을 돌보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몫이다. 각자의 임무와 역할이 다르다는 말이다.

현재 한국의 경제개혁정책은 경쟁력 없는 기업체의 정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각 대학은 연봉제를 도입하고, 우수 교수를 스카우트하며 경쟁력 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기업끼리 겨누고, 대학끼리는 견주라고 하면서 어째서 아이들은 경쟁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현재 추진중인 교육개혁의 최종목적조차 국가경쟁력의 신장에 있지 않은가? 정당한 경쟁은 생존의 원동력이다. 경쟁을 없애자함은 인간성을 거부하고 발전을 포기하자는 얘기다.

3.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

그래도 미국의 공교육은 돌아간다. 선생님은 폭사하고, 아이들은 총살당하며, 성적은 전세계적으로 꼴찌를 다투어도 미국의 공립학교는 아직 건재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정리대상 제1호로 선정돼 수술을 받았으리라. 그 이유는 막강한 경제력에 바탕을 둔 미국의 사회구조에 있다. 학교가 죽을 쑤더라도 풍부한 취업 기회와 윤택한 사회보장정책이 교육의 실패를 보충한다는 말이다. 물론 좋은 직장은 일류대학 출신이 차지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전체적인 취업의 기회는 거의 모두에게 차례가 돌아갈 정도로 넘쳐난다. 여기서 생기는 경제적 여유가 교육의 실패를 메워 주는 것이다.

완전히 경쟁에 처진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보장제도의 안전망이 튼튼히 구축되어 있다. 저소득층에 지급되는 사회복지기금(welfare, 영세민 구호기금) 또는 SSI(supplementary social security inc ome, 사회보장추가기금)라 불리는 지원금은 한국의 기준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액수다. 정치와 경제가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하는 미국 사회, 그래서 교육이 제 역할을 못 해도 대중의 불만은 조절된다. 사회가 문제를 감당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학업성적이 극히 우수하거나 타력에 의지하지 않고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힘들고 저소득층에 대한 보호정책은 아직도 구호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처지면 죽는 사회, 하지만 구제 방도가 없다. 그래서 학교는 비난받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외국으로 떠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기본틀이 바뀌지 않고는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초중고교가 잘못해서 생긴 사회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학교가 변한다 해서 문제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고뇌를 풀어주는 역할이 바로 정치의 몫이다.

4. 정치부터 정신 차려라

한국 사회의 혼란과 민중의 힘겨운 삶은 초중고 교육의 잘못이 아니다. 부언하거니와, 학교의 목적과 역할은 지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있다. 학교가 만들어낸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몫이다.

한국 교육의 문제는 정치가 초래했다. 정치가 지리멸렬, 직장을 창출하지 못하고 학교가 만들어낸 사람들을 제대로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병의 원인은 무능력한 정치와 부패한 사회에 있으며 학교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같다.

그런데도 힘없는 학교와 교사들은 끝없는 질타 속에 목적 없는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병의 원인을 고치려 하지 않고, 병을 앓고 있는 환자만 다그치니 문제가 해결이 될 리 없다. 학교는 애꿎은 속죄양이며 정작 비난은 무능력한 정치인들에게로 보내야 한다. 그들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국민의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해주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모든 아이들을 다 만족스럽게 교육한 나라는 유사 이래 어디에도 없다. 어떠한 제도에서도 처지는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생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행한 현실이다. 그러나 경쟁에 뒤처지는 아이들을 추스리지 못하는 책임을 학교에 지워서는 안 된다. 학교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원이라고는 인력밖에 없는 나라, 학교가 엎어지면 우리를 그나마 지탱해주었던 마지막 끈마저 끊어진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으로 유학가 많이 보고 크게 배웠다는 교육지도자들과, 이들에게 둘러싸인 우리의 나랏님과 정치인들이 도리어 학교를 망쳐 나라를 쓰러뜨리고 있다.

한국 교육의 몰락은 1995년 김영삼 정부의 교육개혁안으로 그 신호가 올랐으며 그 뒤를 이은 김대중 현 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교실이 붕괴가 됐다. 섣부른 교육정책의 이념적 틀은 세계화 정권이 마련했고, 실제적 파괴행동은 국민의 정부가 행한 셈이다. 자유와 민주를 표방한 양김 정권에 의해 학교가 찢어지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래서 더욱 가슴 아프다.

우리에게는 인력만이 유일한 재산이다. 어떠한 형태의 교육정책도 전체 아동의 학력저하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 조기유학 전면개방을 포함하는 현재의 교육노선이 재고되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정신 차려야 한다.

5. 교육전문가도 정신 차려라

교사는 탄압자가 아니다. 대다수의 교사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명감을 지닌 고뇌하는 교육자들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학과내용은 쓸모 없는 지식이 아니다. 해부학의 지식을 기반으로 의학이 존재하듯 의미 없어 보이는 작은 지식들이 모여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한다. 학과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생각 없는 바보가 아니다. 밖으로부터의 유혹을 이겨가며 밤을 지새우는 가상한 아이들이다.

감히 묻는다. 한국의 교육지도자들은 무엇 때문에 미국과 영국, 브라질의 공립학교가 침몰한 이유를 간과하는가? 학과중심 지식교육을 멀리하면 학교가 무너지고 계급간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는 역사의 교훈을 왜 무시하는가? 계급을 무너뜨리면 또 다른 계급이 창조된다는 사실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정녕 기득권의 탄압이 있다면 오히려 학과지식을 더 습득하여 대항할 만한 힘을 아이들이 길러야 함을 왜 인식하지 않는가? 뚜렷한 교육붕괴의 징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전문가들은 여전히 막무가내다. 자신들의 과오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죄없는 교사들만 더 들볶고 있다. 좋은 교육방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교사들 때문에 일이 잘못됐다는 주장이다. 사회계층의 집단이기주의와 교육재정의 부족, 시설의 열악함도 정책실패의 이유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계가 지난 50년간 줄기차게 사용해온 상투적인 변명과 핑계다. 어쩌면 변명의 방법과 종류까지도 미국을 빼닮았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독선과 아집으로 뭉쳐 실패를 거듭하는 교육전문가 집단을 없애겠다고 미국연방정부는 1980년대 초 교육부의 폐쇄를 고려하기까지 했다. 혹덩어리(Blob)이라 불리는 이들의 전횡이 없어져야 비로소 공교육이 제 길을 간다는, 정권차원에서 고려된 특단의 정책이었다. 왜 한국은 미국의 실패를 반복하는가?

6. 부모도 정신을 차려라

학교가 엉망이라고 불평하는 한국의 부모들은 바로 자신들이 학교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인성교육은 가정의 몫이다. 부모가 가정에서 올바른 본을 보임으로써 아이들의 인성이 계발된다. 선생님 말씀 잘듣고, 공부 열심히 하며, 올바른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부모가 직접 행동으로 가르쳐야 아이들의 행동도 좋아지고, 학교도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부모들은 요구하고, 불평하며, 학교를 몰아세우고 있다. 이는 교육에의 참여가 아니라 참견이요 파괴다.

뒷전에서 촌지 제공하고 욕해가며 선생님들께 아이들 인성교육 잘 시키라고 떼쓰는 학부형들이다. 선생님들을 나쁜 인간으로 매도하면서 무슨 교육을 바라는가?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 아이들이 과연 무엇을 학교에서 배울 수 있을까?

교육은 학생과 교사와 부모가 모두 협조하고 서로의 책임을 다할 때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학생들은 자신을 소비자로 보지 말고 배우는 데 책임의식을 느껴야 하며, 교사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지식교육에 전력을 다하고, 부모는 가정교육에 충실함으로써 아이들의 인성을 책임져야 한다. 어린 아이를 조기유학 보낸다고 뛰어다닐 때가 아니다. 가정교육을 먼저 돌아보자.

신동아 200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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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길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교수·특수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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