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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르포|정자은행을 찾는 사람들

“의대생 OK, 곱슬머리는 안돼”

  • 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의대생 OK, 곱슬머리는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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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정자은행이 만든 계약서에 따르면 자기 정자를 내놓는 사람의 경우 ▲자신의 정자로 출생한 아이에 대해 법적으로나 그외 어떠한 관계에서도 자신의 자식임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정자를 제공받은 인물의 신분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법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신분도 엄격하게 비밀로 할 것을 서약해야 한다. 또한 자기 정자를 비배우자 인공수정용으로 내놓은 경우 그 정자를 자기 배우자의 임신을 위해 방출할 것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정자를 받는 부부는 태어난 아이가 법적으로 자신들의 아이임을 인정하고 부양의무를 부담할 것이며 상속권도 인정하겠다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 또한 인공수정으로 신체적·정신적 결함이 있는 아이가 태어날 위험성이 있으며 인공수정으로 출생한 아이의 신체적·정신적 결함에 대해서 병원과 정자은행 종사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인정한다는 대목도 눈에 띈다.

하지만 무엇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점은 친족으로부터 정자를 공여받아 인공수정하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의 여부다. 이런 논란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발생하는 문제인데 씨족의식이 강한 우리민족은 가능하면 ‘남의 씨’보다는 ‘우리 씨’로 임신하려는 성향이 많기 때문에 일어난다. 구체적으로는 남편의 형제로부터 정자를 제공받아 아기를 갖겠다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 대목에 대해서는 대한의학협회나 대한산부인과학회 등이 내놓은 윤리지침에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미즈메디병원은 가족구성원으로부터 정자를 공여받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같은 값이면 가족의 씨를 얻겠다는 인간적인 여망을 거절할 수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정자를 공여하는 사람과 정자를 받는 부부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 전체가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가족구성원간의 정자제공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시아주버니나 시동생의 정자로 아기를 가진 경우 ‘정신적 근친상간’이라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친척, 가족간에 비정상적인 감정이 생길 우려도 있다. 훗날 상속 등을 둘러싼 법적 논란이 제기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친족간 정자공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편에 있는 서울대 산부인과 문신용 교수는 “친족간의 정자공여는 비배우자 인공수정의 제1원칙인 익명성 보장에 위배된다”며 “친족간 정자공여는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국가차원의 통합관리 필요

현재 우리나라에는 정자은행의 설립이나 운영을 제어하는 아무런 법적 장치가 없다. 물론 대한의학협회가 이미 6년 전 ‘인공수태윤리에 관한 선언’을 제정, 발표했지만 아직까지도 인공수정이나 정자은행과 관련한 법률적인 보호장치가 마련되지 못한 실정이다.

공익적 정자은행의 설립도 미진한 실정. 그러므로 과거의 불미스러운 상황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공신력 있는 정부기관 혹은 국립대학병원 내에 법적 보호장치가 있는 정자은행을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본격적 정자은행의 효시격인 부산대정자은행의 박남철 교수는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악전고투중”이라며 “뇌사자 장기관리에 대해 정부가 관심을 보였듯이 정자은행의 통합관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미즈메디병원의 조정현 박사도 “선택의 폭도 좁고 보유하고 있는 정자의 수도 태부족인 상태에 안정적인 정자의 공급을 위해서는 국립혈액원과 같은 개념의 국립정자은행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자제공자가 부족할 경우 한 사람의 정자를 여러 쌍의 불임부부에게 제공하는데 따른 부작용도 나타날 수 있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성장해 서로 결혼할 경우 근친상간이라는 도덕적 문제는 물론, 유전학적으로 열성 인자가 발현되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한 사람이 10인 이상을 임신시키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그 준수 여부도 철저히 베일에 가려 있다. 정자은행을 운영하는 개개 은행은 정자공여자의 익명성을 보장해 준다는 조건으로 정자를 공여받기 때문에 또 다른 병원에 정자를 제공한다 해도 이를 막거나 감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대 의대 백제승 교수는 “이런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공공기관이 정자은행을 통합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업적인 정자은행이 크게 활성화되고 있는 서구에 비해 우리나라의 정자은행은 병원에 커다란 재정수입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경우 와세다대학이나 게이오대학 출신 변호사들의 정자가 120만엔에 팔리고 있으며 중국 상하이(上海)의 정자은행이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 정자를 기증해 달라는 광고를 띄우자 100여명이 정자를 기증하겠다고 몰려들었다는 뉴스는 먼 나라 얘기로 들린다.

정자은행을 찾는 사람들

미즈메디의 조정현 박사는 어느 불임부부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내놓았다. ‘스무살의 철없는 어린 나이에 지금의 신랑을 만났고 오로지 저만을 사랑해 주는 신랑과 6년의 열애 끝에 결혼에 성공, 꿈 같은 신혼생활을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그러나 더 이상 행복한 결혼이야기로 꾸며져 있지 않다.

이들 부부에게는 결혼 3개월 만에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졌다.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로 남편의 하반신이 완전 마비된 것. 2년여의 세월이 지나 남편이 정신적·신체적 고통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정상적인 부부처럼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가질 수는 없었다.

이들 부부는 담당 의사와 상담한 끝에 전기자극 충격요법으로 체외수정을 하기로 했다. 체외수정이기는 하지만 내 씨를 가지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남편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임신을 하려고 애쓰는 중에 남편은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척추에 이상이 생겼고 전기충격을 가할 경우 신체에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애착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정자은행에서 다른 남자의 정자를 이용해 아이를 갖기로 했다. 그래도 절반은 우리 부부의 피가 섞이는 셈이라며 애써 위안을 삼았다. 조박사는 이들이 보낸 편지를 받은 뒤 흔쾌히 자신이 보관중인 정자은행의 우수한 정자를 이용해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을 하기로 결심했고 현재 이 부부는 자신들만의 특별한 아이를 정성껏 키우고 있다.

정자은행을 찾는 사람들은 이처럼 절박한 심정에서 병원 문을 두드린다. 결코 사치나 허영의식이 개입할 수 없는 애절함이 있는 것이다. 조정현 박사는 “물론 정자은행을 찾는 사람들이 공개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들을 향해 보내는 의혹의 시선을 이제는 거둬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동아 200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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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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