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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참회의 이론적 배경이 된 국제신학위원회 보고서

가톨릭 2000년 史 초유의 大사건 교황의 참회

교황 참회의 이론적 배경이 된 국제신학위원회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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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교회의 신비

”교 회는 역사 속에 있지만 동시에 교회는 역사를 초월한다. 사람들은 ‘신앙의 눈을 가지고’서만 교회를 가시적인 실체 속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성스러운 삶을 운반하는 정신적 실체로서 볼 수 있다.”

교회의 두 가지 차원은 역사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지만 삼위일체적 삶에 참여하고 세례받은 자들의 일체감을 유발하는 영적 교섭 속에서 “인간적인 요소와 성스러운 요소로부터 기인하는 하나의 복잡한 실체”를 만들어낸다. 영적 교섭의 힘으로 교회는 자녀들의 행한 은혜, 공훈, 과실을 떠맡을 수 있는 인간사에서 절대적으로 유일한 주체로서 자신을 표현한다.

그런데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 말씀의 신비를 유추하는 데서도 기본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신성, 순결, 순수한 그리스도는 죄를 몰랐으나, 오직 세상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그의 품에 죄인을 받아들이는 교회는 신성함과 동시에 항상 정화할 필요가 있으며 끊임없이 참회와 일신의 길을 추구한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죄가 없다는 것을 교회의 탓으로 귀결시킬 수는 없다. 반대로 각자는 그 안에서 방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화해야 한다. “성직자를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죄라는 잡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라는 밀알과 함께 섞여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구제를 받은 죄인들을 거둬들일 뿐 아니라 여전히 신성함의 과정에 있다.”

바오로 6세는 이미 교회는 “품 속에 죄인을 안고 있지만 은총이라는 삶 이외에는 다른 삶이 없기 때문에 신성하다. … 이것이 교회가 고통받고 죄를 속죄하는 이유이며, 이로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선물을 통해 교회의 자녀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신비 속에서 거룩함과 나약함에 부닥치며, 끊임없이 구제받고, 아직도 항상 구원의 힘을 필요로 한다.



3.2 교회의 신성

교회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버린 그리스도에 의해 죄를 씻었고, 끊임없이 충만한 성령에 의해 신성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신성하다. “우리는 교회가 무결하게 신성하다고 믿는다.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교회를 그의 신부로 사랑하였고 교회를 위해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교회는 신성하게 되었으며, 성령의 선물로 채워졌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에서는 모두가 신성하다.” 이런 점에서 처음부터 신도들은 ‘성자’로 불린다.

그런데 ‘교회의 신성함과 교회에서의 신성함’은 구분될 수 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명에서 찾아지는 교회의 신성함은 생이 끝날 때까지 하느님 백성의 사명을 지속하는 것을 보장하며, 개인적인 신성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신도들을 돕는다. 신성함이 취하는 유형은 각자가 받는 사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사명과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주어지며 요구되는 것이다. 개인적 신성함은 항상 하느님과 다른 것들에게로 돌려지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모두의 선을 지향하는 ‘교회에서의’ 신성함이다.(중략)

3.3 계속적인 부활의 필요성

우리는 죄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 속에서 계속적인 부활과 지속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지구상의 교회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진정 신성함’으로 각인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게 “교회는 전체적으로 우리 죄를 사해 주기 때문에 흠이 나고 구겨져 있다. 그러나 고백을 통해 주름이 펴지고 흠이 깨끗이 사라진다. 교회는 고백으로 정화되기 위해 기도자 앞에 서 있으며, 인류가 지구상에 살아 있는 한 그럴 것이다”고 말하였다.(중략)

완전한 교회는 신자들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신 앞에 신앙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무한한 덕과 용서하는 포용력을 찬양한다.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유대 덕분에 시간과 공간을 떠나 세례받은 모든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 교섭으로 각자는 그 자신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영적인 것을 활발하게 주고받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식으로 각자의 신성함이 다른 사람들의 덕을 증진시키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죄 역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짐이 되고 저항에 노출되며, 이러한 점에서 교회를 접촉하게 되기 때문에 전적으로 개인에게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암부로스의 교부들은 “우리의 타락으로 교회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경계하자”고 촉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신성할지라도 … 참회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교회는 항상 죄많은 아들과 딸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3.4. 교회의 모성

교회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성령의 힘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자녀들의 죄를 책임진다는 신념은 ‘모성(母性)교회’ 사상 속에서 특히 잘 표현되었다. 바티칸 2세는 교회가 “설교와 세례를 통해 교회가 신도들에게 새롭고도 불멸의 삶을 낳게 하므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어머니가 된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통을 반영한 사상을 내세운다. 즉, “이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어머니(교회)는 마리아와 같다. 그녀는 아기를 낳았으며 처녀이다. 그녀에게서 당신이 태어났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낳고 따라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일원이 될 것이다”고 한다. 시프리안은 이를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할 수 없다”고 간결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을 따르면 교회는 한 신도에서 다른 신도로 지속적으로 성령이 교환되고 전달되는 환경이라 하겠다. 이러한 생동적인 전달 덕분에 세례받은 사람은 각자 동시에 교회의 자식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교회 속에서 신성한 삶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새로운 자식들을 낳는데 협력한 신앙과 사랑에 의해 모성교회가 된다. 그의 신성함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가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모성교회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례받은 사람은 그의 마음 속에서 교회로부터 떨어졌다고 할 때라도 죄로 인하여 교회의 자식임을 떨치지 못한다. 그는 항상 은총의 샘물로 되돌아올 수 있고 그의 죄가 모성교회 공동체 전체에 지우는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 바꾸어 진정한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자녀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 상처받을 수밖에 없지만, 언제라도 자녀의 죄가 만든 짐을 스스로 책임진다고 할만큼 지속적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중략)

[ 4.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 ]

과거의 잘못에 대한 규정은 무엇보다 역사적 판단이 올바르게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기초로 신학적 평가의 토대가 마련된다.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변증론과 역사적으로 공인되지 않은 힐난은 모두 피해야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종교재판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평가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교학권은 당시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반적 윤리를 수행할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론에 의해 조종되었던 과거의 형식들에 의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흔히 침착하고 객관적인 식별을 방해하는 격렬한 감정에 의해 처리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윤리의 판단에 맡기지 않고 역사가들에게 먼저 묻는 이유이다. 역사가에게 묻는 것은 그것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날 수도 있지만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사건과 풍습, 당시의 사고방식 등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재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4.1 역사의 해석

역사적 지식의 관점에서 과거를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한 조건들은 무엇인가? 이것들을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해석하는 주제와 해석되는 대상 사이에 관계의 복잡성을 고려하여야 한다. 과거의 사건이나 말들은 결국 ‘지나간 것’이다. 그것을 현재의 구조 속으로 완전하게 끌어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실질적인 비중을 가지고 있으며 복잡하다. 따라서 그것들이 현재 우리 시대에 보여준 내용과 도전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의 사고방식이나 여건, 생활방식 등 가능한 모든 정보를 이용하여 역사적 비판적 조사를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둘째, 과거와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끈이나 의사소통이 없는 상태에서 해석자와 해석되는 것 간의 공통성을 인지하여야 한다. 이 의사소통의 끈은 어제든 오늘이든 모든 인류는 복잡한 역사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언어의 중재가 필요하다. 인간은 역사속에 있다. 해석자와 해석되는 대상간 연대의식을 밝히는 것은 과거가 남겨 놓은 여러 가지 형태의 증거를 통해서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연구 동기가 된 문제들과 발견된 대답의 효력,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의 정황, 해당 언어가 사용되는 공동체를 해석하는 것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목적에서 해석 과정에서 실질적 효력을 측정하고 적정화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이에 대한 사전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

끝으로, 알고 평가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해석자와 해석되는 과거의 대상간에 삼투작용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바로 여기서 이해행위가 적절하게 이루어진다. 과거는 노출 잠재성과 현재를 개조하려는 자극 속에서 파악되며, 기억은 새로운 미래를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된다. (중략)

4.2 역사적 조사와 신학적 평가

만약 이러한 작업들이 모든 해석적 행위 속에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내부에서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이 통합되는 해석과정의 일 부분이 되어야 한다. 이는 우선적으로 이러한 유형의 해석에서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구별과 이질성의 요소에 최대한 주의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누군가 과거의 잘못 가능성을 판단하려고 할 때, 역사적 기간이 다르고, 교회가 행동했던 사회 및 문화적 시기가 달랐으며, 한 사회와 한 시대에 적절했던 패러다임과 판단으로 다른 시대를 평가에 한다면 잘못될 수 있고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개인, 기관, 그리고 다른 각각의 권능체들은 생각하는 방식과 조건이 다르다. 따라서 과거의 말과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고 교회가 용서를 구하는 방법과 수준은 다양할 것이다. 모든 것이 아주 상이한 역사·지리적 배경에서 일어났기에 일반론을 피해야 한다. 어떤 진술을 한다면 그것은 당시의 맥락에서 적절한 주제여야 한다.

두번째,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간의 상관관계에서 신앙을 해석하는 데에 과거와 현재간의 연결에는 현재의 이해관계와 공통성만이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정신에 의한 통합 행위와 신앙심 많은 자들의 영적 교류 원리에도 기반을 두고 있다. 교회는 모든 시기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어느 면에서 유일한 주체로서 다양한 상태와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에 부합하도록 명받은 초자연적인 모습으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하나의 성령 속에서의 영적 교류는 오늘 세례받은 자들이 어제 세례받은 자들과 연결감을 느끼는 힘으로써, 통시적인 측면에서 ‘현자’들은 영적 교류를 확립해 나간다. 그들은 그들의 공적으로 은혜를 입으며 신성하다고 입증됨으로써 보호받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죄의 부담을 질 의무를 느낀다.

하느님 백성의 영적 교섭의 뛰어난 기반 덕에 신자들은 교회의 과거에 대한 해석을 특별히 중요하게 인식한다. 해석 과정에서 산출된 과거와의 만남은 현재에 특별한 가치를 지니며, 미리 추정할 수 없을 만큼 ‘수행적’ 효능을 가진다. 물론 해석적 지평과 교회 사이의 강력한 일치성이 신학적 비전을 변명적 혹은 자기옹호적 독본으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과거의 사건들과 진술을 이해하고 오늘날에 맞게 해석을 바로잡아 평가하려는 해석적 과정이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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