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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⑩

국보 미륵반가상이 선덕여왕 닮은 사연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국보 미륵반가상이 선덕여왕 닮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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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보낸 불상이 이며 갈야 진사가 바로 광륭사라는 것이다. 광륭사는 일본에 하생한 미륵보살이라는 성덕태자(聖德太子, 573∼647년)가 추고 천왕 11년(603), 즉 진평왕 25년 10월에 대부(大夫) 진하승(秦河勝 혹은 秦川勝)에게 자신이 봉안하고 있던 불상을 하사하여 세운 절이라 한다.

처음에는 절이 세워진 장소의 이름을 따서 봉강사(蜂岡寺)라고도 하고, 그곳 지방명을 따서 갈야사(葛野寺)라고도 부르며, 혹은 진씨가 세운 절이라 하여 진사(秦寺)라고도 하였던 모양이다. 본격적인 절의 면모를 갖추는 것은 진평왕 43년(621)에 성덕태자가 49세로 요절하자 그의 명복을 비는 추복 사찰로 삼으면서부터라고 한다. 아마 이때부터 광륭사로 불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절을 세운 진하승은 신라계 이주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추고 천황 31년(623) 신라에서 성덕태자의 명복을 비는 조문사절을 파견하면서 이 을 만들어 보내자, 이를 신라계 진씨가 세운 성덕태자 추복사찰인 광륭사에 봉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주장이다. 더구나 목조반가상의 재질이 봉화군 춘양면(春陽面)에서 나오는 적송(赤松, 紅松이라고도 함), 즉 춘양목이라는 것이다. 춘양면은 이 있는 물야면(物野面)과 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곳이다.

따라서 경주에서 조성되었을 과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서 만들어졌을 을 연결시켜 생각한다면, 이 이 어째서 춘양목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특유의 적송으로 만들어졌으며 과 쌍둥이 같은가에 대한 해답이 절로 나오게 된다.



다만 은 의 외형만 충실하게 모방(模倣)하려 했으므로 생동감이 결여돼 정지된 느낌이 전신에서 느껴진다. 에서처럼 생략과 함축 및 정밀한 사생으로 추상미와 사실미를 이상적으로 조합해 피가 돌고 맥박이 뛰며 피부에 온기가 느껴지듯 표현했던 예술 정신이 무엇이었는지는 탐구하려 하지 않고 무의미한 형사(形似; 외형만 비슷하게 따라함)에만 매달린 결과다.

그래서 반가한 오른쪽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옷주름도 바람이 잔 듯 고요히 멈춰 있어 답답하고, 힘이 들어간 듯 치켜 올라간 오른쪽 발가락이나 눌러댄 왼쪽 손가락 표현도 그 의미를 상실하여 내밀한 열락(悅樂)의 표출이라는 짜릿한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극도로 양식화한 삼산관 역시 연꽃잎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고 4분 원형의 굴곡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했던 의 최후선을 넘어서서, 관틀을 높이면서 굴곡을 약화시킴으로써 연화 보관의 추상적 아름다움이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거기다 보관 아래에 머리칼 표현을 더함으로써 보관과 머리칼을 혼연일체시키던 신비감마저 없애버렸다. 사실성도 추상성도 일시에 사라지게 한 것이다. 치마 표현에서도 반가한 무릎 아래를 바람결에 올라 떠오르듯 살짝 뒤집혀 받쳐주던 무릎 받침 부분이 무겁게 매달리게 되니 무릎과 상관없는 군더더기처럼 보인다.

왼쪽 허벅지 아래 자리 밑에서 나온 띠 장식은 이 상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부분인데, 재질이 일본에서 흔히 불상 조각 재료로 많이 쓰는 녹나무 즉 장목(樟木)이라 하니 일본에서 뒷날 첨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2단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좌 역시 비자나무(榧木)로 만들어져 있어 일본에서 후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은 을 그대로 형사한 모작이 확실하므로, 이 미륵상이 진평왕 44년(622)경에 일본에 출현했던 미륵보살, 즉 성덕태자의 서거를 애도하기 위해 만들어 보냈을 가능성은 양식사적으로 충분히 인정된다고 하겠다. 이상적인 신라의 미륵선화 형상인 을 본체로 삼아 무수한 분신인 미륵반가상을 만들어 퍼뜨려 나가는 분신불 전파 현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

고구려 평원왕 31년(589), 즉 수문제 개황(開皇) 9년에 수문제는 남조 진(陳)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동진(東晋)의 남천(南遷, 317년)으로 남북이 갈린 지 272년 만에 중국대륙을 다시 통일한다.

사실 고구려는 중국의 자체 분열과 상호 견제에 힘입어 국세를 키워나가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할 수 있었다. 남북조와의 등거리 외교로 남북조를 견제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국세를 신장하여 동방의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동아시아의 패권은 남북조와 고구려를 각기 한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수나라의 중국 통일로 삼각 대권 구도에서 한 꼭지점이 무너진 것이다. 다른 한 꼭지점이던 고구려가 당장 위기감에 휩싸일 것은 당연한 이치다.

특히 고구려가 두려워한 것은 이제 중국으로부터 수륙 양면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에는 육군이면 육군, 수군이면 수군의 공격 한 가지에만 대비하면 되었다. 육지를 국경으로 맞대고 있는 북조는 수군이 없었고, 수군 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남조와는 북조가 육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 고구려는 중국의 침략을 수륙 양동 작전으로 언제든지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수나라가 강력한 기마군단을 앞세워 남조를 멸망시키고 방대한 수군 세력을 흡수해 들였다. 과거에는 분리돼 고구려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던 수륙 양군이 이제는 통합돼 절대적인 위협으로 다가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평원왕은 진나라 멸망 소식을 접하자 바로 전비강화에 몰두한다.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성곽을 수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문제도 이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요수(遼水)가 넓다 한들 장강(長江, 양자강)보다 넓겠으며 고구려 사람이 많다 한들 진나라보다 더하겠는가”하며 고구려를 위협하고, 장군 한 사람만 보내도 쉽게 멸망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평원왕은 군비 강화를 독려하던 중 병으로 돌아가고 그 장자인 영양왕이 등극한다. 영양왕은 평원왕 7년(565)에 태자로 책봉돼 25년간 태자로 있으면서 국정 운영을 눈여겨보았던 패기 넘치는 신왕이었기에 오히려 군비강화를 더욱 신속하게 진행했다. 본래 생김새가 시원스러웠으며 세상을 바로 다스려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던,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영양왕은 8년 동안 전쟁준비를 한 다음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영양왕 9년(598) 2월에 친히 말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략한다. 이 해 정월에 수문제가 강남의 여러 주에 조서를 내려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세 길 이상의 배를 모두 징발하여 관부에 소속시키는 등 수군 강화정책을 편 직후의 일이었다. 수군 강화책이 바로 수륙 양면의 고구려 침략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짐작한 영양왕은 출기불의로 기습함으로써 수나라가 미처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채 전단을 열게 만든 것이다.

이에 272년 만에 천하통일을 이룬 절대군주의 체면을 크게 손상당한 수문제는 대로하여 당장 막내인 제5황자 한왕(漢王) 양(諒)을 행군원수(行君元帥)로 삼아 수륙 30만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한다. 분주하게 준비하였지만 6월에 가서야 침공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영양왕은 이런 침공 시기를 계산에 넣고 2월에 요서를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영양왕은 6월부터는 장마철이 돼 요수가 범람하므로 진흙밭이 인마의 발목을 묶고 뒤이어 북상하는 태풍은 서해 바다에서 전선을 삼켜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연 그의 계산은 맞아 떨어졌다. 20여만 군사를 이끌고 만리장성 동쪽 끝인 임유관(臨關)을 나선 한왕 양은 장마비 속에 제대로 행군도 하지 못하고 군량미도 운반되지 않아 갖은 고생을 한다. 더구나 식수 불량으로 전 군이 전염병에 걸리는데 겨우 요서에 도착한 그마저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런데다 남조 진나라 수군대장 출신으로 수군총관(水軍總管)이 되어 강남 수군 선단을 이끌고 산동반도 동래(東萊)항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쳐들어가던 주라후(周羅, 542∼605년)의 선단이 태풍을 만나 서해바다 속에 거의 수장되고 만다. 이 소식을 접한 한왕 양은 할 수 없이 9월에 아무 소득 없이 군사와 군비만 잃은 채 회군하고 말았다.

고구려 영양왕은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30만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것이다. 이때 30만 군사 중에서 죽은 자가 10명 중 8∼9명에 이르렀다 한다. 뿐만 아니라 강남 수군의 주력부대를 모두 수장해 당분간은 바다 걱정을 덜게 된 것은 더욱 큰 수확이었다. 이렇게 수나라의 기선을 꺾어 놓은 영양왕은 일방 사죄사를 보내 수문제의 체면을 살려주는 외교적인 전략도 함께 구사한다.

간담이 서늘해진 수문제는 못이기는 척하고 고구려와 관계 회복을 허락하여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한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수양제(569∼618년)(도판 11)가 영양왕 18년(604)에 제위에 오르면서 사태는 일변하였다.

그는 형인 황태자 용(勇)을 모함하여 폐위시키고 자신이 태자 자리를 차지한 다음 부황이 병들어 폐태자를 불러들이려 하자 부형을 함께 독살하고 제위에 오른 음흉한 인물이다.

그런 그였기에 제위에 오른 다음 고구려 정복의 꿈을 버리지 않고 그 준비를 꾸준히 하였다. 우선 강남의 물화와 병력을 북쪽으로 수송하기 위해 강도(江都, 남경)에서부터 낙양에 이르는 대운하인 통제거(通濟渠)를 건설한다. 그리고 즉위 후 4년 만인 대업(大業) 3년(607), 즉 영양왕 18년 4월에는 황하 물줄기가 북쪽으로 휘도는 만리장성 밖의 유림군(楡林郡)을 순수하며 내몽고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동돌궐왕 계민(啓民) 칸(可汗)을 찾아가 회유하여 고구려와 관계를 끊게 한다.

이미 종실녀(宗室女) 의성(義城)공주를 계민칸에게 출가시켜 그를 귀순하게 하고서도 못미더웠던지 황후와 함께 가서 계민칸과 의성공주를 함께 만나보고 이들 부부에게 선물을 1만2000 뭉치나 전해준다. 또 동돌궐 추장 3500인에게는 선물을 20만 뭉치나 따로 내려준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장정 100여만명을 동원해 유림에서부터 자하(紫河)에 이르는 수백 리 장성을 열흘 만에 쌓도록 한다. 이때 동원된 장정들은 10명에 5∼6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사인 황문시랑 배구(裵矩, 547∼627년)의 계책에 따라 계민칸에게 와 있던 고구려 사신에게 이렇게 엄포를 놓아 보낸다.

“돌아가 너의 왕에게 마땅히 일찍 와서 조현(朝見; 신하가 임금을 찾아 뵘)하라고 말해라. 그러지 않으면 나와 계민이 너의 나라를 순수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수양제는 동도(東都) 낙양으로 돌아온 다음 그 다음 해인 대업 4년(608) 4월에 하북 지방의 남녀 100여만명을 동원하여 낙양에서 탁군(郡, 현재 북경)까지 이르는 대운하인 영제거(永濟渠)를 건설한다. 통제거와 영제거를 연결하면 수도 장안과 동도 낙양, 남도 건강, 북도 탁군이 모두 물길로 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의 물화와 병사들이 통제거와 영제거 물길을 타고 대량으로 탁군까지 운반돼 쌓이게 되었다.

뒤이어 대업 6년(610) 2월에는 유구를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7000여명을 포로로 잡아와서 권위를 자랑한다. 강남 수군 세력을 과시한 것이다. 3월에 양제는 남도인 강도(江都)로 내려가서 강도 태수의 지위를 장안의 경조윤(京兆尹)과 같은 급으로 올려놓아 강도의 사기를 복돋운다. 드디어 대업 7년(611) 2월에 양제는 강도의 양자진(揚子津)에서 백관을 모아놓고 대연회를 베풀며 등급에 따라 많은 하사품을 내리면서 고구려 정벌 의지를 문무백관에게 암시한다.

이에 강남 해상세력과 연결돼 있던 백제는 발빠르게 이런 눈치를 채고 사신 국지모(國智牟)를 보내 고구려 정벌에 협력할 것을 알리고 군기(軍期)를 정하자고 청한다. 기분이 좋아진 양제는 백제 사신에게 많은 상품을 보내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 무왕과 상의하게 한다.

의기양양한 수양제는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용선(龍船)을 타고 강도를 출발하여 통제거와 영제거를 거쳐 탁군에 도착한다. 거기서 고구려 정벌을 천하에 포고하고 징병령을 내린다.

[ 살수대첩 ]

‘수서’ 권74 원홍사전(元弘嗣傳)에 의하면 수양제는 즉위 초부터 고구려 정벌에 뜻이 있어 원홍사를 동해 해구(海口)로 보내 배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 여러 주에서 징발돼 온 부역 장정들이 관리들의 독촉으로 매를 맞아가며 쉴새없이 일하였는데, 밤낮으로 물속에서 일하므로 허리 아래에 구더기가 생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죽는 사람이 열에 3∼4명은 되었다 한다. 물론 여기에 동원된 장정들은 배 만드는 데 익숙한 강남지역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81 수양제 기(紀)에서는 이때 만든 배가 300척이었다 한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수양제는 이 해 겨울 탁군에서 대회를 열고 강도 출신인 효위(驍衛) 대장군 내호아(來護兒, ?∼618년)를 수군 총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대업 8년(612) 즉 영양왕 23년 정월에 대군이 탁군에 집결하자 병부상서 단문진(段文振)을 좌후위(左侯衛) 대장군으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맹장들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육군을 통솔하게 하고 여러 길로 나누어 고구려로 진격해 들어가게 하니, 동원된 군대의 총수가 113만3800인으로 200만 대군이라 일컬었다. 군량미를 운송하는 사람의 숫자는 이의 배에 이르렀다. 이들이 출발하는데 그 늘어선 길이가 960리에 뻗어 있었다.

2월에 양제가 요수 가에 당도했으나 고구려 군의 저항에 부딪혀 건너지 못하고 맥철장(麥鐵杖) 등 용장이 전사한다.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가 부교(浮橋)를 완성하여 겨우 요하를 건너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1만명을 죽였지만, 요동성을 비롯한 여러 성은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초조한 양제는 요동성 서쪽 몇리 떨어진 곳에 육합성(六合城)을 쌓고 들어가 머물면서 독전한다.

한편 동래를 떠난 내호아의 수군은 전선 수백 척이 수백 리 바다를 뒤덮으며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가 평양 60리 밖에서 아군과 마주쳐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내호아는 승승장구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쳐들어가려 하니 부총관 주법상(周法尙, 556∼614년)이 말리며 여러 군사가 이르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하였다. 내호아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정병 수만명을 가려뽑아 곧바로 성 아래로 진격해 들어갔다.

아군 대장군 왕제(王弟) 건무(建武, 영류왕)는 나성(羅城) 안 빈절에 복병을 숨겨두고 있다가 내보내 내호아 군대와 싸우다가 거짓 패한 척하고 달아나게 하였다. 내호아는 이를 쫓아 성안으로 들어와서 병사들을 풀어놓고 노략질하게 하니 다시 대오를 갖출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복병이 일어나자 내호아는 대패하여 겨우 몸만 빼 달아나매 사졸로 돌아간 자는 수천명에 불과하였었다. 아군은 선단이 있는 곳까지 추격해 들어갔으나 주법상이 군진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으므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에 내호아는 군병을 이끌고 바닷가로 물러나 감히 다시 싸울 생각을 못하였다.

한편 좌익위(左翊衛) 대장군 우문술(宇文述)과 우익위 대장군 우중문(于仲文) 등은 각각 여러 길로 나누어 진격해 오면서 굳게 지키는 성들은 그대로 방치한 채 빠른 속도로 압록강 서쪽 기슭에 모였다. 장마와 태풍이 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평양을 함락하려는 전략이었다. 남겨 놓은 성들은 양제가 거느리고 있는 대군이 차츰 함락하거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포위하고 있으면 자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속한 군사 이동은 가벼운 차림일 때 가능하다. 그런데 고구려가 청야(淸野; 식량이나 생활도구 및 거처를 모두 없애서 들을 텅 비게 하는 것) 전술을 펴서 고구려 영토 내에서는 전혀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수 천리를 속보로 이동하는 수나라 군사들에게 제몫의 군장과 취사도구 및 식량을 각각 짊어지게 하니 사람마다 3가마니 무게를 지고 행군해야 했다. 이에 병사들은 이를 길가에 버리게 되었고 이를 엄금하는 군령이 내려지자 땅을 파서 묻고 행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압록 강변에 30만 군사가 도착하기는 하였으나 당장 군량이 떨어져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때 영양왕은 대신 을지문덕(乙支文德)을 그 병영으로 보내 거짓 항복하고 허실(虛實)을 탐지해 오게 한다. 그런데 우중문은 수양제로부터 만약 국왕이나 을지문덕이 나타나기만 하면 잡아오라는 밀지를 받고 있었다. 우중문이 잡으려 하니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로 와 있으면서 굳이 말리므로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놓아 보냈다.

우중문은 곧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다시 할 말이 있으니 왔다 가라 했으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가버렸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을 놓아 보내고 속이 편안치 않았는데 우문술이 군량이 다해가니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이에 우중문이 정예병을 선발하여 을지문덕을 쫓아가면 공을 세울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자 우문술이 이를 말린다.

우중문이 화를 내며 “장군은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작은 도적 하나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무슨 얼굴로 황제를 뵙겠는가. 군중의 일은 한 사람이 결정해야 하는데 각자가 마음이 다르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양제가 우중문이 계책이 있다 하여 제군으로 하여금 우중문의 절도를 받게 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다. 이에 할 수 없이 우문술 등 여러 장수가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문덕은 우문술 군대가 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일부러 피곤하게 하려고 매번 싸우다가 달아나니 우문술 하루에 7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이기는 것만 믿고 바짝 따라가서 살수(薩水,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 산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여 우문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돌이키면 마땅히 왕을 받들고 행재소에 나아가 황제를 조현하겠다 한다. 이때 을지문덕이 다음과 같은 시를 우문술에게 보냈다 한다.

‘신통한 계책은 천문(天文)을 꿰뚫었고, 오묘한 계산은 지리(地理)를 다 알았네. 싸워 이겨서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할 줄 알고 원컨대 그쳐주기를.(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폐한 것을 보고 다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쉬 깨뜨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드디어 그 거짓 항복에 속는 척하고 군대를 돌이켰다. 그러나 우문술 등은 고구려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진(方陣)을 짜고 행군하였다. 이에 아군은 사면에서 치고 빠지니 우문술 등은 싸우면서 행군하여 7월에야 살수에 이르렀다.

군사가 반쯤 건넜을 때 아군이 뒤에서 후군을 공격하자 우둔위(右屯衛) 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여러 군사가 함께 무너지는데 어찌 할 수가 없다. 이때 살수를 상류에서 막았다 터뜨렸다 한다. 장수와 군사들이 달아나 돌아오는데 하루 낮 하루 밤사이 450리를 달려서 압록강에 이르렀다. 수군 총관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배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수에 도착했을 때 30만5000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겨우 2700명뿐이었다. 자재와 양식 기계는 수 만으로 헤아렸는데 모두 잃어버렸으니 이런 처절한 참패가 있을 수 없었다. 이에 양제는 대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가지고 회군한다.

이때 백제 무왕은 국지모를 보내 수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고 군기(軍期)를 받아오지만 사실 뒤로는 고구려와 내통하여 수나라 기밀을 고구려에 전해주었다. 또 수나라 군대가 요수를 건널 때도 군대를 고구려 국경에 보내 수나라를 돕는 척 소문만 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진평왕은 고구려가 전력을 다해 수군을 막는 동안 고구려 남쪽 땅 500여리를 쳐서 빼앗았다.

[ 고구려 후기 고분 벽화 ]

수 양제의 대규모 침공을 막아낸 대수전쟁(612∼614년)의 승리는 고구려 문화에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듯하다. 이것은 고분 벽화에서 나타나는 극적인 변화에서 추측할 수 있다.

동수묘 이래 고구려 분묘 내의 벽화 내용은 총주(塚主)의 생전 생활을 사후(死後) 세계로 연장시키려는 의도가 작용, 총주의 생전 모습과 그의 생활 환경이 재현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후기에 이르면 다만 방위를 맡아 천장이나 벽면의 한 부분에 나타나기도 하던 사신(四神; 靑龍, 白虎, 玄武, 朱雀)이 벽화의 주제가 되어 주벽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묘실(墓室)도 상자 모양의 단실(單室)로 변하게 되고, 축석으로 벽면을 구축하던 종래의 석실 구축 방법도 1매의 곱게 물갈이한 화강암 판석으로 대치하는, 전혀 새로운 묘실 구축 방법이 이와 함께 등장한다.

따라서 이제는 벽면에 곧바로 사신도만 그리는 동수묘적인 벽화 기법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법도 크게 발전하여 채색은 화려하고 깊이 있고, 필선은 더욱 활기가 넘치면서 세련되고 회화적인 공간 감각이 고려된다. 산이나 나무, 구름 등 배경화도 이제는 문양적인 유치한 단계를 벗어나서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다.

이와 같이 갑작스러운 변화 현상을 종래에는 사신도가 음양오행설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여 도교에 연관시켜 생각하려고만 하였다. 이는 단순히 당(唐) 고조(高祖)가 도교(道敎)를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전해주었다는 ‘삼국사기’ 기록(624년)과 보덕(普德)화상이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박해하므로 고구려를 떠나 백제로 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한 생각이었다. 비록 도교의 영향이 아무리 강력했다 하더라도 몇백년 지속된 전통적인 분묘 벽화의 내용을 갑자기 일신시킬 수 있겠는가?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몇가지 각도에서 검토가 있어야 한다. 그 첫째가 이 벽화 고분의 주인공들이 종래의 고분벽화 주인공들과 문화 기반이 다른 세력들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를 만든 시기에 있어서 새로운 문화 담당 계층의 급작스러운 출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사료(史料)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획기적인 지배층의 교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 분포가 평양과 구도(舊都)인 통구(通溝) 지방에 골고루 나뉘어 있으니 이런 가설은 성립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새로운 문화 담당 계층의 출현에 의한 문화의 일변 문제는 대수전쟁의 승리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많은 포로와 노획물을 획득했으므로 이들의 사역에 의한 수 문화(隋 文化)의 직접적인 영향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만5000 군대 중에 요동까지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이었고, 수많은 군비와 기계를 모두 잃었다고 하였으며, 전쟁 이후 10여 년만에 당 고조(高祖)의 요청에 의하여 송환된 포로만도 1만여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고구려에 포로로 잡힌 군사가 십수만을 헤아린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가 이 전쟁을 통해서 남북조의 찬란한 문화를 아우른 고도의 수 문화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급격한 벽화 분묘 양식의 변화는 수 문화의 영향으로 보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특히 화려한 채색이나 요철(凹凸)의 입체감 같은 것은 남북조 시대에 불화(佛畵)의 영향으로 장승요(張僧繇) 등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발달한 회화 기법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묘사나 극도로 세련된 힘찬 필선 따위는 고개지(顧愷之)·육탐미(陸探微)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중국 전통 화법이었다. 회화적인 구도감은 이미 남제(南齊) 사혁(謝赫)이 화육법(畵六法)에서 경영위치로 지적한 바 있었다. 그러니 이러한 요소들이 후기 고구려 벽화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시 수에서는 서역계 돌궐족 출신인 염비(閻毗, 564∼613년)와 그 아들 입덕(立德, ?∼656년)·입본(立本, ?∼673년) 3부자가 일세를 대표하는 명화가로 크게 활약하고 있었다. 그 염비가 바로 수양제의 측근 내승(內丞)으로 요동까지 양제를 호종해 곁에서 숙위(宿衛)하면서 맹활약하다가 회군 도중 하북의 고양(高陽)에서 50세로 갑자기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그림 기법이 포로가 된 염비 휘하의 화공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고구려에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서(江西) 우현리(遇賢里) 대묘(大墓)의 (도판 12)에서처럼 섬세하고 활력이 넘치며 깊이 있는 채색이 마치 수나 당초(唐初)의 사신도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통구 사신총(四神塚)처럼 화려한 채색과 복잡한 장식 구도가 육조식(六朝式) 사신도 기법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천장 층급부에 당초무늬·날아가는 신선·연꽃·산줄기·상서로운 새·용 등을 장식했는데, 활달한 필치와 입체감 있는 채색, 섬세하고 화려한 묘사법은 중기의 고졸(古拙)한 기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회화적이다.

특히 진파리(眞坡里) 제1호분은 네벽에 구름과 꽃과 나무 등을 그리고 그 중앙에 사신도를 그렸는데, 바람에 날리는 구름과 꽃·나무 등에서 유연한 율동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런 기법이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 벽화에 연결되고 있음을 당시 고구려 문화의 주변 전파 양상으로 보아야 할지, 백제 문화의 해양적 선진성으로 보아야 할지 아직 선뜻 판단하기 어렵다.

산경문전(山景文塼; 산 경치를 문양장식으로 꾸민 벽돌)을 비롯한 기와와 벽돌 종류의 장식문양이 고도의 회화성을 지니되, 이것이 고구려적인 회화 기법과는 상이한 양상을 띠는 것은 백제 문화의 독자성 내지 해양적 선진성으로 보는 쪽이 더욱 타당할지 모르겠다.

다만 고구려 중기 벽화 고분의 영향이 뚜렷한 순흥(順興) 어숙묘(於宿墓)의 발견(1971년)은 고구려 문화의 신라 전파를 확신케 하는데, 이것이 순흥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죽령로(竹嶺路)가 당시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문화 통로였음을 재확인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신동아 200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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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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