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국보 미륵반가상이 선덕여왕 닮은 사연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입력2006-11-21 13:4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살아 숨쉬는 반가사유상 ]

    모든 예술 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 조형예술, 즉 미술 분야에 있어서 생동감(生動感)은 그것이 있거나 없는 데 따라 그 성공 여부가 결정지어진다. 그래서 예부터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할 때 기준이 되는 6가지 법칙을 거론하면서 ‘기운(氣韻)이 살아 움직여야 한다(氣韻生動)’는 것을 첫째 항목으로 꼽아왔다. 이처럼 평면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림에서도 생동감을 중요시하는데, 입체성을 두루 갖춘 조각에서는 새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조각 중에서도 예배자의 공양을 받고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는 일을 담당해야 할 신상(神像)조각은 이런 가치평가 기준이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는 과거에 수많은 인격(人格) 신상을 만들어낸 그리스와 로마 및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과 우리나라 등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체 조각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예배 공양자들의 순수한 신앙심이 충만할 때 신성과 인간을 이상적으로 조합한, 생동감 넘치는 인격 신상이 탄생한다. 사람들은 이를 매개체로 삼아 현실의 고통과 불만을 승화시켜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생동감 넘치는 신상조각이 만들어지려면 순수한 신앙심이 전 사회를 하나로 뭉치게 하여 떨끝만큼의 의심도 내지 않는 상황이 조성돼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열정의 시기는 역사 속에서 그리 많지도 않고 또 있다 해도 길 수가 없다. 생동감 넘치는 인체 조각이 인류 미술사를 통틀어 많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문화 유산에서도 그 많지 않은 유례 중에 첫 손가락을 꼽아야 할 대표적인 신상 조각이 있으니, 바로 이다.

    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머리에는 원(圓)을 4등분한 크기의 호(弧) 셋을 정면과 양쪽 측면에 비스듬히 세워 붙여서 만든, 산(山)자 모양의 단순한 관이 씌워져 있다. 그런데 이 관은 깎은 머리처럼 표현된 머리칼과 그대로 이어져 있어서, 마치 머리칼 부위가 그대로 관의 아랫부분인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머리칼과 화관(花冠) 모두가 사실성을 상실하여 신비화됐기 때문이다.

    이런 관 표현은 본래 미국 워싱턴 후리어 미술관 소장의 의 연화관(蓮花冠)이나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소장의 (도판 3)의 연화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꽃잎 석 장을 각각 앞면과 좌우 옆면에 세우던 것을 양식화한 것이다. 연꽃잎 모양의 관틀을 고정시킬 관테가 있어야 화관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과 에서는 모두 화관의 테를 분명히 표현함으로써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에서는 관테 표현을 생략한 채 바로 머리칼과 이어 놓았다. 그래서 얼핏 보면 깎은 머리에 산 자 모양의 승관(僧冠)을 눌러쓴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대담한 생략은 상반신으로 이어진다. 화관의 끈 치레를 완전히 배제하고 나서 양쪽 어깨에 걸쳤던 천의(天衣, 被巾이라고도 함)마저 벗겨냈다. 상반신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으로 대담하게 노출시킨 것이다.

    그리고 목걸이 하나만 달랑 둘러놓았다. 아무 장식 없는 두 줄의 둥근 고리 모양이다. 속이 빈 금속제 고리인 듯 가벼운 느낌을 자아내는데, 늘어지거나 휘감기지 않고 목 둘레를 딱딱하게 외둘러 놓으니 벌거벗은 상체와 신묘한 대조를 보이면서 파격적인 장식효과가 드러난다.

    뚜렷한 두 줄의 목걸이 표현과는 대조적으로 위 팔찌 한 쌍은 보일 듯 말 듯 외줄고리로 희미하게 표현하여 장식성을 최소화하고 있다. 그것이 나신의 아름다움을 더욱 신비롭게 한다.

    원래 인도에서 비롯된 미륵보살의 목걸이와 팔찌는 복잡한 구조의 화려한 구슬꿰미였다. 이것이 중국을 거치면서 차츰 단순해져서 심엽형(心葉形, 하트 모양)의 넓은 판으로 바뀌었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제9회 도판 4-1)에서 보인 것처럼 방변원심형(方邊圓心形) 장식의 세련된 표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단순해질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인 생략을 보여주는데, 양식화의 극치 현상이라 하겠다.

    목걸이의 강렬하고 상징적인 장식성을 의식한 듯, 목에 3줄의 음각선을 그은 삼도(三道, 불보살의 목에 나 있는 3줄의 주름선)는 그 양쪽 끝이 적당한 곳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소멸돼 사실성을 드러낸다.

    사실성을 드러내는 것은 삼도 뿐만이 아니다. 한창 물오른 듯 팽팽한 얼굴에서도 마치 부끄러워 홍조(紅潮)가 피어 오르는 순간처럼 온기가 배어나며, 입은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움직이기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팽팽하게 피어난 큰 얼굴과 굵고 건장한 목에 비해 상체는 가냘프다. 이는 미처 육신이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이나 소녀의 몸매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어깨에서 팔뚝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가슴과 허리를 잇는 유연한 곡선이 너무나 천연덕스러워 팽팽한 살갗 밑으로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하물며 반가한 오른쪽 무릎 위에 오른쪽 팔꿈치를 날렵하게 굽혀 대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편한 대로 굽혀서 턱을 살짝 바치고 있는데 이르러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반가한 오른쪽 발은 왼쪽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데, 무슨 내밀한 열락(悅樂)이 있는지 엄지발가락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고 발바닥이 한껏 긴장해 있다. 그 발목 근처에 포개 놓은 왼손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도 같은 감흥의 표출 현상이다.

    [ 신상과 신앙인의 내밀한 교감 ]

    손과 발에서 보인 이런 사실적인 순간동작의 표출은 선정(煽情)에 가까운 관능미(官能美)의 구현이라 할 수 있으니 곧 거기서 강렬한 생동감을 감지하게 된다. 이런 발랄한 생동감은 신상 조각에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신앙인들과 신상이 직접 교감할 수 있는 활력소로 작용한다. 그 결과 신상이 민심을 결집시키는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 도 이런 맥락에서 생동감 넘치는 조각 기법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지금은 사라져 없어졌지만 머리 뒤에 붙어 있었을 광배(光背)는 두원광(頭圓光) 형태로 매우 단순했으리라 생각한다. 그 기본 형태는 후리어 미술관 소장 (도판 4)이나 (도판 5)의 두원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웃통은 벌거벗었지만 배꼽 아래로는 치마를 입고 있다. 넓은 허리띠가 치마 말기처럼 치마 뒤폭을 가지런히 묶고 나왔으나, 양쪽 치마폭이 양 허리 뒤쪽에서 위로 비져나와 허리띠를 덮으며 앞으로 돌아나오는 옷차림으로 겉멋을 자랑하고 있다.

    치마 뒷자락은 에서처럼 세로 주름을 겹겹이 접어 내리긴 했으나 주름 간격의 변화는 훨씬 다양해졌다. 중앙을 크게 접고 좌우 주름도 일정치 않게 처리하면서 주름 끝이 치마폭의 굴곡에 따라 부드럽게 변화해 나가도록 한 것이다.

    장구통 모양의 등의자도 훨씬 세련되게 다듬었다. 상판 깔개는 엉덩이 생김새에 따라 가운데가 높고 좌우가 낮게 말안장처럼 굴곡지게 만들었다. 의자 덮개 천은 바닥까지 덮어내렸는데, 천자락 끝이 물결치듯 깔리면서 대좌 하단을 마무리짓게 하였다.

    양쪽 옆구리 허리띠에서 걸려 내려온 장식띠는 극단적인 생략 기법이다. 에서는 장식띠가 자리 밑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복잡한 표현을 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다만 엽전 모양 고리에서 앞뒤로 들어가 서로 꼬고 나온 두 가닥의 장식띠가 모두 엉덩이 아래 자리 속으로 들어가 깔리고 만 형태다.

    앞면의 치마는 반가한 오른쪽 무릎을 따라 오른편 치맛자락이 들어올려진 상태다. 이는 에서처럼 치맛자락이 무릎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면서 물결층과 날개깃층으로 이층의 무릎 받침 층을 만드는 사실성을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을 뛰어넘어 무릎 아래에서 옷자락이 딸려오다 바람결에 나부낀 듯 비스듬한 경사면을 만들어 놓고 그 아래로 딸려 올라온 치마의 끝 부분을 흘러내려 마무리지은 형태다. 얼핏보면 무리없는 사실적 표현인 듯하다. 그러나 실상 이런 옷주름은 무릎 밑에 방석을 받쳐주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가상적 표현이다. 그러니 양식화 현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상에서는 그런 양식화 현상이 다른 부위의 생동감 넘치는 사실성과 신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사실로 착각하게 하는 이상한 친화력이 발휘되고 있다.

    왼쪽 무릎을 덮고 오른쪽으로 진행해간 치맛자락은 가장 긴 끝이 앞면 중앙부 의자 밑부분까지 내려와 연꽃잎 모양의 입체조각으로 물결치듯 둥글게 마무리지었다. 그 위로는 엉덩이 밑에서 빠져 나온 치마 뒷자락이 덮어 내리면서 자유분방한 옷자락을 만들어 놓고 있다.

    옷자락이 복잡한 듯 보이나, 세가닥의 옷주름이 수키와 골처럼 접히고 그 사이로 두 가닥이 암키와 골처럼 접히는 단순한 구조일 뿐이다. 다만 옷주름에 중심선을 세워 팽만감을 불어넣고 바람결에 나부끼듯 옷자락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지럽게 느껴질 뿐이다.

    이것도 양식화의 절정에 이르러 극도로 단순화한 상체의 함축적 생략에 대응하여 조화를 이루려는, 계산된 복잡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왼쪽 다리는 연화족대를 딛고 있는데 정강이를 따라 무릎 밑으로 나 있는 옷주름은 다만 좌우에서 두세 줄이 나오다 사라져서 사실적인 입체감을 더해준다. 왼발이 딛고 있는 연화족대 앞부분은 나중에 보수한 것이라 한다.

    [ 진골은 진흥왕의 혈손 ]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은 미륵반가상 양식이 인도와 중국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양식 진전을 이루어온 결과 절정에 이른 단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완벽한 미륵반가상이 만들어지려면 이를 뒷받침해줄 만한 사회 여건이 성숙돼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제9회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았다. 신라 선덕여왕이 최초의 여왕이 된 것은 그가 하생한 미륵보살인 미륵선화로 지목되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렇다면 이 은 바로 선덕여왕이 미륵선화로 지목되는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앞서 말한 대로 선덕여왕(580년 경∼647년)은 백정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진평왕과 마야부인으로 일컬어지던 김씨 왕비 사이에 맏딸로 태어난다. 따라서 그는 석가모니불과 같은 인물이 되어야만 하였다. 일찍이 그의 증조부인 진흥왕(534∼576년)과 증조모인 진흥왕비 박씨 사도(思道)부인(534년 경∼614년)은 모두 만년에 출가하여 각각 흥륜사와 영흥사에서 승려 생활을 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기에 그들 자신이 석가족과 같은 특수 혈통을 타고난 종족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다른 왕족들과 구별짓기 위해 그들의 혈통을 타고난 후손들을 진골(眞骨)이라 부르게 되었던 듯하다. 진흥왕 이후 그의 혈통을 타고난 왕들의 왕호(王號)를 보면 진지왕(眞智王, 554년 경∼579년), 진평왕(眞平王, 565년 경∼632년)이라 하여 계속 진(眞)자를 붙이고 있는 데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이런 왕호가 돌아간 뒤에 올린 시호(諡號)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측 정사(正史)인 ‘북제서(北齊書)’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에서는 한결같이 신라왕 김진흥이니 신라왕 김진평이니 하여 이름으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재위시에 부르던 왕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고구려나 백제의 왕을 지칭할 때는 고구려왕 고아무개, 백제왕 여(餘)아무개라 하여 그 이름을 지칭하고 있는데 유독 신라왕에게만 시호를 썼을 리 없다. 즉 신라 왕호는 사후에 올린 시호가 아니라 생전에 부르던 왕의 칭호였으리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759년) 선생도 일찍이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에서 진흥왕 순수비에 진흥대왕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시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라왕의 시호는 중엽부터 생긴 것이고 초기에는 모두 고유한 말로써 일컬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컬은 것이 하나, 차차웅(次次雄)이라 한 것이 하나, 이사금(尼師今)이라 한 것이 열여섯,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이 넷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거하면 ‘지증(智證) 마립간 15년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고 하므로 신라의 시호를 쓰는 법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듯 말하고 있다. 이로부터 왕이 돌아간 후에는 반드시 그 시호를 쓰게 되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진흥왕본기(眞興王本紀)에서도 역시 35년조에 ‘왕이 돌아가시매, 시호를 진흥이라 하였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것이거늘 그 제목에 엄연히 진흥대왕이라 일컫고 있으며, 또한 북한산비에도 역시 진흥이라는 두 글자가 있다. 이로 보면 법흥(法興)이니 진흥(眞興)이니 하는 것은 장사 지낸 뒤에 올린 시호가 아니라 곧 살아 있을 때의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북제서’에서는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4년에 조서를 내려서 신라 국왕 김진흥으로 사지절동이교위(使持節東夷校尉)로 삼았다’고 하였고, ‘수서’에서는 ‘개황(開皇) 14년에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이 사신을 보내 축하하였다’고 하였으며, ‘당서’에서는 ‘정관(貞觀) 6년에 진평왕이 돌아가자 그 딸 선덕(善德)을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에 의거하여 보면 진흥이니 진평이니 하는 것들은 분명히 시호가 아니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이후에 비로소 시법(諡法)이 있게 되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당서’의 기록에 김무열(金武烈)이라 부르지 않고 김춘추(金春秋)라 하였다. 이로써 가히 알 만한 일이다. 그러니 이 비석에서 진흥이라 한 것은 역시 살아 있을 때의 칭호라고 해야 할 것이다.”

    [ 특수 혈통 진골과 미륵선화 사상 ]

    그런데 진흥왕은 신라의 국토를 최대한으로 확장하여 동북쪽으로 함경남도 이원 마운령과 함흥 황초령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서울 북한산에 이르며, 서남쪽으로는 경남 창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였다. 신라 건국 이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공적을 바탕으로 절대 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그 자손들을 진골이라 부르며 그들만이 왕위에 나갈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에 대해 감히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신라는 시조 이래로 화백(和白)제도에 의해 귀족들이 모여 국왕을 선출해왔는데 진흥왕은 이 제도를 무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은 석가족과 같이 특수 혈통을 타고난 진골(眞骨)이라는 사실을 표방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래서 자신의 왕호를 진흥(眞興), 즉 진골을 일으킨 임금으로 지었던 것이다. 이 진골의 출현을 합리화하고 그 지지기반을 마련하려는 작업이 미륵선화의 선택과 용화낭도(龍華郎徒)의 양성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 진흥왕 37년(576) 조에서 그 해 봄에 미륵선화 즉 원화(原花)를 선발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군주 진흥왕이 돌아가자 보수적인 구 왕족들의 반발이 매우 거셌던 듯하다. 진지왕(眞智王, 554∼579년)이 겨우 재위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행실이 음란하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 시해당하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당시에 진흥왕비인 사도부인 박씨(534∼614년)가 비구니로 아직 영흥사에 건재해 있었으므로 보수세력의 저항은 곧 한계에 부딪혀, 동륜(銅輪, 550년 경∼572년)태자의 장자인 왕태손(王太孫) 백정반(白淨飯, 565년 경∼632년)이 왕위에 나가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되는 듯하다.

    이렇게 진골 귀족이 위기에 몰리게 되자 진흥왕비나 그 손자인 진평왕은 진골의 신족(神族) 관념을 강화하기 위해 진골 중에서 미륵선화가 출현할 것을 기대하게 된다. 마침 진평왕에게서 선덕여왕(580년 경∼647년)과 김춘추(604∼661년)의 모친인 천명부인(天明夫人, 582년 경∼?), 백제 무왕의 왕비인 선화공주(善花公主, 584년 경∼?) 등 세 공주가 내리 태어나니, 이들 중에서 미륵선화를 간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막내인 선화공주가 미륵선화로 간택되었던 듯하나 백제 왕손 마동에게 유인돼 무왕비가 되었다는 사실은 9회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자 진평왕과 진흥왕비 등 진골 집단에서는 서둘러 첫째 공주인 덕만(德曼)을 미륵선화로 결정하여 국선(國仙), 즉 화랑들의 구심점이 되게 하여 미륵보살의 출현을 기정 사실화해 나가는 듯하다. 무왕의 즉위가 진평왕 22년(600) 경신(庚申)이므로 이 해를 전후한 시기에 이런 일이 결행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니 선덕여왕이 20세 내외가 되었을 시기다.

    백제 왕손 마동에게 미륵선화인 선화공주를 탈취당한 신라인들의 실망과 분노는 아마 극에 달했을 것이다. 자신의 나라 왕실에 하강한 미륵보살을 백제 왕손의 계략에 말려 자신들의 손으로 넘겨주고 말았으니 말이다. 아마 선화공주의 부정한 행실을 소문만 듣고 침소봉대하여 귀양보내자고 앞장서서 주장하던 사람들은 바로 진지왕을 내몰았던 반진골 보수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 백제 왕손이 신라의 미륵선화를 유인하여 백제 왕비로 삼음으로써 신라에 하강한 미륵을 백제에 빼앗기는 엄청난 ‘재앙’을 맞게 된 것이다. 이에 보수세력은 민심을 잃어 설 자리를 놓치고 만다. 진골세력이 보수세력을 제압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이 사건을 처리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신라사회에서는 하루 빨리 미륵선화의 공식 출현을 간절하게 소망하였을 것이다. 그런 민심을 파악한 진평왕은 맏딸인 덕만 공주를 미륵선화로 결정 공포하면서, 하강한 미륵보살의 모습을 반가사유상으로 조성하여 민심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 용모는 새로 미륵선화가 되어 장차 대통을 이어갈 덕만공주의 모습이 범본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은 선덕여왕의 20세 전후 모습이라 추정하는 것이다.

    국력과 민심을 결집하여 혼연일체된 순수한 신앙심이 없고서는 이런 신상 조각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사실 이런 국민적 결집력은 국가간에 격앙된 적대감이 부추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완벽한 신상을 조성해낸다는 것이 단지 사회적 열망이나 국왕의 의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이루어낼 수 있는 문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문화가 낙후했던 후발국가였다. 선덕여왕 시기에도 아직 문화적 성숙도가 미흡한 상태였을 터이니, 최고 수준의 미륵반가상을 조성해낼 역량이 부족했으리라는 추측이 제기될 만하다.

    하지만 이런 추측은 진흥왕의 영토 확장에 따른 고구려와 백제 문화의 대거 유입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영토의 편입은 생활 문화 전반의 편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라의 한강 유역 장악은 백제의 옛 수도권 문화 뿐 아니라 한반도 심장부 문화의 흡수를 의미하는 것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진흥왕 이후 신라 수도권 문화의 급성장은 마치 미륵신앙이 백제를 앞지를 만큼 급신장한 것만큼이나 초고속으로 진행됐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 김유신과 미륵반가상 ]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그 첫째가 경주 서남쪽 월성군 건천면 송선리 단석산(斷石山)에 있는 국보 제199호 이다. 김유신(金庾信, 595∼673년)이 15세(609년) 나이에 용화랑(龍華郞)이 돼 수련하였다는 곳에 조성돼 있는 마애불상군이다.

    이 불상군 중에는 미륵반가상(높이 110cm)이 있다. 바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이 가지고 있는 양식적 기본 틀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상체는 벌거벗었는데 천의 한 가닥이 둥근 목걸이처럼 가슴 근처에 걸려 있다. 배꼽 아래로 둘러 입은 치마는 반가한 오른쪽 무릎을 따라 오른쪽 폭이 들려 올라가서 무릎 밑에 깔렸다가 다시 나오며 무릎 받침 옷주름 층을 만들고 있다. 이는 무릎 받침 옷주름 층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다. 족대를 밟고 내리 디딘 왼발 아래에는 넓은 연꽃 좌대가 새겨져 있고 삼산관을 쓴 머리 둘레에는 두원광이 단순한 동그라미로 새겨져 있다.

    또 북쪽 바위 절벽 맨 위쪽 왼편, 즉 동쪽에 반가좌로 앉아 있는 이 미륵보살을 향해 2불 1보살이 서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각기 왼손을 들어 미륵보살을 가리키며 무엇을 인정하거나 누구를 인도해가는 듯한 태도다. 맨 오른쪽 불입상 높이가 105cm이고, 그 다음 보살입상 높이가 102cm이며, 그 다음 불입상 높이가 116cm인데, 모두 낮은 돋을 새김으로 파서 만들었다.

    9회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마 ‘법화경’ 권1 서품에서 말한 대로 연등불은 석가모니불을 수기(授記; 장차 부처님이 되리라는 예언)하고, 석가모니불은 미륵을 수기하며 문수보살은 이 사실을 인증하는 내용을 표현함으로써 미륵의 하생을 기정 사실화하는 장면인 듯하다. 따라서 미륵반가상 바로 오른쪽에 서 있는 가장 큰 불입상은 석가모니불로 보아야 하고, 그 다음은 문수보살, 또 그 다음은 연등불로 보아야 마땅하겠다.

    이 이 정확하게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김유신이 수련하던 시기를 전후해서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화랑이 출현하는 진흥왕 37년(576)부터 김유신이 이곳에서 수련하던 시기인 진평왕 31년(609) 사이에 조성되었다고 해야 한다.

    만약 김유신 수련 시절에 조성된 것이라면 여기에 조성된 미륵반가상 역시 미륵선화인 덕만공주, 즉 선덕여왕을 상징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 김유신이 용화랑이었다면 덕만공주를 화주(花主)로 삼고 있었을 터이니 말이다.

    또 하나의 예는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김유신묘 재실인 금산재(金山齋)에 전래해 오다 1930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놓은, 현존 높이 125cm의 이다. 머리와 두 팔이 잘려나갔으나 반가자세를 한 몸통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상반신이 나신이고 쌍가락지 형태의 둥근 목걸이를 하고 있어 과 동일 양식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머리칼이 어깨를 덮은 흔적이 있고, 장식띠가 옆구리 허리띠로부터 길게 내려와 있으며, 연화족대를 밟고 있는 왼쪽 정강이를 따라 표현된 옷주름선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등은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어 보다는 앞서고 보다는 뒤의 양식이라 해야 하겠다.

    반가한 오른쪽 무릎 밑을 받쳐주는 무릎 받침 옷자락 표현이 분명치 않고, 반가한 오른쪽 발의 발바닥이 왼쪽 무릎 너머로 넘겨 붙은 것이나, 옷주름 표현에서 입체성이 결여된 점 등도 이 반가상 조성이 아직 습작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런데 이런 습작품이 있다는 것은 곧 최고 걸작품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므로, 의 존재는 의 신라 제작설을 증명하는 부동의 증거라 하겠다.

    [ 김술종이 조성한 북지리 미륵반가상 ]

    다음은 이다. 허리 이상 상반신 거의 전부가 잘려나간 반가상이다. 그런데도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가 160cm나 되는 것을 보면 세계 최대 규모의 반가사유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은 부분을 근거로 복원하여 높이를 계산하면 250cm나 된다고 한다. 가히 장육(丈六) 미륵반가상이라 할 만한 규모다.

    그런데 이 미륵반가상은 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닮았다. 다만 하나는 재질이 화강암이고 하나는 금동이라는 차이와, 하나는 높이가 250cm나 되고 하나는 높이가 93.5cm로 크기가 다를 뿐이다.

    그래서 선뜻 선후 구별이 안 되는데, ‘삼국유사’ 권2 효소왕대(孝昭王代) 죽지랑(竹旨郞)조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어 그 선후 문제를 가늠하게 해준다.

    “처음 술종(述宗)공이 삭주(朔州, 현재 춘천) 도독사(都督使)가 되어 장차 다스릴 곳으로 가려는데 그때는 삼국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기병(騎兵) 3000으로 호송하게 되었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 지금 죽령)에 이르니 한 거사가 있어 그 고갯길을 잘 다스렸다. 공이 보고 탄복하여 크게 칭찬하자 거사도 역시 공의 위세가 심히 빛나는 것을 좋아하여 서로 마음에 새겨 두었다.

    공이 삭주의 임소에 부임하여 한 달이 지났는데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하므로 놀라움이 더욱 심하여 다음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어오게 하였다. 심부름꾼이 가서 묻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 지 며칠 됐다고 한다. 심부름꾼이 돌아와 그 죽음을 알리는데 바로 꿈꾼 날이었다.

    공이 이르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모양이구나’하고 다시 군사들을 보내 죽지령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내게 하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어 무덤 앞에 안치하였다. 꿈꾸던 날로부터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로 인해 이름을 죽지(竹旨)라 하였다. 자라서 벼슬에 나가 유신(庾信)공과 함께 하며 그 부원수가 되어 삼국을 통일하고 진덕·태종·문무·신문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를 안정시켰다.”

    즉 이 미륵석상을 삭주 도독사 김술종이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 1 진덕왕(眞德王)조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진덕왕 시대에 알천(閼川)공, 임종(林宗)공, 술종(述宗)공, 무림(武林)공(자장의 부친), 염장(廉長)공, 유신(庾信)공이 남산 우지암(于知巖)에 모여서 국사를 의논했다.”

    김술종은 진덕여왕 때 화백회의를 주도하던 6인의 원로 대신 중 3번째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6번째인 김유신보다 지위나 나이가 훨씬 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진덕여왕(647∼654년) 원년(647)에 김유신의 나이가 53세였는데 김유신이 말석에 끼었다면 세번째인 김술종은 김유신보다 적어도 10세 이상의 나이 차가 있을 듯하다.

    그런데 김술종이 미륵석상을 만들고 낳은 아들인 김죽지가 장군이 되어 진덕여왕 3년(649)에 태장군 김유신의 부장(副將)으로 도살성에서 백제군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때 김죽지의 나이가 40세 정도는 되었을 터이니 김죽지가 태어난 것은 진평왕 32년(610) 경이 될 것이다.

    이 해에 김술종이 삭주 도독이 됐다면 나이가 30세 정도는 되어야 하므로 김술종이 태어난 시기는 진평왕 2년(580) 경이라 해야 할 것이다. 김유신보다 15세 정도 연상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진덕여왕 때 화백회의에서 김술종과 김유신이 3번째와 6번째가 될 만한 나이 차이다.

    또 김죽지가 마지막 전공을 세우는 기록이 문무왕 10년(670) 백제 부흥군으로부터 7개의 성을 빼앗는 것이니, 610년 생이라면 환갑쯤 되었을 터라 그의 출생연도에 대한 추정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김죽지는 신문왕(681∼691년) 때까지 재상을 지내고 효소왕(692∼701년) 때까지 살아 있었다 하니 80세 이상 장수하였던 모양이다.

    어떻든 김죽지가 태어난 해가 진평왕 32년(610) 경이라면 이 의 조성연대도 바로 그 해 어름이어야 하니, 의 조성연대 역시 거의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은 1965년 11월26일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物野面) 북지리(北枝里) 구산동(龜山洞)에서 신라 오악(五岳) 조사단이 발견했다. 이후 1966년 6월에 경북대학교가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를 담당하여 원 위치를 확인하고 을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소장하고 있다. 이 상과 의 선후 문제는 선뜻 결정짓기 어려우나, 거의 동시에 조성된 것이 틀림없다.

    김술종이 진골 귀족으로 30대 젊은 나이에 삭주 도독이 되어 3000 기병을 이끌고 죽령을 넘어 춘천으로 부임해가게 된 것은, 그때 수(隋)의 중국 통일(589년)로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변화하여 삼국의 쟁패가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남북조의 대립과 분열이 지속될 때는 그 영향이 우리에게 끼칠 틈이 없으므로 삼국은 자체의 힘겨루기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니, 진평왕 초년 경에는 진흥왕이 확장해 놓은 영토를 지키기가 여간 힘겹지 않았다.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 공세를 펼쳐왔기 때문이다.

    드디어 고구려는 수와 대결함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영양왕 9년(598) 즉 진평왕 20년에 왕이 말갈군사 1만을 친히 이끌고 요서를 선제 공격함으로써 수나라와 전단(戰端)을 열어 놓는다.

    이에 진평왕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 26년(604) 남천주(南川州, 현재 이천)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 현재 서울)를 다시 설치하여 고구려에 적극 공세를 취한다. 진흥왕 29년(568)에 북진정책을 포기하는 유화적 몸짓으로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로 옮겨왔던 것인데, 이제 38년만에 다시 북진정책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호전적인 수양제(605∼616년)가 들어서자 진평왕은 그 30년(608)에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있던 원광(圓光)법사에게 부탁하여 고구려를 정벌해달라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보낸다. 때마침 수양제는 바로 전 해에 돌궐 가한(可汗) 계민(啓民)의 장막에 이르렀다가 고구려 사신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 정벌을 결심하고 있던 터라 이를 흔쾌히 허락한다.

    이 소식을 접한 고구려는 2월에 신라를 응징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켜 춘천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한다. 이에 진평왕이 김술종을 삭주도독으로 삼아 춘천으로 급파하여 고구려를 물리치게 하였던 모양이다.

    벌써 진평왕 33년(611) 2월에는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의 조서를 천하에 포고한 상태였다. 그러니 김술종이 이 어름에 삭주 지방을 회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왕실 측근의 진골 귀족으로 패기만만한 30대 초반의 국경 수비대 사령관직에 있던 김술종이 자신의 아들이 미륵하생시에 태어나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룩하고 미륵세계를 이루는데 대공을 세워주기를 간절히 기원하여 만든 미륵보살상이라면 그 정성과 규모가 어떠했을지 대강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태어날 자식이 미륵보살이 되기를 기원했을 수도 있다.

    죽령에서 멀지 않은 봉화 물야계곡 죽지리 구산동에 세계 최대 규모의 걸작 미륵반가상이 조성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단한 화강암 재료로 총높이가 250cm나 되는 거대한 석상을 조성하였는데도 이 가지고 있는 세련된 조각 기법이 거의 그대로 재현돼 있다. 돌로 된 옷자락이 산들바람을 맞아 살랑살랑 나부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일본 경도(京都)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는 광륭사(廣隆寺)에는 과 쌍둥이처럼 닮은, 높이 83.3cm(2자7치6푼)의 이 있다.

    누가 보아도 쌍둥이라고 얼른 알아볼 수 있는 이 미륵반가상은 최근 일본학자의 연구 결과 신라에서 진평왕 45년(623)에 만들어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2 추고(推古) 천황 31년 7월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을 토대로 밝혀낸 사실이다.

    “31년 가을 7월에 신라가 대사(大使)로 내말(奈末) 지세이(智洗爾)를 보내고 임나는 달솔 내말지(奈末智)를 보내 함께 왔다. 불상 1구와 금탑 사리를 보내고 또 대관정번(大觀頂幡) 1구와 소번(小幡) 12가닥도 보냈다. 곧 불상은 갈야(葛野) 진사(秦寺)에 모시고 나머지 사리와 금탑 및 관정번은 모두 사천왕사(四天王寺)에 들여 놓았다.”

    이때 보낸 불상이 이며 갈야 진사가 바로 광륭사라는 것이다. 광륭사는 일본에 하생한 미륵보살이라는 성덕태자(聖德太子, 573∼647년)가 추고 천왕 11년(603), 즉 진평왕 25년 10월에 대부(大夫) 진하승(秦河勝 혹은 秦川勝)에게 자신이 봉안하고 있던 불상을 하사하여 세운 절이라 한다.

    처음에는 절이 세워진 장소의 이름을 따서 봉강사(蜂岡寺)라고도 하고, 그곳 지방명을 따서 갈야사(葛野寺)라고도 부르며, 혹은 진씨가 세운 절이라 하여 진사(秦寺)라고도 하였던 모양이다. 본격적인 절의 면모를 갖추는 것은 진평왕 43년(621)에 성덕태자가 49세로 요절하자 그의 명복을 비는 추복 사찰로 삼으면서부터라고 한다. 아마 이때부터 광륭사로 불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절을 세운 진하승은 신라계 이주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추고 천황 31년(623) 신라에서 성덕태자의 명복을 비는 조문사절을 파견하면서 이 을 만들어 보내자, 이를 신라계 진씨가 세운 성덕태자 추복사찰인 광륭사에 봉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주장이다. 더구나 목조반가상의 재질이 봉화군 춘양면(春陽面)에서 나오는 적송(赤松, 紅松이라고도 함), 즉 춘양목이라는 것이다. 춘양면은 이 있는 물야면(物野面)과 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곳이다.

    따라서 경주에서 조성되었을 과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서 만들어졌을 을 연결시켜 생각한다면, 이 이 어째서 춘양목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특유의 적송으로 만들어졌으며 과 쌍둥이 같은가에 대한 해답이 절로 나오게 된다.

    다만 은 의 외형만 충실하게 모방(模倣)하려 했으므로 생동감이 결여돼 정지된 느낌이 전신에서 느껴진다. 에서처럼 생략과 함축 및 정밀한 사생으로 추상미와 사실미를 이상적으로 조합해 피가 돌고 맥박이 뛰며 피부에 온기가 느껴지듯 표현했던 예술 정신이 무엇이었는지는 탐구하려 하지 않고 무의미한 형사(形似; 외형만 비슷하게 따라함)에만 매달린 결과다.

    그래서 반가한 오른쪽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옷주름도 바람이 잔 듯 고요히 멈춰 있어 답답하고, 힘이 들어간 듯 치켜 올라간 오른쪽 발가락이나 눌러댄 왼쪽 손가락 표현도 그 의미를 상실하여 내밀한 열락(悅樂)의 표출이라는 짜릿한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극도로 양식화한 삼산관 역시 연꽃잎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고 4분 원형의 굴곡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했던 의 최후선을 넘어서서, 관틀을 높이면서 굴곡을 약화시킴으로써 연화 보관의 추상적 아름다움이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거기다 보관 아래에 머리칼 표현을 더함으로써 보관과 머리칼을 혼연일체시키던 신비감마저 없애버렸다. 사실성도 추상성도 일시에 사라지게 한 것이다. 치마 표현에서도 반가한 무릎 아래를 바람결에 올라 떠오르듯 살짝 뒤집혀 받쳐주던 무릎 받침 부분이 무겁게 매달리게 되니 무릎과 상관없는 군더더기처럼 보인다.

    왼쪽 허벅지 아래 자리 밑에서 나온 띠 장식은 이 상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부분인데, 재질이 일본에서 흔히 불상 조각 재료로 많이 쓰는 녹나무 즉 장목(樟木)이라 하니 일본에서 뒷날 첨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2단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좌 역시 비자나무(榧木)로 만들어져 있어 일본에서 후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은 을 그대로 형사한 모작이 확실하므로, 이 미륵상이 진평왕 44년(622)경에 일본에 출현했던 미륵보살, 즉 성덕태자의 서거를 애도하기 위해 만들어 보냈을 가능성은 양식사적으로 충분히 인정된다고 하겠다. 이상적인 신라의 미륵선화 형상인 을 본체로 삼아 무수한 분신인 미륵반가상을 만들어 퍼뜨려 나가는 분신불 전파 현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

    고구려 평원왕 31년(589), 즉 수문제 개황(開皇) 9년에 수문제는 남조 진(陳)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동진(東晋)의 남천(南遷, 317년)으로 남북이 갈린 지 272년 만에 중국대륙을 다시 통일한다.

    사실 고구려는 중국의 자체 분열과 상호 견제에 힘입어 국세를 키워나가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할 수 있었다. 남북조와의 등거리 외교로 남북조를 견제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국세를 신장하여 동방의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동아시아의 패권은 남북조와 고구려를 각기 한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수나라의 중국 통일로 삼각 대권 구도에서 한 꼭지점이 무너진 것이다. 다른 한 꼭지점이던 고구려가 당장 위기감에 휩싸일 것은 당연한 이치다.

    특히 고구려가 두려워한 것은 이제 중국으로부터 수륙 양면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에는 육군이면 육군, 수군이면 수군의 공격 한 가지에만 대비하면 되었다. 육지를 국경으로 맞대고 있는 북조는 수군이 없었고, 수군 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남조와는 북조가 육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 고구려는 중국의 침략을 수륙 양동 작전으로 언제든지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수나라가 강력한 기마군단을 앞세워 남조를 멸망시키고 방대한 수군 세력을 흡수해 들였다. 과거에는 분리돼 고구려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던 수륙 양군이 이제는 통합돼 절대적인 위협으로 다가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평원왕은 진나라 멸망 소식을 접하자 바로 전비강화에 몰두한다.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성곽을 수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문제도 이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요수(遼水)가 넓다 한들 장강(長江, 양자강)보다 넓겠으며 고구려 사람이 많다 한들 진나라보다 더하겠는가”하며 고구려를 위협하고, 장군 한 사람만 보내도 쉽게 멸망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평원왕은 군비 강화를 독려하던 중 병으로 돌아가고 그 장자인 영양왕이 등극한다. 영양왕은 평원왕 7년(565)에 태자로 책봉돼 25년간 태자로 있으면서 국정 운영을 눈여겨보았던 패기 넘치는 신왕이었기에 오히려 군비강화를 더욱 신속하게 진행했다. 본래 생김새가 시원스러웠으며 세상을 바로 다스려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던,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영양왕은 8년 동안 전쟁준비를 한 다음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영양왕 9년(598) 2월에 친히 말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략한다. 이 해 정월에 수문제가 강남의 여러 주에 조서를 내려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세 길 이상의 배를 모두 징발하여 관부에 소속시키는 등 수군 강화정책을 편 직후의 일이었다. 수군 강화책이 바로 수륙 양면의 고구려 침략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짐작한 영양왕은 출기불의로 기습함으로써 수나라가 미처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채 전단을 열게 만든 것이다.

    이에 272년 만에 천하통일을 이룬 절대군주의 체면을 크게 손상당한 수문제는 대로하여 당장 막내인 제5황자 한왕(漢王) 양(諒)을 행군원수(行君元帥)로 삼아 수륙 30만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한다. 분주하게 준비하였지만 6월에 가서야 침공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영양왕은 이런 침공 시기를 계산에 넣고 2월에 요서를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영양왕은 6월부터는 장마철이 돼 요수가 범람하므로 진흙밭이 인마의 발목을 묶고 뒤이어 북상하는 태풍은 서해 바다에서 전선을 삼켜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연 그의 계산은 맞아 떨어졌다. 20여만 군사를 이끌고 만리장성 동쪽 끝인 임유관(臨關)을 나선 한왕 양은 장마비 속에 제대로 행군도 하지 못하고 군량미도 운반되지 않아 갖은 고생을 한다. 더구나 식수 불량으로 전 군이 전염병에 걸리는데 겨우 요서에 도착한 그마저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런데다 남조 진나라 수군대장 출신으로 수군총관(水軍總管)이 되어 강남 수군 선단을 이끌고 산동반도 동래(東萊)항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쳐들어가던 주라후(周羅, 542∼605년)의 선단이 태풍을 만나 서해바다 속에 거의 수장되고 만다. 이 소식을 접한 한왕 양은 할 수 없이 9월에 아무 소득 없이 군사와 군비만 잃은 채 회군하고 말았다.

    고구려 영양왕은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30만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것이다. 이때 30만 군사 중에서 죽은 자가 10명 중 8∼9명에 이르렀다 한다. 뿐만 아니라 강남 수군의 주력부대를 모두 수장해 당분간은 바다 걱정을 덜게 된 것은 더욱 큰 수확이었다. 이렇게 수나라의 기선을 꺾어 놓은 영양왕은 일방 사죄사를 보내 수문제의 체면을 살려주는 외교적인 전략도 함께 구사한다.

    간담이 서늘해진 수문제는 못이기는 척하고 고구려와 관계 회복을 허락하여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한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수양제(569∼618년)(도판 11)가 영양왕 18년(604)에 제위에 오르면서 사태는 일변하였다.

    그는 형인 황태자 용(勇)을 모함하여 폐위시키고 자신이 태자 자리를 차지한 다음 부황이 병들어 폐태자를 불러들이려 하자 부형을 함께 독살하고 제위에 오른 음흉한 인물이다.

    그런 그였기에 제위에 오른 다음 고구려 정복의 꿈을 버리지 않고 그 준비를 꾸준히 하였다. 우선 강남의 물화와 병력을 북쪽으로 수송하기 위해 강도(江都, 남경)에서부터 낙양에 이르는 대운하인 통제거(通濟渠)를 건설한다. 그리고 즉위 후 4년 만인 대업(大業) 3년(607), 즉 영양왕 18년 4월에는 황하 물줄기가 북쪽으로 휘도는 만리장성 밖의 유림군(楡林郡)을 순수하며 내몽고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동돌궐왕 계민(啓民) 칸(可汗)을 찾아가 회유하여 고구려와 관계를 끊게 한다.

    이미 종실녀(宗室女) 의성(義城)공주를 계민칸에게 출가시켜 그를 귀순하게 하고서도 못미더웠던지 황후와 함께 가서 계민칸과 의성공주를 함께 만나보고 이들 부부에게 선물을 1만2000 뭉치나 전해준다. 또 동돌궐 추장 3500인에게는 선물을 20만 뭉치나 따로 내려준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장정 100여만명을 동원해 유림에서부터 자하(紫河)에 이르는 수백 리 장성을 열흘 만에 쌓도록 한다. 이때 동원된 장정들은 10명에 5∼6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사인 황문시랑 배구(裵矩, 547∼627년)의 계책에 따라 계민칸에게 와 있던 고구려 사신에게 이렇게 엄포를 놓아 보낸다.

    “돌아가 너의 왕에게 마땅히 일찍 와서 조현(朝見; 신하가 임금을 찾아 뵘)하라고 말해라. 그러지 않으면 나와 계민이 너의 나라를 순수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수양제는 동도(東都) 낙양으로 돌아온 다음 그 다음 해인 대업 4년(608) 4월에 하북 지방의 남녀 100여만명을 동원하여 낙양에서 탁군(郡, 현재 북경)까지 이르는 대운하인 영제거(永濟渠)를 건설한다. 통제거와 영제거를 연결하면 수도 장안과 동도 낙양, 남도 건강, 북도 탁군이 모두 물길로 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의 물화와 병사들이 통제거와 영제거 물길을 타고 대량으로 탁군까지 운반돼 쌓이게 되었다.

    뒤이어 대업 6년(610) 2월에는 유구를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7000여명을 포로로 잡아와서 권위를 자랑한다. 강남 수군 세력을 과시한 것이다. 3월에 양제는 남도인 강도(江都)로 내려가서 강도 태수의 지위를 장안의 경조윤(京兆尹)과 같은 급으로 올려놓아 강도의 사기를 복돋운다. 드디어 대업 7년(611) 2월에 양제는 강도의 양자진(揚子津)에서 백관을 모아놓고 대연회를 베풀며 등급에 따라 많은 하사품을 내리면서 고구려 정벌 의지를 문무백관에게 암시한다.

    이에 강남 해상세력과 연결돼 있던 백제는 발빠르게 이런 눈치를 채고 사신 국지모(國智牟)를 보내 고구려 정벌에 협력할 것을 알리고 군기(軍期)를 정하자고 청한다. 기분이 좋아진 양제는 백제 사신에게 많은 상품을 보내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 무왕과 상의하게 한다.

    의기양양한 수양제는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용선(龍船)을 타고 강도를 출발하여 통제거와 영제거를 거쳐 탁군에 도착한다. 거기서 고구려 정벌을 천하에 포고하고 징병령을 내린다.

    [ 살수대첩 ]

    ‘수서’ 권74 원홍사전(元弘嗣傳)에 의하면 수양제는 즉위 초부터 고구려 정벌에 뜻이 있어 원홍사를 동해 해구(海口)로 보내 배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 여러 주에서 징발돼 온 부역 장정들이 관리들의 독촉으로 매를 맞아가며 쉴새없이 일하였는데, 밤낮으로 물속에서 일하므로 허리 아래에 구더기가 생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죽는 사람이 열에 3∼4명은 되었다 한다. 물론 여기에 동원된 장정들은 배 만드는 데 익숙한 강남지역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81 수양제 기(紀)에서는 이때 만든 배가 300척이었다 한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수양제는 이 해 겨울 탁군에서 대회를 열고 강도 출신인 효위(驍衛) 대장군 내호아(來護兒, ?∼618년)를 수군 총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대업 8년(612) 즉 영양왕 23년 정월에 대군이 탁군에 집결하자 병부상서 단문진(段文振)을 좌후위(左侯衛) 대장군으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맹장들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육군을 통솔하게 하고 여러 길로 나누어 고구려로 진격해 들어가게 하니, 동원된 군대의 총수가 113만3800인으로 200만 대군이라 일컬었다. 군량미를 운송하는 사람의 숫자는 이의 배에 이르렀다. 이들이 출발하는데 그 늘어선 길이가 960리에 뻗어 있었다.

    2월에 양제가 요수 가에 당도했으나 고구려 군의 저항에 부딪혀 건너지 못하고 맥철장(麥鐵杖) 등 용장이 전사한다.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가 부교(浮橋)를 완성하여 겨우 요하를 건너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1만명을 죽였지만, 요동성을 비롯한 여러 성은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초조한 양제는 요동성 서쪽 몇리 떨어진 곳에 육합성(六合城)을 쌓고 들어가 머물면서 독전한다.

    한편 동래를 떠난 내호아의 수군은 전선 수백 척이 수백 리 바다를 뒤덮으며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가 평양 60리 밖에서 아군과 마주쳐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내호아는 승승장구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쳐들어가려 하니 부총관 주법상(周法尙, 556∼614년)이 말리며 여러 군사가 이르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하였다. 내호아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정병 수만명을 가려뽑아 곧바로 성 아래로 진격해 들어갔다.

    아군 대장군 왕제(王弟) 건무(建武, 영류왕)는 나성(羅城) 안 빈절에 복병을 숨겨두고 있다가 내보내 내호아 군대와 싸우다가 거짓 패한 척하고 달아나게 하였다. 내호아는 이를 쫓아 성안으로 들어와서 병사들을 풀어놓고 노략질하게 하니 다시 대오를 갖출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복병이 일어나자 내호아는 대패하여 겨우 몸만 빼 달아나매 사졸로 돌아간 자는 수천명에 불과하였었다. 아군은 선단이 있는 곳까지 추격해 들어갔으나 주법상이 군진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으므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에 내호아는 군병을 이끌고 바닷가로 물러나 감히 다시 싸울 생각을 못하였다.

    한편 좌익위(左翊衛) 대장군 우문술(宇文述)과 우익위 대장군 우중문(于仲文) 등은 각각 여러 길로 나누어 진격해 오면서 굳게 지키는 성들은 그대로 방치한 채 빠른 속도로 압록강 서쪽 기슭에 모였다. 장마와 태풍이 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평양을 함락하려는 전략이었다. 남겨 놓은 성들은 양제가 거느리고 있는 대군이 차츰 함락하거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포위하고 있으면 자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속한 군사 이동은 가벼운 차림일 때 가능하다. 그런데 고구려가 청야(淸野; 식량이나 생활도구 및 거처를 모두 없애서 들을 텅 비게 하는 것) 전술을 펴서 고구려 영토 내에서는 전혀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수 천리를 속보로 이동하는 수나라 군사들에게 제몫의 군장과 취사도구 및 식량을 각각 짊어지게 하니 사람마다 3가마니 무게를 지고 행군해야 했다. 이에 병사들은 이를 길가에 버리게 되었고 이를 엄금하는 군령이 내려지자 땅을 파서 묻고 행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압록 강변에 30만 군사가 도착하기는 하였으나 당장 군량이 떨어져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때 영양왕은 대신 을지문덕(乙支文德)을 그 병영으로 보내 거짓 항복하고 허실(虛實)을 탐지해 오게 한다. 그런데 우중문은 수양제로부터 만약 국왕이나 을지문덕이 나타나기만 하면 잡아오라는 밀지를 받고 있었다. 우중문이 잡으려 하니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로 와 있으면서 굳이 말리므로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놓아 보냈다.

    우중문은 곧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다시 할 말이 있으니 왔다 가라 했으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가버렸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을 놓아 보내고 속이 편안치 않았는데 우문술이 군량이 다해가니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이에 우중문이 정예병을 선발하여 을지문덕을 쫓아가면 공을 세울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자 우문술이 이를 말린다.

    우중문이 화를 내며 “장군은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작은 도적 하나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무슨 얼굴로 황제를 뵙겠는가. 군중의 일은 한 사람이 결정해야 하는데 각자가 마음이 다르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양제가 우중문이 계책이 있다 하여 제군으로 하여금 우중문의 절도를 받게 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다. 이에 할 수 없이 우문술 등 여러 장수가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문덕은 우문술 군대가 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일부러 피곤하게 하려고 매번 싸우다가 달아나니 우문술 하루에 7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이기는 것만 믿고 바짝 따라가서 살수(薩水,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 산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여 우문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돌이키면 마땅히 왕을 받들고 행재소에 나아가 황제를 조현하겠다 한다. 이때 을지문덕이 다음과 같은 시를 우문술에게 보냈다 한다.

    ‘신통한 계책은 천문(天文)을 꿰뚫었고, 오묘한 계산은 지리(地理)를 다 알았네. 싸워 이겨서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할 줄 알고 원컨대 그쳐주기를.(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폐한 것을 보고 다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쉬 깨뜨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드디어 그 거짓 항복에 속는 척하고 군대를 돌이켰다. 그러나 우문술 등은 고구려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진(方陣)을 짜고 행군하였다. 이에 아군은 사면에서 치고 빠지니 우문술 등은 싸우면서 행군하여 7월에야 살수에 이르렀다.

    군사가 반쯤 건넜을 때 아군이 뒤에서 후군을 공격하자 우둔위(右屯衛) 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여러 군사가 함께 무너지는데 어찌 할 수가 없다. 이때 살수를 상류에서 막았다 터뜨렸다 한다. 장수와 군사들이 달아나 돌아오는데 하루 낮 하루 밤사이 450리를 달려서 압록강에 이르렀다. 수군 총관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배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수에 도착했을 때 30만5000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겨우 2700명뿐이었다. 자재와 양식 기계는 수 만으로 헤아렸는데 모두 잃어버렸으니 이런 처절한 참패가 있을 수 없었다. 이에 양제는 대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가지고 회군한다.

    이때 백제 무왕은 국지모를 보내 수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고 군기(軍期)를 받아오지만 사실 뒤로는 고구려와 내통하여 수나라 기밀을 고구려에 전해주었다. 또 수나라 군대가 요수를 건널 때도 군대를 고구려 국경에 보내 수나라를 돕는 척 소문만 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진평왕은 고구려가 전력을 다해 수군을 막는 동안 고구려 남쪽 땅 500여리를 쳐서 빼앗았다.

    [ 고구려 후기 고분 벽화 ]

    수 양제의 대규모 침공을 막아낸 대수전쟁(612∼614년)의 승리는 고구려 문화에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듯하다. 이것은 고분 벽화에서 나타나는 극적인 변화에서 추측할 수 있다.

    동수묘 이래 고구려 분묘 내의 벽화 내용은 총주(塚主)의 생전 생활을 사후(死後) 세계로 연장시키려는 의도가 작용, 총주의 생전 모습과 그의 생활 환경이 재현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후기에 이르면 다만 방위를 맡아 천장이나 벽면의 한 부분에 나타나기도 하던 사신(四神; 靑龍, 白虎, 玄武, 朱雀)이 벽화의 주제가 되어 주벽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묘실(墓室)도 상자 모양의 단실(單室)로 변하게 되고, 축석으로 벽면을 구축하던 종래의 석실 구축 방법도 1매의 곱게 물갈이한 화강암 판석으로 대치하는, 전혀 새로운 묘실 구축 방법이 이와 함께 등장한다.

    따라서 이제는 벽면에 곧바로 사신도만 그리는 동수묘적인 벽화 기법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법도 크게 발전하여 채색은 화려하고 깊이 있고, 필선은 더욱 활기가 넘치면서 세련되고 회화적인 공간 감각이 고려된다. 산이나 나무, 구름 등 배경화도 이제는 문양적인 유치한 단계를 벗어나서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다.

    이와 같이 갑작스러운 변화 현상을 종래에는 사신도가 음양오행설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여 도교에 연관시켜 생각하려고만 하였다. 이는 단순히 당(唐) 고조(高祖)가 도교(道敎)를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전해주었다는 ‘삼국사기’ 기록(624년)과 보덕(普德)화상이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박해하므로 고구려를 떠나 백제로 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한 생각이었다. 비록 도교의 영향이 아무리 강력했다 하더라도 몇백년 지속된 전통적인 분묘 벽화의 내용을 갑자기 일신시킬 수 있겠는가?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몇가지 각도에서 검토가 있어야 한다. 그 첫째가 이 벽화 고분의 주인공들이 종래의 고분벽화 주인공들과 문화 기반이 다른 세력들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를 만든 시기에 있어서 새로운 문화 담당 계층의 급작스러운 출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사료(史料)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획기적인 지배층의 교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 분포가 평양과 구도(舊都)인 통구(通溝) 지방에 골고루 나뉘어 있으니 이런 가설은 성립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새로운 문화 담당 계층의 출현에 의한 문화의 일변 문제는 대수전쟁의 승리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많은 포로와 노획물을 획득했으므로 이들의 사역에 의한 수 문화(隋 文化)의 직접적인 영향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만5000 군대 중에 요동까지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이었고, 수많은 군비와 기계를 모두 잃었다고 하였으며, 전쟁 이후 10여 년만에 당 고조(高祖)의 요청에 의하여 송환된 포로만도 1만여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고구려에 포로로 잡힌 군사가 십수만을 헤아린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가 이 전쟁을 통해서 남북조의 찬란한 문화를 아우른 고도의 수 문화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급격한 벽화 분묘 양식의 변화는 수 문화의 영향으로 보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특히 화려한 채색이나 요철(凹凸)의 입체감 같은 것은 남북조 시대에 불화(佛畵)의 영향으로 장승요(張僧繇) 등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발달한 회화 기법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묘사나 극도로 세련된 힘찬 필선 따위는 고개지(顧愷之)·육탐미(陸探微)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중국 전통 화법이었다. 회화적인 구도감은 이미 남제(南齊) 사혁(謝赫)이 화육법(畵六法)에서 경영위치로 지적한 바 있었다. 그러니 이러한 요소들이 후기 고구려 벽화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시 수에서는 서역계 돌궐족 출신인 염비(閻毗, 564∼613년)와 그 아들 입덕(立德, ?∼656년)·입본(立本, ?∼673년) 3부자가 일세를 대표하는 명화가로 크게 활약하고 있었다. 그 염비가 바로 수양제의 측근 내승(內丞)으로 요동까지 양제를 호종해 곁에서 숙위(宿衛)하면서 맹활약하다가 회군 도중 하북의 고양(高陽)에서 50세로 갑자기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그림 기법이 포로가 된 염비 휘하의 화공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고구려에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서(江西) 우현리(遇賢里) 대묘(大墓)의 (도판 12)에서처럼 섬세하고 활력이 넘치며 깊이 있는 채색이 마치 수나 당초(唐初)의 사신도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통구 사신총(四神塚)처럼 화려한 채색과 복잡한 장식 구도가 육조식(六朝式) 사신도 기법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천장 층급부에 당초무늬·날아가는 신선·연꽃·산줄기·상서로운 새·용 등을 장식했는데, 활달한 필치와 입체감 있는 채색, 섬세하고 화려한 묘사법은 중기의 고졸(古拙)한 기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회화적이다.

    특히 진파리(眞坡里) 제1호분은 네벽에 구름과 꽃과 나무 등을 그리고 그 중앙에 사신도를 그렸는데, 바람에 날리는 구름과 꽃·나무 등에서 유연한 율동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런 기법이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 벽화에 연결되고 있음을 당시 고구려 문화의 주변 전파 양상으로 보아야 할지, 백제 문화의 해양적 선진성으로 보아야 할지 아직 선뜻 판단하기 어렵다.

    산경문전(山景文塼; 산 경치를 문양장식으로 꾸민 벽돌)을 비롯한 기와와 벽돌 종류의 장식문양이 고도의 회화성을 지니되, 이것이 고구려적인 회화 기법과는 상이한 양상을 띠는 것은 백제 문화의 독자성 내지 해양적 선진성으로 보는 쪽이 더욱 타당할지 모르겠다.

    다만 고구려 중기 벽화 고분의 영향이 뚜렷한 순흥(順興) 어숙묘(於宿墓)의 발견(1971년)은 고구려 문화의 신라 전파를 확신케 하는데, 이것이 순흥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죽령로(竹嶺路)가 당시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문화 통로였음을 재확인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