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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만에 입을 연 납북 454인 가족의 절규

“대통령님, 평양에 가시면 납북가족들 찾아오셔야 합니다”

  • 김당 dangk@donga.com

“대통령님, 평양에 가시면 납북가족들 찾아오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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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을 한 달 앞둔 97년 11월20일 국정원은 이른바 ‘북한 직파 부부간첩 및 연계고첩망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북한이 80년대 초반까지는 6·25 당시 월북자 등을 공작원으로 양성, 남파해 남한 내 일가·친척을 포섭하는 이른바 ‘연고선 공작’을 전개해왔으나, 이들이 고령화함에 따라 어릴 때부터 장기간 간첩교육을 받은 이른바 새세대 공작원을 남파해 운동권 인사들에 대한 직접 침투 공작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대남공작 실태는 당시 검거된 부부간첩 최정남의 진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정남은 자신이 공작원으로 남파되기 전 남한 출신 교관들로부터 한국사회 적응훈련인 ‘이남화 교육’을 받았다고 진술해 대공수사관들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최정남의 진술을 토대로 의심이 가는 실종·행불자를 추적해 인상착의를 대조한 결과 최정남이 이남화 교육을 받은 ‘홍교관’과 ‘마교관’은 지난 78년 8월 전남 홍도 해수욕장에서 실종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던 홍건표(당시 17세)·이명우(당시 17세)군으로 밝혀졌다. 또 같은 해 8월 군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실종된 김영남군(당시 17세) 또한 당시 북한 조사부(현 작전부) 공작원 김광현(62·80년 자수)에 의해 납북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국정원의 이런 수사결과 발표를 접한 최준화씨(71세)는 ‘승민이도 혹시 납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최씨의 아들 승민군(당시 17세)은 앞서의 두 고교생이 납북된 홍도에서 그보다 1년 전인 77년 8월 친구와 함께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최씨는 당시 함께 실종된 아들 친구 민교군(당시 18세)의 아버지 이헌우씨(90년 사망)와 함께 전남 해안지역은 물론 제주도까지 내려가 백방으로 자식들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두 고교생의 실종 사건을 수사했던 전 전남도경 대공분실장 O씨가 국정원 수사발표를 보고 납북 가능성을 국정원에 제보해옴에 따라 국정원이 두 학생의 주소지와 연고자 등을 내사해 사진을 입수해 최정남과 부여간첩 김동식, 귀순자 안명진씨 등에게 확인한 결과 이들 역시 북한의 사회문화부 및 작전부에서 대남 공작원 및 안내원들의 남한 현지 적응훈련을 위해 운영중인 ‘이남화 환경관’에 근무하는 남한 출신 강사임이 밝혀졌다.

최씨는 “아무런 죄도 없고 공부만 하던 애들을 납치해 이 지경으로 만든 게 원망스럽다. 간첩으로 넘어오면 또 여기서 죄인이니 이리 가도 죄인, 저리 가도 죄인 아니냐”며 안타까워 했다. 또 최군의 어머니 이동금씨(66)는 “말로는 철통같이 지킨다고 하지만 1년 뒤에도 계속 같은 장소에서 고등학생들을 납치한 것 아니냐. 걱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이제나 저제나 통일이나 되어 만났으면 한다”고 말했다.



동진호와 김만철 가족의 기구한 악연

납북자 가족들의 사연 중에서 안타깝지 않은 사연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기구한 것은 동진호의 경우일 것이다.

당시 부산에서 여고 1년생이던 최우영씨는 아버지가 납북되던 87년 1월15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이날은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아버지의 고향이자 어머니(김태주씨)의 고향이기도 한 경남 남해 본가에 모여 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 무렵 동생(당시 13살)이 어디선가 텔레비전 긴급뉴스를 듣고 허겁지겁 달려와 아버지가 탄 제27 동진호의 납북 소식을 전했다.

여수 선적 저인망 어선인 동진호는 당시 백령도 서북방 28마일 공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에 납치되었다. 정부 당국에서는 곧 풀려날 것이라고 했다. 대한적십자사의 송환 요청에 대해서도 남북 직통전화를 통해 ‘관계기관 조사후 송환해주겠다는 긍정적인 회신이 왔다.

그러나 불운이 겹쳤다. 그 무렵 신문은 부산 출신인 박종철군(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년) 고문치사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동진호가 납북된 그날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쇼크사’했다는 짤막한 신문 보도가 나오더니 며칠 안가 내무장관과 치안본부장이 경질되는 문책인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 공교롭게도 김만철(金萬鐵)씨 일가족이 일본으로 탈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씨 일가는 박종철군이 사망한 1월14일 밤 북한 청진항을 떠났었다.

국민들의 관심은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김씨 일가 12명한테 쏠릴 수밖에 없었다. 박종철군 사건으로 곤경에 몰린 정부로서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김씨 일가 탈출 소식을 집중 보도했다. 시중에서는 “종철이가 종을 치니 만철이가 그만 쳐라”라고 한다는 냉소 섞인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북한은 1월23일 해운총국 대변인 성명을 내고 김씨 일가가 탄 배가 기관고장으로 표류한 것이라며 일본에 정박한 김씨 일가가 한국으로 가게 된다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김만철씨 가족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동진호는 억류된 지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구정 무렵 동진호가 석방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최씨 가족들은 아버지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로운 사건이 터졌다. 대만이나 제3국으로 간다던 김만철씨 일가족이 남한으로 오기로 결정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최씨 모녀는 불길한 예감에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

최씨 가족은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지만 한국 정부가 김씨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공작을 진행할 때 북한은 ‘동진호 선원의 신병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한국 정부는 그 경고를 무시했다. 최씨가 보기에는 한국 정부가 동진호 선원 12명과 김만철 일가 12명을 바꾼 셈이다. ‘체제 선전’을 위해서건 아니면 박종철 사건의 파문을 가라앉히기 위해서건. 그래서 최씨는 김만철씨 가족을 제3국으로 보낸 다음에 천천히 데려와도 될텐데 왜 하필이면 그때 데려왔는지가 원망스럽다. 목숨 걸고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온 김씨 일가는 나중에 소원대로 경남 남해에 둥지를 틀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최씨 가족에게는 너무 기이한 악연이다.

북한 당국은 나중에 동진호 선장 김순근씨와 어로장 최종석씨가 공화국에 대한 적대적 정탐행위를 했으며 간첩활동을 시인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그러나 북한은 방송 말미에 동진호에 대한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고 밝혀 김씨 일가의 ‘교환 협상’ 가능성을 암시했다. 그 이후 92년 제8차 남북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북한측의 이인모 노인 송환 요구에 연계해 남한측이 동진호 선원 송환을 요구할 때까지 동진호 선원은 ‘잊혀진 존재’였다. 그리고 이산가족 문제 협의를 위한 고위급회담 대표접촉이 결렬되자 동진호는 또 잊혀져 갔다. 동진호 사건 이후에도 어선이 납북된 사례는 여럿 있었으나 여지껏 억류된 선원은 한 명도 없다.

가족 사진 없는 가족들

납북 동진호 선원 가족들한테는 정작 가족 사진이 없다. 최씨에게도 아버지와 함께 네식구가 찍은 가족사진이 없다. 납북 초기에 귀환 소식이 들릴 때 기자들이 집에 들러 사진이란 사진은 다 가져가버리는 바람에 정작 최씨는 기사에 난 가족사진을 복사해 품고 다닌다. 최씨가 늘 소지하고 다니는 스크랩에는 사진말고도 동진호 관련 기사 그리고 호소문 등이 담겨 있다. 그중에는 동진호 선원 양용식씨(납북 당시 27세)가 지난 96년 1월13일자 북한 ‘통일신보’의 ‘내 삶의 보금자리’라는 수기에 썼다는, 북한 여성과 결혼해 황해북도 은파군 공장기술자로 잘 살고 있다는 기사도 있다. 저쪽뿐만 아니라 이쪽의 납북 선원 아내들도 상당수는 재혼을 했다. 최씨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지만.

최씨는 그동안 통일원(통일부)이며 안기부(국정원)며 적십자사에 부친의 생사확인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냈으나 회답은 늘 북한은 통제된 곳이라 생사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99년 1월말 신문 보도에서 아버지가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다. 생사 확인을 애타게 기다려온 가족에게 먼저 알려주지 않고 언론에 발표한 국정원의 처사가 원망스러웠지만 최씨는 그래도 살아계시다는 소식이 반갑기 그지 없었다. 최씨는 당장 국정원에 어느 수용소인지 문의했으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씨를 두 번째 만났을 때 그의 스크랩 표지 안쪽에는 이런 메모가 붙어 있었다.

“아빠가 계신 곳(추정) ●평남 개천시 14호 정치범 수용소 ●명칭:국가안전보위부 14호 관리소 ⇒탈북자의 증언(2000.2.29 현재) 2000.3.16 현재 아버지가 납북된 지 4810일”

동진호 선원 박광현씨(당시 38세)의 아내 정경자씨에게도 남편 사진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아이들 교육용 교재를 파는 사무실로 정씨를 찾아갔을 때 정씨는 결혼식 사진을 들고 나왔다. 정씨는 “동진호 선원들 사진은 전부 언론사에 있다. 87년 당시 석방된다는 보도가 나올 때 기자들이 다 가져 갔다. 그때는 당연히 곧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진 같은 것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래서 빛바랜 결혼 사진밖에 없다”고 했다.

정씨의 남편 박광현씨는 원래 장사를 하다 벌이가 시원찮아 배를 탄 지 보름 만에 납북되었다. 정씨는 동진호가 납북되고 나서야 남편이 배를 탄 사실을 알았다. 남편이 외국으로 돈 벌러 간다고 하고 가족들 몰래 고깃배를 탔기 때문이다. 당시 세 살이던 외아들은 지금 고교 1년생이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남편이 말한 대로 아들에게 ‘아버지는 외국에 돈 벌러 가셨다’고 했지만 언제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다른 납북 선원 가족들처럼 정씨도 남편의 생사 여부를 모른다. 이혼이나 사별이라면 차라리 깨끗할 텐데 북한에 납치되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으니 미칠 노릇이라고 했다. 정씨는 솔직히 빚과 짐만 안기고 떠난 남편이 원망스럽다고 했다. 또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순한 사람들이 대우를 잘 받는 것을 볼 때, 가장이 북한에 잡혀가고 남은 가족에게 아무런 도움이 없는 정부 당국이 원망스러웠다고 했다.

“비행기 사고나 삼풍백화점 사고 같은 대형 사고가 터지면 피해자들이 대부분 가진 자들이지만 많은 보상을 받는데 납북 어부들은 아무런 보상도 없다. 오히려 감시나 당하고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아왔다. 탈북자는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데 대한민국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 있는 정부가 가장을 잃은 가정의 생계를 보장해주지 않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 또 납북자는 엄연히 특수한 유형의 이산가족인데 일반 이산가족은 생사 확인하는데도 경비를 지원해 주면서 납북자 가족은 지원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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