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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연구|정주영가의 30년 상속스토리

끝나지 않은 후계전쟁 4000억짜리 옥새는 어디로

  • 이형삼 hans@donga.com

끝나지 않은 후계전쟁 4000억짜리 옥새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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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심중은 아들 몽구씨가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고 있었다. 그가 혼자 힘으로 현대자동차써비스와 현대정공을 창업한 것은 현대자동차 인수를 위한 전초전의 성격이 짙다. 몽구씨는 자동차써비스를 통해 현대자동차의 수도권 이외 지역 판매권을 얻어내는가 하면, 현대정공을 통해 갤로퍼 등의 RV(레저용 차량)를 생산함으로써 현대자동차의 운신 폭을 좁혔다. 명색 세계 10위권의 자동차 메이커인 현대자동차는 현대정공을 의식한 나머지 RV 애호가의 세계적인 급증세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RV 하나 내놓지 못했다.

몽구씨는 96년 1월 그룹 회장에 취임한 후 처음으로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대자동차는 그룹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자동차 없는 현대그룹은 상상할 수도 하는 없다”고 못박았다. 숙부와 조카 사이엔 이내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2년 남짓 계속되던 미묘한 신경전은 98년 기아자동차 국제입찰을 둘러싸고 전기를 맞게 된다.

세영씨 부자는 처음부터 기아차 인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외환위기로 경영여건이 악화된 마당에 빚투성이 기아차를 인수할 경우 현대차마저 부실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 관계자의 얘기는 다르다. “세영씨 부자는,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하면 현대차의 덩치가 지나치게 커져 정명예회장이 자신들에게 자동차를 넘겨줄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기아차 인수에 극력 반대했다”는 것.

세영씨측은 98년 8월의 1차 입찰에서 기아차의 입찰가를 100원으로 써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주영 명예회장은 “현대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며 대로했고, 그후의 입찰은 몽구 회장에게 일임했다. 몽구 회장은 10월의 3차 입찰에서 삼성과 대우를 제치고 기아차 인수권을 따냈다. 이제 세영씨 부자의 낙마(落馬)는 시간문제였다. 그해 12월 정명예회장은 몽구 회장을 현대차 및 기아차 회장에 임명하고 몽규 회장은 부회장으로 ‘강등’했다. 세영씨는 이사회 의장에 눌러 앉혔다.

그로부터 불과 두 달 후 마침내 최후의 순간이 왔다. 지난해 2월26일 열린 현대자동차 주총에서 몽구 회장은 이사진에 자신의 측근을 앉히려 시도했다. 숙부가 지난 30여년간 현대자동차에 구축해놓은 인맥이 워낙 두텁다 보니 명색이 회장인 자신의 말발조차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영씨는 조카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얘기가 정명예회장의 귀에 들어가면서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 3월2일, 격노한 정명예회장은 아우를 불러 올려 최후통첩을 했다. “현대자동차의 지분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맏형의 명령에 토를 단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다. 세영씨는 그 자리에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물러났다. 몽구 조카의 몫이던 현대산업개발을 ‘위자료’로 받은 것만도 형에게 감사해야 했다.

아버지를 향하여

숙부와의 상속분쟁에서 승리한 몽구 회장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내친 김에 여세를 몰아 그룹 후계자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질 참이었다. 그러나 너무 앞서 나갔던 탓일까. 이번엔 그가 ‘모난 돌’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복병(伏兵)은 동생 몽헌이었다.

장남 몽필씨와 4남 몽우(夢禹)씨는 사망했고, 3남 몽근(夢根·58)씨, 7남 몽윤(夢允·45)씨, 8남 몽일(夢一·41)씨는 이미 그룹에서 독립했으며, 6남 몽준씨는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현대그룹의 차세대 맹주로 거론될 형제는 몽구·몽헌씨 두 사람뿐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형제들의 분가가 완료된 90년대 중반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원하든 원치 않든 라이벌 의식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좀더 초조했던 쪽은 몽구씨였다. 몽헌씨가 현대의 불모지대나 다름없던 전자 분야를 개척, 현대전자를 설립 10년 만에 연 3조원의 이익을 내는 알짜기업으로 키운 데 비해 몽구씨는 그에 비견될 만한 경영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97년 몽헌씨는 몽구씨가 맡고 있던 현대상사까지 수중에 넣었고, 현대 삼성 LG간의 3각 빅딜 과정에도 현대쪽 창구를 맡아 LG반도체 빅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런 사정을 의식한 몽구씨는 그룹 회장 취임 직후부터 아버지의 오랜 꿈이었던 종합제철소 사업을 추진했으나 중복투자의 폐해를 우려한 정부의 반대와 IMF 환란에 부딪혀 좌절됐다. 정명예회장은 몽구씨가 회장에 취임하던 96년, 없던 그룹 부회장 자리를 일부러 만들어가며 몽헌씨를 앉힌 다음 지주회사격인 현대건설을 맡겼다. 이어 98년 1월에는 그를 회장으로 승진시켜 몽구씨와 공동으로 회장직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몽구씨측을 긴장시켰다.

그후 몽구씨는 아버지의 또다른 숙원인 대북사업을 실현해 신임을 얻고자 했지만 여기에서도 몽헌씨에게 밀리고 만다. 89년에 북한을 다녀온 정명예회장은 몽구씨를 통해 북한측과 물밑 접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몽헌씨는 98년 초 아버지로부터 “대북사업을 재개하라”는 지시를 받자 마자 이익치(현 현대증권 회장) 김윤규(현 현대건설 사장) 등의 핵심참모 라인을 가동,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 관계자들과 마주앉아 협상의 물꼬를 텄다. 금강산 유람산 관광사업의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성사시킨 주인공도 몽헌 회장이었다.

이 과정에도 몽구씨와 몽헌씨는 마찰을 빚었다. 당시 현대의 대북 접촉 채널로 활동한 일본 규슈대학의 고바야시 게이지 교수에 따르면 98년 2월 싱가포르에서 갖기로 했던 북측과의 첫 회합이 이틀 전에 돌연 취소됐다고 한다. 원인을 제공한 것은 현대였다. 고바야시 교수의 설명.

“정명예회장은 북한과 교섭 직전 몽헌씨를 회장에 앉히면서 몽구 회장은 국내, 몽헌 회장은 해외를 맡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북한이 해외냐 국내냐를 두고 이견이 있었던 듯하다. 그 전부터 북한과 접촉하고 있던 몽구 회장측에서 북한측에 ‘몽헌 회장과의 교섭은 현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는 팩스를 보냈는데, 사정을 모르는 북한은 이 때문에 서둘러 회합을 취소했다. 이 싸움은 명예회장이 ‘북한과의 교섭책임자는 몽헌 회장으로 한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해결됐다.”

이 해프닝을 계기로 정명예회장은 대북사업에서 몽구 회장 라인을 배제하고 이익치 회장, 김윤규 사장을 비롯한 몽헌 회장 계열 경영진이 맡는 것으로 창구를 일원화했다. 이들은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등과 직접 접촉하며 사업관련 협의를 해왔는데, 송부위원장은 최근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 장관과 실무협의를 통해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이른 인물이다. 몽헌 회장은 송부위원장과 사석에서 술잔을 주고받을 만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박장관은 남북 정상회담 협의과정에 현대 관계자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박장관이 송호경 부위원장과 접촉하던 시점에 정몽헌 회장이나 이익치 회장이 중국에 머물렀던 사실은 우연의 일치만으로 보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MK의 선제공격

최근 몽구 회장의 이익치 회장 인사로 촉발된 몽헌 회장과의 충돌은 이와 같은 세 불리 상황을 뒤집어보려는 몽구 회장의 선제공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몽구 회장측은 특히 자동차 소그룹 분리를 앞두고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설비 투자비용이 많이 들고 할부 판매 부담 때문에 막대한 자금력을 필요로 하는 자동차사업의 특성상 반드시 현대증권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명예회장과 몽헌 회장의 신임을 등에 업은 이익치 회장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 몽헌 회장이 해외 출장을 떠난 시점을 기회로 삼았다. 전격적으로 인사를 단행하면 명예회장으로서도 이를 번복하진 못하리라고 예상한 듯하다.

몽구 회장은 96년 몽헌 회장으로부터 비슷한 경우를 당한 바 있다. 몽구 회장이 그해 8월 남미 출장 중일 때 몽헌 부회장이 현대건설 사장에 대한 전격 인사를 단행했던 것. 그는 당시 몽구 회장 계열로, 몽헌 부회장과 의견충돌이 잦았던 심현영 현대건설 사장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이내흔 현대산업개발 사장을 앉혔다. 그룹 종합기획실장을 역임한 심사장의 그룹내 위상도 만만치 않았지만, 정명예회장은 몽헌 부회장의 조치를 사후 승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명예회장의 반응이 달랐다. 몽헌 회장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몽구 회장의 인사조치를 철회한 것이다. “몽헌 회장은 현대전자를 통해 충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으므로 현대증권은 자동차 그룹으로 가야 한다”는 몽구 회장측의 간곡한 설득도 먹혀들지 않았다. 몽헌 회장은 귀국 후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이익치 회장 인사를 원점으로 돌리면서 몽구 회장 계열인 고려산업개발(현대자동차가 최대 주주) 회장 인사까지 단행해 그룹 회장의 파워를 과시했다.

그렇다고 몽헌 회장의 앞길이 순탄하게 트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현대증권은 지난해 업계 1위로 떠올랐지만 거래수수료 감소 등에 따라 지난해 수준의 수익을 내기 힘들 전망이고, 현대건설도 건설경기 침체로 내수 부진에 허덕이고 있다. 주력 계열사인 현대전자 또한 기복이 심한 반도체 가격 때문에 안정된 수익이 불투명하다.

더욱이 현대그룹은 부채비율 200%를 맞추기 위해 구조조정보다는 유상증자에 주력했던 탓에 투자자들의 외면으로 주가가 크게 떨어진 상황이다. 지난해 증권시장에 들어온 32조원의 증자액 중 12조원이 현대 계열사 증자액이었다. 이 때문에 매출액 순위 1위의 현대그룹 시가총액은 3월24일 종가 기준 26조5063억원으로 삼성그룹(74조3559억원)과 SK그룹(37조296억원)에 뒤지는 것은 물론, 삼성전자 주식 시가총액(55조7605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우여곡절 끝에 형제간의 내분은 일단 수습됐지만, 몽구와 몽헌 두 아들이 서로 아버지의 ‘낙점’을 주장하며 엎치락뒤치락하는 광경은 정명예회장의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변함없는 ‘그랜드 디자인’

그러나 현대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번 사태가 정명예회장 특유의 후계자 관리술과 분가(分家) 철학에서 비롯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본다. 향후의 상속과 계열사 분리에 대한 정명예회장의 ‘그랜드 디자인’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으며, 언젠가 그것을 구체화하는 일도 결국 그가 주도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아버지를 의식한 두 형제의 경영 경쟁도 그 ‘디자인’에서 웬만큼 의도됐던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명예회장은 현대중공업과 현대건설 두 핵심 지주회사의 최대 지분(각각 11.56%, 4.58%)을 거머쥔 채 후계구도를 못박지 않음으로써 그룹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2세들의 경쟁을 자극하는 한편 이를 통해 그들의 능력과 성향을 치밀하게 관찰해왔다.

현대중공업과 현대건설의 정명예회장 지분은 다른 계열사에 대한 거미줄 같은 출자를 통해 그룹 전체를 정교하게 지배하고 있다. 중공업은 자동차 증권 상사 고려산업개발의 1∼2대 주주며, 건설 역시 상선 자동차 중공업 등의 주요 주주다.

포스트 정주영 시대의 진정한 후계자는 시가 4000억원대에 이르는 정명예회장의 핵심 지분을 물려받을 인물이다. 그러나 정명예회장은 이 4000억원짜리 ‘옥새(玉璽)’의 향방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다.

그는 3월27일의 경영자협의회에서 일단 몽헌 회장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몽헌 회장의 뒤에는)제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일은 다 저와 의논할 것이니까 아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며 수렴청정의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몽헌 회장에게 자신의 지분을 떼 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10년 전 그는 한 인터뷰에서 “언제까지 현대 경영에 관여할 것이냐”는 질문에 “한 25년쯤은 더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되받았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는 백수(百壽)를 확신하고 있다. 부축을 받지 않으면 거동이 불편한 몸이지만 기력은 여전히 왕성하다고 한다. 그가 지프를 타고 몇시간씩 서산농장을 돌아볼 때는 동승한 임원들이 먼저 힘에 부쳐 꾸벅꾸벅 졸 정도라는 것.

이처럼 건강을 자신하는 정명예회장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는 실질적인 경영권을 할양하지 않고 저울질을 계속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됨에 따라 현대의 대북사업이 활기를 띠게 된다면 몽헌 회장의 행보가 빨라질 수밖에 없고, 이 경우 몽헌 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정명예회장이 생각보다 빨리 특단의 조치를 취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몽헌 회장의 구상중인 대북사업은 영농사업과 공단 개발, 관광·레저사업에 이르기까지 1, 2, 3차 산업을 종횡으로 넘나든다. 경제기반이 무너진 북한으로선 실로 국가를 새로 세우는 작업에 가깝고, 몽헌 회장으로서도 전 그룹 차원의 총력을 쏟아부어야 할 판이다.

몽헌 회장은 대북사업과 관련, 4월4일 정명예회장과 일본을 방문했다가 8일 함께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명예회장만 귀국했다. 몽헌 회장은 남북 정상회담 합의사실이 발표되던 4월11일 현재 중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끌었다.冬

신동아 200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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