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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의 이 사람의 삶|소설가 천승세

한국문단의 영원한 ‘신인’

한국문단의 영원한 ‘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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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승세의 문학을 얘기할 때 바다를 빼놓을 수 없다. 희곡 ‘만선’을 비롯하여 중편 ‘낙월도’, ‘신궁’ 등은 빼어난 어촌소설이다. 그는 ‘신궁’을 쓰기 위해서 거의 12년 동안 거문도를 들락거렸다. 그러나 거기서 멈춘다면 천승세가 아니다.

“연근해에 대한 체험은 할 만큼 했고 작품으로도 담아냈는데, 문제는 원양을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원양으로 나가보자고 결심했지요. 남양이 좋긴 한데, 남양은 여기저기 기항지가 있어서 술도 있고 여자도 있고, 그래서 뱃놈이 외국 여자하고 여차여차해서 애도 낳고…그게 더 소설적이라고 할지 몰라도 내 문학 기질하고 맞지 않아요. 더 처절한 곳이 어디냐, 그게 바로 북양이에요. 떠났다가 돌아올 때까지 기항지가 없어요.”

그는 결국 1973년에 “황천(荒天) 항해로 인하여 생명이 절(絶)한다 해도 본인은 일체의 배상요구를 않겠습니다”라는 각서에 도장을 찍어 제출한 뒤에, 동태잡이 원양어선에 몸을 싣고 캄차카반도로 향한다.

“도봉동의 8평짜리 단칸 셋방에 굶은 제비새끼들처럼 오글거리는 자식새끼 다섯을 남겨둔 채, 죽어도 찍소리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가면서 생각했어요. 문학 혹은 예술의 피는 어느 정도로 진하기에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해서 죽음의 길이나 다름없는 이 고난의 길로 자청하고 나가야 하는가, 끊임없이 자문했지요.”

한 개의 태풍이 생기면 자(子)태풍이 너댓 개씩이 파생하고, 1200t짜리 대형어선이 파도 속에 형체도 없이 묻혔다가 솟아오르는 험난한 항해를 체험하면서 그는 여기를 왜 왔던가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나 그는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 시간 이후에 어떤 글쓰는 놈이 시도한다면 몰라도, 오늘 천승세가 당신하고 얘기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까지는, 약소대한의 천승세라는 소설가가 동태잡이배를 타고 북태평양 그 더러운 바다를 항해한 것이 현역 소설가로서는 세계에서 유일한 일입니다. 문학 예술의 풍토가 우리하고 다른 외국 같았으면 난리 났을 겁니다. 이 말을 이가 갈려서 꼭 해야 되겠어요. 우리나라가 3면이 바다 아니오. 정치가든 역사학자든 해양입국입네 야단들 아닙니까. 세계 최초로 현역 작가가 북태평양의 사지에 나갔다 왔으면 신문사마다 달려들어서 연재하자 뭣하자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한 군데도 없어요.”

그가 선택한 ‘외져서’ 살아온 삶

한 세월이 흐른 뒤, 월간 ‘한국문학’에 북양 나갔던 체험을 살려 ‘빙등(氷登)’이라는 제목의 작품 연재를 시작했으나, 안기부의 압력으로 이내 중단됐다. 당시 ‘호지명’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천승세는 반체제 작가로 낙인 찍혀서 작품활동 자체를 방해받고 있었다. 1985년, 그러니까 5공시절 얘기다.

“우리나라에 어민사를 정리해 놓은 게 어디 있습니까. 처음 계획은 조선 초기부터 시작해서 한국어민사 전체를 소설에 담아 10부작으로 쓰자, 해서 무수한 자료를 수집했어요. 뱃놈 소설이라는 게 재미가 없을 수가 없어요. 조선 초기부터 중종 5년까지를 담은 4500장은 장롱구석에 처박아 두었고, 전체 중에서 끝부분에 해당하는 ‘북양’ 부분만이라도 오는 6월까지 완성하려고 하는데 이제 진이 빠져서 잘 될지 모르겠어요.”

그는 탁월한 문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러울만치 외진 곳으로 제쳐져 살아왔다. 그는 작품집 ‘황구의 비명’ 후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말고, 그가 권력과 문단 일각으로부터도 ‘외져서’ 살아온 삶은 그가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외진 자리가 바로, 머리와 가슴을 온통 ‘예술혼’으로 단단히 들여채운 사람이 서 있어야 할 제자리가 아닐까.

그는 전두환 시절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절필하기로 선언했다가 얼마 안 가서 신문 연재소설을 쓰는 등 태도를 바꿔버린 문인들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이 비판적인 문인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1인당 4000달러씩 주면서 해외여행을 권유했을 때 얼씨구나 하고 비행기를 타고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배신감을 토로했다. 그 자신은 절필선언을 지키느라 콩트만 써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고 했다. 그는 그 자신이 문인이면서도 문인들의 행태에 할 말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너도나도 전집(全集)을 발간하는 세태에 대해서도 그는 독설을 쏟아놓았다. 소설이라는 것이 끝이 없는 난고의 길이고, 전집이란 작가의 문학적인 일생을 정리하는 것인데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전집을 낼 수 있느냐고 했다.

이야기가 천상병 시인에 이르자 그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우이동 판잣집에서 셋방살이할 때, 우이동 전체에서 전깃불 없는 집이 바로 그 집 하나였어요. 그때 천상병이가 내 단칸방에서 7개월을 함께 살았어요. 우리 집에 얹혀 살게 된 사연이 기구합니다. 이 사람이 억울하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다 나오니까, 문인들이라는 자들이 천상병만 나타났다 하면 다 도망가버려요. 행여나 같이 어울렸다가 다칠까 봐. 문인이라는 놈들이 이렇게 더러운 놈들이에요. 그래서 내가 판잣집 단칸방으로 데리고 갔지요. 한 방에서 내 마누라랑 나랑 천상병이랑 다같이 자는 거요. 요놈이 아랫도리를 붙들고 ‘부인, 요강 가져오세요!’ 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우리 마누라가 오줌빨래 다 했어요.”

천상병과 청승세

우이동 셋방에서 쫓겨나 다른 곳으로 이사할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셋방 보증금이 1만2000원이었는데, 이사하던 날 인근 가게에서 외상값을 갚으라고 했다. 천상병이 천승세 이름으로 외상술을 마셨는데 그 돈이 1만2000원을 넘었다. 외상값을 갚고 나니 그야말로 무일푼으로 온가족이 쫓겨났다. 그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상병이 저 놈을 나 아니면 어느 놈이 보호하겠나” 하는 생각 때문에 허허 웃고 말았다는 것이다. 범인으로서는 흉내내기 어려운 도량이다.

천승세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문장의 도처에 자리하고 있는 토속 민중언어다.

“적어도 한 나라의 소설가라면 그 나라 언어를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문학공부를 할 때 국어사전 하나 정도는 아예 통째로 외워버렸어요. 예를 들어서 호랑이 새끼를 ‘개호주’라 하는데 아주 아름다운 우리말입니다. ‘엘레지’라고 하면 외국말인 줄 아는데 그가 아녜요. 개좆을 그렇게 부릅니다. 금성을 샛별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그건 ‘개밥바라기’예요. 이런 걸 글 쓴다는 사람들도 모르고 있어요. 나는 팔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설가의 문장은 정확해야 하는데 요즘 소설가들 너무 공부를 안 해요. 어떤 소설 읽다보니까 ‘그녀를 똑바로 직시했다’는 문장이 나오던데, 도대체 그게 말이 됩니까.”

문학마당은 진실과 정의에 순교하는 막장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나는 그의 작품 ‘황구의 비명’을 읽다가 실감나는 의성어 한 대목에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좌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를 ‘쐐에쐐에, 호그르호글, 터텁텁, 꼬골’이라고 표현한 부분이었는데, 나는 하릴없이 책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실제로 변기의 물을 내려보기까지 했다.

─문재(文才)란 타고나는 것이라고 보세요, 아니면 학습에 의해서 작가적 역량이 갖춰질 수 있다고 보세요?

“가장 바람직한 것은 타고나는 경우예요. 50은 타고난 재주이고, 그 뒤에 식견이나 학식 이런 게 붙어서 나머지 50이 되는 거라고 봅니다. 어떤 소재든 맡기면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특정한 소재 아니면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상황변화에 아랑곳없이 똑같은 문장 운용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주 재주가 모자란 사람들이에요. 우리 문단에 어중이떠중이가 너무 많습니다. 나는 심지어 이런 생각을 다 해봤다니까요. 글 쓴다는 놈들을 한군데에 다 모아가지고 백일장을 열어서 자격 없는 놈들은 걸러내버렸으면 좋겠다고.”

─문학적 자질말고, 진보적인 문학인이 갖춰야 할 덕목이 어떤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진정한 진보는 사회적·정치적 모순과 싸울 게 아니라 온당치 못한 평화하고도 싸워야 합니다. 습득된 선의는 본질악보다 더 나쁜 경우가 많아요. 문학마당이란 궁극적으로 진실과 정의에 순교하는 막장입니다. 그런 정신이 없이 만들어진 문학작품이라면 차라리 장소팔의 만담보다 못해요.”

나는 애당초 천승세 선생과의 인터뷰를 위해 녹음기를 준비해갔다. 그리고 말했다. “혹시 제가 선생님보다 오래 살게 되면 육성이라도 녹음해 뒀다가 영결식장에서 조문객들에게 들려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얘기에 가시가 너무 많았다.冬

신동아 200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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