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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50주년 특별연재

중공군 참전 경고한 주은래… 자만에 빠진 도쿄의 맥아더

‘잊혀진 전쟁’ 그 결정적 순간들의 秘錄(중)

  • 이정훈 hoon@donga.com

중공군 참전 경고한 주은래… 자만에 빠진 도쿄의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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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 아더 원수가 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7함대 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에게 강원도 원산 상륙작전을 명한 것은 10월1일이었다. 이에 따라 스트러블제독은 제7연합기동함대를 편성해 청진 이남의 모든 북한 해안을 봉쇄했다. 하지만 병력 이동과 장비를 싣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 맥아더는 10월15일로 잡은 원산상륙 D데이를 20일로 연기했다. 맥아더의 구상은 원산상륙이 이뤄지면 10군단을 평양으로 진격시켜 8군과 함께 평양을 함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가 등장했다.인천에서 호되게 얻어맞은 인민군이 급히 30여 명의 소련 기술자를 불러들어 원산 앞바다에 기뢰를 부설했던것.때문에 원산 앞바다로 접근하던 미 해군 함정 3척이 대파되었다.

기뢰를 제거하는 것을 소해(掃海)작전이라고 한다.그리하여 10일부터 사상 최대의 소해작전이 시작되었다.이 작전에는 미 해군 소해정 10척, 일본 해상보안청 소해정 21척, 한국 소해정 1척 등 모두 32척이 투입되었다. 원산 앞바다 소해 작전에 일본 해상보안청이 참여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오쿠보 타게오 일본 해상 보안청 장관에게 소해작전 참여를 요청한 이는 미극동해군 참모부장 바크 소장이 었다.이에 대해 요시다 총리는 ”소해작전에 참여하되 비밀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그래 서 다무라 대령을 지휘관으로 제1-2-3-10대 소속 소해정 21척이 원산으로 이동했다.이중 제1대는 이미 UN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협력한 적이 있고, 제2대는 군산 소해작전을 지원한 바 있었다.

10월17일 원산 앞바다에서 제 2대 소속 소해정 1척이 기뢰와 접촉해 침몰하며 1명이 죽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그러자 제2대 지휘관인 노세쇼고 중령이 ”미군의 작전명령에 반대한다”며 제2대 소속 소해정 3척을 이끌고 일본으로 돌아가, 곧바로 책임을 지겠다면 사표를 던졌다.



이 사건은 1978년까지 일본에서는 비밀에 부쳐졌다.맥아더가 초안을 잡아준 일본 헌법(일명 평화헌법)은 ‘일본군은 해외 출동은 물론이고 외국군과의 공동 작전을 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었 다.따라서 일본 해상보안청 부대의 한국전 참여는 일본 헌법 위반이 아닐 수 없다.

10월19일 미 해병1사단을 태운 상륙함정들이 원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소해작전이 끝나지 않아 이 함정들은 12시간 동안은 북쪽으로, 나머지 12시간 동안은 다시 남쪽으로 왔다갔다 했다. 이 시 간 보내기가 얼마나 지루했던지 미 해병 대 병사들은 ”우리가 요요작전을 하러 왔다”고 자조했다. 요요는 실에 묶인 공을 던지면, 그 공이 실의 탈력성 때문에 되돌아오는 놀이 기구다.

맥아더의 오판

그러나 10월10일 이미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은 원산을 점령했고, 19일에는 미 1군단이 평양을 점령해버렸다. 요요작전 1주일 만인 10월26일 미 해병1사단은 아주 안전하게 원산 해안에 행정상륙했다. 더웃기는 것은 미 육군 7사단이었다.7사단을 태운 상륙함정들은 북한 앞바다에 기뢰가 부설돼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앞바다에 10일 동안 떠 있었다.그리고 함경남도 이원 앞바다로 올라가 29일 7 사단 병력을 행정상륙시켰다.

평양이 8군에 점령되자 맥아더는 작전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맥아더는10월17일 미 육군 7사단은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지금은 양강도 헤산)으로 진격케 하고 미 해병 1사단은 장진호가 있는 함경남 도 장진군 쪽으로 진격케 하는 명령을 내렸다.이로써 UN군의 전체 통솔이 매우 이상해졌다.서부 전역에서는 미 8군이, 동부전역에서는 미 10군단이 독자 작전권을 갖고 진격하는 가운데, 10월1일 38선 돌파 이후 국군은 정일권 총참모장의 명령에 따라진격하는 구도가 돼버린 것이다.

이것은 UN군으로 매우 큰 실수였다.정말로 맥아더 원수가 한국전을 총지휘하고 싶었다면 그는 도쿄가 아닌 한국으로 옮겨와서 지휘했어야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도쿄는 한국에서 너무 멀어, 전쟁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없다.원 거리에서 UN군 각 부대를 분할함으로써 자신의 지휘권을 공고히 한 맥아더의 행동은, 임진왜란 때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연상시킨다.

당시 도요토미는 도쿄 근처에 있는 하카다에 머물며, 조선으로 출병한일본군을 원격 조정했다.조선으로 출병한 일1본군은 한양성을 함락한 뒤 2개군으로 재편됐다.그묘 1개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고 평양으로 진격했고, 또 하나의 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끌고 두만강 중류인 함경(북)도 회령까지 진격해 선조의 두 아들을 생포했다.도요토미는 이렇게 두 장수를 경쟁시킴으로써 자기의 권위를 확인했는데,그 틈을 뚫고 명나라군이 참전해 왜군을 밀어붙였다.358년 전의 역사 교훈을 맥아더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UN군이 38선을넘어섰을 때부터 서방 언론은 베이징을 주목했다.국군이 38선을 넘은 1950년 10월1일은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 전체를 석권한 지 꼭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이날 중국 외상 저우언 라이는 ”중국 인민은 이웃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침략받는 경우 이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10월3일 밤 저우언라이는 다시 파니카 베이징 주재 인도 대사를 불러 ”만일 미군이 38선 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온다면 중공도 개입할 것이다”고 말하고 이를 미국에 전달케 했다.

무제한 북진 명령

9월27일 미국 통합참모본부는 맥아더 원수에게 ‘귀하의 작전목표는 북한군을 격멸하는데 있음.이 목표를 달성하기 이해 38선 북쪽 지역에서의 군사작전을 인가함.단 소련이나 중공이 대부대를 북한 에 투입했거나 군사적으로 위협을 표한 사실이 없을 때로 한정함.만주와 소련영토에 대해서는 일체 군사작전을 금지함.소련군이 개입해올 경우 수세를 취해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 것.중공군이 개 입해올 경우에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전투를 계속할 것‘이라는 훈령을 내린 바 있었다.(9·27 훈령).

그러나 미국은 UN에서 ‘통한(統韓)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중국의 경고를 무시했다.오히려 중공군이 참전할 경우 현지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취할 수 있는 재량권의 폭을 넓 혀주었다.10월15일 이러한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트루먼 미 대통령은 괌섬 동쪽의 웨이크섬으로 날아와 맥아더 원수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트루먼이 ‘중국이나 소련이 참전할 가능성‘을 묻자 맥아더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주에는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있는데 그 가운데 압록강 연변에 배치된 것은 10만~12만5000명이다.따라서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더라도 그 병력은 고작 5만~6만일 것이다.중공군은 공군이 없지만 우리는 한국에 기지를 둔 공군이 있다.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평양에 내려오기도 전에 전부 궤멸될 것이다.”

이 회담후 맥아더는 UN군의 북진 한계선을 없애버렸다.10월2일 그가 내린 작전명령 2호에서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서해안의 평북 정주에서 동해안의 함남 흥남까지(이른바 청천강)만 진격하도 록했다.그런데 10월17일 작전명령 4호를 내려 평북 선천에서 함국 학성군(지금은 김책군)까지 진격하도록 했다(맥아더 라인).

그런데 10월24일 맥아더 원수는 다시 ”모든 작전 제한선을 없애고 국군과 UN군은 모든 지상부대를 투입해 신속히 한·만 국경선까지 밀고 올라가라”고 지시했다.반공주의자인 맥아더는 중공을 사탄으로 보고 자신에 차서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그런데 맥아더의 카리스마에 눌려 있던 미 통합참모본부는 ”우리는 귀하가 그러한 명령을 내린데는 틀림없이 어떤 정당한 사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하 지만 그러한 조치는 우리도 다소 관심이 있으니 우리에게도 통보해 주기 바랍니다”라는 아주 공손한 질문 형태의 조치로 이를 추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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