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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홍욱희의 새천년 세상읽기

의약분업 사태로 본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

  •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 환경학박사

의약분업 사태로 본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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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개혁을 추진하는 리더십이 합리성과 공정성을 결여해서는 일을 성사시키기 힘들다. 새 정부는 의약분업과 함께 그린벨트 해금도 추진하고 있는데, 이 방안은 피해당사자가 별로 없는데도 시민환경단체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에 실패하여 추진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역감정을 해소한다면서 정부의 일방적인 독주로 추진되는 박정희 대통령 추모사업이나 위천공단 건설 사업 등은 지역 갈등을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할 수도 있다. 그 사업의 추진이 공정하고 합리적이지 못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의약분업 제도가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대에도 추진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그 시행방안의 작성 과정에 시민단체들이 참여해서 공정성과 합리성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만약 보건복지부가 구태의연하게 관변단체나 참여시키고 친정부 인사들로 위원회를 구성해서 그 작업을 맡겼다면 의약분업의 실행은 아직도 요원했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갈등의 해소에는 합리성과 공정성에 바탕을 두는 강력한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둘째, 제도와 관행의 개선은 점진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지난 수십년간 급속한 발전과정에 우리 국민은 어느새 매사에 서두르는 속성을 갖게 됐다. 이렇게 매사를 서두르는 관행이 한편으로는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처럼 너무 서두르는 습관이 다시 한번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현상을 최근에 똑똑히 목격하고 있는데, 그것은 벤처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지원이다. 벤처산업 육성은 애초에 IMF 사태로 허약해진 우리 기업들의 사기를 높이고 굴뚝산업 위주의 후진국형 산업구조를 선진국형 산업 구조로 거듭나게 한다는 좋은 목적에서 출발했다. 이제 한바탕 광풍이 몰아치고 난 지금, 그 결과는 어떠한가?

기업은 기업들대로 그동안 길러 놓았던 우수한 인재를 벤처산업에 빼앗겨 허탈해하고, 남은 인력들은 대체 인력을 구할 수가 없어서 빠져나간 사람의 몫까지 처리해야만 하는 격무에 시달리고, 사회는 사회대로 일확천금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위화감이 커지고, 주식시장 과 코스닥 시장은 혼란에 빠지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국민소득 1만불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과거처럼 급속한 개혁 처방이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식의 개혁은 국민들로 부터 예기치 못한 반발만 불러일으킬 따름이다.

지역갈등 해소를 위한 대책이나 정치권 개혁을 위한 방안들, 정부의 구조조정을 위한 조치들이 그 당사자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 면 주도면밀하게 작성된 행동 계획들이 점진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이런 중장기적인 시책의 수행에 최고 통치자의 강인한 리더십이 전제해야 함은 물론이다.

갈등구조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셋째, 갈등 해결을 위한 연구가 폭넓게 이뤄져야 한다. 대부분의 사회적 갈등은 그 역사가 길고 그만큼 사회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면화하면서 그 갈등구조 역시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복잡해진 사회적 갈등의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그 역사가 아주 긴 사회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남북의 정상이 만나기로 되어 있는 지금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런 반공 이데올로기의 득세로 인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민주인사들이 고초를 겪었던가. 필경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가장 심각한 갈등의 하나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일부 기득권층과 또 그런 사람들 때문에 물심양면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이념적 갈등일 것이다.

이제는 노사 관계 양상도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똑같은 노동자지만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어떤 노동자는 연봉이 억대를 넘어서 여느 회사의 경영자들보다 더 풍족한 생활을 누린다. 그런가 하면 파견 근로자가 정규 근로자보다 많은 직장이 흔하고, 시간제 근로자도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다. 이런 상황에 전통적인 노사 관계의 정립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더욱이 재택 근무가 일반화하고 외국인 노동자도 점점 더 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이처럼 다원화, 다양화하는 사회 속에서 갈등의 해결책을 찾는 작업은 이제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어느 한쪽의 사정을 감안해서 마련하는 갈등 해소책은 다른 한쪽의 공감의 불러일으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회적 갈등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활발하다.

이런 선진국들에 반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 갈등 문제를 연구하는 변변한 연구소조차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적 갈등문제는 사회학자들의 중요한 관심 영역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사회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그리 넓지 못하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국가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선진국 사회 진입일 것이다. 그런데 선진국이 되려면 국민소득 증가에 앞서서 우리 사회를 선진국형 사회로 바꾸는 일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갈등의 벽을 낮추어야 하는데, 그 첫째 과제는 바로 갈등 해결을 위한 연구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갈등 해결을 위한 전문가와 전문기관의 육성이 절실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중요한 사안이 부각됐을 때 정부가 쉽게 생각하고 추진하는 것이 위원회를 구성하는 일이다. 그래서 노사문제가 심각해지면 노사문제 해결을 위한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지역갈등이 심화되면 지역갈등 해소를 위한 또는 지역화합을 위한 무슨무슨 위원회가 만들어진다. 성차별 문제가 부각되면 또 그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가 제안되고 쓰레기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 심지어 정부와 시민단체 사이를 조정하는 위원회까지 발의된다.

갈등해소 전문가가 필요하다

이런 위원회 구성 관행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구성된 위원회 위원들이 실제로는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전문가에 속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선진국의 전문가들처럼 잘 훈련된 전문가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 들었던 의약 분업의 예를 다시 들어봐도 그렇다. 이런 의약분업의 시행에 대비해서 우리 정부와 학계, 의료계, 시민단체들은 얼마나 연구를 했고 이 분야 전문가를 몇 명이나 육성했을까? 필자는 만약 우리나라 규모의 선진국이 의약분업의 전면적 실시를 앞두고 본격적으로 준비에 임했다면 적어도 10년 전부터 무수히 많은 연구들을 진행시키고 그 결과 수십 명, 수백 명의 박사급 연구자들을 양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의약분업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래야 일부 관변 연구소와 몇몇 대학에 근무하는 의료정책 연구자 몇 명이 고작이다.

그토록 의약분업에 반대하던 대한의사회와 대한약사회도 의약분업에 대비해서 관련 연구를 수행했다는 말을 필자는 아직 듣지 못했다.

사정이 그랬기 때문에 의약분업을 위한 시행방안 마련에 시민단체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시민단체의 간부들로 위원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두어 달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과연 의약분업의 실시에 따르는 제반 사항을 다 점검할 수 있었을까?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사안이라고 해도 결국은 비전문가, 아니면 기껏해서 반(半)전문가들의 손에서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사정이 그러니 정책 시행과정에 부작용이 없을 리가 없고, 또 설령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이 시정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을 소요하기가 다반사다.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그 강인한 갈등의 구조를 일정한 수준까지 정리해야 하는데, 이 일은 기득권층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이런 갈등구조의 타파 없이는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기 때문에 합리성과 공정성에 바탕을 두는 강력한 리더십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렇지만 리더십만으로 개혁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도와 관행의 개선에는 인내가 필요하고, 온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사전에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더불어 관련 전문가들의 육성도 필요하다.

신동아 200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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