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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대특집|역사의 대전환, 남북화해시대

‘김정일 쇼크’ 은둔자에서 슈퍼스타로

  • 신동아 특별취재반

‘김정일 쇼크’ 은둔자에서 슈퍼스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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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씨의 기억에 따르면 김영숙은 얌전하고 조용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북한에 남녀평등법이 제정된 지는 오래 됐다. 그러나 아직 여성이 집안 일을 도맡아 한다. 다만 김일성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좀 강조했을 뿐이다. 가부장적 잔재가 적지 않게 남아 있는 것이다.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은 북한에서 ‘백두산 3대 장군’으로 우상화되어 있다. 김정숙은 항일 유격대 시절 김일성 부대의 작식(作食)대원이었다. 김정일은 권력을 완전히 구축한 다음에도 생모 김정숙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87년 9월 아프리카 기니아 국무장관이 병 치료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그는 김일성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정숙 여사가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보았다”고 말했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서 김정숙을 알 리가 없었지만, 그는 평양에 오기 전 기니아 주재 북한대사에게 평양에 가면 꼭 김정숙에 대해 언급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 소식이 김정일의 귀에 들어갔다. 기니아 국무장관은 곧바로 국가수반급 초대소인 주암 초대소로 옮겨졌고, 그가 치료받던 병원도 차관급 이상이 사용하는 남산진료소에서 김일성 부자 전용의 봉화진료소로 옮겨졌다. 치료가 끝난 뒤에는 예정에도 없던 묘향산 여행도 갔고, 김일성 부자만 사용하는 ‘1호 열차’를 이용했다.

김정일은 자기 자리에 있는 술병을 들어 따라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버티려면 끝까지 버텨야지, 경희가 먹인다고 드시면 됩니까?”

황비서는 하는 수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입에 털어 넣었다. 놀랍게도 그 술은 맹물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정일이 맹물을 마시고 있다는 걸 아는 간부는 아무도 없었다. 김정일은 잦은 비밀 연회 등으로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를 몇차례 들었다.

아버지보다 떨어지는 카리스마

김정일의 카리스마는 김일성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이 정평이다. 김일성은 항일유격대 등 고생도 해봤고, 정부 수립 후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해가는 과정에서 연륜을 쌓을 수 있었다. 반면 김정일은 자신이 권력을 쟁취한 면도 없지 않지만,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북한을 물려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김일성은 비록 정규 학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고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지시를 내릴 때도 듣는 사람이 혹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없앴다. 일하는 과정에서도 첫째가 사람 중시였다. 일은 사람이 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김일성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감은 높은 편이었다.

반면 김정일은 어린 시절 전쟁을 겪긴 했지만 그의 사고방식은 전후 세대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이런 탓인지 김정일은 사람 중시보다는 사회통제 시스템 구축이나 당성, 사상성을 더 강조해왔다고 볼 수 있다. 60년대부터 김일성에 대한 극도의 우상화 작업은 모두 김정일이 진행한 것이다. 세계 최대 높이와 크기의 김일성 동상, 김일성의 시신만 안치된 호화찬란한 금수산 기념궁전, 묘향산 김일성 김정일 선물전시관, 각종 혁명사적관 등은 모두 김정일이 만든 것이다. 70년대 중반까지 그런 대로 꾸려가던 북한경제가 80년대 들어 몰락하기 시작한 것도 김일성에 대한 김정일의 우상화 작업에서 기인한 바 적지 않다.

김일성에게는 유교의 봉건적 잔재가 얼마간 남아 있었다. 김정일의 50회 생일 때는 한시(漢詩)를 지어주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대학시절부터 서양 영화를 많이 보아온 김정일은 일찍부터 ‘현대적’ 감각을 가져왔다. 최근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다. 김일성은 학교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을 갈라놓도록 했다. 그리고 대학졸업 때까지 결혼을 금지시켰다. 70년대에는 소련과 동구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파들이 당 간부로 많이 등용되었다. 이들은 남녀공학이 ‘별학’보다 교육 효과가 낫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고, 중앙당 과학교육부와 정무원 교육위원회 간부들이 남녀공학 안을 김일성에게 올렸다. 김일성은 이를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안을 올린 간부들 여러 명을 ‘혁명화’에 보냈다.

80년대에 들어와 김정일은 남녀공학을 주장했다. 사람은 본성이 남녀가 함께 있어야 더 힘을 내고 능률이 오르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교육위원회 간부들이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남녀공학 안이 김정일을 통과하더라도 김일성이 반대하면 또 여러 명 다칠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묘안을 냈다. 김일성이 지금은 학교에 현지지도를 나가지 않으니 공학인지 별학인지 알아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모든 보고가 김정일을 통했기 때문에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거론만 안하면 됐다. 이 아이디어는 끝까지 성공했다. 89년 무렵부터 북한 전지역에 초등학교 남녀공학이 실시됐다.

김정일은 74년 2월1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됐다. 대외적으로는 ‘당과 인민의 지도자’로 발표됐다. 사실상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인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노동신문’은 이때부터 김정일을 ‘당중앙’이라는 말로 지칭했다. 말하자면 김정일이 대중의 스타로 급부상한 것이다.

74년 무렵 북한에서는 머리를 적당히 기르는 게 유행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김정일이 머리를 아주 짧게 하고 나타났다. 김정일은 주위 사람들에게 ‘속도전 머리’라고 했다. 김정일이 속도전 머리를 하고 다니자, 젊은 당 간부들이 다투어 속도전 머리로 바꾸었다. 속도전 머리는 삽시간에 북한 전역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속도전 머리는 김정일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작은 키가 더 작아 보였고, 나이가 더 어려 보였다. 한동안 속도전 머리를 하고 다닌 그는 어느날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퍼머를 하여 앞머리를 높이 세운 채 나타났다. 김정일의 퍼머 머리 때문에 미장원이 한때 초만원을 이룬 적도 있다.

김정일의 영화취미는 알려져 있다. 대학시절에도 그는 외국영화가 들어오는 중앙영화보급소에 가서 소련영화를 돌려보았다. 북한의 대학생이면 누구나 받아야 하는 두 달간의 ‘어은동 야영훈련’ 도중에 빠져 나와 중앙영화보급소에 간 적이 있는데, 이를 안 삼촌 김영주가 사람을 풀어 찾아내 군사교관에게 인계하기도 했다.

훈련 기간 중 사격에는 열심이었다. 그의 사격솜씨는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몬트리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이호준으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의 생모 김정숙이 여성으로는 드물게 명사수였다.

대학졸업 후 당에 들어가 처음 그의 능력을 인정받은 분야가 영화예술이다. 그는 조선예술영화활영소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고, ‘영화’라는 축구팀을 만들어 영화인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당시 그가 만든 작가단체가 장편소설을 담당했던 ‘4·15 창작단’이다. 여기서 ‘불멸의 혁명총서’라는 김일성 일대기를 만들었다. 이 총서를 만들면서 작가들을 휴양소에 모아놓고 집필토록 했다. 김정일의 독특한 생산개념인 속도전을 벌인 것이다.

4·15 창작단에서 집필된 소설들이 ‘유격대 5형제’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이었고, 대부분 영화화되었다. ‘피바다’와 ‘꽃파는 처녀’ 등은 김일성 우상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김일성이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 작품들을 혁명가극으로 만들 때 그는 음악을 직접 선곡하는 등 감독 역할도 했다.

신동아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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