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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경제위기’ 유령인가 현실인가

  •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제2 경제위기’ 유령인가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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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만한 경영과 오일 쇼크로 79년 부도 위기에 내몰린 미국 자동차 회사 크라이슬러는 부채가 20억 달러에 채권 금융기관이 400개나 돼 채무 조정 작업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당시 위기 수습을 위해 CEO로 영입된 인물은 크라이슬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리 아이아코카. 아이아코카는 경영진을 전면 교체한 데 이어 10만5000명의 직원 중 절반 가까이를 감원하고 군용차량 부문을 매각하는 등 성실한 자구노력으로 채권단으로부터 10억 달러의 부채를 출자전환 형태로 탕감받아 회생의 토대를 마련했다. 우리의 경우와는 극히 대조적인 사례다.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 연구위원은 “기업의 부실 규모가 크면 무조건 워크아웃 프로그램에 집어넣다 보니 경영을 잘못한 사람에게 오히려 혜택을 주는 결과가 됐다. 부실 기업주들은 이를 악용, 자금 흐름이 막히는 듯하면 값나갈 만한 것은 다 팔고 빚만 잔뜩 남겨놓은 상태에서 워크아웃에 들어간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워크아웃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해 일시적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기업만 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이들 워크아웃 기업으로 들어간 여신은 대략 105조원(이중 대우그룹 여신이 약 70조원)대로 추정된다. 이는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를 넘어서는 규모로,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경제위기론을 불식시키기는 요원하다.

대부분의 부실기업이 제조업 분야 기업이라는 사실도 신속한 구조조정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한국개발연구원 김준경 연구위원의 말이다.

“일본 경제가 침체됐을 때는 제조업 쪽의 부실규모가 크지 않았다. 주로 건설, 부동산 등 서비스 분야에서 부실이 발생했다. 부동산 거품이 빠지면서 위기가 닥친 것이다. 미국에서도 제조업 분야에선 부실이 거의 없었다. 한국 경제의 비극은 제조업 부문의 부실이 금융 부실을 초래한 데 있다.



가령 부동산 분야에서는 구조조정과 부실 처리가 순조롭게 이뤄진다. 담보 부동산은 사고팔기가 쉽기 때문에 구조조정 때 매각해 빚을 갚기도 손쉽다. 제값 받고 부동산 파는 일에만 신경 쓰면 된다.

이에 비해 제조업의 경우에는 자산을 매각하기가 쉽지 않다. 공장 부지며 건물, 설비, 비축 원자재, 재고품 등을 사들일 사람을 찾기 어려운 데다 실업을 유발하는 등 구조조정에 따른 사회적 영향도 크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압력에 눌려 의사 결정이 지연되기 일쑤다. 따라서 실물 부문의 효율적인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과감한 개혁 드라이브가 필요하다.”

금융 부실의 책임

지금의 각종 경제지표가 97년 외환위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우려스러운 대목이 있다. 재정적자가 그것이다. 97년에 위기를 불러온 것은 민간 부채였지 나라 빚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IMF가 우리에게 혹독한 긴축 프로그램을 강요하자 동정하는 시선을 보내는 이도 적지 않았다. 하버드 대학의 제프리 삭스 교수 같은 이는 “한국의 경제위기는 갑작스런 시장공황에서 촉발된 것이지, 과거 중남미 국가들처럼 정부와 공공 부문의 낭비와 재정적자 누적 같은 ‘경제적 방탕’이 빚어낸 것이 아니다”며 IMF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2년 반 만에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국가 부채가 올해 말까지 200조원대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재정적자의 폐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부양책과 함께 금융권에 대한 거듭된 공적자금 투입이 그 주범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재정적자가 계속 누적되면 이를 해소하기 위해 계속 국채를 발행해야 하고 이는 채권 금리의 상승은 물론, 시장 전체의 만성적인 고금리 상황을 야기할 수 있다. 통화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게 된다. 정부의 지급보증도 대외적으로 약발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금융연구원 정한영 연구위원은 “금융기관 구조조정 등을 위해 시중에 공급된 유동성을 흡수할 목적으로 한국은행이 발행한 통화안정증권 잔액이 지난 4월 말 현재 63조5000억원에 달해 올해 들어서만 12조원의 순증가를 기록했다. 앞으로도 투신권 등의 추가 구조조정 자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통안증권을 발행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이렇게 될 경우 한은은 이자 부담에 시달리게 돼 통화정책을 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

지금까지 100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이 금융권 구조조정을 위해 투입됐지만 금융시장의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서울대 김수행 교수(경제학부)는 “산업위기가 금융위기로 이어졌던 97년과는 달리 지금은 그동안 산업 구조조정을 무리하게 떠맡았던 금융기관의 부실로부터 위기감이 표출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문제없다’고 주장하는 펀더멘털은 금융의 범주가 아니라 산업의 범주에 드는 것이기 때문에 ‘펀더멘털이 좋으니 경제위기는 없다’는 강변은 설득력이 없다는 게 김교수의 반박.

금융 부실의 책임은 1차적으로 대출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부실기업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에 있지만, 사실상 금융기관을 장악하고 정책금융 도구로 활용한 정부의 책임도 크다. 최근 골칫덩어리로 불거진 투신권 문제를 들여다보면 부실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양측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관찰된다.

대한투신·한국투신 등은 자본이 잠식된 상태에서도 법에 금지된 수익률 보장각서를 아무 제약 없이 써주고 엄청난 규모의 투자자금을 유치해 이를 재벌그룹 계열사에 공급했다. 이것이 무분별한 과잉투자로 연결됐음은 불문가지. 현대투신이 부실로 빠져든 것도 고객의 돈을 현대그룹 계열사를 지원하는 데 사용하고 정확한 분석 없이 대우채를 사들이는 등 방만한 운영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런 잘못을 바로잡기는커녕 자산 관리회사인 투신사에 여신업무인 기업어음(CP) 할인업무까지 허용하는 등 오히려 부실을 조장했다.

패닉이냐, 모럴 헤저드냐

장하성 교수는 “정부는 대우사태를 둘러싸고 금융기관을 부실로 몰아넣는 일을 세 차례나 거듭했다”고 비난한다. 정부는 대우가 98년 초부터 연리 30%짜리 채권을 무리하게 발행하는 등 좌초 조짐이 있었는데도 이를 방치하다 금융기관들에 반강제로 대우 회사채를 매입케 했다. 대우사태가 터진 지난해 여름에는 투신사와 은행들이 회수한 대우채와 기업어음을 다시 박아넣으라고 강요했다. 또한 지난해 말에는 투신사 고객들에게 다른 펀드에 재가입하는 조건으로 대우채의 95% 환매보장조치를 해주면서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의 도적적 해이를 정당화했다. 장교수는 “정부가 이렇게 해놓고 지금 와서 투신사에게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것은 볼썽사납다”고 꼬집었다.

지난 4월 현대투신의 파행적인 자금운용 실태를 공개한 참여연대는 이미 4개월 전부터 현대투신의 장부를 속속들이 열람, 실태를 파악했으나 금융시장에 미칠 충격을 고려, 현대투신 스스로 사실을 인정하고 대안을 제시하도록 시간을 줬다고 한다. 현대투신측에 공동성명서까지 써줬다는 것. 하지만 현대투신은 이렇다 할 조치를 내놓지 않았다.

참여연대는 발표 10일 전에는 금융감독위원회에도 사실을 알렸으나 금감위 역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투신이 그 시점에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손을 썼다면 부실 규모를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있었다는 게 참여연대 관계자의 아쉬움이다.

금융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쏟아붓는 것이 부실 책임을 져야 할 금융기관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자칫 금융기관의 국유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 연구위원은 “투신 등 부실 금융기관 문제는 무작정 살리느라 급급할 일이 아니다. 금융기관은 신뢰도에 금이 가면 간판을 내리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은 97년 말보다 자본시장이 넓게 개방된 상태라 신뢰 추락에 따른 자본 유출이 당시보다 더욱 대규모일 우려가 있다는 것. 원화 예금까지 달러화 예금으로 전환해 유출이 가능해진 마당에 이미 시장의 신뢰를 잃은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입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금융 부실의 상당 부분은 금융기관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라 재정이 수행해야 할 일을 대신 떠맡은 데서 기인했다. 따라서 금융기관뿐 아니라 압력을 행사한 정부와 금융기관의 회계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에도 책임이 있다. 더욱이 부실 금융기관의 미래를 시장논리에만 맡기고 방치할 경우 가뜩이나 얼어붙은 금융시장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와 패닉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정운찬 교수는 “공적자금을 투입하되, 부실 금융기관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둘 게 아니라, 퇴출시켜 마땅한 금융기관은 퇴출시키는 것을 전제로 그에 따른 부작용(퇴출 금융기관과 거래하고 있는 기업이나 중소 금융기관의 연쇄 파산 등)을 최소화하는 데 돈을 써야 한다”고 충고한다.

아울러 부실 처리 과정을 공개하고 부실 책임자를 규명, 형사는 물론 민사 책임까지 물음으로써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이 투입되면 ‘악’ 소리가 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투신권의 부실과 투자 위험을 잘 알면서도 ‘일이 터지면 정부가 메워준다’는 무책임한 자세로 돈을 갖다 맡긴 투자자들에게도 일정 부분 손실을 분담케 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금융당국으로서는 개별 금융기관의 부실 규모나 워크아웃 기업의 채무 재조정 현황은 물론, 금고업계의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 비율조차 공개하지 않는 폐쇄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공적자금 투입에 앞서 책임규명 의지를 확인하고 손실분담 원칙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할 것이다.

“지금은 위기가 아니라 호기일 수도 있다. 늦게나마 이런 문제점들이 드러난 것은 다행한 일이며,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대출심사와 기업 지배구조, 정경유착 같은 후진적 시스템을 선진화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한국개발연구원 김준경 연구위원)는 말을 귀담아들을 만하다.

한국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에서는 국내적 요인보다는 국제적 요인이 경제 흐름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국 경제가 연착륙할 가능성이 높아졌고, 일본 경제도 회복세를 보이는 데다, 내리막을 걷던 유로화도 강세로 돌아섰기 때문에 바깥에서는 별다른 위기 요인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시각.

다만 동남아 상황이 다소 걱정스럽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5월 들어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는 연초 대비 16.2%, 태국 바트화는 3.9%, 필리핀 페소화는 3.4% 하락했다. 6월에는 이들 세 나라의 주가지수가 연초에 비해 30%대나 떨어졌다. 말레이시아 주가는 6월8일 5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고, 4월 중순 이후 5주 동안 3억5000만 달러의 해외 자금이 유출됐다.

위기의 도화선은 시장 심리

이들 역시 무역수지, 외환 보유고 등 실물 부문은 안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금융개혁이 지연되면서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선 금융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IBRA의 지도부가 부정부패 혐의를 받고 있고, 태국의 금융 구조조정을 이끄는 FIDF는 막대한 빚더미에 올라 추진력이 저하됐다. 정치적 불안도 여전하다.

삼성경제연구소 홍순영 연구원은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을 동남아 국가들과 한부류로 보는 경향이 있어 97년과 같은 ‘전염효과’가 우려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경제위기는 시장 심리(market psych ology)의 미세한 변화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그런데 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게 불확실성이다. 시장에 불확실한 요소들이 많으면 시장 참여자들은 작은 악재에도 과민하게 반응해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실물 부문이 아무리 좋아도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못 믿겠다→주식 안 산다→투자 회수한다’는 흐름을 타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빚어진다. 더구나 우리는 97년에 한 번 큰코를 다쳤기 때문에 투자자들의 심리가 극도로 민감하고 불신의 파급효과도 크다.

한국 증시에 700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전체 투자자금의 10%만 회수해도 불안의 동조화 현상은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번져간다. 97년의 아시아 경제위기도 외국인 투자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시장 불안이 진정될 때까지만 잠시 발을 빼고 있으려 했던 게 외국 자본의 집단 탈출로 확산되는 바람에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따라서 벽돌 한두 장 빠져나가는 바람에 집이 무너지는 경우를 다시 겪지 않으려면 시장의 크고 작은 불안요소를 하나하나 정비해 안팎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IMF체제 3년차로 접어들면서 급한 불은 끈 셈이다. 이제 응급처치는 끝났으니 입원실로 옮겨 행여 재발 위험은 없는지 꼼꼼한 진단과 검사를 받을 일이 남아 있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s’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악마는 작은 곳에 숨어 있다는 얘기다. 경제위기의 유령들도 그렇듯 아주 작은 곳들에 숨어 있다.

신동아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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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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