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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 신앙에서 아미타 신앙으로 경주 남산 배리(拜里) 미륵삼존불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미륵 신앙에서 아미타 신앙으로 경주 남산 배리(拜里) 미륵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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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신라에 그 영토를 넘겨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라까지 복속시켜 당의 군현으로 편입시킴으로써 과거 한사군 시대와 같이 식민통치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에 당은 신라가 백제 영토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처음부터 차단하기 위해 백제 부흥운동을 일단 잠재운 다음부터는 백제의 옛 태자 부여륭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귀국시킨 다음 백제의 옛땅을 관리하게 하고 과거의 국경대로 그 경계를 구획짓게 하는 회맹(會盟)의식을 치르게 한다.

이에 신라는 마지못해 문무왕 4년(664) 2월에 왕제 김인문을 보내 유인원 및 부여륭과 함께 상주 웅령(熊嶺)에서 회맹의식을 갖고 그곳을 국경으로 확정짓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문무왕 5년(665) 8월에는 문무왕이 직접 웅진(공주)으로 가서 취리산(就利山)에서 다시 유인원, 부여륭과 회맹하여 서로 화친할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부흥운동 기반을 철저히 무너뜨렸으므로 백제인들이 이제 더 이상 조직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나라 군대만 철수하면 백제의 고토가 신라 것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회맹의식에 매우 여유로운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당이 회맹을 하자고 요구하면 순순히 회맹에 응하면서 백제 영토에 대한 욕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문무왕 6년(666) 4월에는 도리어 김유신의 장자인 삼광(三光)과 장군 김천존(金天尊)의 아들 한광(漢光)을 숙위학생으로 보내면서 이들로 하여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니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사실 고구려는 백제 부흥운동이 전 해에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나당의 협공을 두려워하여 태자 복남(福男)을 당나라로 보내 고종을 시위하게 하는 등 대당 외교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다. 더구나 이 해에 대당 항쟁을 주도하던 절대권자인 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장자 연남생(淵男生)과 차자 연남건(淵男建)이 막리지 자리를 놓고 다투다 장자가 밀려나서 당나라로 망명하는 불상사가 일어나 국세가 분열되는 불행이 겹치고 있었으니 고구려는 여간 위태로운 상황에 몰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신라가 이 틈을 노린 것이다.



남생이 당나라에 망명한 것이 6월이고, 고구려 보장왕이 막리지 자리를 남건에게 넘긴 것이 8월이며, 당고종이 남건에게 특진요동도독겸평양도안무대사현도군공(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玄郡公)을 봉하는 것이 9월이고, 이적(李勣, 592∼667년)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여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 12월이다.

이 해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淵淨土)는 조카들의 싸움을 지켜보다 미구에 고구려가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그가 다스리던 고구려 남쪽 12성을 가지고 신라에 귀순해 온다.

문무왕 7년(667) 7월에 당 고종은 문무왕에게 그의 제 6왕제인 김지경(金智鏡)과 제 7왕제인 김개원(金愷元)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 침략에 출정시키고, 유인원과 제 5왕제 김인태(金仁泰)는 비열도(卑列道, 안변길)로 침공하며, 왕은 다곡(多谷, 평산) 해곡(海谷, 해주) 길로 침공하여 이적과 평양에서 만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문무왕은 8월에 대각간 김유신 등 30 장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9월에 한성정(漢城停, 서울)에 이르러 이적을 기다린다.

한편 당나라에서는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적이 9월에 요하를 건너 신성(新城) 등 16성을 격파하고 좌무위장군 설인귀(薛仁貴, 612∼681년)는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蒼) 3성을 함락하며 연남생군과 합세하였다. 곽대봉(郭待封)이 거느린 수군은 해로로 평양에 진격해 들어갔으나, 풍사본(馮師本)이 거느린 군량곡선이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해 공격에 차질이 빚어졌다.

부총관 학처준(處俊)도 안시성 아래에서 3만 고구려 병사를 격파하였으나 고구려 막리지 연남건이 압록강구를 막아 방어하므로 쉽게 육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올 수 없었다. 이에 당고종은 다음 해인 문무왕 8년(668) 1월에 유인궤와 김인문을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아 요동성 공략에 투입하는 한편 신라에 투항한 연정토를 당으로 불러 돌려보내지 않는다. 고구려 침공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그를 앞잡이로 쓰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이적과 설인귀는 2월에 부여성을 함락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부여천(川) 일대의 40여 성이 모두 따라 항복했다. 이때 당고종은 요동의 전황이 궁금하여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는 돌아와 이렇게 복명(復命, 일처리를 명령받은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함)했다 한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에 선제(先帝, 당태종)께서 죄를 묻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까닭은 저들의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말에 이르기를 ‘군사에 중매가 없으면 중도에서 돌아온다’ 하였습니다. 이제 남생 형제가 서로 헐뜯으며 우리 향도가 되었으니 저들의 뜻과 속임수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으며 장수는 충성스럽고 병사는 힘을 다합니다. 신이 그래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또 고구려의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900년(700년이어야 한다)에 이르지 못하고 80세의 대장이 있어 멸망시킨다고 했다는데 고씨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가지고 있어 이제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과연 남생 형제들의 불화가 고구려의 멸망을 직접 불러들이는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들 형제가 절대 권력을 놓고 다툴 수밖에 없게 된 데는 연개소문의 권력욕이 근본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절대권력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보수세력이 그에 기생하여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이 자체가 사회의 노쇠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해온 지 241년이 지나 그 한계 수명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즉 문화 말기 현상인 것이다.

어떻든 연남건은 부여성이 위급하다는 급보를 받고 5만 군사를 급파하였으나 이적의 군사와 설하수(薛賀水)에서 만나 일전을 벌인 끝에 3만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여 대행성(大行城)마저 함락당한다. 이적은 대행성을 함락한 후 압록강에 이르러 남건의 최후 저항을 받지만 여러 길로 몰려드는 대군의 공세에 힘입어 이를 간단하게 물리치고 단숨에 200여 리를 달려가 욕이성(辱夷城)을 함락하니 모든 성들이 항복하거나 성을 비우고 달아나 평양성까지 무인지경으로 쓸고 갈 수가 있었다. 여기에는 7월16일에 한성(漢城, 서울)까지 나와 군사를 독려하며 고구려를 협공한 문무왕의 공적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철륵(鐵勒) 흉노 출신의 설필하력(契苾何力, ?∼677년)이 가장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아래 도달하고 이적의 군대를 비롯한 대군이 차례로 뒤따라와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기를 한 달 넘게 하니, 고구려의 보장왕은 견디다 못해 9월21일 연개소문의 막내아들 연남산(淵男産)으로 하여금 수령 98인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나가 이적에게 항복하게 한다.

이적은 예로써 이를 대접하며 항복을 받아들이는데 막리지 남건은 끝내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군사권을 맡고 있던 승려 신성(信誠)의 내응으로 성이 함락하자 자살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이적이 보장왕과 그 왕자 복남(福男) 덕남(德男)을 비롯하여 대신 등 20여만 명을 포로로 하여 당나라로 돌아가니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 지 70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 고구려의 국세는 5부 176성 69만호였다 하는데, 당은 고구려 땅을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누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고구려 침략에 수훈을 세운 우위위(右威衛) 대장군 설인귀가 검교(檢校) 안동도호가 되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남아 이 지역을 처음 다스려 나갔다 한다.

한편 문무왕은 고구려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부터 평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났으나 혜차양(次壤)에 이르렀을 때 당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온다. 10월22일에 김유신을 태대각간으로 삼고 김인문을 대각간으로 삼는 등 논공행상을 행하고 11월5일 포로로 잡은 고구려인 7000명을 거느리고 서라벌로 돌아온다. 그리고 6일에는 문무신료를 거느리고 선조 사당에 나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실을 고한다.

이로써 삼국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 할 수는 없으니, 당을 끌어들여 우리 민족이 대물려 살아오던 터전을 저들의 손에 넘겨주고 우리 민족을 저들의 노예로 끌려가게 함으로써 오히려 우리 국토를 분열시키고 우리 민족을 흩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군위(軍威) 석굴 아미타삼존상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缶溪)면 남산(南山)동 양산(陽山)에는 국보 109호로 지정된 (도판 10)이 있다. 일명 학소대(鶴巢臺)라 불리는 바위산 절벽 중턱에 천연동굴이 뚫려 있는데 그곳을 조금 확장 정비하고 아미타 삼존불을 모셔 놓은 것이다.(도판 11)

인도의 아잔타 석굴을 비롯한 무수한 석굴사원이나 중국의 돈황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을 모방하여 조성한 석굴사원으로, 인공석굴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도의 석굴사원 형태를 계승한 진정한 의미의 석굴사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에 모셔져 있는 불보살상이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걸치는 시기의 양식기법을 보이고 있다. 주불좌상은 얼굴이 크고 상체가 우람하나 무릎 폭이 좁아서 마치 (제 11회 도판 10)의 조성 비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전체적인 양식기법은 당태종 정관(貞觀) 13년(639) 명이 있는 (도판 12)과 비슷하다. 다만 이 시무외 촉지인(觸地印)을 짓고 있는데 반해 주불은 항마(降魔) 촉지인을 짓고 있는 것이 다르다. 아미타불이 항마 촉지인을 짓는 통일신라 특유의 조상 양식이 이로부터 비롯되는 듯하다.

항마 촉지인이란 석가세존이 마왕(魔王) 파순(波旬)을 항복받고 대각(大覺)을 이루어 불타가 되는 순간에 짓고 있던 손짓이다. 왼손을 왼쪽 무릎 위에 손바닥이 보이도록 위로 펼쳐서 편안히 놓은 것이 항마인이다. 마왕을 항복받은 사실을 표시하는 손짓이다.

이때 석가세존은 지신(地神; 토지를 맡아 다스리는 신)을 건드려 깨어나게 해서 마왕으로부터 항복받은 사실을 증명하게 하는데, 증인으로 지신을 불러내기 위해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엎어 대고 손가락은 무릎 아래 땅을 가리키게 하여 지신을 건드리는 시늉을 하니 이런 손짓을 촉지인(觸地印; 지신을 건드리는 손짓)이라 한다.

그런데 아미타불로 하여금 이런 항마 촉지인을 짓게 한 것은 백제와 고구려를 항복받은 것이 마왕을 항복받은 것이라고 생각한 당시 신라인들의 사고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항마 촉지인을 지은 아미타불상이라는 독특한 불상양식이 출현하였고, 이런 불상양식이 이후 아미타 신앙의 토착화와 더불어 우리 고유의 불상양식으로 자리잡아 나갔다고 보아야 하겠다.

주존은 굴실의 안벽 중앙에 턱을 만들어 엉덩이 부분을 걸치게 하고 무릎 아래로는 높이 70cm의 딴 돌을 받쳐 고정하였는데 앞에 받친 네모난 딴 돌의 표면에 옷주름무늬를 새겨놓아 포수좌(袍垂座) 형식의 방형(方形) 대좌임을 상징하였다. 머리로부터 무릎까지 이르는 주존불의 불신(佛身) 높이는 218cm이다.

좌우 협시보살상 역시 의 협시보살상이 보이던 작은 키에서 벗어나 초당(初唐) 양식을 계승한 백제 말기의 (도판 6)처럼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데, 약간 몸매를 비틀어 이른바 삼굴신(三屈身, 3방향으로 몸을 꺾음)의 교태를 지었다. 7세기 중반 초당 시대에 유행하던 보살상 양식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불보살상은 7세기 중·후반기에 당나라 양식을 받아들여 조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삼존의 근엄한 얼굴 표정에서 (도판 8)보다도 더 초당 양식에 근접한 느낌이다. 따라서 이 조성된 이후 어느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언제 왜 이곳에 이런 삼존불상을 조성해 모셨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삼존불상의 성격을 먼저 규명해야 한다. 이 삼존불상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62년 9월22일 황수영 선생을 비롯한 신라 오악조사단에 의해서였다. 이때 조사에서 석굴의 크기는 폭 380cm, 높이 425cm, 깊이 430cm, 주불 총 높이 288cm, 좌협시보살상 높이 192cm, 우협시보살상 높이 180cm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사원임을 인정하여 국보 109호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좌협시보살입상의 보관에서 화불(化佛)좌상의 존재를 확인하고 우협시보살입상의 보관에서는 정병(淨甁)의 존재를 확인하였기 때문에 으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보관에 화불이 새겨지면 관세음보살이고 정병이 새겨지면 대세지보살인데, 이 두 협시 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는 것은 아미타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교리적 근거는 유송(劉宋) 원가 연간(424∼442년)에 서역승 강량야사(畺良耶舍)가 번역한 ‘불설관무량수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과 위제희(韋提希, 마가다국 빈바사라왕의 왕비)에게 이르시기를 이 생각이 이루어졌으면 다음에 마땅히 무량수불의 불신(佛身)과 광명(光明, 몸에서 나오는 빛)을 살펴보아야 한다. 무량수불의 몸은 백천만억 야마천의 염부전단 나무와 같은 황금색이고 불신의 높이는 60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다.

미간에 있는 백호(白毫)는 오른쪽으로 뚜렷하게 돌아서 5개의 수미산과 같고 부처님의 눈은 맑고 깨끗하기가 사방의 큰 바닷물같이 분명하다. 몸에 있는 모든 터럭의 구멍에서는 빛이 솟아나서 수미산과 같이 커지고 머리에서 솟아나는 둥근 빛(圓光)은 백억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와 같은데 원광 안에는 백만억 나유타 항하사 수의 화불(化佛)이 있고 하나하나의 화불은 또 무수한 화보살(化菩薩)을 시자로 삼고 있다.

무량수불은 8만4000 대인상(大人相, 미남이 되는 기본적인 요소)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하나의 대인상은 각각 8만4000 수형호(隨形好, 미남이 되는 세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중략)

다음에는 응당 관세음보살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보살은 키가 80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고 몸빛은 자금색(紫金色, 자주빛이 도는 황금색)이며 정수리에는 육계(肉)가 있고 목에서는 원광(圓光)이 나오며 그 지름이 100 유순이다. 그 원광 중에는 500 화불이 있는데 석가모니와 같고 하나하나의 화불은 500 보살과 무수한 여러 천인들로 시자를 삼고 있으며 거신광(擧身光, 온몸에서 나오는 광명) 중에는 5도(五道, 인간, 축생, 아수라, 아귀, 지옥) 중생의 일체 모습이 모두 나타난다.

정수리 위에는 비릉가마니(毘楞伽摩尼)와 같은 기묘한 보배로 천관(天冠)을 만들어 썼는데, 그 천관 중에 하나의 화불을 세워 놓았으니 키가 25 유순이다. 관세음보살의 얼굴은 염부전단 나무와 같은 황금색이고 미간의 백호상은 7보(寶) 색을 갖추어 8만4000 종류의 빛을 뿜어내는데 하나하나의 광명에는 한량없는 숫자의 화불이 있고 하나하나의 화불은 무수한 화보살로 시자를 삼고 있다.(중략) 그 나머지 몸매가 아름다운 것은 불상과 다름없는데 오직 정수리 위의 육계와 정수리를 볼 수 없는 상호만 세존에게 미치지 못한다.(중략)

다음은 대세지(大勢至)보살을 보아야 한다. 이 보살은 몸의 크기가 역시 관세음보살과 같으나 원광의 지름은 250 유순으로 250 유순을 비추며 거신광은 시방(十方)의 나라를 비추는데 자금색으로 인연있는 중생은 모두 볼 수 있다. 다만 이 보살의 한 털구멍에서 나온 빛을 보면 곧 시방세계의 무량제불의 깨끗하고 신묘한 광명을 모두 볼 수 있으므로 이 보살을 무변광(無邊光)이라 부른다.

지혜의 빛으로 일체를 비춰서 삼악도에서 벗어나 무상도(無上道)를 얻게 하므로 이 보살을 일컬어 대세지라 한다. 이 보살은 천관(天冠)에 500의 보배로운 연꽃이 있고 하나하나의 연꽃에는 500의 보배로운 받침이 있으며 하나하나의 받침에는 시방제불의 깨끗하고 신묘한 국토의 크고 작은 모습이 모두 나타나 있다. 정수리 위의 육계는 발두마화(鉢頭摩花, 홍수련 꽃)와 같은데 육계 위에는 한 개의 보병(寶甁)이 있어 여러 광명을 가득 담고 있다가 불사(佛事)가 있으면 널리 드러낸다. 나머지 여러 신상(身相, 생김새)은 관세음과 같아 다름이 없다.”

이로 보면 이 군위 석굴 안에 봉안한 삼존상은 틀림없이 아미타삼존상의 전형을 완벽하게 갖춘 아미타삼존상이라 할 수 있다. 의 경우 우협시 대세지보살상의 보관에서 아직 정병이 있었던 확증을 찾아내지 못한 상황이므로, 현존한 아미타삼존불 양식으로는 이 이 ‘불설관무량수경’의 내용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해낸, 우리나라 최초의 아미타삼존상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에 이런 아미타삼존상을 앞장서 조성해 놓았을까. 이것은 이곳의 지리적 여건을 살펴보아야만 해결될 문제이다. 지금은 이곳이 군위군이지만 옛날에는 신녕(新寧)의 속현인 부계(缶溪)현에 소속된 땅이었다. 팔공산 북쪽 지맥이 흘러 내려와 동남쪽으로 팔공산 상봉을 바라볼 수 있도록 터진 계곡의 뒷산 절벽 중턱에 석굴이 있어 그 안에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셔 놓은 것이니, 이 아미타삼존상은 파계사 뒷산인 팔공산 연봉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점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그 영토를 차지하고 나서는 팔공산을 중악(中岳), 계룡산을 서악(西岳), 지리산을 남악(南岳), 토함산을 동악(東岳), 태백산을 북악(北岳)으로 설정하게 되니 통일 후 가장 먼저 중악의 위치를 확정하여 이를 성지화(聖地化)할 필요성이 절실했을 듯하다.

그래서 중악 기슭인 이곳에 자연 석굴이 있고 그 석굴 안에서 중악의 상봉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시려는 생각을 해내지 않았나 한다.

더구나 이곳은 경주에서 백제나 고구려의 옛땅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목이었다. 경주-영천-신령-부계-군위-선산-상주로 해서 백제로 가거나, 신령-부계-함창-문경으로 새재를 넘든지 신령-부계-군위-비안-예천-풍기로 해서 죽령을 넘는 길이 모두 이곳을 거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원된 장병들이 모두 이곳을 거쳐갔을 터인데, 전쟁터에서 죽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허다했을 것이다. 이에 이들이 서방정토인 극락세계로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불사가 거국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절실했을 터이니, 문무왕이 그 8년(668)년 11월5일에 고구려 정벌을 끝마치고 서라벌로 회군해 돌아오면서 이곳에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시도록 명령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생각을 하도록 한 것은 원효(元曉, 617∼686년)대사였을 듯하다. 앞서 밝힌 대로 원효는 이 조성의 교리적 배경이 되고 있는 ‘불설관무량수경’에 대한 연구가 깊어 ‘불설관무량수경종요’ 1권을 지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인(慈仁)현이었고, 요석공주에게 장가들어 문무왕에게는 매제에 해당하는 인척 관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신동아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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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 신앙에서 아미타 신앙으로 경주 남산 배리(拜里) 미륵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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