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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김 구속, 백두 로비의 새 진실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린다 김 구속, 백두 로비의 새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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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부터 약 8년 동안 백두사업 운용부대인 OO부대의 체계관리단장으로 근무했던 예비역 육군 준장 권기대씨(57)는 백두사업의 산 증인으로 불린다. 국방부 주변에서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대해 권씨만큼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1998년 10월 린다 김과 그 부하직원에게서 각각 1000만원, 1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1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그는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원심과 같은 내용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는 린다 김에게 한을 품고 있다. 린다 김 때문에 자신이 구속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린다 김 사건을 맡은 재판부(서울지법 형사12단독. 재판장 정영진 판사)에 린다 김을 엄벌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재판부는 6월25일 열린 결심공판 때 그를 증언대에 세웠다.

권씨의 법정 증언에 따르면 기무사는 그를 조사할 때 녹취록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 녹취록엔 린다 김이 부하직원에게 “권장군(권기대씨)에게 줄 1000만원을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통화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것. 그는 “린다 김이 내게 화장품 선물로 위장해 돈을 준 것은 나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것이었다”며 “기무사가 통화를 감청한다는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그런 얘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신동아’ 6월호에 실린 린다 김 인터뷰 기사를 내세우기도 했다(린다 김은 ‘신동아’ 인터뷰에서 기무사가 자신의 통화를 감청하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린다 김에 대한 결심공판 다음날인 6월24일과 린다 김이 구속된 후인 7월11일 두 차례에 걸쳐 약 7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권씨는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얽힌 비화를 상세히 털어놓았다. 그는 백두사업 선정과정 비리와 린다 김의 로비행태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했지만 백두사업 자체에 대한 비판에는 신중했다. 백두사업에 대한 언론의 ‘일방적 매도’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백두사업에 대해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권씨는 인터뷰에 응하게 된 동기부터 말했다.



“내가 뭐 잘 했다고 큰소리를 치겠습니까. 공직자로서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군 후배들에게 굉장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린다 김이 방송에 나가 자신을 PR하는 걸 보고 그런 식으로 사회정의가 전도돼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정에 서게 된 동기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 일은 내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줬습니다. 35년 동안 몸담았던 군이라는 직장을 잃어버렸고 연금도 박탈당했습니다. 또 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후배들 중에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다시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별규정 논란

1989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권씨가 백두사업에 관여한 것은 1991년 국방부 1급 군무원으로 임용되면서부터. 그가 맡은 직책은 백두사업 운용부대로 지정된 OO부대의 체계관리단장. 대령급인 백두사업단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으며 백두사업 진행을 총감독하는 자리였다.

권씨에 따르면 백두사업의 뿌리는 19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OO부대는 월남전에서 활약한 C―46기에 무전장비를 실은 원시적인 통신감청 비행기를 운용하고 있었는데 비행기가 너무 낡아 불만이었다. 그래서 신형 정찰기를 요구했지만 국방부는 예산 문제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한미군이 그간 대북첩보수집용으로 활용해오던 정찰기 U2R기와 가드레일을 1995년에 철수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에 따라 독자적인 첩보수집을 위한 정찰기 도입이 불가피해졌다. 그것이 백두사업의 출발이다.

―백두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내가 (OO부대로) 갔을 때 이미 4개 회사가 백두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어요. 레이시온, E시스템, ESL(나중에 TRW에 통합) 등 미국의 3개 회사에 이스라엘의 라파엘이 가세한 상태였지요. 그러나 그때만 해도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국방부는 우선 장비와 비행기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통신감청)장비는 OO부대에, 비행기는 공군에 맡겼습니다. 공군은 영국제인 호커800과 미국의 사이테이션3, 프랑스의 펠콘50을 후보기종으로 검토했습니다. 나는 장비에 대한 자료수집을 위해 국방부에 해외출장을 건의했습니다. 그래서 91년 11월초∼91년 12월초까지 약 한 달 동안 요원들을 데리고 해외로 나갔습니다. 먼저 미국에 가 레이시온과 ESL, E시스템사를 둘러본 후 이스라엘로 날아가 라파엘사까지 방문했습니다.

그중 제일 여건이 좋은 건 이스라엘 회사였습니다. 라파엘사는 우리를 사막으로 데리고 가 실제 거리를 놓고 장비를 제작하는 광경을 보여줬습니다. 아울러 시스템 설계 단계부터 한국측을 참여시키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 자체만 놓고 보면 E시스템사에서 만들 장비가 가장 좋아 보였습니다. 다른 회사 장비보다 가볍고 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판단됐습니다.

92년 초 국방부에 이런 내용을 담은 출장결과를 보고했습니다. 백두사업 계획이 무르익은 것은 91년 12월 이양호씨가 국방부 정보본부장에 취임한 후입니다. 그때만 해도 린다 김의 로비 같은 건 없었습니다. 이씨의 주도로 국방부에 백두·금강사업단이 만들어졌고 서태석 준장이 초대 사업단장을 맡았습니다.”

이양호 전 국방부장관과 백두사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92년 사업단은 창설됐지만 백두사업은 국방부의 의지 부족으로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주한미군이 정찰기 철수 방침을 철회하는 바람에 정찰기 도입의 필요성 자체가 흔들렸다. 이때 꺼져가던 백두사업의 불씨를 되살린 사람이 바로 이 전장관이었다. 합참의장 시절 백두사업을 조금씩 진전시킨 이 전장관은 1994년 12월 국방부장관이 된 후 적극 나섰다.

백두사업은 통신감청장비를 실은 비행기로 대북정보를 수집하는 사업이다. 그래서 장비와 비행기의 체계결합이 중요하다. 1995년 1월 국방부는 ‘탑재장비 회사가 비행기를 선정한다’는 특별규정을 만들었다. 즉 그때까지 따로따로 진행돼오던 장비·비행기 선정작업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이 특별규정은 뒷날 논란이 됐다. 린다 김의 로비가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 때문이다.

린다 김을 로비스트로 고용한 미국의 E시스템사는 처음엔 기종으로 사이테이션3를 선택했다가 나중에 호커800으로 바꿔 응찰했다. 문제는 그후 호커800 제작사와 E시스템이 백두사업 수주경쟁에 나섰던 또다른 미국 회사 레이시온사에 통합된 것. 이를 두고 국방부가 장비와 비행기를 특정 회사에 몰아주기 위한 사전조치 아니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 특별규정이 린다 김의 로비에 영향받은 것이라고 볼 만한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한때 린다 김 밑에서 활동한 문아무 예비역 중령이 백두사업 사업자 선정이 끝난 직후인 1996년 6월 국방부 등에 제출한 진정서에 따르더라도 린다 김이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과 연결된 것은 1995년 2월 이후다. 국방부에 따르면 이 규정이 결정된 것은 1994넌 9월 획득심의회를 통해서다. 국방부 현 백두사업단 관계자의 설명엔 일리가 있다.

“주장비와 항공기 선정작업을 분리해 추진하다보니 체계결합에 대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협상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주장비회사에서 주장비와 체계결합이 가능한 항공기를 선정해 시험평가 및 협상을 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권기대씨의 설명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장비와 비행기를 따로따로 선정하려다 보니 체계결합에 대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며 “특별규정 자체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 장비업체들만 먼저 평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차 평가 대상이 미국의 3개 회사로 국한된 것은 미 정부의 FMS(대정부간 구매) 규정 때문입니다. 미 정부는 오래 전부터 미국 회사 무기를 사는 나라에 대해 FMS 방식에 따를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자국의 고도기술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정부 차원에서 통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미 정부가 3개 회사의 입찰과정에 모두 관여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중 하나를 선정하는 작업부터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선정된 미국 회사와 다른 나라 회사들을 놓고 최종 심사에 들어간다는 계획이었습니다.”

―1차 평가 대상인 미국 장비회사들이 선택한 비행기는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레이시온은 호커800을, ESL(이때쯤 TRW에 흡수)은 펠콘50을, E시스템은 사이테이션3를 골랐습니다. 특별규정을 만든 후 국방부는 OO부대에 백두사업 시스템 전체를 평가하는 권한을 줬어요. 그에 따라 OO부대 백두사업팀은 95년 4월 ADD(국방과학연구소) 요원들, 공군 관계자들과 함께 2주 동안 합숙하며 3개 회사의 장비와 비행기 성능을 심사했습니다.”

―E시스템이 레이시온에 통합된 것을 언제 알았습니까.

“1차 평가 과정에 알게 됐습니다. 원래 E시스템 기술진은 사이테이션을 선호했습니다. 그런데 평가 직전 E시스템이 비행기를 사이테이션에서 호커로 바꾸더군요. 알고 보니 호커 제작사를 사들인 레이시온이 그때쯤 E시스템도 사들인 겁니다.”

―OO부대 사업단의 평가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TRW+펠콘 체계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줬습니다. 감청장비만 놓고 보면 E시스템 것이 가장 좋았지만 비행기와의 결합 측면을 따질 때 TRW만 못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단점은 값이 비싸다는 점이었습니다. 3개 비행기 중 펠콘이 가장 비쌌어요. 장비도 TRW 것이 비쌌지요. 그 다음이 E시스템, 레이시온 순이었습니다.”

잘못된 기종 선택

권씨에 따르면 백두사업에 이상기류가 흐른 것은 이때부터. 5월초 OO부대는 평가결과보고서를 국방부에 제출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 석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사업단장인 이정한 대령이 직접 보고서를 들고 국방부 정보본부장 Y중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보고서 결론을 본 Y본부장이 ‘어, 이거 아니잖아. 접수시키지 마’ 하고 공문접수를 막더래요. 이대령이 내게 전화해 어떡하냐고 묻기에 부대장에게 얘기했습니다. 부대장은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당장 접수시켜’ 하고 소리치더군요. 그래서 국방부 획득과장을 통해 정식으로 공문을 접수시키긴 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국방부 참모들은 장관(이양호)의 의중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전에 E시스템으로 내정돼 있었다는 얘기입니까.

“95년 6월1일 국방부에서 심의가 열렸습니다. 조달본부장 군수국장 획득실장 전략기획부장 등 국방부 및 합참의 고위관계자들과 ADD부소장이 나왔는데 운용부대인 OO부대에선 내가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심사 자격은 없는, 옵서버였지요. 그런데 심의 절차가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OO부대장이 책임지고 평가하라고 해놓고는 막상 회의장에 가보니 OO부대 안말고도 정보본부 안과 ADD 안이 나란히 제출돼 있는 겁니다. 그 두 안은 모두 E시스템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준 것이었습니다. 심의위원들은 한 사람만 빼고 모두 E시스템에 손을 들었습니다. 심의위원장인 윤종호 국방부 2차관보가 ‘이대로 장관에게 보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회의가 끝나기 전 내가 일어나 약 10분 동안 OO부대 의견을 밝혔습니다. 주로 비행기에 대해서였습니다. 첫째, 펠콘은 나머지 두 비행기보다 동체가 크고 높이 뜨며 오래 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보수집량이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값이 비싼 게 흠이지만 가격보다 정보수집력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둘째, 안정성 면에서도 펠콘이 뛰어납니다. 다른 비행기는 발이 두 개인데 펠콘만 삼발이입니다. 셋째, 성능도 펠콘이 가장 좋습니다. 내 얘기를 듣고 난 후 윤종호 심의위원장은 ‘운용부대에선 그런 말 할 수 있다’며 ‘장관 결정에 따르자’고 말하더군요.”

―성능 차이가 어느 정도입니까.

“우리가 운용하려는 정찰기 성능은 미공군 정찰기 U2R기와 미육군 정찰기 가드레일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E시스템은 U2R기 제작에 참여했고, ESL(TRW)은 가드레일 탑재장비를 만든 회사입니다. E시스템 것이 더 좋긴 했지만 사실 어느 회사 것이 더 뛰어나다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둘 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자회사들이거든요. 굳이 따진다면 통신장비시스템은 TRW가 최고였고, 컴퓨터시스템이나 전자정보 분야에선 E시스템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성능은 분명히 차이가 났습니다. 예컨대 E시스템에 90점, TRW에 85점을 준다면 펠콘과 호커는 100점 대 85점 정도로 차이가 컸습니다. 더 좋은 것은 사이테이션이었구요.”

당시 국회 국방위 소속으로 백두사업을 감사했던 이동복 전의원의 설명도 권씨의 주장과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이 전의원은 항공업체 임원을 지낸 덕에 항공기 지식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따르면 호커는 1950년대 생산된 낡은 비행기로 크기도 작고 고도도 낮다. 또 전산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것도 단점.

반면 1970년대 생산된 사이테이션은 완전 전산화가 이뤄진 비행기다. 펠콘은 셋 중 가장 최근에 생산된 기종으로 호커의 단점과 대조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 전의원은 “호커 용량이 작으니까 장비 크기를 줄여 맞추려 했다”며 국방부의 주먹구구식 사업추진을 비판했다. 이 전의원이 1998년 국회에서 그 문제를 지적했을 때 비행기값(600여억원)은 이미 거의 다 지불된 상태였다.

한편 국방부는 ‘신동아’에 보낸 답변서를 통해 “당시 수요부대가 TRW와 펠콘50 체계를 건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E시스템과 호커800 체계가 주장비 성능 및 가격조건이 우수해 선정했다”고 밝혔다.

호커800이 선정된 데 대해 OO부대 백두사업팀 관계자들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1995년 9월 이양호 국방부장관은 백두사업 진행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OO부대장을 찾았다. 마침 부대장이 출장중이라 권기대씨가 대신 장관실로 갔다.

“이장관은 대뜸 ‘E시스템이 제일 좋다면서? 이미 1950년대에 U2기(U2R)를 만들었다는데?’ 하면서 은근히 E시스템을 추겨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쏘나타로도 되는데 굳이 그랜저 탈 필요 있냐’고 그럽디다. 그래서 각 회사 장비와 비행기의 장·단점을 설명해준 다음 ‘장비만 따지면 E시스템 것이 우수하지만 비행기와 결합해 평가하자니 TRW를 선정할 수밖에 없었다’며 OO부대의 의견을 전달했습니다.”

그해 11월 2차 선정, 곧 백두사업 사업자를 결정하기 위한 최종심의가 열렸다. 사이테이션3와 호커800을 각각 파트너로 정한 프랑스 톰슨사와 이스라엘 라파엘사가 1차 심의 때 선정된 미국의 E시스템+호커800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종 선정과정은 문제 없었습니까.

“그해 11월 열린 최종 선정 심의는 아주 정상으로 이뤄졌습니다. 운용부대인 OO부대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었죠. 중요한 건 1차 선정과정이었습니다. 1차 때 미국측 장비회사가 결정된 이상 2차 때 다른 나라들의 입찰은 들러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OO부대가 미군의 장비를 쓰고 미군과 정보를 공유하는 한·미연합부대이므로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 장비를 고르기가 힘들었죠. 미제를 쓰지 않으려면 별도 부대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또 E시스템사 장비가 톰슨이나 라파엘사 것보다 비싸긴 했지만 성능은 더 우수했습니다. 그래서 최종 선정 때는 OO부대도 E시스템을 지지했어요.”

FMS, 현실 인정해야

―일부 군사전문가는 FMS 방식을 선택한 것 자체를 강하게 비판하는데요. 말하자면 미국 정부에 맡기다 보니 우리 돈 주고 우리 맘대로 하지 못하고 기술력도 갖지 못한다는 겁니다.

“FMS로 하면 미 정부가 품질을 보증하므로 안정성 면에선 좋지요. 그러나 그만큼 값이 비싸고 추가 관리비가 든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국방부도 처음엔 FMS로 안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백두는 현존 장비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제작사와 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프거든요. 결국 FMS 방식을 선택한 건 안정성을 택한 겁니다. 미국 정부가 FMS 아니면 안 판다는데 어떡합니까. 현실여건을 무시한 원론적인 비판입니다.”

―사업자 선정 계약 후 항공기 구매방식이 FMS에서 상용구매로 바뀐 데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지 않았습니까. 국방부는 예산 절감 차원에서 변경했다고 하지만(국방부에 따르면 약 200만달러 절감), 상용구매는 로비자금이 몇 만 달러로 제한되는 FMS와 달리 제한이 없기 때문에 이것 또한 린다 김의 로비로 바뀐 것 아니냐는 의혹인데요.

“미국은 장비와 비행기 둘 다 FMS로 구매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돈 아끼려고 상용으로 바꾼 겁니다. 상용구매이긴 하지만 장비와 체계결합이 FMS로 진행되므로 비행기 성능도 같이 보증받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린다 김은 E시스템사 로비스트입니다. 내가 알기로 호커800의 로비스트는 따로 있었습니다. 어쨌든 우리쪽에서야 싸게 구입할 수 있어 좋은 건데 그것도 문제가 됩니까.”

―일부 전문가는 거꾸로 장비는 기술력 확보 차원에서 상용구매로, 비행기는 FMS로 구입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호커800은 군용기가 아닙니다. 미 정부도 FMS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아무나 살 수 있는 비행기입니다. 그걸 왜 돈을 더 주고 FMS로 합니까. 반면 시스템은 미 정부가 기술을 통제합니다. 상용으로 할 수가 없어요. 얼토당토않은 논리입니다.”

권씨는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대한 비판에 무척 민감했다. 한마디로 그렇게 엉성하게 일을 진행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린다 김을 처음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97년 5월 E시스템사에 갔다가 공군 대령 출신인 이준영씨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91년에 만났을 때는 무기중개업체인 윤일통상 부사장이었는데, 그때 보니 E시스템사의 에이전트가 돼 있었습니다. 귀국해서 얼마 안 지나 이씨가 집에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한국에 와 있는데, 소개할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여자라. 저녁만 먹고 헤어졌는데 내가 주로 부탁을 많이 했습니다. 계약서대로 잘 진행시켜 달라고 말입니다. 그 여자는 내 앞에서 유력 인사들 이름을 대면서 거물 행세를 하려 했습니다만 그러려니 하고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가 바로 린다 김이었어요.”

―국방부에 백두사업 중단을 건의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97년 6월부터 10월까지 미국에서 백두사업과 관련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미 공군성이 주관했는데 제작사인 E시스템측과 양택남 백두사업단장을 비롯한 OO부대 관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E시스템은 처음 제시했던 제안서와 다르게 장비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애초 우리가 요구한 성능에 훨씬 못 미치는 장비였습니다. 논쟁이 붙었는데 급기야 회의를 중단하고 귀국해버렸습니다.

97년 7월 말 계약서를 다시 검토한 후 국방부에 사업 중단을 건의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측에서 전화가 왔는데 ‘한국 기술자들이 우리 설명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오해가 생겼다’며 한국에 오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술자는 필요 없고 E시스템사 사장이 직접 오라고 통보했죠. 8월 말인가 린다 김이 E시스템사의 백두사업본부장, FMS 담당자와 함께 입국했습니다. 같이 회의를 했는데 E시스템측은 ‘충분히 검토해 한 달 안에 답변을 주겠다’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뭘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가 없어요. 그래서 10월 말쯤 다시 한번 강력히 사업 중단을 건의했습니다.”

이처럼 OO부대가 강력히 반대하자 E시스템측은 태도를 바꿔 국방부에 ‘중단하려면 중단하라’고 통보해왔다. 그렇지만 국방부는 중단하고 싶어도 맘대로 중단할 수 없는 처지였다. FMS 규정에 따라 미정부에 이미 돈이 순차적으로 건너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E시스템측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셈이다. 린다 김이 다시 한국에 온 것은 그때쯤이다.

―린다 김에게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는데요.

“내가 그 돈 받고 뭐 하나 린다 김에게 해준 게 없습니다. 당시 린다 김에게 뇌물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오히려 린다 김에게 부탁할 처지였습니다. E시스템사(백두사업 사업자)에 잘 얘기해 계약대로 장비를 잘 만들어 달라고 말이죠. 내가 국방부에 사업중단을 요청한 것은 E시스템사가 당초 약속한 것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장비를 제작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반대한다고 중단될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국방부 방침은 변함이 없었거든요. 국방부는 ‘중단을 할 정도로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제작사측과 잘 협의해 계속 추진하라’고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린다 김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린다 김에게 돈을 받게 됐습니까.

“97년 10월 말 만나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이준영씨와 셋이 저녁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약속시간에 조금 늦은 린다 김은 ‘대선 캠프에 들렀다 오느라 늦었다’고 말하더군요. 자리에 앉기 전 ‘미국에서 사온 화장품인데 사모님에게 선물하라’며 들고온 쇼핑백을 슬쩍 제 옆에 놓기에 대수롭잖게 여겼지요. 그날 린다 김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내가 ‘E시스템이 제작비를 줄이려는 것 아니냐’ ‘커미션을 줄여라’ 하고 몰아붙이자 린다 김은 ‘(사업이) 되는 쪽으로 진행하자’ ‘사업이 진행돼야 나도 돈 받는다’고 하더군요. 집에 돌아가 쇼핑백을 열어보니 50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린다 김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사업진행과정에 개입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로비스트의 책임이지요. 사업자 선정으로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양쪽을 오가며 협조하도록 E시스템과 계약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사업이 중단되면 에이전트 몫이 없어지는 문제도 있고요. 또한 E시스템사도 회사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되니 좋을 건 없었지요. 어쨌든 중단하면 서로 손해인 것은 분명했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손해지요. 이미 건너간 돈이 있으니.”

―그해 12월10일 린다 김으로부터 또 500만원을 받았는데요.

“그날 오후 린다 김의 소개로 E시스템사 사장과 직원 일행을 만났습니다. 대여섯 시간 동안 회의를 했는데 사장이 ‘개선’을 약속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는데 린다 김이 전화를 걸어와 가는 길에 자신이 묵고 있는 아미가호텔에 들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만나서 나눈 얘기는 주로 대통령 선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린다 김은 OOO 총재, OOO 캠프를 거론하며 ‘선거자금을 요구한다’ ‘어디에 어떻게 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헤어질 때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나는 돈 많은 여자입니다. 권장군님이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용돈으로 드리는 겁니다’ 하면서. 그런데 사람 맘이 참 묘합디다. 알고 받았든 모르고 받았든 한 번 받은 게 있으니 두 번째는 거부감이 덜한 거예요. 린다 김도 ‘신동아’(6월호) 인터뷰에서 내게 준 돈은 뇌물이 아니며 ‘사업자 선정이 끝난 다음에 뇌물을 주는 바보가 어디 있냐’고 했는데 그 말은 맞은 말입니다. 맹세코 나는 그 돈을 뇌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린다 돈, 뇌물 아니다

권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까지 했지만 법원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린다 김 사건 담당 재판부도 마찬가지. 판결문엔 ‘권기대에 대한 뇌물공여는 백두사업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사업중단을 건의하는 동인(권기대)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해 권씨는 “판사가 당시 상황을 잘 모른 채 돈이 오고간 점만 갖고 판단한 탓”이라며 원망과 아쉬움을 나타냈다.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문제점으로 지적된 사항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예컨대 방향탐지기 오차정확도 등이 제안서와 맞지 않았습니다. 그쪽에선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비행기 중량도 문제가 됐습니다. 알려진 바와 달리 백두 비행기에는 조종사 부조종사 외 다른 사람이 탈 필요가 없습니다. 비행기가 자동으로 신호정보를 수집해 지상으로 보내주거든요. 설계도대로라면 비행기 내부가 너무 좁아 비행중 잠깐 쉴 공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행사가 쉴 수 있는 휴게의자 하나 놓아달라고 요구했는데 중량이 커져서 안 된다는 겁니다.”

―OO부대가 지적한 문제점들에 대해 국방부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미정부 FMS 담당요원들과 주한미군 관계자들과 협의한 후 ‘큰 문제가 아니고 상호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니 보완 및 개선이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문을 통해 ‘OO부대는 계속 사업을 추진하라’고 지시하더군요. 당시 장관이나 정보본부장이 로비를 받아 그렇게 한 건 아닙니다. ‘처음 하는 사업이라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며 사업 중단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다들 동감했습니다. 실제로 제작사측과 협의를 거쳐 문제점으로 지적된 부분들이 많이 개선돼 갔습니다. 처음에 적당히 하려다 우리가 강력히 항의하자 태도를 바꾼 겁니다.”

권기대씨에 따르면 한 차례 고비를 넘기고 ‘잘 가던’ 백두사업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은 이듬해인 1998년 4월 OO부대장이 바뀌면서.

“새로 부임한 P장군은 ‘백두는 필요치 않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미군 정찰기 U2R기와 가드레일이 있으므로 백두가 별로 이바지할 게 없으며, 성능 문제로 시끄러운데다 IMF체제로 외화가 부족한 판에 엄청난 외화를 들이는 사업을 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부대장의 의견에 처음 사업자 선정과정부터 불만을 품었던 실무자들이 장단을 맞췄습니다. 거기에 감사원 감사, 국방부 특별평가가 이어지자 ‘백두를 계속 하자는 놈은 다 돈 받은 놈’이라는 식의 극단적 논리가 판쳤습니다. P장군은 부대장 소신으로 ‘백두 불가’ 보고서를 국방부에 제출했습니다. 기무사가 내사에 들어간 것은 그 즈음입니다.

98년 8월 국방부 특별평가팀이 구성돼 백두사업에 대한 평가가 시작되자 P장군은 주미사업단 소속 장교들을 국내로 불러들였습니다. 특별평가기간에 ‘너희들은 매국노’라며 BOQ(독신장교숙소)에 가둬놓다시피 하고 외출을 통제하는 한편 외부인과 접촉하는 걸 막았습니다. 그 사람들 중 일부가 E시스템 직원들과 백두사업 관련 자료를 팩스를 주고받다 군사기밀유출죄로 구속됐습니다. 국방부에서 감사를 받고 있는 주미사업단장 이화수 대령에게 필요한 자료를 건네주려 한 일이었는데, 나중에 재판도 받지 않고 다 풀려난 데서 알 수 있듯 그건 죄도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보십니까.

“당시 구속된 사람들은 백두사업을 제대로 해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미사업단은 백두사업을 계속 끌고 가려고 했고 나도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P소장에 의해 보직해임된 백두사업단장 양대령과 내가 한 얘기가 있습니다. 만약 사업자가 우리가 추천한 대로 TRW사로 결정됐다면 둘 다 죽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당시 국방부 검찰부장 말을 들어봐도 기무사가 수사를 서둘러 종결시키려 한 건 분명합니다. 어떻게 돈을 준 린다 김에 대한 조사도 없이 돈 받은 사람만 구속할 수 있습니까. 큰 걸 감추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은 겁니다.”

―희생양이라 하면?

“백두사업과 린다 김의 관계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당시 기무사 수사는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운용부대 내부에서 ‘한다, 안 한다’로 시끄러운데다 감사원에서 지적하고 국회에서 떠드니 일을 벌이긴 벌여야겠는데 적당선에서 마무리지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어쩌면 정권 교체도 한몫했을지 모릅니다. 전 정권에서 진행된 사업에 대한 흠집내기 차원일 수 있지요. 어쨌든 린다 김이 위기감을 느꼈을 법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군 안팎에 린다 김을 보호해야 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는 사건을 적당히 덮을 희생양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후 OO부대 백두사업단은 어떻게 됐습니까.

“기무사·군검찰 수사가 끝난 후 P장군은 국방부로부터 질책을 당했습니다. OO부대는 국방부 지시로 백두사업에서 손을 뗐습니다. 대신 지난해 1월 국방부에 백두사업단을 새로 만들어 사업을 국방부가 직접 관리하고 있습니다. 현 주미사업단장 안아무대 대령에 따르면 지금은 미국측과 오해도 없고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불가피한 시행착오

권기대씨의 얘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두사업은 린다 김 로비와 상관없이 자주정보력 확보 차원에서 시작된 것으로 꼭 성공시켜야 하는 사업이다. ▲장비 및 기종 선정과정에 린다 김의 로비가 작용했다. ▲로비 결과 운용부대가 추천한 장비와 기종이 선정되지 않았다. ▲운용부대가 한·미연합부대니만큼 미국 장비회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자인 E시스템이 제안서대로 장비를 만들지 않아 한때 사업중단을 건의했다. ▲운용부대의 강력한 반발로 몇 가지 문제점들이 개선됐다. ▲새로 부임한 부대장이 ‘백두 불가론’을 들고 나와 한때 사업 중단 위기를 맞았고 그것은 기무사 수사로 연결됐다. ▲기무사 수사는 린다 김의 로비실태를 덮기 위한 희생양 만들기였다.

백두사업에 대한 갖가지 비판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기술력을 전수 받을 수 있는 체계결합사업을 총이나 대포 구입하듯 파는 쪽, 즉 미 정부에 맡겨버렸다는 점이다. 군 전문가들은 진정한 정보자주화, 자주국방을 생각했다면 단순히 장비를 사들이는 데 그칠 게 아니라 기술력을 확보하는 쪽으로 사업을 진행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한 권씨의 설명은 그야말로 실무자다운 것이다.

“처음에 미국 장비를 FMS로 구매하기로 결정한 이상 기술 이전이나 소프트웨어 개발은 물 건너 간 겁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것을 선택했다면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그나마 지금은 전보다 나아졌습니다. 장비 제작과정에 처음엔 우리쪽에서 운용요원만 참여했는데 지금은 기술요원까지 참여하고 있습니다.”

국방부 백두사업단에 따르면 1998년 특별평가 때 문제점으로 지적된 12개 항목 중 ‘과도한 요구사항’으로 판단된 6개를 뺀 나머지 6개 항목은 한·미간 협의를 통해 체계규격서에 반영됐다고 한다. 최근 미국에서 있었던 백두 정찰기의 시험비행결과는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백두사업 진행과정에 겪은 시행착오는 향후 한국 국방사업에 귀중한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내년에 국내에 들어올 백두 정찰기가 린다 김이라는 무거운 그림자를 떼내고 훨훨 날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까.

신동아 2000년 8월호

3/3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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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김 구속, 백두 로비의 새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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