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밀착르포|전공의·수련의 24시

“히포크라테스 정신? 자부심도 돈도 떠났는데…”

  • 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히포크라테스 정신? 자부심도 돈도 떠났는데…”

3/3
암세포가 생겨 위의 3분의 2 가량을 잘라내야 하는 큰 수술인지라 분위기가 심각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수술실 공기는 무겁지 않았다. 위수술 경험이 풍부한데다 워낙 낙천적인 방호윤 과장이 가끔씩 건네는 농담이 바짝 긴장한 레지던트들이나 간호사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탓이다. 위를 잘라내고 흉부세척 등을 마친 뒤 가슴을 꿰매는 것이 레지던트들 몫이다. 김인경씨(여)와 김성진씨는 한땀 한땀 정성스레 환자의 가슴을 봉합한 뒤 비로소 마스크를 벗을 수 있었다. 오전9시부터 시작한 수술은 거의 4시간만인 낮12시45분에야 끝났다.

하지만 1시부터 오후 수술이 잡힌 터라 쉴 틈이 없다. 일반외과 의국에 가 음료와 과일 등을 간단히 먹은 김씨는 또다시 수술실로 뛰어갔다. 두 번째 환자는 아예 위를 통째로 들어내야 한다. 위를 잘라낸 뒤 식도와 장을 연결하는 것이 두 번째 수술의 내용이다. 이번에도 4시간 정도의 큰 수술이었다. 꼬박 8시간 정도를 긴장상태에 서 있은 터라 레지던트들도 힘든 기색이 보인다. 김인경씨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다리를 폈다 오므렸다 하자 당장 방과장의 입에서 호통이 떨어진다. 10시간짜리 수술도 있는데 그런 것도 견뎌내지 못하느냐는 핀잔이다.

수술실에 들어오기 전 김성진씨는 자신이 담당한 환자들을 돌본다. 세브란스 병원과 달리 원자력 병원에서는 레지던트들이 주치의다. 오전 내내 배에 복수(腹水)가 찬 말기 위암환자의 복수를 뽑아냈고 가슴혈관을 통해 영양제를 공급해야 하는 환자의 혈관도 찾아야 했다.

학교졸업생을 고스란히 인턴이나 레지던트로 옮겨 놓는 학교부설 대학병원의 경우 ‘군기’도 세고 경직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원자력 병원은 여러 학교에서 모이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다. 부산 고신대의대를 졸업한 김성진씨는 “학연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경우 대학부설 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하면 나중에 일자리를 잡을 때 유리할 수 있다”며 “하지만 원자력 병원 같은 암전문 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거치는 것도 밀도 있는 교육을 받는 데는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병원에 가면 드문 위암환자가 이곳에는 허다하기 때문. 그만큼 위암수술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의사들이 항상 병원에 남아 야근만 하는 것은 아니다. 7월7일은 마침내 탈장수술을 집도한 레지던트 2년차 박광인씨를 축하하는 회식이 준비됐다. ‘이와이’(일본말로 축하란 뜻)라 불리는 회식은 오후7시반경부터 병원근처 낙지집에서 일반외과 과장, 레지던트, 인턴, 간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외과에서는 맹장수술 다음으로 간단한 수술이지만 어떤 단계를 지났다는 것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것이 의료계의 오랜 관행이다.



기형적으로 비대한 전문의 비율

박광인씨에게 축하 꽃다발을 선사하고 간단한 인사말을 들은 뒤 유쾌한 술자리가 벌어졌다. 병원에서 물어보지 못한 것들도 자연스레 물어보고 일반외과를 하면 어떤 점이 힘들고 어떤 점이 좋은가라는 개인적인 관심사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진료부장을 맡고 있는 외과전문의 최동욱 과장은 “이런 회식자리는 1달 내내 억눌려 있던 젊은 의사들이 스트레스를 발산하는 자리라는 의미도 있다”며 “의사도 기계가 아닌 사람이니까 술먹고 좀 풀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역시 이날 회식에 참석한 대장항문외과 황대용 과장도 이번 의료계 파업과 관련, “의사들이 대대적인 파업을 벌인 이유를 잘 생각해야 한다”며 “전공의들의 파업동참은 자존심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절박한 생존권 투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의약분업안대로 간다면 정말로 150만원짜리 월급쟁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파업의 근저에 있을 것이란 지적이다. 의료계에서 3D로 통하는 외과의사들은 이미 존경도 받지 못하고 돈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이번 사태로 신뢰까지 잃었다며 안타까워 했다.

황대용과장은 “그래도 의사들만큼 순수한 집단이 없다”며 “이번 사태로 의사들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는 지적을 받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의사들은 수술실에 들어갈 때마다 ‘저 환자가 내 어머니나 아버지라면…’이라는 심정으로 수술에 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술이 거나해질 10시반경 김성진씨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병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날 당직이라 술도 한모금 받아 마신 것 빼고는 모두 사양했다. 병원에 올라가는 길에 김씨는 “평상시에 조용한 것 같아도 늘 위험을 안고 있는 곳이 암병동”이라며 호출기를 살폈다. 수술 마친 환자는 폐렴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으므로 긴장을 늦출 수 없고, 큰 수술을 받은 환자는 장기에서 급작스러운 출혈의 위험이 있으니 환자의 상태를 늘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새벽 2시경이 돼서야 김성진씨는 고단한 하루를 접을 수 있었다. 물론 숙면을 취하는 것은 아니고 침대에 몸을 뉘어보는 것. 호출기와 전화는 항상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양말도 벗지 않는다. 이날밤에도 3,4차례 호출을 받아 병동을 둘러본 뒤에야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매일 오전8시에는 의국에서 레지던트들의 회의가 있다. 레지던트 4년차 치프인 김병기씨 주재로 환자의 상황을 정리하고 차트와 필름을 판독하며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자리다. 이날은 토요일이라 수술이 없어 조금은 여유가 있어 보인다.

간단한 회의를 마친 김병기씨는 기자의 질문을 받자 의료체계의 문제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 놓았다. 예방의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김씨는 일단 우리나라 의료전달 체계에 문제가 있다며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현재와 같이 1차, 2차, 3차 진료기관의 의보수가가 동일한 구조에서는 3차병원인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 간단한 감기환자도 모두 종합병원을 찾는 현재 구조로는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고 동네 병원이나 의원의 생존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98%가 넘는 전문의 비율도 기형적인 거라고 비판한다. 김씨는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뒤 대다수가 개원의가 되고 개원의의 경우 1년이 지나도 배 가르고 위암 수술할 기회가 없는 것이 현실 아니냐”며 “현재의 교육은 지나치게 낭비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번 의료계 파업에서 공론화하지는 않았지만 전공의들의 월급줄을 쥐고 있는 병원장들에 대한 불만의 소리도 높았다고 말했다.

의사는 극빈자?

병원 쪽에서는 싼 임금에 전공의들을 4년간 부려먹다가 내보내면 또 다른 전공의들이 들어오니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 김씨는 “최근 몇 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의대의 숫자는 그만큼 수지타산이 맞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말했다. 과거 외과계열을 제외하고는 3년으로 정해졌던 레지던트 과정을 4년으로 슬그머니 늘린 것도 병원측이 양질의 인력을 싼 값에 좀더 부려먹으려는 불순한 의도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전문의 비율을 줄이고 일반인들 수요에 부응하는 일반의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 김씨가 제시하는 해결방안.

일한 만큼의 대가는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사들의 항변. 이번 파업기간중 대외적으로 목청을 높이지는 못했지만 대다수 전공의들이 가진 불만은 역시 일한 만큼의 댓가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자존심은 물론 환자들의 존경심도 잃은 지 오래지만 이번 파업으로 의사들의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턱없이 부족한 대우 등 전공의들이 직면한 실상을 조금이나마 이해시켰다는 것이 위안거리라는 것.

“말하기 부끄럽지만 제가 얼마 전에 미국 대사관에 비자신청을 했어요. 1년간 총소득이 1680만원이 찍힌 근로소득 원천징수 영수증을 제출했다가 비자승인을 거부 당했지 뭐예요. 비자발급을 거부당하고 돌아서려니 ‘난 이제 극빈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레지던트 4년 차의 넋두리다.

7일간의 취재과정에서 50여명이 넘는 전공의·수련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확실히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고, 온몸을 던져 환자를 돌보는 ‘좋은 의사’들이었다. 자신들이 벌인 파업은 올바른 의료서비스 정착을 위해 불가피한 행동이었다는 신념도 확고한 듯 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일주일간의 파업으로 국민건강에 끼친 불편에 대한 절절한 반성을 하는 전공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 어쩌면 너무 바쁘고 힘들어 반성할 짬을 내지 못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신동아 2000년 8월호

3/3
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목록 닫기

“히포크라테스 정신? 자부심도 돈도 떠났는데…”

댓글 창 닫기

2021/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