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에 68년 미국으로 망명한 전 체코 국방성 참모장 겸 당 제1서기였던 잔 세이나의 폭로는 아주 충격적이었다. 그는 96년 9월17일 미 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6·25전쟁 당시 소련군이 행한 미군포로와 한국군포로에 대한 생체실험을 폭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6·25전쟁 초기에 체코정부는 모스크바로부터 북한에 군병원을 설치할 것을 명령받았다. 병원이 완성되자 소련측은 군부상자 치료를 위한 병원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이는 위장이었다고 세이나는 말했다. 그는 체코정부의 최고기밀 서류를 인용해 이 병원이 미군포로와 한국군포로들에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장이었다고 증언했다. 소련 과학자들은 미군포로들을 대상으로 소련이 제조한 핵무기를 포함해 세균전과 화학전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가를 실험했다. 그들은 한국군포로보다 미군포로들을 선호했다. 그 이유는 소련의 1차적인 적대국은 미국이기에 미국인들의 신체 반응이 중요했다고 세이나는 설명했다.
체코정부는 소련당국의 명령으로 이 병원 인근에 시체소각장을 건립했다. 6·25전쟁이 휴전에 이르렀을 때 이 병원에는 약 100명의 미군포로들이 있었다. 이들 포로들은 우선 4개 그룹으로 나뉘어 체코로 후송되어 신체검사를 마친 후 소련으로 이송됐다. 세이나는 이 모든 사실을 북한에 파견된 체코 비밀경찰과 군의무관들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또 소련군 고문관들의 보고서도 입수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1968년 체코를 탈출할 때 적어도 200명 이상의 또 다른 미군포로들이 소련으로 후송됐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 관계자들이 이 정보를 추적했음은 당연했다.
이렇게 미국정부는 참전 지역에 관계 없이 전세계를 상대로 미군포로나 실종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만약 이들 정보가 미군포로나 실종자 추적작업에 도움을 줄 때는 보상금도 지급하고 있다.
미국이 해외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모국으로 송환하는 것은 남북전쟁 이후 멕시칸 전쟁(1846~1848) 때부터라고 미 국방부 전사자료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전사자나 실종자 신원파악이 정확지 않았다. 그리고 유해봉송도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전투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면 전투지역 근방이 그들의 무덤이 됐다. 그러다가 1898년 미서전쟁을 계기로 해외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를 미국땅으로 송환하는 제도가 미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됐다. 당시 쿠바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들의 유해를 미국본토로 이송했다. 그후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미군이 유럽전선에 투입되면서 미군 유해가 대서양을 건너 미 본토로 대거 송환됐다. 이를 위해 영현청을 설치해 전사자들의 신원파악과 유해송환업무를 관장케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면서 전사자나 포로 및 실종자 관리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져 미 의회는 관계 법령을 대대적으로 보완했다. 또한 지휘책임을 육군장관에게 맡겼다. 또한 전사자의 신원파악도 과학적으로 다루게 되어 오늘날과 같은 신원확인소가 설립됐다. 이 신원확인소에 사상 처음으로 전문해부학자와 인류학자들이 요원으로 근무하게 됐다. 이후 한국전쟁과 월남전쟁 등을 포함한 냉전상황에 신원확인소의 중요성이 높아져 1976년 5월 하와이주 호놀룰루 히캄 공군기지 내에 DNA 감식반 등 첨단장비를 갖춘 ‘육군중앙신원확인소(CILHI)’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신원확인소 건물 입구에 레이건 전 대통령이 말한 “당신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실종미군 찾기의 교훈
육군중앙신원확인소(CILHI)는 우리에게도 낯익은 기관이다. 최근 북한으로부터 송환되는 미군 유해가 판문점을 통해 미측에 인수되는 즉시 하와이에 있는 이 신원확인소로 보내진다. 이곳에서 정밀검사를 통해 신원을 식별하고 확인이 끝나면 가족에게 통보되고 이어 국가의식에 따라 엄숙한 장례식을 치르고 유해는 비로소 조국의 땅에 안장된다.
최근 한국에서도 재북 국군포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억류 국군포로 송환촉진 연구회 총무간사’로 활동하는 이기봉씨는 국군포로에 대해 최소한 생사 확인 및 희망자의 귀향을 위해 정부의 노력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미주에서도 알려졌다. 한편 지금까지 한국정부가 국군포로 현황에 대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여러 채널을 통해 북한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국군포로 중 268명의 명단을 확보했다는 것이 전부이고 유엔이나 국제인권단체들에 건의하는 정도로 보인다.
6·25전쟁이 휴전됐을 당시 미송환 국군포로 숫자는 연구자에 따라 2만∼9만여명까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 정부기관에서는 대체로 2만여명 선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53년 포로교환 현황을 보면 유엔군측이 인수한 포로가 1만3457명(한국군 8333명, 유엔군 5124명), 인계한 포로는 8만2493명(북한군 7만5778명, 중공군 6715명)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실종자는 총 4만1954명이며, 이 가운데 유가족 신고와 증언자료를 토대로 전사처리된 경우가 2만2562명이었다. 병적부 확인 결과 실종자로 처리된 1만7020명과 미확인자 2372명을 합친 나머지 1만9392명이 미송환 국군포로일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한국 국방부측 설명이다.
97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제대군인연맹(WVF) 제22차 총회에서 ‘한국전쟁 포로 송환 촉구’ 결의안이 통과됐다. 당시 세계 74개국 200여개의 참전 제대군인 단체로 구성된 서울총회는 폐회식에 앞서 각국 대표단이 “6·25전쟁 포로 및 실종자들은 국제인도주의적 법규와 포로 자신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돼야 하며 북한은 이 결의에 성의 있는 태도로 임할 것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난번 코소보 사태로 유고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미군포로 중 한 군인은 미 군용기로 미국땅에 내리면서 “조국이 명하면 나는 다시 코소보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을 위해 싸움터에 나갔다가 포로가 된 자신을 위해 미국민들과 미국정부가 쏟는 애정을 누구보다도 실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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