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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안이영노의 공간탐험

유동인구 30만 거대 지하도시 코엑스 몰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기획된 해방구

  • 안이영노 문화평론가

유동인구 30만 거대 지하도시 코엑스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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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를 겪고서도 소비 자본주의는 무한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이제 지상을 지나 지하로 파고든다. 사이버 스페이스로 가고, 버스를 타도 벽에 붙거나 횡단보도 앞에 보이는 전광판을 파고 든다. 우리 손 안의 휴대폰, 그리고 골목의 빈 구석을 파고 든다.

1990년대 소비 자본주의가 아니라 1960년대를 상기하라. 무한한 운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칠 줄 모르는 우리의 산업화다. 우리의 굶주림과 상처로 얼룩진 자부심-고속 산업화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병폐를 지녔든, 강한 힘을 가졌든 간에 군부 독재와 결합한 독과점 자본주의의 전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코엑스 몰을 걸으며 내 안경 너머로 보이는 인간 군상. 휴일을 맞아 소비를 즐기고 한가롭게 놀고 있지만 이들은 몽매한 대중도, 전원에서 풀 뜯는 소 같은 우중도 아니다. 이들은 여전히 광기로 일터를 달구던 산업 역군이다. 이들은 지금 쉬러 와서도 무한정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 노동 현장의 관성이 휴일 낮에 브레이크를 걸고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속도대로 여가를 보내는 것이다. 이 인파의 여가에는 맹목성이 있다. 19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마찬가지의 속도감이 있다.

코엑스 몰은 ‘달리는 자들’의 공간이다. 멈추고 쉬는 자들의 공간이 결코 아니다. 엄청난 굉음을 내고 소비하는 잠재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경쟁하는 경제적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산자들, 노동자들이 이 몰에 보인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여기 이 인파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뿜어내는 ‘빨리빨리 증후군’에 중독된 사람들. 바로 한국의 소비자들이다. 이 소비가 없다면 우리의 경제도 없다.

달리는 소비자들, 일하는 속도로 여가를 보내는 인파들. 이런 사람들 사이로 퍼져가는 새로운 인종이 있다. 이들 역시 1990년대의 산물이지만, 요즘 들어 점점 늘어나는 새로운 경향, 바로 축제주의자와 풍요를 찬미하는 사람들이다.



게으를 권리를 외치던 소비의 총아들, 호모 루덴스, 쉴 권리를 주장하고 노는 법을 창안한 1990년대적 인간, 이런 아이들의 표정을 코엑스 몰에서 자주 마주친다. 기성세대의 표현대로 이들은 고생이라고는 겪어보지 않은 듯 해맑은 표정으로, 과잉된 웃음, 방송에서 보는 듯한 행복한 미소를 지니고 있다.

그런 ‘나일론 스마일’을 발견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육체적 기쁨을 즐기고 놀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브랜드로 위치를 표현하는 사람들, 부지런히 사고 쓰면서 죄책감 없이 웃을 수 있는 아이들, (금액은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부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탕진을 통해 자기 몸에 엄청난 테러를 하는 반항아들, 날라리들. 그리고 게으름뱅이들…. 코엑스 몰과 같은 소비의 첨단 도시는 자연스럽게 게으른 자들의 공간이 된다. 점점 서울의 바쁜 곳들과 이 도시 소비 문화의 빈틈들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사람들이 소외되기 쉬운 대도시일수록 이탈자, 백수, 게으름뱅이, 그리고 느림보를 위한 공간이 많다. 쇼핑 몰의 구석, 호텔 로비로 올라가는 계단 등에 앉아 있는, 대학생 또래의 반바지들을 난 오늘만도 다섯 차례 이상 보았다. 마치 배낭 여행 가듯이, 빈틈 없이 짜인 이런 몰의 틈새에 앉아서, 그들은 게으름과 나른한 느낌, 잡담과 스킨십 같은 사소한 유희를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IMF 이후 증가한 우리 도시의 모습이다. 가난하게 여가를 보낼 곳을 찾는 수많은 서울 사람들. 이런 게으른 자들이 발견한 곳은 모두 한국 산업화의 틈새들이다. 이제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와 같이 한낱 작은 도시에서 소외된 사람이 소소한 희망을 찾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일상에서 신비를 찾아 도시 속에서 방황하고 구도하는 이들이다.

이탈자와 백수의 공간

1990년대 이후 나타난 다른 경향은 근대화 이후 최초로 권태를 느끼는 세대가 나왔다는 점. 현대 사회 특유의 소외 속에서 기분 전환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아이들이 권태 속에서 대중 문화를 갈구한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새로운 지루함의 세대는 반대로 대중 문화 속에서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는 아이들이다. 1990년대적 풍요 속에서 이를 즐기면서도 일말의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들, 도시의 권태를 회의와 사색으로 이끌어내는 세대들, 산업화의 조증과 모두 인파의 물결에 휩쓸리는 광기 속에서 우울하고 진지한 아이들, 소비의 환희 속에서 여백을 찾는 아이들을 본다.

역시 나만의 착각일까. 주말 한낮 코엑스 몰의 엄청난 인파 속에는 지루함을 느끼는 표정이 자주 보인다. 권태는 풍요 속에 나타나는, 부럽기 그지 없는 표정이다. 귀티가 나는 아이들의 얼굴은 무관심으로 얼룩져 있는 듯하다. 점점 더 거창한 것이 많아지는 부자 나라에서 태어나, 더 이상 대단하고 거창한 것은 없다는 듯 무감각하다. 물론 1990년대 신세대 뿐 아니라 많은 기성 세대도 그 점에서는 지루함과 따분함을 겪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들이 그냥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태만과 쾌락에 대해 회의하고 당당하게 논리를 편다는 점이다. 자신 있으면서도 무심한 듯 나른한 표정들. 마치 남들이 못 보는 귀신을 보듯 나는 코엑스 몰과 같은 큰 도심을 걸으면서 무수히 이런 아이들을 마주친 것 같다.

이런 경향이 대세인지, 실제 이런 세대가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백, 뒷골목! 이 시끄러운 몰에도 태풍의 눈 같은 진공이 있다. 소음이 한순간 사라지는 신기한 공간들, 그곳에는 바쁜 도시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평범한 천사들이 앉아 있는 것이다!

계단의 아이들, 호텔 로비 한가운데 소파를 차지한 젊은이들, 외곽 벤치에서 돈 없이 여가를 보내는 듯한 대학생 커플. 그들의 한 손에는 휴대폰이, 또다른 손에는 자판기에서 뽑은 캔음료가 있다. 뛰면서 즐기는 나만의 여유! 혹은 뛰는 인파와 이들은 별상관이 없다.

국제 회의장 지하에 놓인 하얀 피아노 앞을 지날 때 난 중학생 둘이 건반을 두드리며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을 듣는다. 언제 호텔 웨이터가 와서 제지할지 모르는데, 그 아이들은 한가롭게 그 짧은 시간을 즐긴다. 긴장의 이완을, 여가를, 또 소비 속에서 권태를 습득한 사람들은 코엑스 몰을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안다. 지겨운 하루하루의 반복적인 소비 속에서 한편으로는 무감각하고 한편으로는 언뜻 역겨운 지루함을 이겨낼 줄 안다. 이 아이들의 감각은 대중 소비로부터의 분산과 일탈?

이탈자와 백수의 공간이 분명히 있다. 그저 소비가 아니다. 일상 속에서 유희하고 나름대로 권태를 이기고 태만을 생산한다. 이 젊은이들이 거대한 쇼핑 몰 속에서 그럴 권리는 분명히 있다. 이들은 코엑스 몰로 들어서는 통행세를 이미 치렀다. 그리고 수족관이나 영화관처럼 유명한 곳도 아니고, 지금 한적한 공간의 여백을 소비하려는 것뿐이다.

면세점 거리의 선진국형 걸음걸이

새로 지은 아셈 빌딩으로 들어서서 에스컬레이터로 지하로 내려간다. 메가박스 시네플렉스와 수족관을 지나면 갑자기 한적한 곳이 나타난다. 위치 상으로는 새로 지은 인터콘티넨탈 호텔 아래가 분명하다.

무척 한산하다. 방금 지나온 인파의 시장과는 대비가 심하다. 이곳은 내국인 공간이 아니다. 면세점이다. 놀라운 것은 면세점이 이전처럼 내국인들이 발을 들여놓고 싶어하던 희구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이스버그, 카무소, 폴리니 같은 고급 의류와 피혁 제품을 지나 국내 공예품이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이곳은 숍 도어와 윈도 쇼핑이 결합한 기능적 공간으로 짜여 있다. 그러나 백화점처럼 내국인이 윈도 쇼핑(아이 쇼핑)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국인에게 이곳은 주차장 등으로 가기 위한 쾌적하고도 한적한 통로다. 그러나 간혹 ‘소요학파’와 이탈자들에게 이곳은 산책로가 된다. 이미 영화관과 수족관을 지나 소음의 통행세를 치른 사람들에게 이곳은 공원처럼, 걷고 눈의 피로를 씻고 사색에 잠기는 공간이다.

벽에 기대서서 관찰하니 사람들에게서 특유의 ‘선진국 걸음걸이’가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기름진 소비의 거리를 유유히 걷는 고소득 국민의 걸음걸이가 아니다. 나라는 부유하지만 국민은 가난하고 검소한 곳에서 나오는 걸음걸이, 스위스와 일본에서 보듯, 즉 후기 산업 사회에서 여가를 확보한 사람들이 걷는 명상과 여유의 걸음걸이다.

이곳에서 내가 본 사람들은 소수지만 아주 특별하다. 일상의 신비를 찾는 국외자들, 의미 그대로 관광객을, 즉 여유를 갖고 서울 도심을 걷는 한국인 관광객을 본다. 아이 쇼핑을 부끄럽거나 쑥스럽게 생각하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들. 눈에 띄지 않던 게으른 보행자, 소요하는 산책가들이 바로 여기에 출몰하는 것이다.

나는 산책한다. 고로 존재한다.

유행은 삼성역 지하를 과거로 만들어버렸고, 대자본은 코엑스 몰이라는 더욱 거대한 공간을 선보였다. 그야말로 새것이다. 아직도 흐르는 바니스 냄새, 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새로움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새것(NEW)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제품(BRAND-NEW)을, 말하자면 상품이 끊임없이 나오기를 바란다. 아무리 완전한 것이 나와도 사람들은 다음 것을 기다린다. 그것이 현대성이니까.

여기 오는 서울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에 살지만 서울을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는 존재, 즉 고향 없는 유랑민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는 존재로서 유목민을 택하기도 한다.

특히 이 인파 중의 많은 젊은이들은 아예 소비 시장을 고향으로 생각하는 신종 인류다. 1990년대 이후로 시장에 터를 내리고 자유와 저항을 외치는 이상한 아이들이 늘고 있는 거다.

인파의 급류같이 빠른 템포에 항의하는 존재, 차라리 지루함을 즐길 수 있는 존재, 근대화의 속도를 다소 거스르는 게으른 존재, 우유부단하고 저항하는 유랑민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소비의 현장으로부터 간격을 두면서 보는 비판적인 국외자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관광객의 눈’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소비의 현장을 생각하고 고민할 줄 아는 보행자가 필요하다. 산책하는 존재, 사색하고 명상하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도시의 근대화는 유랑적 존재가 박멸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현대 교통 수단에서 내려 보행자들의 리듬으로 코엑스 몰을 유유히 산책할 보행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곳곳에 널브러져 빈 공간을 활용하는 아이들이야말로 급하고 바쁜 인파가 흐르는 코엑스 몰의 아름답고 소소한 경치라고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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