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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김정일은 피눈물의 역사를 만나야 한다

통일잔치에서 소외된 통일전사 백기완의 분노

  •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김대중과 김정일은 피눈물의 역사를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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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보도된 남북정상회담의 비화를 보면, 김정일 위원장도 주한미군의 실체를 인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확실히 모르겠어. 김정일씨를 만날 수 있다면 한번 물어보려고 해. 지금 우리나라 신문 방송에서 떠드는 것만 같고는 믿기가 힘들어. 미국과 일본 언론도 믿을 수가 없어. 내가 추측하건대 미국이 북쪽에 대해서 지나치게 경제통제를 하고 있으니까 북쪽도 숨을 쉬기가 힘들잖아. 경제제재를 풀기 위한 전략, 전술이 요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행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은 해본 일이 있어.”

―이산가족이 고향을 방문하고 비전향 장기수가 송환되는 것은 일보 전진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는 거 잘하는 거야. 김대중씨, 김정일씨 정말 잘하는 거라니까. 이산가족만이 이산가족의 아픔을 알거든. 장기수 그 양반들 북쪽으로 보내는 것도 잘하는 거야. 나는 김대중씨가 이북으로 갈 때 같이 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야. 자기 뜻으로 사는 사람이 무슨 죄인이야.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범죄자로 모는 곳은 남쪽밖에 없어. 하지만 통일을 자꾸만 추상적 민족주의나 인도주의적 경협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그보다는 우리 민족이 어떤 통일을 이룰 것이냐에 대한 합의가 시급해.”

백기완 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통일문제 전문가다. ‘통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됐던 시기에 통일문제연구소를 차렸다. 5공 때는 모진 고문에 시달렸고 6공 때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게 남북민중정치협상을 제안했다. 또한 92년 민중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면서 밝힌 통일부문 공약에는 ‘민중주도 연방제’가 1순위로 명시돼 있다. 그렇기에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본 감회는 남달랐을 듯하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포옹하는 장면을 지켜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너무나 감격해서 울었어. 좌우지간 우리 민족끼리 55년간 싸우다가 실권자끼리 만났으니 얼마나 감격스런 일이야. 신문에서는 김대통령이 예상 밖의 환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야. 우리 민족 마음보가 원래 그런 거야. 텔레비전을 보면서 한참을 울다보니까 영화의 겹치기처럼 우리 어머니하고 나하고 55년 만에 껴안는 것처럼 착각을 했어. 그래서 꺼이꺼이 울었어. 나는 두 사람이 정말로 민족적인 원칙을 가지고 만났으면 해. 그냥 만난 게 아니라, 분단의 역사, 피눈물의 역사를 만나야 해. 나는 두 분이 진짜 민족성원의 한 사람으로 분단을 깨부수기 위해 싸워온 통일운동의 역사를 만나시라고 빌었어.”

“미군은 한반도 분단의 상징”

―선생님께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일허무주의’로 규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미국의 독점자본이 온 한반도를 장악하는 것도 통일이야?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건 한반도에 대한 전면적인 지배와 침략이지 결코 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썩어문드러진 재벌이 금강산 선녀탕이나 백두산 천지에 별장을 짓는 것도 통일이야?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것은 부패를 한반도에 강요하는 것이지 분단으로부터 고통받는 민중을 해방시키는 통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런 통일은 우리 민족을 위한 통일이 아니기에 ‘통일허무주의’라는 거야.”

―최근엔 미국의 한반도 지배 양식도 변하고 있다는 주장이 우세합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경우 미국도 당황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우리의 분단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습니까. 분단구조를 누가 장악하고 있어? 미국이잖아. 전세계에서 남의 나라 군대가 50년 넘도록 총칼을 들고 와 있는 예가 없어. 그런 미군을 그대로 놓고 통일 어쩌구 하는 건 미국의 힘이 주도하는 통일이지 우리 민족의 통일이 아니야. 경제적으로 어떻게 돼 있어? 다 팔아 동이 날 정도로 미국의 독점자본이 거머쥐지 않았어? 남한경제는 사실상 미국금융제국주의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이렇게 볼 때 앞으로 미국의 금융자본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음모도 통일이라는 명분으로 다가오게 돼 있어.”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외세를 완전히 배제한 통일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외세를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보십니까.

“외세는 존재하는 거야. 다만 외세를 배척할 대상으로 보느냐, 외세의 상호모순을 이용할 대상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돼. 한반도 분단의 물리적 장치가 바로 외세야. 그러니 외세를 몰아내지 않고는 자주적인 통일이 불가능해. 그런데 말야. 외세는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상호모순으로 존재해. 그래서 외세를 전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도 봐야 한다는 거야.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정치행태의 문제일 뿐이고, 민족적 대원칙에서는 반드시 몰아내야만 해.”

“역사는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

백소장의 지론인 ‘민중주도연방제통일론’이 이어졌다. 외세를 배격하고 민중 중심의 통일을 일구어내자는 주장이다. 예나 지금이나 백소장은 그 자리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없다. 평생을 함께 싸워왔던 문익환 목사와 계훈제 선생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재야의 젊은 일꾼들도 하나둘 정치권으로 편입됐다. 요즘엔 백기완 소장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대학생들이 부지기수라는 말도 엄연한 현실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그것을 대세로 인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세계적인 자본의 지배에 대해서 아무런 자각도 없이 그냥 후퇴하게 된다면 그건 잘못된 세계사를 만드는 공범자가 되는 거야. 자기 알기성, 주체성을 포기하는 거야. 눈앞의 압도적인 현상에 매몰돼선 안돼. 역사라는 건 다그쳐오는 현상을 깨는 거야.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어. 일본이 하와이를 폭격하고 남양군도를 차지했는데 선생님이 그러는 거야. ‘일본은 압도적으로 강하다. 그러니 한민족은 독립운동을 해봐야 소용없다. 일본을 도와서 동양이 서양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일본이 망했잖아. 지금 미국의 금융제국주의가 전세계를 휩쓰는 것 같아도 그건 일시적인 현상이야.”

―하지만 민중운동 진영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학생운동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축소됐습니다.

“젊은이들이 뭐 출세 좀 하겠다고 민중운동 진영에서 이탈해서 현실 정치권으로 진출하고 관료권으로도 들어갔는데, 나는 그게 젊은이의 개인적 좌절이라고 생각해.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소시민으로 편입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은 중대한 사태라고 생각하지 않아. 역사는 결코 좌절하지 않아. 인류의 역사를 보면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안 되겠다는 흐름이 주류를 이루어왔거든. 때로는 바위에 부딪혀 깨지기도 하지만, 깨졌다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땅속으로 스며들어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로 흘러가고 있잖아. 인류의 보편적인 이념이 승리하는 날이 언젠가는 오게 돼 있어.”

“젊은이여 올바른 꿈을 가져라”

청년세대에 대한 백기완 소장의 열정은 남다르다. 청년이 살아야 민족이 통일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온 그다. 90년대 중반 민족문화대학 설립운동을 벌인 것이나 최근 계간잡지 ‘노나매기’를 창간한 것도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빠져드는 젊은이들을 끌어안기 위해서였다. 그런 백소장이 지난 5월 난생 처음으로 대학교수 자격으로 강단에 섰다. 뭔가 신선한 충격이 있었을 것도 같다.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습니까.

“한마디로 ‘개죽’을 보는 느낌이오. ‘개죽’은 나뭇잎인데 가랑잎하고는 다릅니다. 가랑잎은 여름 한때의 짙푸른 자기 역사와 자기 추억이 있거든. 그런데 ‘개죽’은 얼핏 보기에 가랑잎과 비슷하지만 짙푸르러지기도 전에 메말라서 떨어져서는 실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다가 썩은 물살에 거품처럼 흘러가는 거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나는 꼭 ‘개죽’이 떠오릅니다.

―희망이 없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 땅의 청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승리한 게 아냐. 성공한 게 아니라구. 성취한 것 뿐이라구. 감옥엘 가봤어? 감옥에 가면 강도질하고 도둑질한 놈도 일시적으로 성취한 놈들이라구. 그러나 그 사람들이 승리한 건 아니잖아.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이 잘못된 역사를 갖고 마치 독점자본이 승리한 것으로 착각하고 경제적으로 뿌리를 내리려고 다투잖아. 그렇게 출세하려고 하잖아. 자기만 잘살려고 하잖아. 썩은 물살에 그저 흘러가는 ‘개죽’이잖아. 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 어떤 것이 역사냐 하는 공부를 다시 하라 그거야. 썩어 문드러진 세상을 극복하기 위한 양심의 역사, 피눈물의 역사만이 진짜 역사라는 것을 깨치길 바래. 두 번째로 요즘 젊은이들은 꿈이 없어. 욕망만 있지 꿈이 없잖아. 나도 잘살고 너도 잘사는 올바른 꿈을 가져라 이 말이야. 나는 감히 그 꿈의 실체가 ‘노나매기 세상’이라 말하고 싶어.”

‘노나매기’는 ‘같이 힘을 합쳐 잘살자’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로 백소장이 창간한 계간지의 이름이다. 백소장이 ‘노나매기’ 발간을 결심한 데는 쓰라린 사연이 묻어 있다. 98년 통일문제연구소가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은 뒤 백소장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강사료로 받은 돈을 지하철에서 소매치기 당했는데, 며칠 뒤에 미안하다는 편지와 함께 돈의 일부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백소장은 ‘소매치기도 나를 알아보고 돈을 돌려주는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며 책을 쓰기 시작했고, 그 책을 판 돈으로 ‘노나매기’를 발간하게 됐다.

―노나매기 세상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세상입니다.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야. 지구의 인구가 60억이 넘는데 그중에서 10억은 굶어죽고 있잖어. 20억은 배고파서 병들고 있잖어. 60억 인구 중에 뚝 잘라 절반이 병들고 있는 이유가 뭐야? 자본주의의 모순이 가져온 잘못된 사태거든. 미국이나 구라파는 잘살되 올바로 잘살고 있지 못하잖어? 아프리카의 노동자와 스위스 노동자의 임금 격차가 300 대 1이야. 미국과 구라파의 젊은이들이 젊음을 만끽할 때 아프리카와 아시아 인구의 30억이 굶어죽고 있잖어? 이게 잘못된 세상 아니야?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어?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명제를 들고 나와야 된다 이거야.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이여, 노나매기 공부 좀 하시라는 거야.”

―노나매기주의는 선생님께서 오래전부터 말씀해오신 ‘통일적 인간형’과 어떻게 다른가요.

“노나매기 인간형이 바로 통일적 인간형이야. 그럼 어떤 게 통일적 인간형이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스물한 살 때 독립운동하러 가시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노비문서를 불지르고 땅을 노비들에게 다 나누어줬어. 돌아가실 때도 땅 한평 없이 가셨어. 49년도에 암살당한 백범선생도 뭘 남겼어? 입던 두루마기하고 신발밖에 남긴 게 없어. 장준하 선생도 땅 한평, 집 한칸 안남겼어. 통일이라는 게 뭐야. 세계의 분열과 분단을 전제로 해서 한반도의 분단을 해결하는 거잖아. 양심이 분열되면 안되는 거야. 사회적 분열을 통일하는 몸부림을 통해서 내적분열을 통일하는 인간상, 나는 그런 사람을 통일꾼, 통일적 인간형이라고 생각해.”

잘 알려진 것처럼 백기완 소장의 고향은 황해도 구월산 밑이다. 해방 직후 축구화를 사주겠다는 아버지를 따라 맨발로 서울에 온 뒤 지금껏 한번도 고향을 찾지 못했다. 1946년 겨울과 1947년 봄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려다 미군의 제지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뒤 6·25전쟁이 터졌고, 백소장은 평생을 두고 있지 못할 어머니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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