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묻지마 정당’ 자민련의 끝없는 추락

  • 이중근·경향신문 정치부 기자

    입력2006-08-17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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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9일 오후 2시30분,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자민련 당사 2층 기자실에 김학원 대변인이 급히 들어섰다. 국회에 있다가 황급히 들어온 김대변인은 격앙돼 있었다. 기자실 옆 대변인실로 들어간 그에게 김종호 총재 직무대행이 전화를 걸어와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잠시 뒤 그는 대변인실에서 나와 보도자료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에서 우리 당이 마치 총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어서 당이 언제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고의적인 허무맹랑한 이른바 위기론을 거론하고 있음은 심히 개탄할 일이다. 이러한 자민련을 죽이기 위한 의도적 음모의 이유와 진원지, 그리고 정체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계속될 경우 당 차원의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이다…(중략)…근거없는 루머를 퍼뜨리는 것은 우리당에 대한 흑색, 악의를 품은 음모의 계략이 아닐 수 없다. 큰 정당에는 큰 소리 한마디 못하면서 작은 정당이라고 아무렇게나 말하고 짓밟는 일부 언론에 대해 한편 연민의 정을 느끼며 바른 길로 되돌아오길 진정으로 충고한다…”

    격앙된 그의 심중을 반영하듯 김대변인의 성명은 보기 드물게 강경했다. 그만큼 자민련은 이날 일부 신문에 실린 ‘9월 위기설 자민련 동요’라는 제하의 기사에 흥분했다. 더구나 이날은 모처럼 김종필 명예총재가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간담회에 출석하는 등 정치 행보 재개의 의욕을 보인 날이어서 더더욱 격앙했다.

    이튿날 오전 9시부터 김대행 주재로 7층 총재실에서 열린 주요 당직자 회의에서도 이 위기설이 논란이 됐다. 회의 초반에는 “당의 체제를 제대로 정비해 활성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됐다. 그러나 도중에 다시 이 기사가 문제가 되면서 논의는 엉뚱하게 흘러갔다. 한 참석자는 “해당 기자의 출입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흥분했다. 김대변인은 회의 후 “이번 기사는 최근 한나라당 내부 보고서에 있는 ‘자민련 8월 해체설’등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말하며 배후·음모설을 제기했다.

    기자실에 나붙은 기자출입금지 대자보



    그리고 11시30분쯤 당사 입구와 기자실 앞문에 ‘○○일보 기자 출입금지’ 대자보가 나붙었다. ‘허위사실 날조보도로 자민련을 매도한 ○○일보를 규탄한다’는 내용으로 밑에는 ‘자민련 중앙당 사무처 당직자 일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변인실 당직자가 다른 출입기자들의 눈을 의식해 서둘러 떼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또 한번 “자민련은 역시 비판조차 수용 못하는 정당”이라는 말이 나왔다.

    최근 자민련 주변에서 돌고 있는 위기설은 물론 딱부러진 근거나 내용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3부 이자의 사채로 지급해온 사무처 당직자들의 8월 월급이 지급되지 못할 것 같고, 의원들이 원내 교섭단체 구성 문제가 불투명해지면서 당에서 마음이 떠나고 있다는 게 위기설의 전부다. 이런 상황이 심화되면 그동안 참아왔던 의원들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으로 흩어져갈 것이라는 정도의 추정이었다.

    기사의 근거로 지목된 한나라당 내부 보고서 내용도 ‘상황이 이러하니 자민련 의원들에게 접근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둘 필요가 있다’는 게 요지다.

    그러나 비록 ‘9월 위기설’ 또는 ‘해체설’의 직접적 근거나 징후는 없다 해도 자민련이 지금 처한 현실이 위기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자민련 관계자들이 부인하고 있는 것은 ‘당이 공중분해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시나리오일 뿐 자민련의 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는 당내 여기저기서 쉽게 들어볼 수 있다.

    “사실 지구당 활동을 하면서 당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떳떳이 말하지 못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에서 한 발 떨어져서 보니 정말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우리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 국민들은 완전히 코미디로 보고 있더라. 그것을 자민련 의원들도 알고 있지만 개선이 안 된다. 개인적으로 진로를 어떻게 정해야 할 지 모르겠다.”

    지난 7일 자민련 당사에서 만난 한 지구당 위원장-그것도 자민련의 본거지인 충청지역의-이 기자에게 털어놓은 솔직한 얘기다. 스스로도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치욕적”이라면서도 “고향에서조차 이런 대접을 받는 자민련의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또 다른 당직자의 말.

    “도대체 요새는 모임에 나가는 게 귀찮고 신경질이 난다. 가기만 하면 무엇하러 자민련에 입당했느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자민련의 행태를 꼬집는 질문이 이어진다. 한마디로 비전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심지어 민주당과 합당을 기대하고 입당했느냐고까지 물어온다. 우리 당을 독립된 정치조직으로 인정해 주지 않으니 정말 답답하다.”

    자민련이 맞고 있는 상황은 95년 3월 창당 이후 최대 위기다. 매일같이 언론의 질타는 쏟아지고, 원내교섭 단체 구성 문제는 하루가 다르게 희비의 쌍곡선을 그리고 있다. 당의 운명마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당원 스스로 인정한다. 사무처 직원의 60%를 잘라내고도 월급을 반으로 줄였다. 그나마 지난 7월 월급은 창당 이래 처음으로 지급이 밀렸다. 인터넷 홈페이지 운용비도 없어 8월16일부터 재가동했다. 이러니 만나는 사무처 직원들마다 “당에 남아 있어야 할지 다른 직장을 찾아봐야 할 지 좀 조언해달라”고 말하곤 한다.

    안 열리는 당무회의, 불분명한 당직자들

    당 운영 체계가 엉망일 것은 불문가지다. 자민련은 총선 후 지금까지 당무회의를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다. 당무회의를 열었다가 무슨 비판이 쏟아져 어떤 사단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단 한 차례도 개최하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사실을 말하면 당무위원이 누군지도 정확하지 않다”며 “당무회의 없이 각종 결정을 집행하는 것은 엄연한 당헌·당규 위반”이라고 토로했다.

    총선에서 낙선한 뒤 미국으로 유학간 박철언 부총재의 경우 당직사퇴를 선언했지만, 그가 부총재인지 여부도 불분명하다. 한마디로 당직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불과 반 년 전까지 55석의 의석에 총리까지 차지하면서 국민회의(현 민주당)와 현 정권을 탄생시켜 공동운영하던 때의 위용은 간 데가 없다.

    그러나 당 관계자들을 더욱 답답하게 하고 있는 것은 자민련의 미래와 지도부, 특히 김종필 명예총재의 행보다. 의원들도 단결해 당을 활성화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채 제각각이다. 가뜩이나 당이 어려운 상황인데 일부 의원들은 알력까지 보이고 있다.

    지난 8월3일 자민련 의원총회(자민련에서는 17명의 회의를 의총이라고 하는 게 어색하다며 의원회의로 부른다)에서 나왔던, 소속의원들의 볼썽 사나운 입각 운동을 개탄하는 목소리를 들어보면 자민련의 현주소를 짐작할 수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국회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 사활을 걸고 있는 당은 무시하고 소속의원들이 장관 자리를 얻으려고 사방으로 뛰어 ‘염불보다는 젯밥’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자성론이 나왔다. 자성론은, 평소 이 점을 강력 비판하던, 44세의 재선이면서 혈기방장한 이재선 수석부총무가 먼저 제기했다.

    그는 “지금 당의 처지를 생각하면 우리 당 현역의원들은 아예 장관을 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국무총리다, 장관이다 해서 다 나가면 당은 누가 지키느냐”면서 “소속의원 17명 전원이 장관 자리를 줘도 가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자”고 제의했다. 수석 부총무로 원내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국회법 개정안 날치기 때 육탄 돌격도 마다지 않은 그로선 회의장에 얼굴조차 비치지 않은 의원들이 마냥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 당 일을 누구에게 맡기느냐. 우리 스스로 의욕을 보여야 한다”면서 이전에도 공공연히 입각 운동을 벌이는 의원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었다. 이어 오장섭 원내총무도 “당을 살리기 위해선 원외 인사라면 몰라도 현역의원은 절대 입각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입각 희망자로 거론된 김학원 이양희 이완구 정우택 의원 등 이른바 당내 ‘재선 4인방’은 묵묵부답이었다. 재선 4인방은 장관직에 대한 미련을 숨기지 않았고, 경쟁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한 비방전도 계속했다.

    의총이 끝난 뒤 한 의원은 “자기 이름이 하마평에 오르지 않으니까 아예 재뿌리려는 것”이라고 평했고, 다른 의원은 “교섭단체는 물건너갔는데…”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또 김명예총재에게 골프채를 사다준 것으로 거론된 모의원은 의총 전 “드라이버 한 개를 사다준 것이 마치 한 세트를 사다줘 로비한 듯 비쳐 불쾌하다. 그런 소문을 낸 사람을 알고 있는데 내가 반드시 손보겠다”고 말하는 등 자중지란을 보였다.

    개각이 끝난 뒤에도 입각 대상에 거명된 의원들에 대한 당내 견해는 상당히 신랄하다. 한 당직자는 이들을 ‘미운 오리새끼’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 당에서는 젊은 재선의원들이 너무 설친다. 김명예총재를 제외하곤 어려워하는 사람이 없다. 당이 어려움에 처할 땐 오히려 단결해서 당 재건에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한 중진 의원은 “초·재선들이 각 당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우리 당의 경우는 그 도가 지나치다. 다른 당 의원들은 그래도 과거 정치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개혁을 부르짖기라도 하는데 우리 당 재선들은 그러지도 못하면서 욕심만 낸다”고 꼬집었다.

    소장 의원들간 알력이 자민련 의원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안이지만 알력을 보이고 있는 게 비단 이들만은 아니다. 당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김종호 대행과 조부영 부총재 사이도 좋지 않다. 16대 국회 상임위 배정 과정에 국회 부의장인 김대행이 다선의 중진의원들이 선호하는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배정된 것이 발단이 돼 이후 두 사람은 껄끄러운 관계에 있다.

    비교적 한직인데다 경력이나 전문성과 무관한 교육위에 배정된 조부총재는 “앞으로 반드시 이것을 문제삼겠다”고 김대행 면전에서 쏘아붙였다. 조부총재는 “국회 부의장인 김대행이 오장섭 총무가 올린 상임위 배정안을 직접 바꾸고 자신이 통외통위를 맡은 것은 총재 대행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앙금을 풀지 않고 있다.

    의원들의 분열도 그렇지만 자민련으로 하여금 공당다운 외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하는 기본적인 원인은 정책과 역할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 민의와 동떨어진 행태다. 한 고위 당직자는 “솔직히 지금 우리는 공당의 꼴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다. 다른 의원도 “어려울 때일수록 당직자들이 당을 차고 앉아 정책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고 있다”고 자탄했다.

    우선 총선 이후 자민련은 모든 정책 논의에서 빠져 있다. 숱한 현안이 발생했는데도 자민련이 나서서 내놓은 대안은 하나도 없다. 안보정당을 자임하면서도 6·15 공동 선언 이후 환경이 변한 남북 관계에 대해 제대로 논의해본 적도, 그럴 듯한 견해를 밝혀본 적도 없다. 김명예총재가 “북한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흥분해서는 안되고 천천히 생각하면서 가야 한다”고 말한 게 전부다.

    당 관계자들은 ‘정책 실종당’이 된 원인은 기본적으로 원내 교섭단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다. 여야 총무협상에 끼지 못하니 각종 현안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을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당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또 자민련이 주장하는, 제3당으로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는, 과정이 정밀하지 못한 것도 이유다. 캐스팅 보트 행사는 그야말로 말은 쉽지만 어려운 과정이다.

    캐스팅 보트는 민의를 정확히 반영할 때 효과가 극대화되는데 자민련의 경우는 그러지 못하고 있어 당리당략만을 위한 행동으로 치부되고 있다. 김명예총재의 말처럼 ‘몽니’로 비치는 것이다. 국민들 사이에서 “별다른 정책은 하나 내놓지도 못하면서 의석 수에 비해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갖고 있다”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여기에 기인한다.

    자민련이 전체적으로 민의와는 동떨어지게 행동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 것은 지난 총선 때부터다. 당시 자민련은 총선시민연대의 존재와 활동을 정면으로 부인하면서 퇴행적 정치집단이라는 인상을 줬다. 정치의 근본적인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총선 시민연대의 활동을 ‘불법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나치게 매도했던 것이다. 선거 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정책적 미스였다는 게 지금의 평가다.

    청구동 JP 자택의 당무보고, 골프정치

    여기에 자민련을 점점 왜소하고 이상하게 만들고 있는 또 하나의 원인은 김명예총재의 불투명하고 구태의연한 행보다. 김명예총재의 총선 이후 행보는 신당동 자택 칩거와 골프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외적인 공식 활동은 국회에 몇 번 나와 표결에 참석한 것 뿐이다.

    신당동(과거에는 청구동이었으나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당동) 자택에 칩거하다보니 온갖 얘기가 도는 것은 당연하다. 공당의 당직자들이 당무 보고를 위해 사저를 자주 찾을 수밖에 없고, 자택에 있다보니 오겠다는 사람을 말릴 수도 없어 원내·외 인사들이 집안에 끊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포커를 친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특히 총선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골프행각은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논총을 받고 있다. 김명예총재가 지난 61년 5·16으로 정계에 등장한 이래 이처럼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한 적은 없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가 골프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예전 같으면 넘어갔음직한 문제도 골프치는 모습과 오버랩 되면 어김없이 증폭돼 부정적으로 비치곤 한다. 김명예총재의 골프를 비판하는 여론이 거세자 측근들은 건강관리를 위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지난 7월말 김명예총재와 함께 일본으로 가려고 김포공항에 나왔던 부인 박영옥씨는 기자들에게 “왜 유독 우리 양반이 골프치는 것만 그렇게 비난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박여사는 “골프는 이제 국제적인 대중 운동 아니냐. 박세리나 박지은이 골프 치는 것은 국위선양이라고 하면서…”라고 따졌다. 김종호 총재직무대행도 “보통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하는 것이나 JP가 골프를 치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고 항변한다.

    김명예총재의 골프 정치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이들은 골프치는 횟수가 지나치게 많은 데다 때를 가리지 않는 점을 지적한다. 건강삼아 칠 수도 있지만, 경기 지역에서 수해가 발생했는데 그곳에 가서 친다든지, 6·25 기념일에도 필드에 나가는 것은 심하다고 입을 모은다. 민생을 살피거나 현안에 천착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처사라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이 점과 관련해 김명예총재의 정치 스타일을 들며 ‘JP 한계론’을 거론한다. 김명예총재는 기본적으로 ‘로맨티스트’여서 난관을 돌파하는 힘이 약하다는 것이다. 같은 3김 중에서도 김영삼 전대통령처럼 저돌적이지도 않고, 김대중 대통령처럼 치밀하지도, 노력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오랫동안 쌓아온 관록으로 시간을 벌면서 틈새가 나타났을 때 절묘한 운신으로 활동 무대를 열어나가는 게 전부라는 분석이다. 권부의 핵심에 오래 있다 보니 일반 국민들의 생각을 잘 읽어내지 못하고, 국정에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근 들어서는 그 유명한 ‘JP식 간접화법’까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선문답이나 주고 받느냐는 것이다. 한 정치학자는 “지도자는 원래 명쾌해야 하는데 JP는 모호하다”면서 “이것이 젊은 층에서 인기가 없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JP의 모호한 행보에 당 내부도 당황

    김명예총재에 대한 젊은 층의 선호도가 극도로 부정적으로 고착화되고, 급기야 여야 소장의원들이 그의 한·일의원연맹회장직 퇴진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도 다 이런 배경에서 나오고 있다는 분석이다. 심지어 당 운영에 대해서도 그는 늘 두루뭉실하고, 알듯 모를 듯한 태도를 취해 당 관계자들을 헷갈리게 한다. 늘 “당이 결정해 주면 그 뜻에 따르겠다”고 해놓고 정작 당론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하루 아침에 틀어버리는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함께 일했던 당직자들은 얘기한다.

    ‘재선 4인방’이 집중비난을 받았지만 사실 지난 개각 때 자민련과 김명예총재가 보여준 행태도 모호한 행보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자민련은 ‘개각 불참’을 선언했지만 정말 자민련 몫의 장관을 입각시키지 않으려는 것인지 진의를 애초부터 의심받았다.

    결과적으로 의심은 적중했다. 자민련 소속 신국환 산자부장관과 김명예총재와 가까운 한갑수 농림부장관이 자민련 대표로 입각했다. 이 때문에 개각 발표 뒤 자민련은 ‘말 바꾸기’로 또 한번 여론의 질타를 받을까봐 전전긍긍했다.

    백보 양보해 신장관의 입각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장관까지 자민련 몫으로 기용됐다는 점에 당 내부에서조차 경악했다. 한동안 자민련 관계자들은 “한 장관은 비록 김명예총재와 친하고 골프도 가끔 치는 사이지만 우리와는 무관하다. 한장관은 우리 당사에 발을 들여놔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결국은 김명예총재가 승인한 인선이었다는 게 확인됐다.

    개인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한장관을 천거 또는 승인한 김명예총재의 행동에 당 소속 인사들이 섭섭함을 표시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 때문인지 한장관은 지난 9일 오후 5시 사전 예고도 없이 자민련 당사를 방문, ‘인사’하는 것으로 답례했다.

    일부에선 김명예총재가 오늘의 위기에 처한 원인을 용인술을 들어 분석하기도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김영삼 전대통령의 ‘가신그룹’과 같이 그에게 직언하며 헌신적으로 보좌하는 인물이 주변에 없다는 얘기다.

    가신그룹이 없어서 그로 인한 폐해는 피할 수 있지만 주변에 정치적으로 보좌할 인물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어떤 사람은 “JP 주변을 보면 그가 과연 앞으로 정치를 계속할 사람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현재 이수영 명예총재 비서실장과 김상윤 특보, 강의출 보좌관 정도가 곁을 지키고 있다. 예비역 중령으로 치안감을 지낸 이수영 실장이나 경찰 출신인 김특보의 역할은 거의 일정을 잡는 정도에 머물러 있고, 강보좌관은 수행 전담이다. 정치적인 결정은 김명예총재 혼자서 하고 있다.

    김종호대행이나 함석재 사무총장, 오장섭 총무, 정우택 정책위 의장 등 당직자들이 있다지만 마음 편하게 건의할 수 있을 만큼 그와 오래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이 아니다. 대부분 입당파다.

    사실 김명예총재에게 측근이 없지 않았다. 신민주공화당 창당 때는 김용환 현 한국신당 의장이 있었고, 최각규전부총리도 있었다. 자민련 창당 때는 조부영 부총재 등 창당 공신들이 있었다. 김용환 의장은 한 때 그의 ‘복심’으로까지 불리며 당 일을 야무지게 꾸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조부총재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곁을 떠났다. 그 역시 2인자를 키우지 않고 혼자 끌고 가려는 스타일 때문에 지금 와서는 발목을 잡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민련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일부에선 ‘JP 한계론’을 ‘JP 역할 종결론’으로 연결시킨다. 자민련에 대한 지지도가 3%에 머물고, 김명예총재에 대한 지지도가 정체돼 있는 상황에 지금 구도로 간다면 JP가 은퇴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측근들의 말을 빌리면 현 시점에서 그가 ‘정치 생활을 마무리하는 단계로 접어든다’는 표현은 수용하지만 ‘당장 은퇴는 절대 거부’라고 한다. 김명예총재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말이 바로 ‘정계 은퇴’다. 측근들은 “명예총재가 앞으로 정치를 하면 얼마나 하겠느냐”면서도 은퇴라는 말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런 상태로 정치를 끝내지는 않겠다는 게 김명예총재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최근 김명예총재측은 아들 김진씨가 국제 사기사건에 휘말렸다는 기사가 두 차례 언론에 보도되자 기사화한 언론사를 즉각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적이 있었다. 고발건은 해당 언론사의 유감표명으로 일단락됐지만 김명예총재측은 이들 보도를 모두 ‘JP 죽이기’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틈만 나면 그의 부정적인 측면을 거론하면서 활동 공간을 좁히려는 세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김명예총재의 정치 생명과 자민련의 장래 부분에 대한 당의 견해는 낙관론과 비관론 두 갈래로 나뉜다. 낙관론은 기본적으로 40년 정치생활에서 보여준 김명예총재의 끈기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대선정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 낙관론자들은 지난 7월말 김종호 대행이 김영삼 전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을 방문했을 때 YS가 “김명예총재는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에 크게 고무돼 있다.

    김대행은 틈만 나면 “다음에 대권을 잡는 사람은 JP의 마음을 잡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부르짖고 있다. 차기 대권 가도에서 김명예총재가 또한번 ‘DJP 후보 단일화’와 같은 일을 일궈내 정치생명을 연장할 것이라는 얘기다.

    자민련 일각에선 김대행과는 또다른 견해도 제시한다. ‘내각제를 통한 JP 대망론’이랄 수 있는 주장을 펴는 이 사람들은 “내각제 개헌 카드가 아직도 살아있다”면서 “동교동 쪽에서도 이대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기 때문에 내각제 개헌을 깊숙이 논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김전대통령의 ‘JP 띄우기’ 발언도 사실은 내각제를 통한 3김의 공동 활로 모색을 위한 심모원려로 해석했다.

    차기 후보 부재와 당의 진로

    자민련의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 대해서도 낙관론자들은 “이제 시간의 문제일 뿐 구성은 떼논 당상”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집권 민주당이 날치기까지 해놓고 처리하지 않는다면 향후 정권을 운영하기 어려워지고, 한나라당측도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15석까지 낮추겠다는 의사가 노출된만큼 ‘합의’라는 모양새만 갖춰주면 용인하지 않겠느냐고 전망하고 있다.

    즉 자민련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한 뒤 다음 총선 때까지 버티면 지난 총선에서 자민련을 지지하지 않았던 반작용으로 충청권의 표가 자민련에 쏟아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지난 7월 국회법 날치기 때 민주당 소속 충청권 출신 의원이 “우리를 자민련으로 양자 보내는 방안도 있다”고 언급한 것이 충청권에서 여전한 자민련의 위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당과 김명예총재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은 “당은 몰라도 김명예총재의 향후 진로는 비관적”이라고 사석에서 말한다. 충청권 한의원의 말.

    “이제 와서 공개하지만 지난 총선 뒤 지역구의 몇몇 사람이 찾아와 ‘JP 때문에 당신을 찍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사실이다. 충북지역을 중심으로 충청지역에서 JP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나빠져 있다. 지난 지방선거 보궐 선거 때도 나온 말이지만 앞으로는 김명예총재가 유세를 다니지 않는 게 좋을 정도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당내 일각에서는 다음 대선 때 대선 후보를 내지 않을지 모른다는 점을 대단히 우려하며 이 문제는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양희의원 같은 사람은 “연달아 두 번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는 정당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나.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없는 정당은 살아남을 수 없다. 다음에는 허수아비에 갓을 씌워서라도 대선에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내 극소수의 주장이지만 자민련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풍 쇄신’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들은 “지금 명예총재의 힘은 오로지 공동정부의 한 축이라는 점에서 나오고 있다”며 JP와 당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부는 “앞으로 자민련은 이한동 총리와 김종호 대행, 강창희 의원이 이끌어가는 정당이 될 수도 있다”고 관측하기도 한다. 특히 강의원을 중심으로 한 젊은 정당으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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